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입상

달이선생 2019. 10. 17. 10:00

2019 경기만에코뮤지엄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여행가자-지금을 기록하다'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입상

 

 

 

일정
~ 10:00 집결 및 출발
10:00~10:20 이동(소래산등산 입구)
10:20~11:20 소래산 마애보살입상 탐방
11:20~11:30 이동(소산서원)
11:30~12:00 소산서원&하연선생묘 탐방
12:00~12:20 이동(물왕저수지)
12:20~13:20 점심식사
13:20~13:30 이동(KBS소래송신소)
13:30~14:00 KBS소래송신소 탐방
14:00~14:10 이동(호조벌)
14:10~14:40 호조벌,관곡지&연꽃테마파크 탐방
14:40~15:40 짚풀공예 체험
15:40~16:00 마무리 및 이동(시흥시청후문)

 

 

  공정여행 '동네봄'의 진행(김지영, 원은주)으로 팸투어를 하였다. 사실 이번 코스는 동네봄에서 새로이 개발한 것으로 기획 때 자문을 했었던지라 참여하였다. 날씨도 좋고 참여하길 잘 했다. 우선 시흥의 보물인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을 자주 찾긴 했지만 ABC행복학습센터 뒷길로 해서 정식 코스로 올라다녔었는데, 경사로도 적다하고 길도 넓은 부천쪽 군훈련로 방향으로 길을 잡으니 산행의 묘미가 있었다. 더욱이 군인들 레팰 훈련장소는 소래산 중턱의 비교적 너른 터인데, 소래산을 오르는 길에 문지와 같은 형태며, 바닥에 널린 기와조각들로 볼 때, 마애보살상을 지키는 작은 절이나 암자가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사실 이곳이 절터로 유력한 추정지라고 한다.

  소래산 중턱 장군(병풍)바위는 시흥쪽 소래산 면에 가장 크고 잘 보이는 곳이다. 한국전쟁 때 웃대야리 방앗간에서 영국군이 대포를 쏘아 사격 훈련을 했을 정도였다. 재밌는 것은 지금도 그 탄흔이 마애보살상 오른쪽 한 곳과 왼쪽 두 곳에 있는데, 마애보살상을 빗겨간 것이다. 주민들은 마애보살상이 염험하여 포탄이 빗겨간 것이라고 하여 한 때 많은 신앙인들이 찾았다고 전한다.(시흥시지명유래)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은 당대 손꼽히는 작품이다.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경외감 뿐만 아니라 선각을 통한 미적, 원근감(구도, 비율, 선 굵기 등)도 표현된 뛰어난 작품이다. 이러한 마애불에 대해서 최근 단국대 정성권 박사로 부터 흥미로운 강의(2019 경기 인문학 강좌 '한국의 마애불과 소래산 마애보살입상')를 들었다.(아래, 강의 내용과 질문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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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 백제 최고수준의 마애불은 6세기 작품인 서산 삼존마애불상으로 교각상 형태로 북위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 양식이다.

신라는 통일기 작품인 석굴암 마애불로 최고의 미를 선보였다. 표현력 뿐만 아니라 건달바는 사자관을 쓴 모습인데, 이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래스의 모습으로 세계문화교류의 특징을 보이며, 건축면에서도 습기를 막는 자연 항원항습으로 본존불 바닥 지하수를 용출하여 입구로 흘러 나가게 만든 천재적인 시스템 고안까지 백미 중에 백미이다. 더욱이 지붕은 로마 판테온 원형 건축술 도입 측면까지 세계적인 유산이다.

  이렇게 마애불이 변화되는 것은 9세기 들어서다. 신앙 뿐 아니라 정치적 상징성이 특별히 강조되는데 바로 후삼국의 혼란과 고려 통일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이 시기 궁예나 왕건은 왕즉불 즉 왕과 부처를 동일시하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 만들어진 마애불은 육계 머리에 대의(가사 U자형 걸침)를 걸친 부처의 모습이 아닌 관을 쓴 보살의 모습이 나타난다.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이 이를 따르는 작품이다. 

  옷주름은  U자형으로 인도 아소카왕식(9~10세기)이고, 옷주름 꽃무늬(옷깃, 9~10세기), 10~11세기의 특징인 원통보관(송대)의 모습으로 봐서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은 10세기 중후반인 고려 광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위치는 개성으로 가는 교통로와 가깝고 해안로는 서해안과 이어진다. 또한 인근의 방산동에는 청자요지(사적 413호)가 있는데, 청자굽에 명문으로 '갑술'이란 간지가 출토되어 서기로 고려 전기에서 보면 974년이므로 이 무렵이다.

  특히 이 가마는 벽돌식 가마로 중국의 기술을 직수입 한 것인데, 당시 광종은 후주의 쌍기 등을 대거 받아들여 황제국 선언과 체제 확립, 호족에 대한 숙청을 통해 중앙집권체제를 달성한다. 이렇듯 청자요지와 함께 시기적으로 비슷하고 개성의 귀족에게 생활용품으로 납품했던 청자가마인 생산유적과 유통을 통해 고려 조정에서 주목되는 이곳에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이라는 황제 상징물이 보살로 표현되었을 개연성이 아주 높다.

  광종의 잇단 개혁은 호족의 시대를 끝내고 황제의 시대, 즉 황즉불을 마애불을 통해 구현 한 것이다. 개태사 삼존불, 안성 봉업사 마애불, 매산리 석조보살 등이 면류관을 쓴 마애상 모습으로 대표적이다. 특히 논산 관촉사 미륵보살상은 왕건이 만든 마애상 옆에 거대하고 기괴하게 축조하여 광종의 황즉불 사상을 상징하였다.

  이러한 면류관 마애상이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처럼 보관 형태로 변화하는데, 이는 거란이 세운 요가 강성해지면서 그 압박으로 내황외제(안으로 황제, 밖으로 제후국 자처) 체제를 고수하였던 고려의 상황이 상징적으로 보여지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은 국가적 사업으로 만들어진 왕즉불의 상징성을 드러낸 작품이며, 현지 호족인 인주이씨와의 관련성도 높다. 이들이 국책사업을 진두지휘 하였을 개연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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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흥시에 와서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에 대한 정보를 알게되면서 처음 찾아 본 이후 강렬한 인상이 지워지지 않는다.

'곧은 경사로를 올라 숨을 헐떡이다 오솔길을 돌아서며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열리며 거대한 바위와 함께 다가온 마애불.. '

  오늘 다행히도 인사를 하게 되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부처님 관세음보살... "

 

 

 

 

 

 

 

 

 

 

 

 

 

 

 

 

 

 

 

 

 

 

 

 

 

 

 

 

 

 

 

 

 

 

 

 

 

 

 

 

 

 

 

 

동영상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입상 음각 선형의 모습(자료 제공 : 시흥시청 향토사료실)

 

 

 

음각 선형을 바탕으로 채색 도안 작품(시흥문화원 소장, 시흥역사자료전시실 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