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김준용 장군 묘 및 신도비

달이선생 2019. 10. 21. 10:00

김준용 장군 묘 및 신도비

 

  1636년 병자호란은 우리 역사에서 암울했던 역사이자, 치욕이었다. 군왕 인조가 삼전도에 나아가 청태종 황태극의 발 아래 항복례인 삼배구고두를 행했던 일로 인해 당시의 모든 일은 쉬쉬할 뿐, 말하기 꺼려했다. 더욱이 우리의 승전도 마찬가지였다. 

  김준용 장군은 병자호란 당시 몇 안되는 승장 중에 한 명이었지만 패전의 오명으로 파직과 유배를 당했던 인물이다. 다행히 억울한 누명은 곧 풀렸으나 그의 전공에 대한 포상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주장이 이러하였는데, 종군해서 용맹을 자랑했던 휘하 장졸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전라병마절도사 김준용 휘하에서 광교산 전투에 참가하여 만주 정황기의 주장이자 청태조 누루하치의 부마 양고리(백양고라, 슈무루 양구리(만주어: ᡧᡠᠮᡠᡵᡠ
ᠶᠠᠩᡤᡠᡵᡳ
한자: 서목록 양고리[舒穆禄 揚古利] )를 사살했던 박의(朴義)의 전과도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조선이 항복한 이상 조선의 빛나는 전과는 청에겐 뼈아픈 치욕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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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의 숨은 공신 박의-방통'(전문 출처:https://bangtong36.blog.me/220792945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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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다행히 정조 때 김준용 장군의 공을 기려 장려하자는 상소가 올라와  

 

사직(司直) 신기경(愼基慶)이 상소하여 당면한 문제 12조항을 올렸다... 넷째는 임진년과 병자년의 난리 때 창의사(倡義使) 우성전(禹性傳)이 의리를 제창하여 공훈을 세웠고 고 병사(兵使) 김준룡(金俊龍)은 오랑캐를 섬멸하여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상주어 장려하자는 일이고,...(司直愼基慶, 上疏陳時務十二條... 四曰, 壬丙之難, 倡義使禹性傳, 倡義樹勳, 故兵使金俊龍, 殲胡立功, 宜加褒奬)-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1791) 1월 22일 정유 4번째기사       

 

  이듬해 다음과 같이 시호가 내려졌다.

 

판서 제말(諸沫)에게는 충의(忠毅), 증 판서 공서린(孔瑞麟)에게는 문헌(文獻), 판서 이익정(李益炡)에게는 정간(靖簡), 판서 황경원(黃景源)에게는 문경(文景), 판서 조영국(趙榮國)에게는 정헌(靖憲), 증 찬성 김준룡(金俊龍)에게는 충양(忠襄)의 시호를 내렸다.(贈諡判書諸沫忠毅, 贈判書孔瑞麟 文獻, 判書李益炡 靖簡, 判書黃景源 文景, 判書趙榮國 靖憲, 贈贊成金俊龍 忠襄)-정조실록 35권, 정조 16년(1792) 9월 29일 을축 3번째기사

 

  김준용 장군의 묘는 원래 양천현 남산 선산에 있었으나 1973년 서울시의 확장개발에 따라 당시 시흥군으로 묘지를 잡아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옮겨온 석물 중 동자석 한 쌍이 있었는데, 도난당하였다.

 

 

 

 

 

 

 

 

 

 

 

 

 

 

 

 

 

 

 

 

 

 

 

 

 

 

증병조참판 행북도절도사 김공 신도비명
조선국 증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행절충장군 수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 겸 경성
도호부사 김공金公 신도비명 및 서문
 
