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청주한씨 문익공파 묘역(한준겸)

달이선생 2019. 10. 21. 11:00

청주한씨 문익공파 묘역

 

  경기도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된 청주한씨 문익공파 묘역은 인조의 장인 한준겸(韓浚謙, 1557~1627)의 시호 문익(文翼)을 따서 그 직계로 아들 한회일, 손자 한이성, 증손자 한두상 묘 등 4대에 걸치 묘역이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 한준겸의 졸기이다.

 

영돈녕부사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이 졸하였다. 한준겸의 자는 익지(益之)이고 호는 유천(柳川)인데 청주인(淸州人)이다. 풍채가 뛰어나고 기량이 넓으므로 일찍부터 공보(公輔)의 촉망을 지니고 있었다. 일찍이 북방의 관찰사가 되어서는 먼저 《가례》《소학》을 간행하여 언서(諺書)로 번역하였고, 또 《의례》를 모방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제정하였으며, 외직으로 나가거나 내직으로 들어오거나 근면하였고 사방에 힘을 다했으므로 크게 사민(士民)들의 마음을 얻었다. 영남 안찰사(嶺南按察使)가 되어서는 정인홍(鄭仁弘)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순행(巡行) 중에 그의 문앞을 지나면서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는데, 마침내 그의 무리인 문홍도(文弘道)의 날조된 무함을 입어 파직되어 돌아왔다. 계축년 변란 때 역신 이이첨이, 선왕이 일곱 신하에게 유교(遺敎)를 내려 영창(永昌)을 보호하게 하였는데 한준겸도 그 속에 끼었다는 이유로 사형수 박응서(朴應犀)를 사주하여 상변하게 하여서 한준겸이 드디어 체포되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과 서로 친하지 않다고 변명하라고 권하였으나, 한준겸은 죽고 사는 것은 명이니 남을 팔아서 스스로 벗어나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국구(國舅)가 되어서는 더욱 근신하였는데, 그가 죽자 사람들은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領敦寧府事西平府院君 韓浚謙卒。 浚謙益之, 號柳川, 淸州人也。 風儀秀偉, 器量宏深, 早負公輔之望。 嘗按節北方, 先刊《家禮》《小學》, 翻以諺釋, 又倣《儀禮》, 作鄕飮酒、鄕射之禮。 出入勤勞, 宣力四方, 大得士民之心。 及按嶺南也, 惡鄭仁弘之爲人, 巡過其門, 一不通問, 竟爲其黨文弘道所搆捏, 罷還。 癸丑之變, 逆臣爾瞻, 以先王遺敎七臣, 保護永昌, 而浚謙亦在其中, 嗾死囚朴應犀上變, 浚謙遂被逮。 人勸其以與延興不相厚爲辭, 浚謙曰: "死生, 命也。 賣人自脫, 吾不爲也。" 及爲國舅, 益加謹愼, 及卒, 人皆惜之)-인조실록 16권, 인조 5년 7월 17일 신사 4번째기사 1627년

 

  한준겸의 업적으로 주목되는 것은 임난 후 국가재정이 어려워 명나라 사신 일행 접대를 책임지고 처리했던 일로 호조판서의 일인자로 평한 일이나 함경도감사로 나가아서 인심이 사납다는 선입견이 아닌 덕으로서 문화 정책을 펴서 함경도의 인심을 바꾼 일화 등에서 그의 품성을 알 수 있다.

  현재 그의 묘역은 시흥시에서도 가장 찾아가기 어려운 상태이다. 묘역이 위치한 곳이 영동고속도로 군자영업소에 위치하여 단절되어 있고 묘역 입구마저 철문으로 가로 막혀 성묘가 불가능하다. 더욱이 묘역에 이르는 길은 안내판이 잘되어 있으나 주변으로 환경업소인지 영세한 공장과 시설들이 어지럽게 자리잡고 있어 매우 수산하다. 여러 전후 사정은 알겠으나 경기도기념물까지 지정된 분묘인데, 철문과 철조망으로 묘역을 단절시켜 놓아 마음이 무겁다. 묘역 관리를 위해 어쩔 수 없지만 안타깝다. 묘역을 찾으려면 시흥시 향토사료실이나 종중에 허락을 받아 묘원에 들어갈 수 있다.

  묘 아래 기와집으로 지은 종손이 사는 종가(재실)와 사당 문익사(1999)가 있다.

  시흥시청 향토사료실의 협조로 2019년 11월 5일 10시에 묘역 2차 답사를 하였다. 그리고 3차로 11월 9일 15시 답사하여 한준겸 선생 신도비 구지를 확인하였다.

 

 

 

출처: 시흥시의 역사와 문화유적(기전문화재연구원, 2000)

 

 

 

 

 

 

 

 

 

 

 

 

 

 

 

 

 

 

 

 

 

 

 

 

 

 

 

 

 

 

 

 

 

 

 

 

 

 

 

 

 

 

 

 

 

 

 

 

 

 

 

 

 

 

 

 

 

 

 

 

출처 : 시흥시 향토사료실,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시흥의 금석문-신도비명의 원문 표점. 번역-', 시흥역사문화총서2(동문인쇄출판, 2010)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 시호 문익文翼 한공 신도비명


유명조선국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 겸 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문익
한공韓公 신도비명 및 서문
열심히 공부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이라 하고, 깊고 멀리 생각하는 것을 ‘익'이라고 한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이정구가 지음
보국숭록대부 행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 김상용이 전액篆額을 씀
가선대부 행연안도호부사 해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 오준이 씀

(領敦寧府事 西平府院君 謚文翼 韓公 神道碑銘
有明朝鮮國 輔國崇祿大夫 領敦寧府事 西平府院君 兼 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 贈謚文
翼 韓公 神道碑銘 幷序
勤學好問曰 ‘文’, 思慮深遠曰 ‘翼’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兼 領經筵事·監春秋館事 李廷龜撰
輔國崇祿大夫 行吏曹判書 兼 判義禁府事·知經筵事 金尙容篆
嘉善大夫 行延安都護府使 海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 吳竣書)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증시(贈諡) 문익(文翼) 한공(韓公) 신도비명 병서  

