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지붕없는 박물관으로 여행가자-지금을 기록하다, 하연 선생 묘 등

달이선생 2019. 10. 17. 13:15

2019 경기만에코뮤지엄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여행가자-지금을 기록하다'

 하연 선생 묘 등



일정
~ 10:00 집결 및 출발
10:00~10:20 이동(소래산등산 입구)
10:20~11:20 소래산 마애보살입상 탐방
11:20~11:30 이동(소산서원)
11:30~12:00 소산서원&하연선생묘 탐방
12:00~12:20 이동(물왕저수지)
12:20~13:20 점심식사
13:20~13:30 이동(KBS소래송신소)
13:30~14:00 KBS소래송신소 탐방
14:00~14:10 이동(호조벌)
14:10~14:40 호조벌,관곡지&연꽃테마파크 탐방
14:40~15:40 짚풀공예 체험
15:40~16:00 마무리 및 이동(시흥시청후문)



  공정여행 '동네봄'의 진행(김지영, 원은주) 으로 팸투어를 하였다. 소래산을 내려와 ABC행복학습센터 으뜸관 갤러리 시흥에서 열리고 있는 제정구 선생 전시를 잠시 보고 다음 목적지인 하연 선생 묘와 소산서원에 갔다.

  소산서원은 현대에 만들어진 서원으로 조선시대 사액서원은 아닌 현대 성균관 등록 서원이다. 현재 유림에 의한 향사가 하연 선생의 사당 '문효사'에서 진행하고 있고 강당과 동서재에서는 시흥시지역사회교육협의회에서 교육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시흥시 문화예술과에서도 다채로운 공연도 열린다.

  하연(1376~1453) 선생은 세종 대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으로 불린다. 승평이 태평성대를 말하는 것이고 수문은 선대() 성법() 이어받아 지켜서, 나라 다스리 백성 편안히 하는 일을 말한다. 그러니 하연은 태평성대를 지킨 재상이란 말이다. 황희, 맹사성과 더불어 세종 대 태평성대를 열 수 있었던 장본인이지만 사람들은 잘 모른다. 시흥에 오기 전에는 잘 몰랐는데, 예전 사극을 보니 세종 대 주요 인물로 나오긴 하였다. 하지만 비중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세종 대 그의 역할은 지대하였다. 특히 지금도 세금 문제가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일본의 아베노믹스가 성공적으로 말했었는데 최근 세금 인상으로 곤욕을 치루고 있다. 이처럼 세종 대 국가의 여러 시책 중 전조인 지세에 대한 개혁이 시급하였다. 특히 손실답험법이란 자의적인 조사는 농민을 더욱 힘들게 하였는데 이를 하연이 나서서 풍흉에 따른 연분9등과 토질에 따라 나누는 전분 6등법인 공법(공세법)을 제정하여 합리적인 지세 수조를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관리들을 중첩 문제로 직책 안배에 문제가 많았는데 이를 행수법을 통해 바로잡았다. 더욱이 세종이 즉위하여 거대 사찰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지는데 이를 관장한 것이 하연이다. 지금으로 치면 종교인 과세와 같은 행정을 처리한 장본인이다.

  하연의 이러한 자질과 능력은 이미 태종으로부터 인정받은 터였다. 당대 무소불위의 권력자 태종에게 신출내기 간관인 하연이 의연한 자세로 흐트러짐 없이 보고 하는 것을 보고 태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치하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하연은 조선 개국 후 두 번 째 치러진 식년시 과거(1396)에서 출사하였다. 시흥시에는 하연과 같은 조선 전기의 인물로 태종과 인연이 깊은 인물이 있는데 이숙번이다. 이숙번은 조선개국 첫 번째 과거 급제자이다. 그의 묘소가 산현동에 있다.

  하연 선생의 묘는 시흥시 소래산의 가장 좋은 명당자리에 쓴 것으로 유명하다. 세자사로 문종의 스승이었던 하연은 그가 죽자 문종이 가장 좋은 자리를 찾으라 해서 지관이 계란을 지금의 자리에 놓아 두었더니 부화된 명당이었다는 설화가 계란마을에 전한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하연의 졸기이다.


영의정(領議政)으로 잉령치사(仍令致仕)한 하연(河演)이 졸(卒)하였다. 하연의 자(字)는 연량(淵亮)인데, 진주(晉州) 사람이다. 병자년720) 에 과거에 올라 봉상 녹사(奉常錄事)에 보직(補職)하였다가 뽑혀서 직예문 춘추관 수찬관(直藝文春秋館修撰官)이 되고 여러 관직(官職)을 더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이르렀다가 승정원 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에 발탁(拔擢) 제수되었다. 태종(太宗)하연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경은 이 벼슬에 이른 까닭을 아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알지 못합니다."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경이 대간(臺諫)에 있을 때에 의연(毅然)하게 일을 말하였으므로, 내가 곧 경을 알았다."