원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감 춘추관사 허목許穆이 글을 지음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 · 춘추관사 오시복吳始復이 글씨와 함께 전액篆額을 씀
공의 이름은 준용俊龍이고, 자는 수부秀夫이다. 성은 김씨金氏로, 신라의 후예이다. 고려 때 이부
상서 거공巨公이 원주原州를 식읍食邑으로 하사받고 원성백原城伯에 봉해져 자손들이 대대로 원주에
살게 되니, 원주 김씨는 여기서 비롯하였다. 대대로 현달한 자가 많았는데, 조선왕조에 들어와 원
도공元度公 해晐가 있었고, 그의 5대손은 절도사 말손末孫이었다. 그는 절도사 박영朴英과 친구 사이
였는데, 당시 조정에서 그를 대간臺諫으로 발탁하려는 논의가 있었지만 기묘사화己卯士禍 때(1519년)
어진 이들이 실패하면서 임명되지 못하였다. 그가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이름이 안우安祐이며, 어
려서 이름을 떨쳤으나 요절하였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이름이 영瑛이며, 전설사 별좌를
지낸 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이름이 두남斗南인데, 선조 임금대의 이름난 선비이다.
지방관으로 행적이 뛰어나 높은 관직에 올랐으며, 89세까지 장수하고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이
르렀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김해金海 김씨金氏로, 담양도호부사潭陽都護府使 희필希弼의 따님이다.
공은 체격이 크고 어려서부터 노는 것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장차
크게 될 인물이라 기대하였다. 만력萬曆 36년(1608) 선조 41년, 23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
전관이 되었다. 또 관무재觀武才에서 장원을 차지하여 훈련원 주부로 승진하였다가 곧 법성수군만
호法聖水軍萬戶가 되었다. 28세에는 마량첨절제사馬梁僉節制使가 되었고, 능력을 인정받아 절충장군에
올라 인동도호부사仁同都護府使가 되었다가, 2년 후 영주군수榮州郡守 겸 조방장助防將으로 자리를 옮
겼다.
광해군이 폐위된 뒤 온 나라의 기강이 사라지자, 임금이 암행어사를 각처에 파견하여 여러 군
현의 불법적 행위를 살피게 하였는데, 이때 공은 고을을 잘 다스렸다는 이유로 특별히 임금으로
부터 옷감을 하사받았다. 이듬해에 북도병마우후北道兵馬虞侯로 옮겼고, 겨울에는 회령도호부사會寧都
護府使로 옮겼다. 그곳에서도 많은 공적을 쌓았으므로 다시 임금으로부터 옷감을 상으로 받았는데,
인동과 회령에는 모두 정청비政淸碑가 세워져 백성들이 공을 추모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천계天啓 8년(1628) 인조仁祖 6년, 공은 43세로 서해절도사西海節度使가 되었다가 곧 체직되었고, 겨
울에 중화도호부사中和都護府使가 되었다가 1년 만에 영남절도사嶺南節度使가 되었다. 다시 3년 만에
절충장군의 품계로서 북도절도사北道節度使에 발탁되었다. 공은 북쪽의 변방을 드나들기 10년 만에
위엄있는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으니, 군사들과 사대부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3년 뒤 어머니 정부
인이 세상을 떠나자 공은 이미 50세의 나이에 3년 간 여묘살이를 하며 슬픔에 정신을 잃을 정도
로 통곡하였다.
상을 마친 뒤에 기보우방어사畿輔右防禦使가 되었고, 이어 호남절도사湖南節度使가 되었다. 그해 겨