       
우리 동방의 세가(世家)와 명벌(名閥)로 국승(國乘)에 실려 있는 것은 분명히 보계(譜系)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혹 처음에는 융성했다가 마지막에는 쇠미한 경우가 있고 중도에 운수가 막혀 마침내 침체하고 만 경우도 있으니, 대대로 혁혁한 가업을 이어 세월이 오랠수록 더욱 창성한 경우로는 청주 한씨(淸州韓氏)가 으뜸이다.
란(蘭)이란 분이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하고 태위(太尉), 삼중대광(三重大匡)의 작위에 올랐고, 후대로 내려와 휘 강(康)에 이르러서는 유학(儒學)으로써 현달(顯達)하였고 충렬왕(忠烈王) 때 재상으로 중찬(中贊)이 되었으며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사기(謝奇)란 분은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이고, 악(渥)이란 분은 우정승(右政丞)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으로 시호는 사숙(思肅)이고, 공의(公義)라는 분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청성군(淸城君)으로, 시호는 평간(平簡)이고, 수(脩)라는 분은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인데 역시 공훈(功勳)으로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고, 상경(尙敬)이란 분은 영의정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으로 시호는 문간(文簡)이고, 혜(惠)란 분은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이고, 계희(繼禧)란 분은 좌찬성(左贊成) 서평군(西平君)으로 시호는 문정(文靖)이니, 모두 9대(代)에 걸쳐 경상(卿相)이 이어졌던 것이다.
이 뒤로 4대(代)는 벼슬은 비록 크게 높지는 못했으나 역시 모두 당대에 명망이 있는 분들이었다. 휘(諱) 사무(士武)는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증(贈) 좌찬성이고, 휘 승원(承元)은 정선 군수(旌善郡守) 증 좌찬성이고, 휘 여필(汝弼)은 중추부 경력(中樞府經歷) 증 영의정이다. 휘 효윤(孝胤)은 경술(經術)과 예학(禮學)으로 제공(諸公)들 사이에 추중(推重)을 받았고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재임 중에 세상을 떠났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니, 공은 그 셋째 아들이다.
공의 휘는 준겸(浚謙)이고 자는 익지(益之)이며 호는 유천(柳川)이다. 모친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태위(太尉)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의 후손이고 예빈시 정(禮賓寺正) 건(健)의 따님으로, 가정(嘉靖) 정사년(1557, 명종12)에 한성(漢城)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적부터 남달리 영특하여 6세에 글을 지을 수 있었고 그 문장이 곧잘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며, 나이 겨우 12, 3세에 종유(從遊)하는 이들은 모두 명사(名士)들이었다. 간혹 공이 지은 시문(詩文)이 사람들 사이에 많이 전송(傳誦)되었다.
기묘년(1579, 선조12)에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고 진사시(進士試)에서는 제칠인(第七人)으로 급제하였다. 초시(初試)에서는 모두 삼장(三場)에서 연이어 급제하였고 시(詩)와 의(疑) 모두 장원을 차지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경진년(1580, 선조13)에는 부친 의정공(議政公)의 상(喪)을 당하였고, 을유년(1585)에는 천거를 받아 태릉 참봉(泰陵參奉)에 제수되었다.
병술년(1586, 선조19)에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곧바로 사국(史局)의 관원으로 선발되어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옥당 남상(玉堂南床)으로 선임되었다. 선묘(宣廟)가 어제(御題)를 내어 유신(儒臣)들에게 시를 지어 바치게 하였는데 공이 수석을 차지하여 표범 가죽 요〔豹皮褥〕를 하사받았다. 이공 산해(李公山海)가 공을 자주 칭찬하면서 “훗날 문형(文衡)을 잡을 이는 반드시 이 사람이다.” 하였다. 그리고 또 어제시(御製詩)에 차운하여 바쳐 마장(馬粧)을 하사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서(注書)로 자리를 옮겼고, 다시 봉교(奉敎)가 되었다.
기축년(1589)에는 관례에 따라 전적(典籍)으로 승진하고 곧 외직으로 나가 금천 현감(衿川縣監)이 되었다. 이는 선묘가 정청(政廳)에 물어보아 공에게 노모가 있는 줄 알고 이 자리에 낙점(落點)한 것인데 중론(衆論)이 떠들썩하여 사람을 쓰는 것이 전도되었다고 정관(政官)을 탄핵하였다. 가을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겨울에 정여립(鄭汝立)의 역모가 발각되자 공은 이진길(李震吉)을 천거했다는 죄에 연좌되어 파직당하고 체포되었다가 달이 지나서야 석방되었으며, 백씨(伯氏) 참의공(參議公) 역시 곤장을 맞고 북쪽 변방에 유배되었다. 이에 사람들은 위태하다고 공을 걱정하였으나 정작 공은 태연한 모습으로 원주(原州)에 전답을 사서 이주하여 농사를 지었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서용(敍用)되어 예조 정랑(禮曹正郞), 강원 도사(江原都事),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를 역임하였고, 겨울에 원주 목사(原州牧使)에 제수되어서는 유랑하는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피폐한 민생을 구휼하니 고을이 이에 힘입어 소생하였다.
을미년(1595)에 지평(持平)으로 조정에 소환되어 필선(弼善), 정언(正言), 홍문관 교리, 겸필선(兼弼善)을 역임하였다.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상 성룡(柳相成龍)이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뽑아 양서(兩西) 지방을 순시하였다. 유상이 공의 재능을 깊이 인정하여 마치 평교(平交) 사이처럼 허물없이 친하게 대하였으며 군국(軍國)의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의 의견을 들어 결정하였다. 조정 의론이 공을 차서를 뛰어넘어 특별히 높은 자리에 기용하고자 하여 하루는 정관(政官)이 공을 부수찬(副修撰)에 의망(擬望)하였고 또 영남 방백(嶺南方伯)에 의망하였으니, 세상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리 겸 보덕(校理兼輔德)에 제수되었고 천거를 받아 의정부의 검상(檢詳)ㆍ사인(舍人)에 제수되었으며, 부응교(副應敎), 사간(司諫), 보덕, 집의 겸 승문원참교(執義兼承文院參校)를 역임, 자문(咨文)ㆍ게문(揭文) 등 외교 문서 작성을 맡았다.
