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윤민일 묘

달이선생 2019. 9. 1. 13:36

   윤민일(尹民逸, 1564~1635)의 묘(墓) 


  2018년 디지털시흥문화대전 집필자로 참여하여 시흥의 전통인물과 그 묘소를 찾아 기술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시흥의 전통인물에 대한 이해와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인상에 남는 인물 중에 바로 윤민일이 있다. 시흥의 명문가 중 시흥시 산현동에 대대로 세거한 '안산윤씨'가 유명하다. 입향조는 윤승유(尹承柳)와 그 아들 성종의 부마 영평위(鈴平尉) 윤섭(尹燮)이지만 집안이 크게 현달하게 된 것은 증손 윤민헌(尹民憲,1562~1628)과 그 자손들이다. 윤민헌의 아들 윤강(尹絳)이 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그 아들들이 모두가 문과에 올랐고, 특히 윤지선(尹趾善)과 윤지완(尹趾完)은 형제정승으로 가문의 위상이 높았다.

  이러한 윤민헌은 파주 우계서실에서 수학한 (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제자였는데, 이 때 동생 윤민일과 함께 수학하였다. 형 윤민헌의 후손들이 현달하여 많이 가리워진 측면이 있는 인물이 바로 윤민일이다. 시흥지역은 조선 유학에서 종주가 되는 인물들과 인연이 되는 인물이 여럿 있다. 사림파의 영원한 종주인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후손 정제두(鄭齊斗, 1649~1736)가 화정동 가래울의 선조들의 묘소를 지키며 장장 20년을 살았고. 영남사림의 스승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제자로 미산동 성씨가의 성락(成洛, 1542~1588)의 묘가 있는데, 청빈의 귀감이었던 인물인 만큼 지금 그의 묘소를 가면 비석하나 없다. 그리고 율곡의 직계는 아니지만 제자 김장생(金長生, 1548~ 1631)이 키운 군자동 군자봉 아래 묘가 있는 금양위 박미(朴瀰, 1592~1645), 장곡동 살고 죽은 효종의 국구 신풍부원군 장유(張維, 1587~1638)가 김장생의 문하에서 율곡의 학문을 익히고 현달하였다. 그리고 율곡의 친구로 성리학의 일가를 세운 성혼, 그 성혼의 제자이자 시흥 즉, 과거 안산에서 세거하며, 현달한 것이 바로 이 윤민헌, 윤민일 형제이다.

  윤민일 선생의 묘소를 찾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각종 기록과 문헌에 나온 주소가 잘못되어 월곶동 일대를 뒤지고 다녔지만 끝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금 원 출처를 외손주 사위인 윤선거(尹宣擧, 1610∼1669)가 남긴 묘표지에서 확인하고 드디어 2018년 2월 14일 답사를 나가 그 묘소를 찾았다. 지금도 공동묘지(천부교 신앙촌) 한켠에 있어서 묘소를 찾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최근에 후손들이 선영을 알리는 표석을 세워 한 결 나아졌다. 조선시대 분묘에 대한 이해만 있으면 찾기 수월하다.

  많은 묘소를 지나 산 위 윤민일 묘를 한 번에 알아봤다. 묘소의 크기 등 오래된 묘란 것을 알 수 있었고 중요한 것은 묘표가 서있어서 확인이 되었다. 화강암의 백대리석의 묘표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데 그래도 표문은 정확히 확인이 된다. 다만 묘표지는 마모가 심해 알아볼 수가 없었는데 후손들이 오석에 비석을 새로 세워 정확히 확인이 되었다.   

  선영이 자리한 곳은 장곡동 상양산자락 서편 구릉인데, 후손들의 정성이 깃든 것을 알 수 있다. 대가댁의 화려한 묘소는 아니지만 스승 성혼을 닮은 윤민일 선생의 고풍이 느껴지듯 축대 위해 반듯하게 모신 묘소가 단정하다. 그 아래로 후손들이 차례로 있는데, 단촐하면서 선비의 기풍이 느껴지는 선영이다.

