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사천 조명군총

달이선생 2019. 7. 31. 18:30

군문 도감(軍門都監)이 아뢰기를, "동 제독(董提督)의 차관(差官)이 와서 말하기를 동 제독이 이미 진주(晉州)를 공격하고 여세를 몰아 진격하자 사천(泗川)과 동양(東陽)의 왜적들이 싸우지도 않고 흩어져 달아났다. 마침내 신채(新寨)를 진격하여 대포로 성문을 부수고 대군이 쳐들어 가려고 할 무렵 모 유격(茅遊擊)의 진영에서 실수로 화약(火藥)에 불이 일어나 진중이 소란하자 왜적이 바라보고 문을 열고서 좌우로 나와 공격하고 사방에서 복병이 덮치니 대군이 허둥지둥 무너져 사망한 숫자가 거의 78천 명이나 되었고 제독은 진주(晉州)로 후퇴하였다.’고 하였습니다."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軍門都監啓曰: "董提督差官來言: ‘董提督旣攻晋州, 乘勝進逼, 泗川東陽之賊, 不戰而散走遂進攻新寨, 以大砲打破城門, 大兵欲入之際, 茅遊擊陣, 火藥失火, 陣中擾亂, 倭賊望見開門, 迎擊左右, 伏兵四起, 大兵蒼黃奔潰, 死亡之數, 幾至七八千, 提督退晋州云矣" 傳曰: "知道")-선조실록105, 선조 31108일 경신(1598)

 

  사천 왜성에서의 전투 내용이다. 조명연합군의 수장은 토왜대장(討倭大將)으로 절충장군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정기룡(鄭起龍, 1562~1622) 장군과 명나라 제독 동일원(董一元)이다. 동일원의 차남 동대순은 명나라가 망하고 귀화하여 광천 동씨 문의공파의 파시조가 되었다. 기록에서 신채(新寨) '새 성채'를 뜻하는 말이 사천 왜성을 말한다. 신채라 한 것은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조명연합군에 막혀 북진을 못하고 남하한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왜군이 사천 방어를 위해 '사천 선진리성(사천 왜성)' 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정기룡 장군과 동제독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이 사천 왜성의 시마즈의 왜군의 반격으로 많게는 8천에 이르는 대병이 한번에 몰살당하였다. 그러한 역사적 증거가 바로 '사천 조명군총' , 사천의 조선과 명나라 군인의 무덤인 것이다. 이를 추모하며 삼문 광장 옆에는 1984114일 사천문화원을 중심으로 시민들이 합심하여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가 세우고 해마다 10월 위령제를 지낸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깝고 참혹한 일이다. '사천 선진리성'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이 무덤은 개인의 무덤이 아닌 당시 패전한 조명연합군의 다수 사망자들의 코와 귀가 베어진 온전한 시신이 아닌 것을 왜군이 성앞에 묻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역에서는 '당병무덤', '뎅강무데기'라고 불렸다.

  이처럼 왜군의 놀라운 전투력은 이미 조선의 군왕 선조와 대신들은 파악하고 있었다.

 

"적은 12천 명의 군사만으로도 쳐들어 올 수 있는 데 반해 우리 나라 군대는 1만 명으로도 왜병 1천 명을 당하지 못한다. 설마 토평(討平)했다손치더라도 피해가 적지 않을 것인데 어떻게 이길 것이라고 기필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계책으론 양장(良將)과 용사(勇士)를 얻는 것뿐이니, 언론이 아무리 좋은들 무엇에 쓰겠는가.(一二千可以衝突, 而我國一萬, 不能當倭兵一千終雖討平, 所傷不貲, 而其勝, 亦何可必乎 爲今之計, 莫若得一良將勇士而已言論雖善, 何用)"-선조실록133, 선조 34117일 병진(1601)

 

  선조는 왜군의 전투력이 '일당백'으로 여기고 있다. 1만명의 군세로 1천을 상대하는 것은 '일당십'이나 이도 당해내지 못한다고 하니 그 이상인 것이다. 그걸 증명한 것이 사천전투에서 시마즈가 이끄는 7천 왜군이 4만 조명연합군을 패퇴시키고 사망자만 무려 8천에 이른 전과이다이러한 왜군의 군사력에 대해서 선조는 체찰사 이덕형(李德馨, 1561~1613)에게 아래와 같이 묻는다.