정유년(1597, 선조30) 8월에는 전한(典翰)으로 있다가 특명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고,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당시 왜적이 호남과 기호 지방에까지 밀어닥쳐 명(明)나라 제독(提督) 마귀(麻貴)가 상(上)을 맞이하여 함께 도강(渡江)할 계획을 세우고서 지계(知計)가 있는 재신(宰臣) 한 사람을 먼저 보내어 건초와 군량을 준비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께서 즉시 명하여 공을 가게 하였다. 공은 적이 패하자 돌아와서 우승지(右承旨)로 승진하여서는 천조(天朝)와 같이 파발(擺撥)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 결과 변방으로 오고 가는 공문이 신속히 전달되어 지금도 사람들이 편리하다고 한다.
겨울에는 경기 감사로 승진하였고, 무술년(1598)에 사직 상소를 올려 체차되어 첨추(僉樞)가 되고 대사성(大司成)에 제수되었다.
기해년(1599)에는 외직으로 나가 경상 관찰사가 되었다. 당시 홍여순(洪汝諄) 등이 이미 유상(柳相)을 무함하여 탄핵하고 공도 함께 탄핵하려 하다가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었다. 공은 영남에 관찰사로 가서는 평소 정인홍(鄭仁弘)의 위인을 미워하던 터라 그의 집을 지나가면서도 들어가지 않았고 정인홍이 부탁하는 일도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정인홍이 크게 유감을 품고 그의 무리인 문홍도(文弘道)를 사주하여 터무니없는 죄명으로 무함하여 공을 파직시켰다.
경자년(1600, 선조33)에 서용(敍用)되어 병조 참판(兵曹參判),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官事)에 제수되었고, 신축년(1601)에는 사도 도체찰부사(四道都體察副使)를 겸임하였으며, 임인년(1602)에는 병조 참판으로 있다가 다시 외직으로 나가 전라 감사에 제수되었고, 계묘년(1603)에 사직 상소를 올려 체차되어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제수되었다. 당시 강역(疆域)에 우환이 많아 상이 누구를 원수(元帥)로 삼으면 좋겠느냐고 대신(大臣)에게 묻자 이상 덕형(李相德馨)이 “한모(韓某)가 직질(職秩)은 비록 낮지만 명망과 실력이 모두 높으니, 이보다 나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여, 마침내 사도 도원수(四道都元帥)에 제수되었으니, 가선대부(嘉善大夫)로서 원수(元帥)가 된 이는 국조(國朝)를 통틀어 공 한 사람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제수되었고, 갑진년(1604)에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체차되어 부제학(副提學),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제수되었다. 겨울에는 다시 이조참판 겸 우빈객(吏曹參判兼右賓客)에 제수되었다.
을사년(1605, 선조38)에는 호남과 영남에서 군사를 시찰하였고 출행(出行)할 무렵 이조 참판을 사직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고, 조정으로 소환하는 성지(聖旨)가 있고 내구마(內廏馬)를 하사받았다. 이에 누차 사직하여 체차되어 대사성, 부제학에 제수되었고,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특진(特進)하였다. 이때 마침 병오년(1606) 조사(詔使)가 왔는데 공은 국가의 재정(財政)에 적절히 맞추어 여유롭게 사행(使行)을 응접하였다. 대사헌 겸 동지경연사(大司憲兼同知經筵事)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 평안 감사에 제수되었다.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였고, 상기(喪期)가 끝나자 판윤(判尹), 대사헌, 함경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공은 함경도에 부임하자 개연(慨然)히 풍속 교화를 자임하여 나이 많은 사람에게 예(禮)를 갖추고 남다른 행실이 있는 사람을 표창하고 선비들을 장려 육성하는 것을 제도로 만들어서 백성을 권면하는 한편 《가례(家禮)》, 《소학(小學)》 및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제도를 간행하고 공문으로 각 고을에 부과하여 민간에 널리 반포하여 백성들이 읽도록 하니, 미개하던 지역이 일변하여 문교(文敎)의 고장이 되었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사수(死囚) 박응서(朴應犀)가 이이첨(李爾瞻)과 모의하고서 옥중(獄中)에서 고변(告變)하여 옥사(獄事)가 역옥(逆獄)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국구(國舅)인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을 사사(賜死)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강화(江華)에 수금(囚禁)하였는데, 초사(招辭)에서 사대부들까지 연루시켰다. 당초 선묘가 병환이 매우 위중할 때 광해가 골육을 해칠까 염려하여 수필(手筆)로 유교(遺敎)를 써 두었으니, 그 대략에 “사생(死生)은 운명이니 다시 무슨 말을 하리오. 다만 대군(大君)이 아직 어려 장성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마음에 걸릴 뿐이다. 내가 죽은 뒤 사람의 마음은 예측하기 어려운 법이니 만일 사설(邪說)이 있으면 제공(諸公)들은 대군을 애호(愛護)하고 부지(扶持)하라. 이 일을 부탁하노라.” 하고 표면에 공 등 일곱 사람의 이름을 써서는 봉(封)하여 궁중에 감추어 두었는데 제공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이첨이 유교를 위조된 것이라 하였고, 헌납(獻納) 유활(柳活) 등이 즉시 변명하지 않은 점을 들어 일곱 신하를 앞장서서 논죄(論罪)하였다. 이에 공도 사판(仕版)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협(鄭浹)이란 자가 흉도(凶徒)들의 유혹에 빠져 이름난 공경(公卿)들을 널리 죄에 끌어넣어 사람들이 체포되어 사방으로 축출되었다. 공도 체포되었는데 광해가 친국(親鞫)하여 정상을 물어보고는 즉시 전리(田里)로 방귀(放歸)하였다. 공은 연흥부원군과는 사이가 좋지 못하였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실도 있었다. 친국을 받을 무렵 친척이 공에게 사실대로 공초하라고 권하자 공은 “사생(死生)은 운명이다. 위급할 때 남을 팔아서 화를 모면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가 없다.” 하였다. 공은 석방되던 날로 즉시 호장(湖庄)으로 가서 백씨(伯氏) 참의공(參議公)과 이웃하여 살면서 서로 자주 내왕하여 경사(經史)를 토론하고 시주(詩酒)를 즐겼다. 흉도들이 찾아오려 하면 피하여 만나지 않았고 안부를 묻는 편지가 와도 답하지 않았으니, 소인을 대하는 것이 이처럼 엄격하였다.