하였다. 세종내선(內禪)721) 을 받자, 지신사(知申事)에 제수하였다. 이때에 나라에 일이 많았는데, 하연이 조심하고 근신(謹愼)하여 그 사이에서 주선(周旋)하니, 두 임금의 은우(恩遇)가 매우 융숭하여 예조 참판에 제수하고, 대사헌(大司憲)에 옮겼는데 부도(浮屠)의 일을 논하니, 세종이 기꺼이 받아들여서 조계종(曹溪宗) 등 7종(宗)을 혁파(革罷)하여 단지 선(禪)·교(敎) 2종만 두고 아울러 주군(州郡)의 사사(寺社)와 토지를 헤아려 줄였다. 뒤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었다가 어떤 일로 파면되어 천안군(天安郡)으로 귀양갔었는데, 얼마 안되어 불러서 병조 참판에 제수하였다가 형조 판서(刑曹判書)·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승천(陞遷)하고,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겸 판이조사(判吏曹事)에 천전(遷轉)하였다. 여러 번 승진하여 좌찬성(左贊成)과 좌의정(左議政)에 이르고 나이가 70에 궤장(几杖)722) 을 하사받았다. 영의정이 되자 문종(文宗)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고자 하니, 하연이 불가함을 고집하였다. 신미년723) 에 늙고 병듦으로써 물러가기를 청한 것이 두 번이었으나 본직(本職)으로 잉령치사(仍令致仕)하게 하였다. 유명(遺命)으로 불사(佛事)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나이는 78세이나, 성품이 간고(簡古)하고 어버이 섬기기를 효성으로 하며, 친족에게 화목하기를 인으로써 하고, 옛 친구를 버리지 아니하며, 경축(慶祝)과 조위(弔慰)를 폐하지 아니하고, 글을 보기를 즐기고 시(詩)를 읊기를 좋아하며, 가산(家産)에 힘쓰지 아니하고 성색(聲色)을 기르지 아니하여 가정이 화목하였다. 관(官)에 있어서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밝게 살피기를 힘쓰고, 일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두 어버이가 모두 나이 80세인데, 무릇 그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면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구경당(具慶堂)을 지어서 세시복랍(歲時伏臘)724) 에 반드시 술잔을 받들어 올려서 수(壽)를 칭송하니, 사람들이 모두 영광으로 여겨서 그 일을 노래하고 읊조리기까지 하였다. 어버이가 죽으니 나가고 들어올 때에는 반드시 사당(祠堂)에 고하며 또 구경당을 그 선인(先人)725) 의 거처하던 곳이라고 하여 해마다 수리하고 이엉을 덮어서 이름을 영모(永慕)라고 고쳤는데, 자질(子姪)들이 기와로 바꾸기를 청하니, 하연이 탄식하기를,

"선인의 예전 살던 집을 어찌 고치리요. 또한 우리 후세로 하여금 선인의 검소함을 본받게 함이 족하다."

하였다. 묘당(廟堂)726) 에 있은지 전후 20여 년에 사대부를 예(禮)로 대접하고, 문(門)에서 사알(私謁)727) 을 받지 아니하고, 처음에서 끝까지 근신(謹愼)하며 법을 잡고 굽히지 아니하였으니, 태평 시대의 문물(文物)을 지킨 정승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그 논의가 관후(寬厚)함을 숭상하지 아니하여 대신의 체면을 조금 잃었고 늘그막에는 일에 임하여 어둡고 어지러웠으나, 오히려 한가롭게 세월을 보내면서 물러가지 아니하다가 치사(致仕)하기에 이르렀다. 또 급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상서(上書)하니, 이때 사람들이 이로써 작게 여겼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함을 지키기를 하연과 같이 한 이도 적었다. 시호(諡號)는 문효(文孝)인데,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은 문(文)이고, 자혜(慈惠)하고 어버이를 사랑함은 효이다.(領議政仍令致仕河演卒。 淵亮, 晋州人。 登丙子科, 補奉常錄事, 選爲直藝文春秋館修撰官, 累官至司憲執義, 擢拜承政院同副代言。 太宗手曰: "卿知所以至此乎?" 對曰: "未也。" 太宗曰: "卿在臺, 毅然言事, 予乃知卿也。" 世宗受內禪, 拜知申事。 時, 國家多事, 小心謹愼, 周旋其間。 兩上恩遇甚隆, 拜禮曹參判, 遷大司憲, 疏論浮屠事, 世宗嘉納, 革曹溪等七宗, 只置禪、敎二宗, 幷量減州郡寺社及其土田。 後爲平安道觀察使, 以事罷, 謫天安郡。 頃之, 徵拜兵曹參判, 陞刑曹、吏曹判書, 轉議政府參贊兼判吏曹事, 累陞至左贊成、議政。 年七十, 賜几杖。 及爲領議政, 文宗欲重修大慈庵, 執不可。 辛未, 以老疾乞退者再, 以本職仍令致仕。 遺命不作佛事, 年七十八。 性簡古, 事親以孝, 睦族以仁, 故舊不遺, 慶弔不廢。 喜觀書, 好吟詩, 不務家産, 不畜聲色。 家門雍睦, 居官處事, 務要明察, 不好興作。 二親年俱八十, 凡所以娛悅其心者, 靡所不至。 作具慶堂, 歲時、伏臘, 必奉觴稱壽, 人皆榮之, 至爲歌詠其事。 親歿, 出入必告祠堂。 且以具慶堂先人所處, 歲修蓋茨, 改號曰永慕。 子姪請易以瓦, 歎曰: "先人舊居, 豈可改也? 亦足使吾後世法先人儉也。" 居廟堂前後二十餘年, 禮接士大夫, 門不受私謁, 終始謹愼, 執法不撓, 可謂昇平守文之相也。 然其論議不尙寬厚, 稍失大臣體。 暮年臨事暗耗, 尙優游不退, 及其致仕也, 又以不急之事上書, 時人以此少之。 然終始保全如者, 亦少。 謚曰文孝, 學勤好問文, 慈惠愛親孝。)-단종실록 7권, 단종 1년(1453) 8월 15일 기해