 

"우리 나라 무장(武將)들은 문자(文字)를 몰라 병서에 대한 지식이 없다. 왜놈들은 비록 글은 몰라도 평생 전쟁에 종사하여 할아비와 아비 때부터 서로 전수하면서 익혔기 때문에 무재(武材)가 되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문자를 배우지 않기 때문에 비록 지려(智慮)는 있어도 모두 저들 같이 싸움에 익숙하지 못한다. 전번에 병서(兵書)를 배워 익히도록 한 바 있는데, 밖에서 들으면 비웃을 줄 나도 알고 있으나 그렇다고 오늘 배우지 않으면 내일은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비록 훈상(訓上)을 정하더라도 누가 서도(書徒)가 되어 자제를 가르치듯 하겠는가. 중이 불경 외우듯 한다면 익혀질 리 없겠지만, 그렇다면 그냥 내버려두고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중국 장수들은 문장(文章)이 매우 좋아 오 도사(吳都司)의 게첩(揭帖)을 볼 때마다 나는 먼저 찬탄을 하게 되는데, 어쩌면 그와 같이 지을 수 있단 말인가. 대책(對策) 같은 것도 그렇게 짓는다고 하던가?(我國武將, 不識文字, 未知韜略矣倭人雖不知書, 平生事業, ()在戰伐, 自祖父傳來, 習而成之我國之人, 不學文字, 雖有智慮, 皆不如彼之習戰矣前者, 使之學習兵書, 予知其爲外人所笑, 然今日不學, 則明日漸遠, 雖定訓上, 誰能爲書徒, 如敎子弟之事乎? 如誦僧經, 必無成習之理, 然何可置而不爲乎? 天將則文章甚好, 吳都司揭帖, 予每見之, 先發開口之笑, 何以如是乎? 至如對策, 亦爲云然乎?")“-선조실록133, 선조 34117일 병진(1601)

 

  선조는 왜군의 전력이 막강한 것은 장수들이 평생을 전쟁에 나아가 익힌 때문이며, 흥미로운 것은 우리 장수들이 한자에 약해 병서를 읽고 전략을 짜는데 약하다는 인식을 했다는 것이다이에 대해 이덕형은

 

"왜말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들 풍속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비록 노예라도 백 석(百石)에서 만 석(萬石)까지 먹게 하고, 패하면 비록 만 석을 먹던 자라도 다시 노예가 되며 저들끼리 술을 마실 때에 팔목에 상처가 있으면 싸움을 잘하는 자라 하여 먼저 마시게 하고, 등 뒤에 상처가 있으면 도망을 잘가는 자라 하여 마시지 못하도록 물리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정(人情)이 각각 다를 뿐 아니라, 마치 우리 나라에서 동자(童子)로 글 잘하는 자를 취택하듯이 어릴 적부터 반드시 그러한 사람을 고른다고 하는데 그들 풍속은 아주 다릅니다.(以倭語學習矣倭俗, 戰勝則雖奴隷, 使之食百石, 以至萬石, 而敗則雖食萬石者, 還爲奴隷自中飮酒時, 臂面有傷, 則以善戰者, 故先飮, 背後有瘡, 則以善走者, 故擯不得飮非徒人情各異, 自少時必取如此之人, 如我國之取童子能文者其風俗殊常矣)- 선조실록133, 선조 34117일 병진(1601)

 

라고 하였다. 당시 왜군의 장수들은 일본어로 병법을 익혔으며, 풍속에서부터 호전적이고 물러섬이 없는 무사기질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왜군의 전투력이나 무장들의 능력과 별개로 선조는 조선에서 특히, 조선성리학이 발달한 경상도 지역의 풍습도 문제점임을 지적하였다.

 

"경상도는 풍습이 잘못 들어 무()를 익힌 사람은 전혀 취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 풍습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군사들이 이름만 군부(軍簿)에 있지 활과 화살을 다룰 줄 모르는 자가 많습니다. 소신이 내려가서 재주도 훈련시키고 활쏘기도 시험하여 활 잘 쏘고 기구를 갖춘 자는 군부에 그대로 두고 활을 쏘지 못하는 자는 주사(舟師)에 소속시키면 권징(勸懲)이 될 듯합니다.(慶尙道, 時習誤入, 業武之人, 專不取之云其習不可不改" 德馨曰: "軍士, 只名存軍簿, 而不解弓箭者多矣小臣下去, 鍊才試射, 善射有器具者, 仍存軍簿, 不能射者, 屬於舟師, 則似有勸懲之路矣)-선조실록133, 선조 34117일 병진(1601)

 

  이와 같은 조선의 형세에서 당시 조정에서는 왜군에 대한 전략에 대해 고심을 하였다.