이이첨의 무리가 모후(母后)를 폐위하고자 하여 연흥부원군을 추후(追後)하여 죽이고 시체를 저자에 전시하였으며, 정사년(1617, 광해군9)에는 다시 일곱 신하들을 찬축(竄逐)할 것을 논의하여 공을 충원(忠原)에 부처(付處)하였다. 공은 작은 띳집을 짓고 5년 동안 적소(謫所)에서 살면서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신유년(1621, 광해군13)에는 여주(驪州)로 양이(量移)되었다. 노적(奴賊)이 요광(遼廣)을 함락하고 동쪽으로 침공해 올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중외(中外)가 흉흉하였다. 이에 원수(元帥)를 보내려 하는데 적임자를 찾기 어려워 비국(備局) 회의에서 ‘한모(韓某)가 아니면 안 된다.’ 하여 마침내 적소에서 서용(敍用)되어 지중추부사 겸 오도도원수(知中樞府事兼五道都元帥)에 제수되었다. 오랜 화난(禍難)을 겪은 상황에서 공은 애써 소명(召命)에 나아갔으나 시사(時事)는 손쓸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공은 소장을 올려 체면(遞免)을 청하였으나 광해가 “대한(大寒)에 갖옷을 찾는다.”라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겨울에 적이 임반(林畔)에 이르렀기에 공은 과거의 부대를 수습하고 질주하여 서쪽으로 가서 중화(中和)에 원수부(元帥府)를 차렸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에 우리 성상이 거의(擧義)하여 반정(反正)하고 중궁 전하(中宮殿下)가 곤위(坤位)에 오르게 되자 공은 승진하여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제수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국구(國舅)는 존귀한 신분이니 외직에 있게 해서는 안 된다 하여 공을 조정으로 소환하였다. 공은 명을 받고 몸 둘 바를 몰라 침식(寢食)이 편안치 않았다. 이어 공을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하여 도성에 머물게 하였다. 공은 중전(中殿)의 사친(私親)으로서 군국(軍國)의 일을 간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이유로 누차 사직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갑자년(1624)에 역적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키자 공은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남쪽으로 피난하였고, 이괄이 주벌되자 어가를 호종하여 환도(還都)하였다. 그리고 겸 지춘추관사에 제수되어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공은 힘써 사양하고 배수(拜受)하지 않았으며, 도체찰사와 도총관도 사직 상소를 올려 체차되었다.
정묘년(1627, 인조5) 노적(奴賊)의 변란 때 공은 배위 대장(陪衛大將)으로서 왕세자(王世子)의 분조(分朝)를 따라 남하(南下)하였다. 전주(全州)에 이르러 무군사 당상(撫軍司堂上)이 되어 세자를 보호하고 제반 일을 조처하니 군민(軍民)이 크게 기뻐하였다. 적이 퇴각하자 분조를 모시고 행재(行在)와 회합하여 도성으로 돌아와서는 병세가 심하여 자제를 불러 계초(啓草)를 쓰게 하여 장차 유표(遺表)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미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누운 자리를 바르게 하고 청사(廳事)로 옮기게 한 다음 숨을 거두니, 7월 17일이었고 춘추는 71세였다.
부음이 들리자 성상이 크게 슬퍼하여 사흘 동안 철조(輟朝)하였으며, 중사(中使)를 보내 상사(喪事)를 보살피게 하였다. 왕세자는 즉일(卽日)로 거애(擧哀)하였으며, 장사(葬事)에 직접 가서 조문하였다. 경사(卿士)부터 금부(禁府) 군사, 저자 백성, 서리(胥吏), 하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달려와서 울며 “선인(善人)이 돌아갔으니, 나라는 어찌하란 말인가.” 하였으며, 조문 온 사람들은 모두 매우 슬피 곡(哭)하였다. 회장(會葬)한 사람은 300여 명이었다. 그해 9월 임오일에 원주(原州) 음지촌(陰枝村) 경향(庚向)의 둔덕에 안장하였다. 태상(太常)에서 의논하여 문익공(文翼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부인(夫人) 황씨(黃氏)는 창원(昌原)의 망족(望族)으로, 집안에 대대로 벼슬이 이어졌다. 부친 휘 성(珹)은 예조 좌랑(禮曹佐郞) 증 이조 참판(吏曹參判)이며, 고원 군수(高原郡守) 이공 고(李公臯)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신유년(1561, 명종16)에 부인을 낳았다. 부인은 나이 14세에 공에게 시집왔는데 단정하고 현숙(賢淑)하여 시부모의 사랑을 받았으며, 집안을 다스리고 음식을 장만함에 모두 법식이 있었다. 공은, 집안은 본래 가난하여 조석(朝夕)의 양식을 빌려야 할 형편이었으나 제사와 주식(酒食)을 차림에 있어 군색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나이 34세에 원주목(原州牧)의 관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후일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고 회산부부인(檜山府夫人)에 진봉(進封)되었다.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장남은 회일(會一)로 남양 부사(南陽府使)이며, 판서(判書) 이성중(李誠中)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2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이성(以成), 이평(以平)이고, 딸은 사인(士人) 신익륭(申翊隆), 정하(鄭何)에게 출가하였다. 나머지는 어리다.
둘째는 소일(昭一)로 영준하였으나 요절하였다.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1녀를 낳았으나 역시 요절하였다.
장녀는 종부시 정(宗簿寺正) 이유연(李幼淵)에게 출가하여 1녀를 낳았는데 별좌(別坐) 안헌규(安獻規)에게 출가하였다.
둘째는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 여이징(呂爾徵)에게 출가하였다.
셋째는 대사간(大司諫) 정백창(鄭百昌)에게 출가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선흥(善興)이고, 딸은 어리다.
넷째는 바로 우리 중궁 전하로, 원자(元子)를 탄생하셨다. 원자는 동궁(東宮)에 계시고, 둘째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이다. 다음은 요(㴭)와 곤(滾)인데 아직 출합(出閤)하지 않았다.
측실(側室)에 2녀를 두었다. 허통(許通) 이환(李煥)과 진원부수(珍原副守) 이세완(李世完)이 사위이다.
이성은 전적(典籍) 안홍량(安弘量)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1남을 낳았다. 신익륭은 2남 1녀를 낳았고, 정하는 2남을 낳았고, 안규헌은 3남 1녀를 낳았고, 이환은 1녀를 낳았고, 이세완은 1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용모가 준수하고 기운이 충실하였으며 자질이 좋고 재능이 뛰어났으며 성품이 관대하고도 엄중하였으며, 행실이 독실하고도 우아하여, 바라보면 대덕군자(大德君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소에는 빠른 말이나 급한 기색이 없고 거동이 무겁고 느긋하여 항상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듯하였으나 사람을 접할 때에는 온통 화기(和氣)로 가득하였다. 남의 과실(過失)을 들으면 언짢아하였으나 아무리 노여워할 만한 일이라도 겉으로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혹 일부러 격발시켜 보아도 그저 웃을 뿐 성내지 않았다. 북방에서 체포되어 올 때 금오랑(金吾郞)이 적신(賊臣)의 지시를 받고 갖은 방법으로 공을 능욕하였으나 공은 더욱 공손히 그를 대하였으며, 자제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어 감히 원망하는 말을 하지 말도록 하였다. 후일에 그 금오랑의 이름을 묻는 이가 있었으나 공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공은 유학(儒學)과 서책을 좋아하였으며 특히 예학(禮學)을 매우 좋아하였다. 박문강기(博聞强記)하여 책을 볼 때면 몇 줄씩 한꺼번에 읽어 내려갔으며 한번 본 것은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국가의 고사(故事)에 매우 밝아 문헌과 전장(典章)의 손익(損益)과 연혁을 낱낱이 꿰뚫어 알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조정에서 무릇 일이 있을 때면 반드시 공에게 질정(質正)하였다.