  윤민일 선생의 발자취와 묘소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디지털시흥문화대전에서 확인 할 수 있다.

http://siheung.grandculture.net/siheung/search/GC06900433?keyword=%EC%9C%A4%EB%AF%BC%EC%9D%BC&page=1#self

    




파평윤씨 안산문중참판공휘민일지묘위 초입

지산공성묘안내도비 안산문중 수근



2019. 10. 21








통정대부돈녕부도정 증가선대부이조참판윤공묘표(通政大夫敦寧府都正贈嘉善大夫吏曹參判尹公墓表-윤민일)

 

만력(萬曆)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 묵암(默庵) 성 선생(成先生, 성혼(成渾))이 정인홍(鄭仁弘)에게 무함을 당하여 당쟁이 크게 일어나자 선생의 문하에 유학한 사람인 추포(秋浦) 황신(黃愼) 이하 모두가 조정에서 쫓겨났는데, 파평 윤공은 바로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공은 휘(諱)가 민일(民逸)이요, 자(字)는 현세(顯世)이며, 호(號)는 지산(芝山)이다. 우리 (파평 윤씨의) 시조인 고려(高麗) 태사(太師) 휘 신달(莘達) 이후 14대를 내려와 소정공(昭靖公) 휘 곤(坤)에 이르러 우리 조선조에 벼슬하기 시작하였다. 그 4대 후손 휘 사로(師路)가 영천 부원군(鈴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또 4대 후에 영평위(鈴平尉) 휘 섭(燮)은 자식이 없어 그의 동생 휘 엽(燁)의 아들인 생원으로서 이조 참판을 추증받은 휘 지함(之諴)을 후사로 삼았다. 윤지함은 참판 남세웅(南世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휘 엄(儼)을 나았는데, 좌랑으로 이조 판서를 추증되었고, 호(號)는 송암(松巖)이니, 이분이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판서 김주(金澍)의 딸이다.

송암은 문행이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공의 백부와 중부(仲父)가 할머니 남씨(南氏)를 받들면서 집에서 한가로이 지냈다. 본래 여러 대를 거듭해 온 부유한 집안의 자제였으나, 공은 이미 장성하자 분발하고 일어나 셋째 형인 참의공(參議公) 윤민헌(尹民獻)과 더불어 고심하면서 책을 읽었으므로 몇 년이 되지 않아 배움이 크게 진보하였다. 마침내 윤민헌과 함께 우계 선생을 찾아가 유학하여 순박 진실하게 공부하고 충신(忠信)하게 속이지 않는 뜻을 얻어들었으므로 종신토록 이를 받아들여 응용할 밑천을 삼았다.

무자년(戊子年, 1588년 선조 21년)에 생원ㆍ진사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나누어 예속되었다가 관례에 따라 전적(典籍)ㆍ직강(直講)으로 승진하였다. 경자년(庚子年, 1600년 선조 33년)에 비로소 예조ㆍ병조 양조의 좌랑과 정랑에 임명되고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에 들어가 문학(文學)이 되어 마침 양(陽)이 회복되는 때를 당하였는데, 정인홍의 화(禍)가 갑자기 일어나자 공은 지평(持平)으로서 아뢰기를, “신은 성혼(成渾)의 문하생입니다. 청컨대 신의 직책을 바꾸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당시에 부정한 의논이 거세게 일어나자 착한 무리들은 기세가 꺾여 마음속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이 없었으나, 공은 그 선봉에 서서 의연(毅然)하게 행동하면서 흔들리지 않았으므로 선비들의 의논이 옳다고 하였다.

그 직후에 공은 외직으로 나가 수원 판관(水原判官)에 전보되었는데, 이로부터 다시 내직에 있지 못하고 개성 경력(開城經歷)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바뀌어서 서천(舒川)과 개천(价川)의 군수를 차례로 지냈는데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모두 노래부르며 칭송했고, 떠난 후에는 비석을 세우고 돌이켜 생각하였다. 전라도와 경기도의 도사(都事)를 역임했으며, 합천(陜川)에 부임하지 않은 것은 간악한 정인홍을 피함이었다. 이어서 대동도 찰방(大同道察訪)과 태상시(太常寺)ㆍ장악원(掌樂院)의 첨정(僉正)을 지냈다.

무오년(戊午年, 1618년 광해군 10년)에 수세관(收稅官)으로 동래(東萊)에 부임했다가 곧 부사로 제수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스스로 면직하고 돌아와 분원(分院)의 승지에 임명되었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즉위년)에 공주 목사(公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교체되어 물러나 경기도의 별장에 거처하면서 일생을 마칠 계획을 하였으므로, 공을 아는 사람들은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얼마 후에 영해 부사(寧海府使)로 제수되어 부임해 부지런히 힘쓰다가 해를 넘겨 돌아왔으며, 다시 풍기 군수(豊基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강화도(江華島)로 달려가 문안을 드렸으며, 가을에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서는 문을 굳게 닫고 한가로이 지내다가 몇 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아! 공은 자질이 순일하고 학문이 왕성하였으며 뜻이 담박하고 행실을 삼가서 평생에 충성스럽고 순박한 성품을 자신하며 교언 영색(巧言令色)을 이루어 당세에 드러내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므로, 문장은 족히 남보다 우수했는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고 재능은 족히 높은 관직에 나아갈 만했으나 지위는 오르지 않았다. 깨끗하고 밝은 시대를 즈음하여 군자의 도(道)가 날로 성장하자 동문의 벗들 중에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과 같은 여러 사람이 모두 국론을 장악하고서 공을 위해 억울하다고 말하였으나 끝내 현재(賢才)가 있었어도 낮은 지위에서 오래 머물면서 때를 못 만나 부진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니, 어찌 이른바 천명이 아니겠는가?