 

당초 권율(權慄)이 행주(幸州)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는 산성을 지켜야 한다고 하다가 이순신(李舜臣)이 수전(水戰)으로 승전하자 그때는 또 반드시 주사(舟師)라야 승리를 취할 수 있다고 하니,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싸워야 반드시 이긴다는 것인가.(當初權慄幸州戰勝之後, 以爲山城可守李舜臣水戰勝捷之後, 以爲舟師必勝不知何戰可以必戰乎?")“-선조실록133, 선조 34117일 병진(1601)

 

  선조는 당시 조정에서 왜군에 대한 대응으로 육전과 수전으로 갈팡질팡하던 조선의 무능을 질타한다. 그러나 이는 선조의 뼈아픈 지적이기보다는 임진년 당시 조정과 군왕 선조의 군사적 전략의 부재를 여실히 드러낸 사실로 조선군을 이끌던 권율의 방책이나 수로를 차단하여 왜군의 보급을 막은이순신의 방략 모두 실전에서 적절히 응용해야 할 전략임에도 결과만을 보고 임기응변이나 이순신, 권율과 같은 뛰어난 제장의 역할에만 의지했던 조선의 무능을 드러내고 있다.

  더욱이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부산진 공격을 주도하다 조선 수군이 전멸한 칠천량해전을 두고 원균에 대한 평가를 묻는다.

 

"원균(元均)이 전쟁에서 패한 후로 사람들이 그를 헐뜯고 있으나 나는 원균 같은 자는 용감하고 슬기로운 자라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는 누가 한 가지 일을 잘 하면 모두 칭찬을 하고 한 가지 일을 실패하면 모두 비난한다. 원래 영웅(英雄)은 성패(成敗)를 가지고 논할 수 없다. 원균을 내가 보지는 못했으나, 당초 임진년에 이순신(李舜臣)과 마음을 함께하여 적을 칠 때 싸움이 벌어지면 반드시 앞장을 섰었으니, 그가 용감히 싸웠던 것을 알 수 있다. 한산(閑山) 싸움에서 패전한 것으로 다투어 그에게 허물을 돌리지만,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조정이 그를 빨리 들어가도록 재촉했기 때문이다. 그의 서장(書狀)을 보면, 안골포(安骨浦)가 그 앞에 있어 금방 들어갈 형세가 못되니 육군으로 하여금 먼저 적을 몰아내게 한 다음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도원수(都元帥)가 잡아들여 곤장을 치자, 그는 반드시 패할 것을 알면서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게 과연 그가 스스로 패한 것인가? 후에 들으니, 이억기(李億祺)와 최호(崔湖) 등이 조정에서 빨리 들어가라고 재촉한 것을 듣고는 서로 말하기를 명령을 어기면 우리 세 사람이 죽을 것이고 들어가면 나라를 욕되게 함이 작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하니, 패군한 죄에 비하면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내가 평소에 매우 온당치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외부의 공론은 어떠한가?("元均戰敗後, 人方非議, 然予意則如均者, 勇智人也我國之論, 能一事則皆稱之, 敗一事則擧陷之, 英雄, 本不可以成敗論也均則予不得見之, 當初壬辰年, 與李舜臣同心討賊, 戰必先登, 其勇戰可知以閑山敗後之故, 爭歸咎焉, 此非渠之所爲, 乃朝廷使之促入也觀其書狀, 則以安骨浦在其前, 勢不可快入, 使陸兵, 先驅出賊兵, 然後可以入去, 則都元帥捉來決杖渠雖知其必敗, 而勢不得不入此果渠之自敗者乎? 後聞李億祺崔湖等, 聞朝廷使之促入, 相與言曰: ‘違命則吾三人死, 入去則辱國非細云若比於覆軍之罪, 則似有間矣予平日甚以爲未便, 故言之外議如何?" )"-선조실록133, 선조 34117일 병진(1601)

 

  선조의 원균에 대한 정확한 지적은 다시 말해서 원균이 억울한 측면이 이순신을 항명으로 처단하여 백의종군 시킨 사실을 자인하는 것이다. 부산진은 이순신의 장계에서 이미 해안 여기저기 왜군의 방비가 잘 되어있어 수군 단독 작전이 매우 위험하였으며, 따라서 육지에서 육군이 연합으로 공격해도 승리가 쉽지 않다고 지적하였는데 선조는 이를 들어 이순신을 잡아들여 형문을 하고 끝내는 죽이려고 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수군을 인수한 원균 역시 이순신과 같은 판단을 하였으나 조선군 총사령에 해당하는 도원수 권율 장군에게 군령으로 다스림을 받고 무리하게 출진하였다가 조선 수군의 전멸과 원균 역시 전사하는 수모를 당하였다. 이러한 조정의 잘못을 선조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문제는 그 오판이 군왕 선조의 잘못인데 조정을 탓으로 돌려 원균을 구명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실록의 내용은 모두 선조가 경상도로 내려갈 체찰사 이덕형을 불러 보아서 친히 정유재란이 끝나고 1601년 그 수습을 위해 국방 전반에 대해서 여러가지 논의를 했던 이야기를 통해 임진년 조선이 처한 사실을 적나라하게 밝힌 것이다남해안 일대가 왜군의 발아래 심음하면서 수많은 전투와 무수히 많은 인명살상의 참혹함을 오늘 이 사천 조명군총이 증명하고 있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라고 한다. 우리 땅에서 다시는 이와 같은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어둑해진 조명군총 앞에서 넋을 추모한다.