효우(孝友)와 돈목(敦睦)이 천성에서 나와 일찍부터 백씨(伯氏) 참의공(參議公)과 더불어 가정의 훈육을 받으며 자라 한집안에 늘 학문을 토론하는 사우(師友)의 즐거움이 있었다. 대부인(大夫人)을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비록 환난(患難)과 빈궁 속에서도 반드시 힘을 다하여 좋은 음식을 장만해 올렸다. 공이 큰 고을 번진(藩鎭)들을 두루 맡고 참의공이 연이어 큰 고을 수령을 맡을 때에는 번갈아 대부인을 모셔서 온갖 즐거운 영화를 다 누리게 해 드렸다. 매번 수연(壽宴) 때면 대부인은 풍악을 울리지 못하게 하고 단지 감군은(感君恩)만 연주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그 가사를 부연하여 속곡(續曲)을 지어 바쳤다. 또 조정 사대부들과 수친계(壽親契)를 결성하여 시절마다 축수의 술잔을 올리니, 선묘가 특별히 술과 음악을 하사하여 영화롭게 하였으며 귀근(歸覲)할 때는 반드시 약물(藥物)을 하사하였다. 공은 중씨(仲氏)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자매가 많이 죽은 것을 늘 슬퍼하여 고자(孤子)들을 자기 자식보다 더 잘 보살펴 주었다. 참의공과는 반평생 동안 함께 살면서 상체(常棣)의 즐거움이 늙을 때까지 한결같았다.
공은 신의가 매우 두텁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궁핍한 친지들이 모두 공의 도움을 받았다. 또 동종회(同宗會)를 만들어 소목(昭穆)의 차서를 밝혔다. 청주(淸州)에 태위(太尉)의 구리(舊里)가 있었는데 백씨(伯氏)가 이 고을에 목사로 재임할 때 공이 백씨와 의논하여 제단을 쌓아 제사하고 비석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는 한편 송추(松楸) 아래 작은 서재를 짓고 귀래(歸來)라는 편액을 걸었으니, 공의 평소의 뜻이 담긴 것이었다.
공의 문장은 평포섬창(平鋪贍暢 서술이 평이하고 문사(文史)가 넉넉하며 시원스러움)하여 화려한 수사를 일삼지 않았으며, 시는 또 주일(遒逸)한 멋이 있고 과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수록한 것이 많지 않으니, 애석하다.
아, 공의 문장과 행의(行誼)로 선묘의 지우(知遇)를 입어 당대의 경국제세(經國濟世)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서 조정에 들어와서는 경악(經幄)에서 논사(論思)의 일을 맡았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사방에 힘을 폈다. 그리하여 그 위망이 높고 무거우며 그 치적이 크게 드러났으니, 여기서 공이 이룩한 사업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누차 화망(禍網)에 걸렸으나 수심에 잠기지 않았고 적소(謫所)에서 기용되어 원수(元帥)가 되었으나 교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뜻하지 않은 일을 만나도 평소와 같이 태연하였고 문득 생각을 거두어들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하였으니, 진퇴 영욕으로 공의 심천(深淺)을 엿볼 수 있겠는가. 몸이 궁부(宮府)를 통솔하고 지위가 백료(百僚)의 으뜸이었으나 집안에는 시렁 하나 더 늘리지 않았고 노비 한 사람 더 들이지 않아 공검(恭儉)한 지조가 만년에 이르러서도 더욱 독실하였으나 이는 공의 작은 행실일 뿐이다. 부귀의 밖에서 초연히 거닐며 입으로는 시사(時事)를 절대 말하지 않았으며 사류(士類)를 도와서 부지해 주고 간신들을 막아서 물리침으로써 군자는 든든히 믿는 곳이 있고 소인은 감히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하여 국가의 화평(和平)의 복을 이루었으니, 여기서 공의 큰 업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공과 문주(文酒)로 사귄 지가 40여 년인데 한 번도 방만한 기색을 본 적이 없고 한 번도 시기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으니, 공은 참으로 장자(長者)이다.
장사를 지내고 이듬해에 공의 윤자(胤子) 남양공(南陽公)이 대사간 정공 백창(鄭公百昌)이 지은 행장을 나에게 가지고 와서 눈물을 흘리며 “선공(先公)께서 평소 그대를 중히 여기셨고 대부인의 묘지명(墓誌銘)도 그대가 지었으니, 이제 비석을 다듬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이는 선공(先公)의 뜻이니, 그대는 끝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무릇 서너 차례 나의 집에 찾아와 더욱 지성스럽게 부탁하였다. 이에 삼가 정공이 지은 행장과 보계(譜系)에 근거하여 초년에 기반을 잡고 중년에 성대한 업적을 이루고 만년에 은택을 베푼 것을 이상과 같이 기술하고 공의 덕업(德業)이 선열(先烈)보다 더욱 크다는 것을 또 이상과 같이 기술하는 바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유서가 오랜 이 문벌이여 / 遠矣華胄
태위께서 그 기반 이루시어 / 太尉業之
덕업을 쌓아 멀리 퍼졌도다 / 旣積而播
그 훌륭한 덕망과 지위를 / 惟德與位
대대로 후손들이 이어받아 / 世趾其美
공에 이르러 더욱 커졌어라 / 至公益大
우리 공의 재능이야말로 / 我公之才
실로 하늘이 내려 주신 것 / 天實生之
세상에 크게 쓰기 위해서이지 / 將以厚用
이에 공은 포의 시절부터 / 爰自布衣
재상의 재목으로 기대하여 / 期以公輔
하인들조차 공의 이름 외웠네 / 走卒皆誦
바다처럼 큰 포용력이요 / 如海之涵
봄기운처럼 온화한 인품 / 如春之和
봉황과 같은 풍모였어라 / 如鳳之儀
훌륭한 천품을 타고났고 / 旣畀全德
항상 무거운 명망 지녔으니 / 恒持重望
복록이 늘 공을 따랐어라 / 福祿隨之
우리 선묘를 보필하여 / 翊我宣廟
조정에 상서로운 빛 되어 / 爲瑞于朝
국가의 큰 문서를 윤색했고 / 潤色鴻猷
가정에 상서로운 기운 어려 / 爲祥于家
임사와 같은 따님을 낳아 / 篤降姙姒
무궁한 복과 경사를 열었도다 / 啓無疆休
오직 예를 지켰고 / 惟禮是服
오직 인재를 아꼈으니 / 惟才是惜
이는 선을 좋아하는 정성 / 好善之誠
경국제세의 그 기량을 / 經濟之手
잠시 발휘하다 길이 막혀 / 暫試而窒
십 년 동안 간난 속에 살았네 / 十載艱貞
일월이 다시 밝게 빛나고 / 日月重明
풍뢰가 천지를 뒤흔들어도 / 風雷震盪
공은 태산처럼 우뚝하였어라 / 公屹如山
군대를 두고 조정에 돌아오니 / 釋師歸朝
출장입상의 큰 인물이라 / 將歟相歟
만인이 우러러보았도다 / 萬人環之
그럴수록 공은 더욱 겸손해 / 公愈斂退
권세를 더러운 물건처럼 피해 / 避權若浼
그저 담박한 생활의 한사였어라 / 淡然寒士
집안으로부터 나라로 이어져 / 自家而國
곤전(坤殿)의 덕화 크게 펼쳐지니 / 坤化丕行
〈관저〉와 〈인지〉의 경사 열렸도다 / 關雎麟趾
아, 공의 덕업은 / 嗟公之業
어찌 전대보다 빛날 뿐이랴 / 奚但光前
그 은택이 백성에 끼쳐졌느니 / 澤在斯民
공은 하늘로 돌아갔으나 / 公歸于天
나의 시는 비석에 남았으니 / 我詩于石
어둡지 않은 정신 영원하리라 / 不昧精神

