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사천 선진리성(사천 왜성)

달이선생 2019. 7. 31. 18:30

  사천(泗川)는 경상남도이다.

  사천하면 생각나는 것은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비속어가 있다. 사천사람들은 싫어하는 말이라고는 하지만 삼천포가 사천보다도 유명해진 비결로 꼭 나쁘게만 볼 수 없을 듯하다. 요즘은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고 해서 유명 관광지나 휴양지가 아닌 역사적으로 비극적인 장소를 찾아다니는 관광이 성황이라니 삼천포 주민들도 역발상의 좋은 기회로 활용하면 좋지 않을까 

  그리고 사천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1592529일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최초로 돌격선인 거북선을 출병하여 왜선 13척을 궤멸시킨 사천해전의 승전지이다. 이 때 돌격선인 거북선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사실 남해안 전역은 조선 수군과 이순신 장군의 자취가 없는 곳이 없다.

  이처럼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당하여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의 활약과 달리 사천에는 비극적인 역사가 담긴 장소가 있다. 본의 아니게 다크 투어가 되었는데 바로 사천 선진리성(泗川 船津里城)과 사천 조명군총(泗川朝明軍塚)이다.

   이곳은 사천의 조곡(세곡미)을 보관하던 조운창인 통양창(通陽倉)이 위치하였다. 창고를 보호하기 위해 토성으로 투박하게 쌓아 사용하던 것은 왜군이 들어와 최고의 방어기지로 탈바꿈시킨 곳이다. 그리고 일제가 1912년부터 성내 왕벚나무를 심어 100년 넘은 나무가 5그루에 이르는 벚꽃 명소이다. 일제는 조상들의 숨결이 간직된 곳이라 성 입구에 처음 비석을 세웠고 해방이후 우리는 충무공의 무훈이 빛나고 처음 해전으로 부상입었던 역사를 기리면서 사적으로 지정하고 비를 세웠고 1998년 역사바로세우기가 한창 일면서 문화재자료로 강등되어 그 표석이 세워진다.

  사천 선진리성은 사천 왜성(倭城)으로 불린다. 임진왜란 당시 제 4번대 주장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휘하로 15백의 군사를 이끌고 출병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쌓은 성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의병, 조명연합군의 대대적 반격에 초반 열세를 만해하고 전쟁이 장기화되었다. 1597년에 다시금 재침(정유재란)이 이루어진다. 이때 수군 총사령관 도도 다카토라 휘하로 시마즈가 출병하여 부산진을 치러 갔던 원균의 조선 수군을 칠천량에서 궤멸시키고 육로로 진출하여 남원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다시금 조명연합군과 우리 이순신 장군 휘하 수군의 반격으로 수세에 몰리자 그의 주력군이 사천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이때 쌓은 성이 바로 사천 왜성, 사천 선진리성이다.

 

전라도 관찰사 황신(黃愼)이 치계하였다. "적중에 왕래하는 박여경(朴餘慶)의 진고(進告)에 의하면 왜적이 중국군이 얼마나 되는지를 묻기에 중국군의 수군(水軍)과 육군이 모두 40만 명인데, 해귀(海鬼)와 달자(㺚子)도 많이 나왔다고 엄청나게 불려서 말하였더니 왜적들이 모두 얼굴색이 변하면서 짐바리와 잡물(雜物)을 죄다 배에 실었다. 소서행장(小西行長)은 곧 사천(泗川)으로 향하여 적장(賊將) 주라궁(周羅宮)과 상의한 뒤에 본진(本陣)으로 돌아와서는 곧바로 왜병(倭兵)들에게 성()을 수축(修築)시키면서 전혀 철거(撤去)할 뜻이 없다.’ 하였습니다."(全羅道觀察使黃愼馳啓曰: "賊中交通人朴餘慶進告, 倭賊問餘慶以唐兵多少, 餘慶盛稱天兵水陸幷四十萬, 海鬼㺚子, 亦多數出來云云, 則倭賊皆變色, 卜駄雜物, 盡爲載船行長卽向泗川, 賊將周羅宮相議後, 還入本陣, 卽令卒倭, 修築城子, 殊無撤去之意云)"-선조실록104, 선조 3195일 정해(1598)

 