울,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침공하여 국경을 넘은 지 3일 만에 선두의 기마병이 이미 서울에 다다
르자 임금은 서둘러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대군이 계속 밀어닥쳐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오
랑캐의 위세가 대단하여 하루빨리 군사를 불러 모아야 되자, 공은 즉시 휘하에 거느린 군사들을
일으키고 인근 고을에서 임금을 호위할 군사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멀리까지 적의 형세를 염탐
하고 무기와 군사를 정비하니, 부대를 움직임에 규율이 있었다. 그러자 오랑캐의 기병들이 사방으
로부터 나왔으나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 감히 덤비지 못하였다. 직산稷山에 이르렀을 때, 충청도
의 군병이 죽산竹山에 있었는데 오랑캐가 기습을 하였다. 체찰사 종사관 박서朴遾가 먼저 죽산부터
구하고자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임금을 구하는 것이 급하다”고 하며 따르지 않았다.
명령을 받은 지 13일 만에 용인龍仁 광교산光敎山에 이르러 험준한 지세에 의지하여 진을 쳤다.
이미 모든 근왕병이 패퇴하고 전라도의 군병만이 남아있었다. 남한산성에 육박하여 함성을 올리며
날랜 군사들을 선발하여 적의 기병을 격파하였는데, 목을 벤 수가 매우 많았다.
적이 매우 근심하여 몽골병 및 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 군사 수만 명을 모아 새벽 안개를 틈
타 진격하여 단번에 돌파하려 하니, 그 기세가 마치 비바람 같았다. 공이 칼을 뽑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맹서하고 돌과 화살이 쏟아지는 곳에 서서 죽을 각오임을 보이자, 군사들 또한 모두 죽기
를 각오하고 싸웠다. 적 또한 진퇴를 거듭하며 종일토록 힘을 다해 싸우던 중, 날랜 기마병을 보
내어 몰래 고개 뒤를 넘어가 고지를 점령하고 화살을 비 오듯 쏟아부었다. 공은 급히 용사 수백
명을 뽑아 앞다투어 올라가며 말하기를 “지금이 바로 충신으로서 나라에 보답할 기회이다”라고
하며 싸움에 임하니, 군사들이 모두 일당백이었다.
오랑캐 중 갑옷을 입고 깃대를 잡은 자가 말을 타고 봉우리에 올라 큰 깃발을 세우고 군사들
을 지휘하자 적군들이 모여들었다. 공이 그를 가리키며, “저 자를 죽이지 않으면, 적이 물러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더욱 힘써 싸움을 독려하였다. 포 여러 발을 발사하자, 깃발을 잡고 군
사들을 지휘하던 자 및 여러 우두머리 곁에 좌우로 서 있던 자들에 한꺼번에 명중하여 죽은 자가
여러 명이었다. 오랑캐들 가운데 죽은 자가 서로 베고 누워 쌓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지만, 우리
군사 중 죽은 자는 겨우 수십 명뿐이었다. 적군이 크게 패하여 산을 내려가 곳곳에 쌓인 시체를
태우니, 적진은 곡성哭聲으로 가득하였다. 밤 이경二更(밤 10시에서 12시 사이를 말함) 무렵 진중을 살펴보니
포환은 이미 다 떨어졌고 군량도 모자랐다. 날이 밝으면 오랑캐들이 반드시 크게 쳐들어 올 것이
나 당해낼 수 없을 것이므로, 진을 옮겨 군사들을 휴식시키고자 하여 횃불을 세우고 가짜 병사들
을 만들어 놓은 뒤 밤에 몰래 군사들을 이동시켰다. 아침이 되자 정말 적군이 크게 쳐들어왔지만
진루가 텅 비어 있었고, 또한 복병을 두려워하여 감히 추격하지 못했다. 패하여 죽은 적장 가운데
백양고라白羊高羅라는 자는 오랑캐의 높은 장수로, 싸움을 잘하여 전공이 높았으므로 선한先汗이 사
위로 삼았던 지체높은 자였다.
