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자신 선생 묘 및 신도비, 그리고 영모재
영화 '광해'로 잘 알려진 광해군의 국구(임금의 장인) 류자신의 묘가 있다. 류자신의 셋째딸이 광해군의 비가 되는 문성군부인 류씨이다. 문화류씨의 선영 아래로는 시흥시에서는 가장 오래된 가옥인 재실 영모재가 위치한다. 그리고 영모재공원 동쪽 끝자락 산 아래 문명성, 조덕준 자선비와 낭정호 송덕비가 위치한다.
류자신 묘가 있는 이곳은 능곡동에 살던 원주민 이주단지(능골전원마을)로 이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류자신 신도비이다. 고개를 돌린 귀부의 당당함과 장엄함에 눈길이 간다. 예전에는 비각을 씌워 눈비를 피했는데, 지붕이 상하면서 철거되었다. 신도비는 쌍룡쟁주라고 해서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모습의 이수부분은 잘 보이는데, 귀부는 난간석에 의해 잘 보이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원래 신도비의 위치는 이곳이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능곡동이 개발되기 전에 신도비가 위치한 곳도 일제시대 옮긴 것인데, 마을에 대해서 잘 아는 원로 김규성에 따르면 수백의 장정이 동원되어 신도비를 옮겼다고 한다. 그 모습이 장관이라 기억에 선하다고 구술하였다.
묘역은 맨 위에 류자신 선생 아버지 류잠을 시작하여 둘째 동생 류덕신과 큰아들 류희갱의 묘, 그리고 류자신의 묘가 있다. 그 아래에는 작은 봉분 3기의 무덤이 있는데, 류자신의 아들로 광해군 대 권세를 누리며 호사를 부리고 인조반정을 죽은 유희분, 유희발, 유희량의 가묘라는 말도 있는데,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음은 류자신 선생의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졸기이다.
문양 부원군(文陽府院君) 유자신(柳自新)이 졸하였다. 정원에 전교하기를,
"문양 부원군이 서거하니 지극히 놀랍고 슬프다. 위와 내전(內殿), 세자 및 세자빈이 거행해야 할 의식 절차를 속히 의논하여 아뢸 것을 〈해조에 말하라.〉"하였다. 【자신은 왕비의 아버지이다. 아들 유희분(柳希奮)·유희발(柳希發)·유희량(柳希亮)과 손자 유충립(柳忠立)이 모두 벼슬하여 권세를 부리고 호사를 누렸으며 형제와 사위, 친족들에 고관들이 연이었는데 자신은 어리석어 술만 마시다가 나이 80에 죽었다. 】文陽府院君 柳自新卒。 以備忘傳于閔德男 , 傳于政院曰: "文陽府院君卒逝, 極爲驚悼。 自上、內殿、世子及嬪, 可行儀節, 速議以啓事, 言于該曹。" 【自新, 王妃父也。 子希奮、希發、希亮, 孫忠立皆立朝用事, 侈靡相尙。 兄弟、他女壻、宗黨, 纓弁相接, 自新昏眊, 但飮酒而已, 年八十終。】
흥미로운 것은 자식이나 친족들은 권세를 부리고 호사를 누렸다고 하고, 류자신은 어리석어 술만 마시다가 80세 죽었다고 한 사관의 평이다. 달리 말하면 류자신 본인은 국구로서 행세를 하지 않고 겸손하였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내용은 광해군의 폭정을 비판하고 외척의 발호를 비판한 것이다. 그러니 개인에 대해서 어리석다. 술만 마시다가 죽었다는 평을 한 것이다. 실록을 만든 사람들이 바로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이고 인조반정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집권 논리를 정당화 하는데 촛점이 있엇을 것이다. 다만 광해군 대 류씨 집안의 발호도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지역 문중 어른들끼리 모임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눈 재밌는 일화도 있는데, 문화류씨 아무개가 '광해대왕'이라고 하자 여기에 대해 서인쪽 문중 어른이 "연산대왕은 들어봤어도 광해대왕은 금시초문"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재밌는 농인데, 사실 광해군의 정책이 상당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지 오래다. 결국 역사 평가는 오늘 우리들의 판단이 중요하다. 광해대왕이든 광해군이든 중요한 것은 역사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평가도 시대 따라 중요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문양부원군 증영의정 ◯◯공 신도비명
유명조선국 증갈충진성동덕찬모좌운위성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
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 문양부원군 행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문양부원군 증시??