  실록에서 보면 사천 왜성을 지키는 장수가 주라궁(周羅宮 Shūrakyū)으로 되어 있다. 이가 시마즈를 말하는 것인지, 혹은 그의 부장을 말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당시 순천 왜성에서 방어진을 구축한 소서행장(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이 사위 시마즈와 연합하여 이 난국을 피하고자 노력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니시와 시마즈는 도요토미가 죽자 본국으로 대거 철군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지만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이순신과 조선 수군, 명나라 수군의 연합작전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고 귀국한다. 바로 노량해전이다. 이 해전으로 우리는 이순신 장군을 잃었다. 그렇지만 고니시와 시마즈의 주력군을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주어 향후 일본의 세력 판도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전라도 순천 남해안에서 울산 왜성의 가토 기요마사에 이르기까지 왜군의 남해안 방어선은 철저했다.

 

"소신이 마산을 가보지 않아 형세는 알 수 없으나 만약 의거할 만한 험한 곳이라면 우병사(右兵使)가 들어가 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산(釜山)에도 적의 영문이 있으니, 조련된 군대 몇 천 명으로 왜성(倭城)을 굳게 지키면 의거할 만합니다. 다만 고성(固城사천(泗川곤양(昆陽순천(順天) 등지에는 인가가 전연 없고 그 전면의 당포(唐浦사량(蛇梁) 사이까지 형편없이 비어 있어 매우 염려됩니다."(小臣不見馬山, 不知形勢矣若可據險, 則右兵使可以入處釜山亦有賊營, 鍊兵數千, 堅守倭城, 則可以據險, 但固城泗川昆陽順天等處, 人烟一空, 前面唐浦蛇梁之間, 虛棄無形, 極爲悶慮) -『선조실록133, 선조 34117일 병진(1601)

 

  1601년 체찰사 이덕형이 그 지역을 가서 돌아보고 전한 것으로 임진왜란이 끝났지만 왜군이 주둔하였던 지역에 인가 등이 전혀 없다는 것으로 실제로 왜군은 정유재란에서 조선의 많은 인력과 물자를 약탈하였는데 사천에 주둔한 시마즈는 남원성의 심당길 등 도공 80명을 대거 납치하여 이를 기반으로 에도 막부시기 도자기 문화를 꽃피웠고(사쓰마도기薩摩燒-심당길의 후손이 현재 그 명맥을 이어 심수관으로 대를 이어 오고 있음) 이 도자기로 서구와 무역을 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다. 특히 시마즈의 영지는 사쓰마번으로 사쓰마는 조슈번의 사무라이들과 연합하여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유신을 성립시켰다. 현재 아베 총리가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는 야마구치현이 바로 조슈다. 임진년 이래로 그 악연이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번외지만 아베가 그토록 이곳을 중시하는 것은 바로 정한론(조선 정벌론)자였던 요시다 쇼인이 후학을 가르친 서당과 무덤이 있고 이곳에서 조선 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2대 총리를 지낸 육군원수 야마카타 아리토모, 조선 1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가쓰라 태프트 밀약의 가쓰라 다로, 중전 민씨 살해를 주도한 주조선공사 미우라 고로그리고 아베의 고조부이자 1894년 경복궁 침탈의 원흉 오시마 요시마사가 쇼인의 제자로 성장한 곳이다. 이들이 바로 메이지유신을 주도하고 현재 아베 내각의 뿌리인 자민당과 우익의 기반이었다.

 

  사천 왜성 내에는 거북선이 최초 출동하여 왜선을 격파한 곳으로 사천해전을 기념하는 이충무공사천해전승첩기념비가 사천만을 바라보며, 성내에 위치해 있지만 사실 왜성 앞에는 15981019일부터 30일까지 벌어졌던 사천 전투의 쓰라린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바로 시마즈가 이끄는 7천 왜군에게 조명연합군 4만이 패배한 곳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유적이 바로 옆 '사천 조명군총'이다. 당시 왜군의 반경으로 수많은 시체를 남겨두고 조명연합군이 후퇴하자 왜군은 이들 시체의 코와 귀를 베어 본국에 전리품으로 보내고 그 시체를 한데 모아 성문 앞에 묻었는데 냄새가 너무 나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사실 조명연합군은 순천의 고니시와 시마즈를 압박하여 남해안에서 이들을 몰아내어 전쟁을 끝내려고 하던 것으로 왜군이 수세에 몰리면서 왜성을 중심으로 방어전을 펼치던 왜군이 조명연합군 진중에 화약폭발사고가 나자 성문을 열고 나와 적극적인 공세로 큰 피해를 본 것이다.