 

西平府院君贈諡文翼韓公神道碑銘 幷序      

吾東方世家名閥載於國乘者。斑斑可譜。然或始盛而終衰。中窒而遂不振。至於世繼赫業。彌久而彌昌者。則淸之韓爲最。其曰蘭佐。麗祖統合三韓。位太尉三重大匡。傳至諱康。用儒術顯。相忠烈王爲中贊。諡文惠。曰謝奇。寶文閣提學。曰渥。右政丞上黨府院君。諡思肅。曰公義。政堂文學淸城君。諡平簡。曰脩。右文館大提學。亦以勳封淸城君。諡文敬。曰尙敬。領議政西原府院君。諡文簡。曰惠。咸吉道觀察使。曰繼禧。左贊成西平君。諡文靖。蓋九代連爲卿相。是後四代。官雖不大顯。亦皆聞人。諱士武。漢城府判官贈左參贊。諱承元。旌善郡守贈左贊成。諱汝弼。中樞府經歷贈領議政。諱孝胤。以經術禮學重諸公間。卒官鏡城判官贈領議政。公其第三子也。諱浚謙。字益之。號柳川。妣平山申氏。太尉壯節公崇謙之後。禮賓正健之女。以嘉靖丁巳。生公於漢城之第。岐嶷夙成。六歲。能屬文。出語驚人。甫十二三。所與遊皆名勝。間有吟述。人多傳誦。己卯。生員壯元。進士第七。其發解也。俱捷三場。而詩疑亦居魁。華譽籍甚。庚辰。遭議政公憂。乙酉。薦授泰陵參奉。丙戌。登第。卽選史局爲檢閱。尋錄玉堂南床。宣廟出御題。命儒臣製進。公居首。賜豹皮褥。李公山海亟稱之曰。他日秉文衡者。必此人也。又次御製詩以進。賜馬粧。俄遷注書。還奉敎。己丑。例陞典籍。卽出補衿川縣監。宣廟。詢于政廳。知公有老母。乃點下。群議譁然。以用人顚倒劾政官。秋。賜暇書堂。冬。汝立謀逆事覺。公坐薦李震吉。論罷被逮。經月得釋。伯氏參議公。亦杖配北塞。人皆爲公危之。而公處之怡然。買田原州。移家就農。壬辰。敍拜禮曹正郞,江原都事,侍講院司書,冬。拜原州牧使。招集流亡。賑撫疲羸。一境賴之。乙未。以持平召。移弼善,正言,弘文館校理。兼弼善。都體察使柳相成龍辟公從事。出巡兩西。柳相器重公。契許如平交。有軍國大事。須公參決。廷議方欲不次用公。一日。政擬副修撰。又擬嶺南方伯。世所僅見也。俄拜校理。兼輔德。薦拜議政府檢詳,舍人。歷副應敎,司諫,輔德,執義。兼承文院參校。掌撰咨揭文書。丁酉八月。自典翰特拜同副承旨。陞至左副。時賊迫湖畿。天朝提督麻貴邀上竝馬渡江。請遣有智計宰臣一人。先往備芻糧。上卽命公往。賊敗乃還。陞右承旨。建請依天朝設擺撥。邊書疾傳。至今稱便。冬。陞拜京畿監司。戊戌。辭遞。爲僉樞。拜大司成。己亥。出爲慶尙觀察使。時洪汝諄等旣構劾柳相。欲幷及公。未有以發也。及公按嶺南。素惡鄭仁弘爲人。過其門不入。有所托亦不施。仁弘大憾。嗾其徒文弘道。構捏論罷。庚子。敍拜兵曹參判,同知春秋館事。辛丑。兼四道都體察副使。壬寅。復自兵曹參判。出拜全羅監司。癸卯。辭遞。授禮曹參判。時疆域多虞。上謀元帥於大臣李相德馨曰。韓某職秩雖卑。望實俱優。無踰於此人。遂拜四道都元帥。嘉善,元帥。國朝一人云。仍拜弘文館副提學。甲辰。移吏曹參判。遞授副提學,工曹參判。冬。復拜吏曹參判。兼右賓客。乙巳。視師于湖嶺。將行乞解銓。不許。有旨召還。賜內廏馬。屢辭得遞。拜大司成,副提學。特陞戶曹判書。値丙午詔使之行。能調度贏詘。接應有裕。歷大司憲。兼同知經筵事。出拜平安監司。戊申。丁大夫人憂。制除。拜判尹,大司憲,咸鏡道觀察使。下車之初。慨然以風化自任。禮高年旌異行。誘掖士子。設爲程式。以興勸刊家禮,小學。冠婚喪祭之制。課以方書。廣布閭巷。俾民誦讀。天荒之域。一變文敎。癸丑。死囚朴應犀與爾瞻謀。從獄中上變。獄飜爲逆。遂殺國舅延興府院君金悌男。囚永昌大君于江華。辭連薦紳。初宣廟疾大漸。慮光海不克保骨肉。乃手書遺敎略曰。死生有命。夫復何言。但大君幼稚。未及見長成。以此耿耿耳。我不幸後。人心難測。萬有邪說。願諸公愛護扶持。敢以此托之。外面書公等七人名。封置宮中。諸公莫之知也。至是爾瞻謂遺敎爲矯誣。獻納柳活等。先論七臣。不卽辨明。公亦削仕版。俄有鄭浹者受凶徒陰訹。廣引名公卿。逮捕四出。公又被收。光海親鞫問狀。卽放歸田里。公與延興素不相能。有事可證。臨鞫。親戚勸公供實。公曰。死生命也。急難之際。賣人而圖免。吾不忍爲。蒙釋之日。卽出湖莊。與伯氏參議公分山而居。杖屢來往。討閱經史。詩酒爲樂。兇徒欲來訪。避之不見。有候問亦不答。其待小人之嚴如此。爾瞻輩欲遂廢母后。追戮延興。屍陳諸市。丁巳。復論竄七臣。公付處忠原。葺茅爲數椽。居謫五年。不出戶庭。辛酉。量移驪州。奴賊陷遼廣。聲言東搶。中外洶洶。將出元帥而難其人。備局會推以爲非韓某不可。遂自謫所。敍拜知中樞府事。兼五道都元帥。積禍之餘。黽勉赴召。而時事無可爲者矣。公拜疏乞免。光海以大寒索裘爲批。冬。賊至林畔。公收拾舊部伍。疾驅而西。開府中和。癸亥。我聖上擧義反正。中宮殿下正位坤極。進拜公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西平府院君。朝議以國舅禮尊。不宜居外。召公還。公承命踧踖。寢食不寧。兼留都都體察使。公以椒親不當與軍國事屢辭。不允。甲子逆适稱兵。公扈駕南遷。适誅扈還。兼知春秋。同修光海日記。力辭不拜。又辭遞都體察使都摠管。丁卯奴賊之變。公以陪衛大將。從王世子分朝南下。至全州爲撫軍司堂上。調護施設。軍民大悅。賊退。奉分朝會行在還京。疾甚。公召子弟書啓草。若將有遺表。而已不能言矣。猶使正席遷廳事遂卒。七月十七日也。春秋七十一。訃聞。上震悼。輟朝三日。遣中使庀喪事。王世子卽日擧哀。比葬臨弔。自卿士以至禁旅市民胥吏僕隷。莫不奔走涕泣曰。善人亡矣。國其如何。來弔者哭之皆哀甚。會窆者三百餘人。其年九月壬午。葬原州陰枝村庚向之原。太常議易名之典。贈諡曰文翼公。夫人黃氏。昌原望族。世有衣冠。考諱珹。禮曹左郞贈吏曹參判。娶高原郡守李公皐女。生夫人於辛酉。年十四歸公。端莊淑哲。舅姑愛之。治家主饋。咸有法式。公家素貧。朝夕假貸。而蘋蘩酒食之供。未嘗見窶色。年三十四。卒于原州牧衙。後贈貞夫人。進封檜山府夫人。擧二男四女。男長曰會一。南陽府使。娶判書李誠中女。生二男三女。男以成,以平。女適士人申翊隆,鄭何。餘幼。曰昭一。秀而夭。娶領議政柳永慶女。生一女。亦夭。女長適宗簿寺正李幼淵。生一女。適別坐安獻規。次適侍講院輔德呂爾徵。次適大司諫鄭百昌。生一男一女。男曰善興。女幼。次卽我中宮殿下。載誕元良。尊居儲貳。次曰鳳林大君。曰㴭,曰滾。時未出閤。側室有二女。許通李煥,珍原副守世完。其壻也。以成娶典籍安弘量女。生一男。申翊隆二男一女。鄭何二男。安獻規三男一女。煥一女。世完一男。皆幼。公貌秀而氣完。質厚而材良。寛平而嚴重。篤實而華雅。望之知爲大德君子。平居無疾言遽色。擧止凝遠。恒若有所籌度。接物渾是一團和氣。聞人過輒不樂。事雖可怒。不形於色辭。人或故激之。亦笑而不嗔。其被逮自北來也。金吾郞承賊臣指。窘辱備至。公待之益恭。飭子弟無敢怨言。後有問其名者終不言。嗜儒敦書。尤好禮學。博聞強記。觀書數行俱下。一經眼終身不忘。明習國家故事。文獻典章。損益沿革。靡不貫穿。以故朝廷凡有事。必就質於公。孝友敦睦。出於至性。早與伯氏參議公受庭訓。一家之內。恒有師友講劘之樂事。大夫人色養無方。雖在患難貧約。必盡脂瀡之供。逮公歷鎭雄藩。參議公連宰鉅邑。迭奉板輿。極繁華娛樂之榮。每壽席。大夫人輒止衆樂。使奏感君恩。公演其辭爲續曲以進。又與朝中士大夫作壽親契。時節稱觴上壽。宣廟特賜酒樂以榮之。其歸覲也。必賜藥物。公每慟仲氏早逝。姊妹多沒。撫諸孤逾己出。與參議公半世同居。棠棣之樂。至老如一日。重然諾好賑施。戚故之。窮乏者。咸取足焉。設同宗會。以明昭穆之序。淸州有太尉舊里。伯氏牧是州。公議於伯氏。築壇以祭。立石記之。嘗築小齋於松楸下。扁之曰歸來。蓋其雅志也。爲文。平鋪贍暢。不事浮靡。詩又遒逸有趣。不喜夸詡。故收錄不多。惜矣。噫。公以交章行誼。遇知宣廟。負一時經濟之望。入而論思經幄。出而宣力四方。風猷顯重。績庸茂著。此可以觀公之業歟。屢遭禍網。不以爲慼。起謫所登將壇。不以爲泰。卒遇之若素。忽斂之如寂。其可以進退榮辱窺公淺深哉。身都宮府。位絶百僚。而宅不廣一架。奴婢之籍。不增一人。恭儉之操。晚而益篤。此亦公之細行也。超然富貴之外。絶口不道時事。扶植士類。遏絶姦倖。使君子有所恃。小人不敢私。致國家和平之福。此可以觀公之大歟。余與公文酒游從四十餘年矣。一未見暴慢之色。一未聞忮害之言。公眞長者矣。旣葬之明年。公之胤南陽公。以大司諫鄭公百昌之狀。泣而叩余曰。先公雅重子。大夫人幽墟之石。子實銘之。今謹治石以竢。此蓋先志也。願子之終惠也。凡往返三四請益勤。則謹就鄭公之狀若譜。得其所以基于初盛于中施于後者如是。而公之德業有以光大先烈者又如是也。銘曰。
 