우리 군사들이 도중에 한 밤이 되어 소란을 일으키며 크게 외치기를, “우리가 장수를 위해 이
미 힘써 싸워 이겼으니, 갑자기 변을 만나 죽어도 이로울 것이 없다”고 하며 모두 흩어져 가버렸
다. 공은 휘하의 기병 수백 명과 더불어 수원에 이르렀지만, 군사가 없음을 걱정하여 남쪽으로 내
려가 다시 군사를 수습하여 뒷날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감사 이시방李時昉은 오랑캐를 두려워하여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내심 부끄러워하는 한편 절도사의 전공을 시기하였으므로, 도리어 말
을 꾸며내어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종사관 박서 역시 예전에 공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았던 것
에 분한 마음을 품고 임금에게 무함하니, 공은 결국 벌을 받게 되었다. 대신 이성구李聖求와 최명
길崔鳴吉이 전투 상황을 보고한 글을 통해 “전공이 많으며, 실로 죄는 없다”고 힘을 다해 말해주어,
이시방은 결국 유배되고 공은 죄를 면하게 되었다.
호란이 평정되자 어영중군에 임명되었다가 집에 머문 지 몇년만에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니,
문병 온 이들이 모두 다시 일어나지 못할까 근심하였다. 이명李溟은 평소 공과 친분이 있었는데,
사적으로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공이 어찌 중국을 공격하는 것을 돕겠는가? 그 병이 깊었을 뿐
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임경업林慶業과 유림柳琳 등은 오랑캐 군대를 따라 가도椵島와 금주錦州의 전
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숭정崇禎 12년(1639) 인조 18년 김해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가 되었다. 1년 만에 두 번째로 영남절도
사가 되어, 군중軍中의 일을 전날 약속한 대로 다시 정비하였을 뿐이다. 이듬해 병이 깊어져 관직
에서 물러나게 해 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병든 몸을 이끌고 십여 리를 가서 관사에서 객
사하니, 공의 나이 57세였다. 이 때 남쪽에서 큰 별이 남쪽에서 떨어졌다. 영의정 김류金瑬와 원두
표元斗杓가 조정에 있다가 부음을 듣고 놀라 말하기를 “하늘의 뜻이로다. 남방에 별이 떨어지니 과
연 훌륭한 장수를 잃었구나”라고 하였다. 임금은 특명을 내려 그의 장례 절차를 돌보게 하고, 법
도에 따라 담당 관서로 하여금 부의를 전하게 하였으며, 그의 공로가 우뚝한 장성과 같다는 내용
의 제문을 내렸다. 공은 만력 14년(1586)에 출생하여 숭정 15년(1642) 11월 5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같은 해 12월 12일 양천현陽川縣의 남산南山 선산에 안장되었다.
공은 침착·굳건하며 큰 지략이 많았을 뿐 아니라 겸손·공손하여 군사들을 아꼈다. 그러므로
김준용金俊龍 신도비명 111
사람들이 그에게 죽을 힘을 다 바쳤다. 2천 섬에서부터 연수連帥에 이르기까지 군사 업무를 담당
한 지 수십 년 동안, 약속을 굳게 지키고 상벌을 신뢰 있게 행하였으며 법도를 반드시 지켰다. 권
세있는 자들에 아부하지 않고 사사로운 이익에 굴하지 않았으며, 관사를 집과 같이 여겨 물러나
살 집이 없었고, 주택과 의복이 마치 보통 선비일 때와 똑같이 검박하였다. 죽은 뒤에는 집안이
가난하여 모든 장례 절차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여 치를 정도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어질다고