 

"지금 어떻게 하였는지 알 수가 없으나 변보의 일은 매우 염려됩니다. 신이 지난 번 양 경리(楊經理)의 도산(島山) 역사에 종사하고 있을 때는 변보가 3일 안으로 도달되었으니, 파발(擺撥)은 꼭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쪽 지방 일은 임진년 변란 후에 흉적들이 89년을 둔거(屯據)하고 있었고 정유년 재란 후에는 중국의 수군 육군이 10만 명이 또 오고 가고 머물고 하면서 민생에 많은 피해를 끼쳤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혈(膏血)이 이미 다 뽑혔습니다. 그 중 전라도가 조금 나았기 때문에 경상도 병영에서 오로지 전라도를 의지하였었는데 정유년 난리에 전라도마저 탕패(蕩敗)되었는데도 조정(朝廷)으로부터의 징책(徵責)은 예와 다른 것이 없습니다.( 今未知何以爲之, 邊報之事, 極爲悶慮。 小臣曾隷楊經理 島山之征。 其時邊報, 三日內得達, 擺撥, 不可不設矣。 南方之事, 壬辰年變後, 兇賊屯據八九年, 丁酉之後, 天兵水陸十萬, 又往來留住, 而擾害民生, 膏血已竭矣。 全羅道稍完, 故慶尙兵營, 專靠於全羅, 而丁酉之亂, 全羅亦爲蕩敗, 朝廷之徵責如舊)-선조실록133, 선조 34117일 병진(1601)

 

  이처럼 남해안 일대는 임진왜란 이후 왜군의 점거로 황폐해졌으며, 원병인 명나라 군대의 주둔으로 더욱 더 황폐해졌다. 당시 영의정을 맡아서 전장을 누볐던 서애 유성룡이 남긴 징비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고 할정도로 조선백성에 대한 왜군과 명군의 횡포와 수탈은 가혹하였다. 당시 쌀, 소 등 가축이나 재산의 약탈 뿐 아니라 부녀자를 성폭행하고 현지처로 삼는 등 그 피해는 말 할 수 없이 너무 참혹했다. 침략군인 왜군은 그렇다고 해도 원병인 명나라군대의 횡포는 가난하고 힘없는 조선백성의 엄청난 고통이 되었다.

   봄이면 벚꽃이 만개하여 유명한 곳인 사천 왜성인데, 우리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한쪽을 장식한 곳이다. 어둑해진 사천바다와 조명군총의 모습이 그날의 아픈 기억을 생생히 증언하는 듯한 모습이다 성안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벗꽃나무들은 왜병이 숨통을 끊어 놓았던 수많은 우리 조상들의 넋이 아닌가 한다. 

 

 

 

 

 

 

 

 

 

 

입구에서 볼 수 있는 사천 선진리성의 표석이다. 왼쪽부터 세워진 표석을 통해 일제 때는 고적(1936.5. 제81호)으로 해방 이후 충무공의 무훈으로 사적지정(1963. 제50호)이 되었으나 1998년 역사바로세우기가 이루어지면서 한낱 왜성으로 조명연합군의 피로 물들게 한 비극적 장소라하여 사적에서 문화재자료로 강등되었던 사천 선진리성의 시대에 따라 바뀐 위상을 보여준다. 

 

 

 

 

 

 

선진리성은 사천에서 유명한 벚꽃유람지다. 일제가 1912년부터 벗나무를 심기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심은 나무도 100년이 넘는 나무가 5그루나 있다. 벚꽃이 지고 찾은 선진리성의 성안은 벚나무로 이루어진 작은 숲이다.