 

 

 

 

 

 

 

 

 

 

 

 

 

 

 

 

 

 

 

 

 

 

 

 

 

사천 조명군총(泗川朝明軍塚)

 

·기념물 제80(1985. 11. 7 지정), 면적 : 1,534

·소재지 :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번지, 수량 : 1

·시대 : 조선시대

·개요

  이 군총은 사천읍에서 서남쪽으로 국도 3호선과 시· 군도를 따라 약 7km 지점인 선진리성에 이르는 도로의 어귀에 자리하고 있다.

  1597(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사천신채(泗川新寨 : 현 선진리성) 전투에서 왜적의 시마즈군(島津軍)을 몰아내기 위해 무술년(戊戌年 : 1598) 10월 초하루, 조명 연합군(朝明聯合軍)이 신채를 포위하고 최후의 혈전을 벌이다가 이때 산화한 수많은 전사자의 시신(屍身)이 묻힌 무덤이다. 무덤은 본래 사방 20(36)의 방형분묘(方形墳墓)로서 당병무덤이라 했는데 흔히 댕강무데기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선진공원(船津公園)을 조성하면서 무덤 앞을 지나는 도로를 개설하고 일부 붕괴된 무덤을 수축한 다음 그 위에다 <당병공양탑(唐兵供養塔)>이라 새긴 높이 1m 쯤 되는 표석을 세웠는데 8· 15 광복 후 누군가에 의해 없어졌다.

이렇듯 세상의 영욕과 성쇠를 바라보면서 근 4백년 동안 잊혀져 온 이 무덤의 넋을 기리고 현창(顯彰)해야 한다는 여론이 지역사회 일각에서 일자, 1983년 사천문화원의 창립을 계기로 당시 사천군민과 출향인사들의 뜻을 모아 무덤을 정화하고 전몰 제385주년을 맞는 이듬해 114, 높이 2.12m<조명연합군 전몰 위령비(朝明聯合軍戰歿慰靈碑)>를 세우고 제막식과 함께 영령을 추모하는 의범(儀範)을 비로소 가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198511월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조명군총(朝明軍塚)>이란 이름으로 명명(命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조실록105, 선조 31(1598) 경신조에 의하면 무술년 10, 사천신채 싸움에서 아군(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의 전사자를 기지칠팔천(幾至七八千)’이라 했는데 이로 보아 아군의 전사자는 최저 7천에서 최고 8천명이 희생된 것인데, 당일 전투에서 이처럼 많은 전사자를 내었다는 것은 전사상(戰史上) 유례없는 희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승자인 일본측 기록에는 한 술 더 떠서 명군의 전사자 “38,717명의 수급을 묻고 무덤 위에 소나무를 심어 경관(京觀)이라 했다고 떠벌리고 있다. 여기서 경관이란 큰 구경거리라는 뜻으로, 전공(戰功)을 보이기 위하여 적의 시체(屍體)를 높이 쌓고 크게 봉분(封墳)한 것을 말한다. 이 두 기록에서 일본측의 ‘38운운은 승자의 입장에서 과장된 숫자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당시 싸움에서 연합군의 희생이 물론 컸지만 전투에 투입된 전체 병력의 수가 3만도 채 안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정란(靖亂) 후 선조 임금이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사천의 중국 군대가 전사한 곳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라. 우리 군대의 전사자는 얼마나 되는가? 서장(보고서) 중에 이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역시 휼전을 거행하라(泗川 天兵戰亡處 遣官致祭 我國戰亡之人則幾許乎 書狀中不及乎此 亦恤典擧行 宣祖實錄105 宣祖 311017日 己巳條)”고 하였다. 이 기사에서 보듯이 선조는 왜란이 끝나자 곧 벼슬아치를 이곳 사천으로 파견하여 연합군 전사자에게 제사를 지내고 또 구제의 은전(恩典)을 베풀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역사의 산 교장(敎場)으로 삼기 위해 사천문화원에서는 1991년 도비보조금 5천만원을 지원받아 민간소유의 묘역을 양도받아 군총 위의 민묘 1기를 이장시키고 또 무성하게 자란 소나무를 제거하는 등 현재의 모습대로 말끔히 복원(465)하였다.

  오늘날 조명군총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초하루가 되면, 사천시가 지원하고 문화원이 주관하여 연례행사로 위령제를 모셨는데, 최근에는 양력으로 바꾸어 101일에 향사를 봉행한다. 따라서 2001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사천 선진성 주변 사적공원화 사업>의 일환으로 조명군총의 성역화가 될 날도 멀지 않았다.

 

 출처 : 사천시사

http://jdpaper.ciclife.co.kr/sub.html?w=body_01_01&style=01&idx=951&num=3536&search=&_view=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