 추기
서평부원군 문익 한공의 산소는 본래 원주에 있었다. 그 후 자손이 영락하자 지사地師가 땅이
불리하니 옮기라 하여 얼마 후 공의 사자嗣子 좌윤공 회일이 숭정 병자년(1636) 여름 5월 17일에
안산安山 대월리大月里 북동쪽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그 신도비는 바로 좌의정 이정구李廷龜 공이 지
은 것으로 당시는 성상께서 봉림대군으로 아직 임금자리에 나가지 못하였을 때이니, 어휘御諱가
현각顯刻되어 있었다. 그 후 보위에 오르셨으나 예전에 새긴 것을 고칠 수는 없는 일이니, 어휘는
마땅히 해와 달과 함께 항상 선명할 것이다. 이 어찌 한씨 가문의 광명일 뿐이겠는가?
비석을 원주에서 안산으로 옮긴 지도 벌써 17년이 되었는데, 좌윤공이 세상을 뜨니, 세월만 보
내고 비를 세우지 못하였다. 임진년(1652) 봄에 성상께서 내수사에 특명을 내려 내탕고 재물을 풀
어 일꾼들을 모집하여 묘도의 남쪽에 중건하니, 이수 귀부로 새로운 언덕에 높다랗게 세웠다. 신
명이 보호하고 길손도 공경하니, 가히 보기 드문 성사이다.
처음에 인조대왕께서는 안산의 길지를 내려 공의 묘소를 옮겨 천만대 굳건할 수 있게 하셨고,
금상께서는 비석을 다시 세워 천만대 허물어지지 않도록 하셨다. 두 분 성상께서 한마음으로 한
씨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융성함과 도타움이 전후에 망극한데, 이러한 이야기는 천지와 더불어
장구히 전해질 것이다. 아! 아름답구나!
공의 대가 끊기니, 종증손 두상斗相을 양자로 들여 공의 제사를 받들게 하니, 두상 또한 아들이
있어 성덕의 봉사가 이어지게 되었다. 반드시 보답이 있다는 이치에 어찌 속임이 있으리오. 두상
이 일을 마치고 마음에 편치 않은 바가 있어 나에게 후기를 부탁하니, 선의先懿를 현양하는 데에
는 가히 유감이 없다 하겠다.
가선대부 전행홍문관 부제학 이민구가 삼가 씀
정헌대부 예조 판서 오준이 글씨를 씀
임진년(1652) 6월 일에 다시 세움
 