 

 

 

 

 

 

 

 

 

 

 

 

 

 

 

 

 

 

 

 

 

 

 

 

 

 

 

 

 

 

 

 

 

 

 

 

 

 

 

 

 

 

 

 

 

왜성은 우리나라 성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수많은 전란(전국시대)을 통해 최고의 방어기지를 갖춘 면모를 알 수 있다. 특히 성안의 구조는 마치 미로와 같아서 수많은 성곽이 겹겹이 이루어져 있다. 사실 이러한 구조로 인해 공성군이 문을 부수거나 성벽을 넘어 성내에 진입하여도 길을 잃기가 다반사였다. 사지에 들어가는 꼴이었다. 이러한 왜성에 대해서 조명연합군 역시 효과적인 공격을 못한 것만 보아도 왜성의 방어능력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밋밋한 성벽에 경사를 주어 상층부와 비스듬하게 가다 곧게 쌓은 특징은 우리나라 수직벽을 이루는 성곽에서는 볼 수 었는 모습이다.

 

 

 

 

 

 

 

 

 

 

 

 

 

 

 

 

 

 

 

 

 

 

 

 

 

 

 

 

 

 

 

 

 

 

 

 

 

 

 

 

 

 

 

 

 

 

 

 사천 선진리성(泗川 船津里城)

 

 

·문화재 자료 제274(1998. 9. 8 지정) . 면적 : 76,637

·소재지 :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공원 일원

·시대 : 고려시대 조선시대

 

  이 성은 사천읍에서 서남방향으로 7km 지점인 사천만 동안(東岸)에 입지하고 있으며, 구릉성 고지 위에 구축한 평산성식(平山城式)의 해안성(海岸城)이다.

  본래 이 성은 서· · 북의 삼면이 바다에 에워싸이고, 동쪽 한 면만 육지로 통하는 천험(天險)의 전략적 요충지(要衝地)에 자리잡고 있었다. 현재는 남· 북의 양면이 간척(干拓)되어 농경지화(農耕地化)했기 때문에 서쪽 방면으로만 바다에 접하고 있다.

1597(선조 30) 1, 왜군은 10만여 대군으로 우리나라에 다시 쳐들어와 이른바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켰다. 이때 좌우(左右) 2군으로 나눈 왜적은 728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였다. 8월초 사천에 집결한 좌군은 곤양· 하동· 구례를 거쳐 남원성을 점령하고, 우군은 초계· 안의를 거쳐 전주를 점령하였다.

  전주에서 합류한 왜적의 선봉이 9월초 충청도 직산(稷山) 부근에서 서울로 북상하려다가 명나라의 유격장 해생(解生) 등이 이끄는 기병 3천에 의해 기습공격을 받고 저지당하자 왜적은 서둘러 남하하여 남해안 6백리에 걸쳐 왜채(倭寨)를 구축하거나 기존의 성곽을 수축하여 그들의 소굴로 삼았다. 이때 사천에는 왜장 시마즈(島津義弘)가 거느린 좌군의 일부가 주둔하였다.

  한편, 이에 맞선 우리 측 군대는 명나라의 중로제독(中路提督) 동일원(董一元)이 이끄는 병력 26,000여 명과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정기룡(鄭起龍)이 거느린 조선군 2,000여 명이었다. 동일원은 1598920일에 진주를 공략함으로써 왜군을 섬멸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하였다. 동제독은 진주를 탈환한 다음에 망진채(望晋寨), 영춘채(永春寨), 그리고 곤양성(昆陽城)을 차례로 탈환하고 패주하는 왜적 시마즈군을 추격하였는데, 928일에는 사천성(泗川城, 읍성)에서 적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에 왜군은 패주해 사천 신채(新寨)로 들어갔다. 신채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실로 공략하기 어려운 지형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10월 초하룻날 이른 아침부터 동일원이 지휘하는 조명(朝明) 연합군은 사천 신채를 포위하여 공격하였고,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명 연합군의 진중에서 폭약궤(爆藥櫃)가 폭발하는 사고로 인하여 아군의 전열이 흐트러지게 되었다. 이 광경을 성채에서 바라본 왜군은 일시에 각종 총포(銃砲)를 쏘면서 성밖으로 역습해 나왔고, 조명 연합군은 왜군을 쳐부수어 바다로 몰아내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희생된 조명 연합군의 무덤이 현재의 조명군총(朝明軍塚)이다. 그리고 사천신채의 시마즈군은 일본의 괴수 도요또미(豊臣秀吉)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해 1117일에 철수하였다.