  소래산 자락에서 멀리 서남쪽으로 뾰족한 군자봉이 보인다. 승지인 군자봉을 확인하려면 소래산에서 보면 된다. 일찍이 정조도 소래산을 지나 안산으로 나아갈 때 소래산과 군자봉의 예사롭지 않음을 간파했었다.(1797년 8월 행행)

  점심을 먹고 다음으로 간 곳은 KBS소래송신소다. 국가보안시설 가급에 해당하는 곳으로 예전에는 출입이 불가능했지만 현재는 미리 신청하여 신원확인만 마치면 누구든 영내 관람이 허용된다고 한다. 1973년 세워져 중부권역의 AM라디오와 TV전파를 담당하고 있다. 케이블 등 다양한 매체가 나오기 전에는 영향력이 상당했는데 그래도 전쟁이나 재난시에는 매우 중요한 시설이다. 현재 무장가능 청원경찰 5명과 박사급 엔지니어들이 근무하고 있다.

  송신소를 나와 호조방죽이 시작되었던 곳에서 호조벌을 거닐었다. 현재도 수문이 있는데, 이곳에 시흥에코뮤지엄 작품이 여럿 있다. 예전 바다일 때는 큰 갯고랑이라고 하여 한개로 불린 자리다. 그곳에서 보통천을 따라 관곡지, 연꽃테마파크로 나아갔다. 연꽃과 잎이 모두 지고 연근 수확만을 기다리는 공원 중간에 시흥시향토민속보존회 총무이자 짚풀공예 전수자 윤지숙 강사가 새끼를 열심히 꼬고 있었다. 오늘 팸투어 대미를 장식할 짚똬리 만들기 때문이다.

  윤지숙 강사가 짚공예와 새끼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짚새기로 만들어서 곡물 따위를 담는데 쓰인 것들은 크든 작든 모두가 둥구미라 부른다. 둥구미의 미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무국장님 아세요?" 묻는다. 난감하다. 모른다.

  '미'자는 '米' 쌀미자를 말한다고 한다. 농경의 산물이 짚이라서... 그리고 새끼줄은 왜 새끼인지 묻는다. 모른다. 

  새끼줄은 만들 때 짚새기 둘로 해서 비벼 꼬는데 음향사상에 따라 사람의 오른손은 음으로 여자, 왼손은 양으로 남자로 이 둘로 비벼 꼬아 다리 아래 눌러 꼬고 나오니 새끼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매우 설득력 있고 재밌는 해설이다. 이어서 예전 머리에 짐이나 동이 등을 옮길 때 받침으로 썼던 똬리를 만들었다. 또아리는 사투리고 똬리가 표준어란다. 요즘 똬리는 작게 만들어서 가정내 냄비 받침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참여한 사람들이 아이 어른 할 거 없이 열심히 만든다.

  손재주가 없다고 뺀 나는 농업기술센터 1층 연꽃갤러리에 가서 민화 전시를 살펴보고 남는 시간 체험에 열중인 사람들 사이에서 오늘 팸투어 과제인 스케치와 기록을 하였다. 팸투어 시작 때부터 안내했던 터라 노트와 만년필이 주어졌었다.

  40여분간 똬리를 만들고 짬시간에 동네봄 원은주 선생님이 꽃차를 나누어 준다. 하늘 높고 파란 너른 개활지 한복판에서 꽃차를 나누는 이 정취, 풍류가 어디 따로 있을까.. 

  이렇게 팸투어를 마친다. 오늘을 기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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