공은 갑자년(甲子年, 1564년 명종 19년) 윤2월 20일에 태어나 을해년(乙亥年, 1635년 인조 13년) 4월 2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2세였다. 공은 무릇 세 차례 장가들었는데,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평천 부원군(平川府院君) 신잡(申磼)의 딸이고,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부호군(副護軍) 황대임(黃大任)의 딸이고, 풍천 임씨(豊川任氏)는 학생(學生) 임경운(任慶雲)의 딸이다. 공은 평천 부원군의 종훈(從勳)으로 해서 참판 벼슬을 증직(贈職)하였기 때문에 세 부인이 모두 숙부인(淑夫人)을 거쳐 정부인(貞夫人)으로 올랐다. 신씨는 1녀를 낳았고 황씨는 2녀 1남을 낳았는데, 큰 사위는 김홍익(金弘翼)으로 현감이며, 둘째 사위는 이장백(李長白)으로 생원이고, 막내 사위는 임공(任鞏)이며, 아들은 윤두(尹紏)였다. 측실의 아들이 둘인데, 윤치(尹緻)는 현감을, 윤작(尹綽)은 각관(榷管)을 지냈다. 윤두는 우후(虞侯) 양수진(楊秀津)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았고 다시 박양(朴敭)의 딸에게 장가들어 4녀 2남을 낳았는데, 정구(鄭搆)ㆍ이정현(李鼎賢)ㆍ이회(李澮)ㆍ홍유황(洪有煌)ㆍ이공간(李公幹)ㆍ이정제(李正齊)가 그의 사위이고, 아들은 윤지원(尹趾遠)ㆍ윤지후(尹趾厚)이다. 김홍익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며, 이장백은 1녀를 두었는데 나에게 시집왔다. 임공에게는 2남이 있었는데, 현감 임경창(任慶昌)과 임수창(任壽昌)이다. 윤치는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윤지무(尹趾茂)는 무과(武科)에 합격하였으며, 윤작은 1남 7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윤지서(尹趾瑞)이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공을 처음에 안산(安山) 무등곡(無等谷) 구리(舊里) 앞 산기슭에 장사지냈었는데, 상서(尙書)를 지낸 조카 윤강(尹絳)이 그 동쪽 당정리(唐井里) 사좌 해향(巳坐亥向)의 언덕에 다시 터를 가려 정하여 기축년(己丑年, 1649년 효종 즉위년) 12월 모일(某日)에 이장하였다. 신씨 부인은 따로 장사를 지냈는데, 묘는 금천(衿川) 사자암(獅子巖) 평천 부원군의 묘소 곁에 있으며, 다만 황씨와 임씨 두 부인은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아들 윤두가 돌을 다듬어 묘비(墓碑)를 세워서 드러내려 하므로, 나 윤선거가 그 음기(陰記)를 기록함에 있어 대략 집안의 세계(世系)와 일찍이 듣고 본 바 덕행(德行)의 착한 것을 서술하여 새기게 하노니, 거의 후세들의 상고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通政大夫敦寧府都正贈嘉善大夫吏曹參判尹公墓表        