여겼다.
많은 사람들이 광교산의 대승을 칭찬하여도, 공은 “당시 임금이 모욕을 당하였는데, 군사를 이
끄는 신하가 성 아래에서 죽지 못한 것이 죄이다. 다른 일을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말하였
다. 불행하게 세상이 뒤집혀지는 때를 만나 임금이 남한산성을 내려와 항복하였으니, 신하된 자로
서 몇 번을 죽어도 부끄럽지 않으며 오랑캐를 아무리 죽여도 많지 않다고 여겼던 것이다. 임무를
받아 사양하지 않으면서도 큰 공을 세웠다고 자부하지 않았으니, 죽음으로써 도를 지킴이 바로
충신의 의리이다.
공은 평생토록 집에 있으면 부모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며, 나아가
서는 왕을 섬김에 충성을 다하였고 친구를 사귐에 신의가 있었다. 이는 곧 돌아가신 부친께서 옮
음을 실천하여 이름을 세운 것과 마찬가지였다. 공이 그처럼 아버지의 가르침을 지켜내었으니, 공
의 어짊은 그 근원이 있다고 할 만하다.
부인 임씨林氏는 본관이 순창淳昌이며, 군자감 주부 계繼의 따님이다. 선현들의 말과 행실에 통
달하여 늘 허물이 없도록 몸가짐을 삼갔으므로 집안에 뇌물과 참소가 없었으니, 이 모두 부인의
현명함 때문이었다. 공이 죽은 뒤 16년 후, 즉 효종 9년(1658) 12월 28일 76세로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2월 27일 남산南山에 함께 장사지냈다.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경문敬文·한문漢文·인문仁文·현문炫文이며, 사위는 정상鄭相이다. 경문
은 사재감 첨정을 지냈고, 80세가 되어 첨지중추부사의 관직을 받았다. 3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춘
장春章·진원振遠·형원亨遠이며, 딸은 1명으로 사위는 참봉 이온李蘊이다. 진원은 몽협夢協을 낳았고,
형원은 2녀를 두었는데 사위는 신필경申弼卿과 이익휴李益休이다. 한문은 해서절도사를 지냈으며, 아
들 석碩은 의금부 도사를 지냈다. 딸이 둘 있었는데 사위는 이진성李震晟과 윤수손尹首孫이다. 석은
몽상夢商과 몽량夢良을 낳았는데, 몽상은 생원이며 몽량은 훈련원정이다. 딸이 둘 있었으며, 사위는
안후선安后宣과 진사 엄집嚴䌖이다. 인문은 사복시 판관을 지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덕원德
遠을 낳았는데 덕원은 형조판서를 지냈다. 덕원은 몽양夢陽을 낳았는데 사간원 정언을 지냈고, 딸
이 둘 있었는데 사위는 진사 유헌장柳憲章과 한종범韓宗範이다. 현문은 병조정랑을 지냈으며, 아들은
홍원弘遠이고 사위는 윤해尹楷인데, 모두 진사이다. 홍원은 몽서夢瑞를 낳았으며 딸은 1명으로, 사위
는 성임成任이다. 정상鄭相은 통덕랑으로 중희重熙와 중윤重胤을 낳았는데 모두 진사이다. 딸은 1명으
로 사위는 정규제鄭奎齊이다. 이진성은 1남을 두었고, 윤수손은 2남을 두었으며, 홍원은 또 1남 1녀
를 두었고 정중희는 2남을 두었으며, 정중윤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측실 소생의 자
녀는 모두 6인인데, 세 아들은 내문乃文·전문全文·회문會文이며, 삼녀는 각각 군수 박정익朴廷翊, 감사
원만석元萬石, 감목 이익상李益常의 첩이다. 내외 적서의 자손 및 증·현손의 대에 이르러 어린 아이
들까지 합하면 모두 백여 명이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우뚝하고 용맹한 신하여, 임금을 에워싼 성과 같도다.
충의를 쌓았으니 만인이 우러러 보는 도다. 그 이름이 영원토록 빛나리.
숭정 기원 후 53년 경신년(1680)에 쓰고, 58년 을축년(1685) 4월 일에 세움