  이와 같은 연유로 인하여 선진리성의 전신인 사천신채(泗川新寨)를 혹은 신성(新城) 혹은 왜증성(倭甑城)이라 일컫기도 한다. 그런데 왜군이 사천신채를 구축하고 주둔하기 이전에 기존의 통양창성(通洋倉城)이 있었던 점에 유의해야 한다. 동국여지지사천현여지승람고적조 및 전선소조에 고려초에 설치한 옛 통양창(通陽倉)은 현의 남쪽 17(7)인 통양포상에 있고, 부근 고을의 조세(租稅)를 거두어 서울(당시에는 개성)로 조운(漕運)하였으니 곧 12조창 중의 하나로 지금도 둘레 3,086(935m)의 토성지가 남아 있다고 하고 전선소(戰船所)는 현에서 남쪽 17리인 통양창성 안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정유재란 때 시마즈군이 이곳을 점령하고 기존의 통양창성을 교묘히 이용하여 방위 시설로 토성 위에 목책(木柵)을 둘러싸고 성안의 고지를 본진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공원의 조성

  일제시대 초기인 1912년 봄, 선진항을 개척한 일본인(日本人)들은 선진리성을 그들의 조상들이 쌓은 성이라고 하여 선진리 성에 벚나무를 심고 공원을 만들었다. 이에 앞서 그들은 먼저 사천신채 사적 보존회(泗川新寨 史蹟保存會)를 조직하여 당시 선진리성의 왜장 시마즈(島津義弘)의 후예인 시마즈 다다시게(島津忠重)에게 연락을 취하여 그를 자금줄로 삼고 사업을 추진하였다. 다다시게(忠重)는 요시히로(義弘)13대 후손으로 해군소장 출신이자 일본 학습원평의회(學習院評議會)의 회장직을 역임한 공작(公爵)의 작위를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선진리성은 시마즈가(島津家)에 의해 공원이 조성되는데, 이 당시 이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여한 사람은 진해요항부장관(鎭海要港部長官) 도고오(東鄕吉太郞) 해군중장, 경남도장관(慶南道長官) 사사기(佐佐木藤太郞), 그리고 사천군수 및 읍남면장 등이었다.

  먼저 성터 안의 한국인 및 일본인 소유의 전지(田地) 2,829평을 헐값으로 매수하고 기타 임야 615평은 무상으로 기증받아 도합 3,444평으로 공원을 만들었다. 경내에는 현재 충령비(忠靈碑)가 서있는 자리에 높이 54치 규모의 화강암으로 사천신채전첩지비(泗川新寨戰捷之碑)라 새긴 비석을 세우고, 경내 동서 양편에 두 신사(神祠)와 조경으로 1천여 그루의 벚나무를 심은 후 191810월에 준공식을 갖고 조선총독부에 기부채납하였다. 그후 총독부는 19365월에 사천 선진리성이라 명명하고 고적 제81호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영욕의 세월은 변천하는 것으로서 8· 15광복 후 벚나무를 제외한 전첩비와 두 신사는 마을 주민들에 의해 모두 제거되었다.

  한편, 사천군에서는 1978년 사업비 4,700여 만원을 들여, 일인들이 세웠던 곤비라사(金毘羅社) 자리에 이충무공 사천해전승첩비(李忠武公泗川海戰勝捷碑)를 세우고 충무공 이순신이 이곳 선진성 앞바다에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등장시켜 왜선 12척을 격파한 해전사상 빛나는 현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 일인들이 세웠던 비석자리에는 6· 25전쟁 때 우리의 영공을 지키다가 산화한 공군장병의 넋을 기리는 충령비가 우뚝 서 있다. 현재 경내에는 편의시설 1동과 돌계단 70m가 시설되어 있고 공원입구에는 1989년에 이어 연차적으로 완공한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전국에서 공원을 찾는 관광객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야외 공연장을 마련해 놓기도 하였다. 또한 오늘날 벚꽃 필 무렵에는 해마다 선진리성 벚꽃축제를 개최하여 상춘객이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한다. 그런데 1963년에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제50호로 지정된 선진리성을 최근에 이르러 왜성이란 이유로 도지정 문화재자료로 격하시켜 아쉬움이 남는다.

 

출처 : 사천시사

http://jdpaper.ciclife.co.kr/sub.html?w=body_01_01&style=01&idx=951&num=3536&search=&_view=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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