萬曆辛丑。默庵成先生受誣于仁弘。黨事大起。游先生之門者黃秋浦愼以下。皆被斥逐。坡平尹公。卽其一也。公諱民逸。字顯世。號芝山。我初祖高麗太師諱莘達之後。十四世而至昭靖公諱坤。始入我朝。四世而諱師路。鈴川府院君。又四世而諱燮。鈴平尉。無子。以弟諱燁之子生員贈吏曹參判諱之諴爲後。之諴娶參判南世雄女。生子諱儼。佐郞。贈吏曹判書。號松岩。是公之考也。妣安東金氏。判書澍之女。松岩有文行而不幸早世。公之伯仲。奉祖母南氏以居家。本重世綺紈。公旣長。奮然自拔。與叔氏參議公民獻刻意讀書。未數年而學大進。遂與之並遊牛溪之上。得聞樸實用功忠信不欺之旨。以爲終身受用之資。戊子。中生進兩試。丙申釋褐。分隷成均館。例陞典籍,直講。庚子。始拜禮兵兩曹佐郞,正郞。入春坊爲文學。適當陽復之幾。而仁弘之禍遽作。公以持平啓曰。臣是成某門生也。請遞臣職。時邪議洶洶。善類無不氣懾。而公當其鋒。能毅然不撓。士論韙之。出補水原判官。自是不復居內。除開城經歷。未赴而遞。連守舒川,价川。所至民皆歌誦。去後立石追思。都事全羅京畿。陜川不赴。則避奸弘也。督郵大同。僉正太常司樂。戊午。以收稅官赴東萊。旋除府使。未幾自免歸。拜分院承旨。癸亥。除公州牧使見遞。仍退居圻莊。爲終焉之計。知公者深惜之。尋除寧海府使。黽勉赴任。踰年而歸。再除豐基。皆不赴。丁卯。犇問江都。秋拜敦寧府都正。已而解職還鄕。牢關養閑。數歲而終。噫。公質醇學蔚。志恬行謹。平生自信以忠樸之性。不喜爲巧令以衒於當世。故文足以踰人而人不識。才足以致位而位不躋。際時淸明。君子道長。同門儕友如吳楸灘允謙諸公。皆秉國論。爲公稱屈。而終於淹滯不振。坎壈以沒世。豈非所謂命歟。公生於甲子閏二月二十日。卒於乙亥四月二十五日。享年七十二。公凡三娶。平山申氏。平川府院君磼之女。昌原黃氏。副護軍大任之女。豐川任氏。學生慶雲之女。公用平川從勳。贈職參判。故三夫人皆由淑進貞。申出一女。黃出二女一男。長女壻金弘翼縣監。次女壻李長白生員。季女壻任鞏。男曰糾。側室子二。緻縣監。綽權管。糾娶虞侯楊秀津女。生二女。再娶朴敭女。生四女二男。鄭搆,李鼎賢,李澮,洪有煌,李公幹,李正齊其壻也。男曰趾遠,趾厚。金無子。李有一女。歸于我。任有二男。慶昌縣監壽昌。緻四男一女。曰趾茂武科。綽一男七女。曰趾瑞。餘幼。公始葬于安山無等谷舊里前麓。從子尙書綘爲改卜于其東唐井里巳坐亥向之原。己丑十二月某日。竁而遷之。申夫人別葬。墓在衿川獅子岩平川墓側。只以黃任二夫人同祔焉。胤子伐石將表墓。俾宣擧記其陰。謹略敍其家世德善之所嘗耳目者而刻焉。庶後之人有所考也。崇禎紀元戊辰之後四十一年戊申六月日。坡平尹宣擧述。

-노서선생유고(魯西先生遺稿) 권17(卷之十七)    묘표지( 墓表誌) / 윤선거(尹宣擧)








동영상(2019. 10. 21. 12:00)







증별시(이별할 때 주는 시)

지산공께서 일본에가는 조선통신 삼사에게 선상에서 지어준 증별시이다.


영욕의 부침이 얼마나 되는가

지난 인간사는 괴롭게 마찰을 빚었네

사신의 배를 타고 교룡의 굴로 건너가니

험악하기가 거친 세상 벼슬살이와 같다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9년(1617)에 후기 2차 조선통신사에 정사 추탄 오윤겸(해주인), 부사 운계 박재(고령인), 종사관 석문 이경직(전주인), 이 피로인 쇄환의 임무로 428명의 수행원과 함께 일본으로 가는 삼사가 6월 25일(무오)에 동래부에 도착 시 수세관 지산공(윤민일)께서 삼사에게 선상에서 지어준 시이다.

정사 추탄 오윤겸은 우계 성혼의 문인으로 지산공과는 동문수학한 관계로 가까운 사이였다.

지산공께서는 동래부사도 역임하셨다.


2018년 2월 3일

후손 윤동설 씀



  이 내용은 2018년 2월 18일 오후 안산윤씨 사당인 영충사로 답사를 갔다가 영평위의 기제사에 참석한 후손에게 받은 것이다. 영충사는 영평위 윤섭(성종의 부마)와 충정공 윤지완(숙종 배향공신, 윤민헌의 손자이자 윤강의 아들)을 모신 사당이다. 사당 곁에 영평위 기제사를 모시는 종손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