 

贈兵曹參判 行北道節度使 金公 神道碑銘
朝鮮國 贈嘉善大夫 兵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行折衝將軍 守咸鏡北道兵馬水軍節度使 兼 鏡
城都護府使 金公 神道碑銘 幷序
原任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兼 領經筵監 春秋館事 許穆撰
嘉善大夫 吏曹參判 兼 同知經筵義禁府· 春秋館事 吳始復書 幷篆


公諱俊龍, 字秀夫, 姓金氏, 本新羅苗裔也. 高麗時, 有吏部尙書巨公, 賜食邑原州, 封原城伯,
子孫遂爲原州人, 原州之金始此. 其世多達人顯者, 入本朝, 有元度公晐, 五世, 有節度使末孫, 與朴
節度英齊名爲友. 當時有擢用臺省之議, 己卯諸人敗而不果, 於公爲高祖. 曾祖諱安祐, 少有名譽,
早世不成, 贈左贊成. 祖諱瑛, 以典設司別坐, 贈吏曹參判. 父諱斗南, 昭敬時名人, 以治行高第貴,
八十九以大年, 至同中樞. 母貞夫人金海金氏, 潭陽都護府使諱希弼之女也. 公魁偉, 自爲兒戲, 已
不與凡兒等, 見者皆期以遠大. 萬曆三十六年, 我昭敬王四十一年, 公二十三, 以武科發身, 爲宣傳
官, 又以觀武才壯元, 陞訓鍊主簿, 爲法聖水軍萬戶. 二十八, 爲馬梁僉節制使, 以能陞折衝, 爲仁同
都護府使. 二年, 改榮川郡守, 兼助防將. 及光海廢, 而四方無紀, 上分遣繡衣, 察諸郡縣不法, 公特
以治理, 賜表裏. 其明年, 遷北道兵馬虞候. 冬, 移會寧都護府使, 又以多績, 賜表裏以賞之, 仁同·
會寧皆有政淸碑, 百姓追思不已. 天啓八年, 我仁廟六年, 公四十三, 爲西海節度使, 尋遞. 冬, 爲中
和都護府使, 一年, 爲嶺南節度使, 三年, 以折衝, 擢拜北道節度使. 公出入北關, 前後十年, 威名已
著, 軍吏士大悅. 三年, 貞夫人卒, 公已五十, 居廬三年, 哭泣幾滅性. 旣除喪, 爲畿輔右防禦使, 仍
爲湖南節度使. 其冬, 虜大擧攻我, 入我境三日, 先驅已薄國都, 上急出幸南漢. 大兵繼至, 南漢受
圍, 虜勢盛强, 召兵日急. 公卽起營下親兵, 行收郡縣兵勤王, 遠斥候, 整戎卒, 師行有律. 虜遊騎四
出, 亦觀望而已, 不敢逼. 至稷山, 湖西兵在竹山, 虜攻之甚急. 體察從事朴遾欲先救竹山, 公言勤王
之急, 不從也. 受命十三日, 至龍仁光敎山, 據險而陣. 諸勤王之師皆已敗歿, 湖南兵獨專, 薄南漢以
爲聲勢, 出勁兵, 擊破虜遊騎, 斬馘甚多. 虜患之, 合蒙古孔·耿兵數萬, 乘曉霧直前, 欲一擊破之,
勢若風雨. 公杖劍誓衆, 立矢石之所, 以示必死, 士皆殊死戰. 虜且進且却, 終日力鬪, 虜以輕騎, 潛
踰後嶺, 先據上峯, 矢下如雨. 公急出勇士數百, 爭登曰, “此正忠臣報國之秋也”, 薄戰, 士皆一當
百. 虜有被甲執旗, 立馬峯上, 建大旗令衆, 衆皆合聚. 公指之曰, “彼不殺, 賊不退”. 督戰益力, 衆
砲俱發. 執旗令衆者, 與諸酋長左右立, 中丸一時, 死者數人, 而虜衆死者相枕藉, 不可計數, 我兵死
者僅數十. 虜大潰下山, 處處積屍燒之, 虜中皆哭聲. 夜幾二更矣, 閱軍中, 砲丸已盡, 軍食乏, 朝日
虜必大至, 不可當, 欲移鎭休士卒, 乃列炬爲疑兵, 潛師夜行. 至朝, 虜果大至, 則空壘, 亦畏伏不敢
追. 虜敗將死者白羊高羅, 虜之貴將, 以善鬪功高, 先汗以女妻之, 重於虜者也. 我兵中路夜驚軍亂,
大號曰, “爲主將, 旣力戰勝之, 卒有變, 徒死無益”, 皆散去. 公與麾下騎士數百, 至水原, 患無兵,