西平府院君文翼韓公之葬, 舊在原州. 其後, 子姓零替, 堪輿家言 “其地不利, 移”. 久, 嗣子左尹
公 會一, 用崇禎丙子夏五月十七日, 奉遷于安山大月里坐艮原. 其神道碑銘, 即左議政李公廷龜撰,
時則聖上以鳳林大君, 未宅儲位, 于御諱, 實在顯刻. 逮至以命德當陽, 而舊刻不可以改, 則當與日
月常鮮. 奚但韓氏私門光耀而巳.
碑自原 移安, 亦十有七年, 以左尹公中沒, 綿歷歲時, 不克竪立. 壬辰春, 聖上特命內需司, 發帑
藏, 募工徒, 重建於墓隧之南, 龍纏龜戴岌嶪於新阡. 陰祇呵護, 行路矜式, 可謂希覲盛事.
始仁祖大王 賜安山吉地, 俾遷公藏, 以爲千萬代永固之域, 今聖上再樹豐碑, 以爲千萬代不朽之
圖. 二聖一心, 惠于韓氏, 隆施厚渥, 前後無涯, 永垂列聞, 與天地久長. 鳴呼! 休哉!
公世旣絶, 取從曾孫斗相, 以奉公蒸甞, 而斗相亦有嗣息, 盛德之祀, 迓續以延. 必復之理, 其不
可誣. 斗相承事不寧, 謁余文以爲後記, 於顯揚先懿, 可謂無憾矣.
嘉善大夫 前行弘文館副提學 李敏求謹識
正憲大夫 禮曹判書 吳竣書
壬辰六月 日 重建
 
 
신도비 동영상

 

 

 

 

 

  한준겸의 묘소가 원주에 있다가 인조가 사패하여 시흥시 거모동에 자리잡고 옮겨와 바로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고 1652년(효종3) 한준겸의 외손이 되는 효종이 내수사의 내탕금을 내어 중건하였다. 귀부이수 양식을 갖춘 신도비는 총높이 약 446cm, 귀부길이 403cm, 비신높이 255c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로 귀두는 정면을 향하고 있고 네 발은 당장이라고 뛰쳐나갈 수 있듯이 생동감있게 조각되었다. 또한 꼬리는 왼쪽으로 말아 올리고, 귀갑으로 둘러싼 등에는 하엽좌대를 마련하여 비신을 세워 놓았다. 이수의 앞면에는 쌍룡쟁주를 뒷면에는 단룡롱주를 장식하였는데, 문양이 화려하고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효종이 직접 역사를 일으키고 당대의 이름난 공장을 불러 조성한 만큼, 조선중기를 대표할 만한 우수한 신도비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전체적인 규모나 느낌이 시흥시 조남동 장군재 마을에 있는 효종의 국구 신풍부원군 장유 선생의 신도비와 유사하며, 웅장하다. 당대 한문사대가 월사 이정구가 짓고, 연안도호부사 오준이 썼다. 전액은 이조판서 김상용(장유의 장인)이 올렸다. 

  지금의 자리는 1995년 서해안고속도로 공사로 인해서 한준겸 묘소 좌측으로 이건한 것으로 그 이건 기록을 비로 남겼다.

  현재 이건된 구지에 초석이 남아있다. 실록에 의하면 이건된 옛 자리는 1769년(영조45) 왕명으로 세운 신도비각이 위치한 곳으로 이후 비각이 기울자 1791년(정조15)에 경기감사가 다시 보수하였다. 비각은 1995년에 새로 세운것이다.

 

출처: 시흥시의 역사와 문화유적(기전문화재연구원, 2000)

 

 

 

 

 

 

 

 

 

 

 

 

 

 

 

 

 

 

한준겸 묘 동영상

 

 

 

 

아들 한회일 묘(한준겸 묘 좌측 아래)

 

 

 

 

 

 

손자 한이성 묘(한준겸 묘 우측 위)

 

 

 

 

 

 

 

증손자 한두상 묘(한준겸 묘 아래)

  증손자 한두상은 한준겸의 손자 생원 한이성(1606~1634)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 생부는 안성군수 한익명(韓翼明)이다. 인조는 한이성이 후사 없이 요절하자 국구의 종사가 끊기려 함을 염려하여 적당한 사람을 골라 제사를 받들게 하라고 하명하여 한씨 문중에서 한두상을 데려다가 어명을 받들었다. 진사시에 합격한 뒤 돈녕부도정에 이르렀다. 

  한준겸 묘 바로 아래 위치한다. 문인석, 망주석, 혼유석, 상석, 향로석, 고석의 옛 석물을 갖추었다. 특히 문인석은 팔소매의 윗부분이 여러번 겹쳐져 주름진 특징이 있다. 

 

 

 

 

 

 

 

 

 

 

 
종손 한걸택 가옥(재실)과 문익사(사당)

 

 

 

 

 

  한준겸의 종택은 원래 99칸의 대저택으로 당시 주변에 약 130호의 마을이 있어 주민 대부분이 이 집의 소작을 하거나 산을 빌려 땔감을 얻을 정도로 부유하였다. 그러나 현 소유자인 한걸택의 조부 대에 점차 가세가 줄어 즐비하였던 건물들이 다 헐어지고 서편 일곽에 있던 가옥만 남아있다가 현재의 모습의 다시 지었다. 종택은 재실도 겸하고 있고, 종택을 지으면서 한준겸의 사당인 문익사도 중건하였다. 종택 뒤로 사당이 있고 그 위로 신도비 구지, 고속도로 건너 구릉에 묘역이 위치한다.

출처: 시흥시의 역사와 문화유적(기전문화재연구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