欲南下更收兵爲後計. 監司李時昉畏胡不赴亂, 心內慙忌節度之有功, 反辭以聞, 從事遾旣心怒不從
己言, 亦毁於上, 公當得罪. 大臣李聖求·崔鳴吉極言戰捷狀曰, “功多實無罪”, 以故時昉竄, 公得免.
旣事平, 公常爲禦營中軍. 家居數年, 以病不出, 客來問者, 皆憂其不起, 而李公溟素善, 私謂其子
曰, “某也, 豈助攻中國者也, 其疾固也”. 時林慶業·柳琳皆被驅從椵島·錦州之役矣. 崇禎十二年, 我
仁廟十八年, 爲金海都護府使, 一年, 爲嶺南節度使, 再任也, 軍中事, 復修前時約束而已. 明年, 疾
甚, 上疏乞解印綬, 輿疾行十許里, 客死館次, 年五十七. 時有大星隕於南方, 議政金瑬·元斗杓在朝
堂聞訃, 至驚曰, “天也. 南方星隕, 果然失一良將”. 上特令一路送喪, 有司致賻如儀, 賜祭文, 稱其
功業, 倚如長城云. 公生於萬曆十四年十二月二十三日, 卒於崇禎十五年十一月五日. 其十二月十二
日, 葬陽川縣南山族葬. 公沈毅多大略, 謙恭愛士, 能得人之死力. 自二千石, 以至連帥, 禦軍數十
年, 嚴約束, 信賞罰, 繩墨必謹, 不媚權貴, 不循私枉, 以官爲家, 歸則居無室廬, 居處服食, 樸如列
士時. 及歿而歸, 家貧, 凡喪事, 依人以辦, 人莫不賢之. 光敎之捷, 萬口多之, 而公曰, “當此之時,
主辱矣. 將兵之臣, 不死城下, 罪也. 他尙何說哉”. 其心以爲, 不幸遭値傾覆, 乘輿下城, 爲人臣,
滅身不爲媿, 破虜不爲多, 雖受任不辭, 慨然不以功業自居, 以守死善道爲心, 此忠臣義也. 公平生,
居則孝於事親, 友於兄弟, 出則忠於事君, 與人交而信, 此先大夫以行誼立名, 公能守而不失如此,
蓋其賢有自云. 夫人林氏, 籍淳昌, 軍資監主簿諱繼之女也. 能多識前言往行, 一以無過自飭厲, 門
無苞苴女謁, 皆夫人之賢也. 公歿十六年, 而孝宗九年十二月十八日, 夫人七十六歿, 後年二月二十
七日, 祔葬南山. 有四男一女, 男敬文·漢文·仁文·炫文, 壻鄭相. 敬文, 司宰監僉正, 年八十, 壽爵僉
知中樞府事. 生三男, 春章·振遠·亨遠, 有一女, 壻參奉李蘊. 振遠生夢協. 亨遠有二女, 壻申弼卿·李
益休. 漢文, 海西節度使, 生碩, 義禁府都事, 有二女, 壻李震晟·尹首孫. 碩生夢商·夢良. 夢商, 生
員. 夢良, 訓鍊院正. 有二女, 壻安后宣,嚴䌖, 䌖, 進士. 仁文, 司僕寺判官, 追爵吏曹判書, 生德
遠, 刑曹判書, 生夢陽, 司諫院正言, 有二女, 壻柳憲章·韓宗範. 憲章, 進士. 炫文, 兵曹正郞, 男弘
遠, 壻尹楷, 皆進士. 弘遠生夢瑞, 有一女, 壻成任. 鄭相, 通德郞, 生重熙·重胤, 皆進士, 有一女,
壻鄭奎齊. 李震晟一男, 尹首孫二男, 弘遠又一男一女, 鄭重熙二男, 鄭重胤一男一女, 皆未長. 庶出
子女六人, 三子, 乃文·全文·會文, 三女, 郡守朴廷翔·監司元萬石·監牧李益常妾. 內外嫡庶子孫, 至
曾玄之世, 幷未長者, 百有餘人.

其銘曰, 矯矯虎臣, 公侯干城, 忠義之積, 萬夫之望, 百代之名.
崇禎紀元後 五十三年庚申 書, 五十八年 乙丑 四月 日立.

 

출처 : 시흥시 향토사료실,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시흥의 금석문-신도비명의 원문 표점. 번역-', 시흥역사문화총서2(동문인쇄출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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