공 류공 신도비명 및 서문
임금(광해군)께서 즉위하신 지 5년 만에 영돈녕부사 문양부원군 류공이 호현방의 자택에서 돌아
가셨다. 임금께서 부음을 들으시고 슬피 애도하여 삼일 동안 조회를 보지 않았으며, 초상 절차에
들어가는 비용을 모두 일등의 예를 기준으로 관비로 집행하게 하고, 예관으로 하여금 예를 갖추
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 이외에 특별히 환관을 보내어 호상 역할을 담당하게 하셨다.
조문하고 제를 올리는 데에 중전 역시 이와 같이 지원하셨고, 동궁은 직접 가서 곡을 하셨다. 공
은 국구의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서 부부가 해로하고 자손이 현창하며 복록이 융성하니, 생전과 사
후 모두 영예롭기가 공보다 더한 분은 우리 조정이 생긴 이래 아직 없었다. 이 해(1612) 4월 27일
에 안산군의 서쪽 광곡리 선영 아래에 인좌신향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공의 유언을 따른 것이다.
장례를 마치고 나서도 공의 여러 아들들은 상복을 입고 있는 형편이라 직접 와서 부탁하지 못
하고 공의 둘째 아들 문원文原의 아들 신립信立을 시켜 가승家乘을 가지고 나를 찾아보게 하였다.
신립이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벗들 중에서 글을 써 주실 분은 오직 공 한 분이니 감히 묘도비의
글을 부탁합니다.”라고 하였다. 아! 내가 공의 어진 아우를 따라 교유하면서 공과 알고 지낸 지
가장 오래되었는데, 어찌 내가 견문이 좁고 학식이 천박하다 하여 의리상 이를 사양하겠는가. 다
만 공은 현달하여 존귀한 지위에 오른 분이므로 법에 따라 마땅히 시호가 내려져야 하고, 또 시
호가 내려진 후에 명을 지어야 마땅하므로 지금껏 미루어 온 것이다.
계축년(1613) 봄, 임금을 호위한 공이 크다 하여 공을 원훈에 추급 책봉하였고 ‘갈충진성동덕찬
모좌운竭忠盡誠同德贊謨佐運’이라는 열 글자의 호를 내리고 대광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 예문
관 춘추관 관상감 사세자사大匡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를 더하여 추증하였다.
문창(공의 셋째 아들 희분希奮) 등 여러 공이 “비문은 이미 갖추어졌다.”고 하며 명을 빨리 써달라고 부
탁하기에 서에 이어 명을 짓는다.
공의 휘는 자신自新이요, 자는 지언止彦이다. 문화 류씨로 고려 때 대승을 지낸 차달車達이 곧 시
조이다. 군기시 첨정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제근悌根은 공에게 증조할아버지이고, 돈녕부
정으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된 수천壽千은 할아버지이다. 이 분에게서 태어난 잠潛은 공조 판서를
지내고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이분이 바로 공의 부친이시다. 이렇게 삼대가 추은된 것은
모두 공이 귀하게 된 까닭이다. 어머니 하동 정씨는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는데, 하동부원군 정인
지鄭麟趾의 증손녀로 호조 참판으로 추증된 승렴承廉의 따님으로, 가정 신축년(1541) 12월 임자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일찍이 대사간 정존靜存 이담李湛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는데 당시 학생들 중에서 가장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갑자년(156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문정왕후의 상을 당해 아버지 의정공議
政公이 태릉(문정왕후의 릉)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는데, 을축년(1566)에 명종께서 하교하시기를 “수릉관
이 몸에 질병이 있으니, 그 아들을 능참봉에 임명해서 자신의 아버지를 간호케 하라.”라고 하셨다.
공은 이로 인하여 비로소 관직에 올랐다. 정묘년(1567)에 복을 마치고 다시 돈녕부 직장에 임명되
었다. 기사년(1569)에 내자시 주부로 옮기었고 이어 장원서 장원에 전임되었다가 평강현으로 나갔
다. 신미년(1571)에 어떤 일로 인해 해임되었다가 사과에 임명되었다. 임신년(1572)에 호조 좌랑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형조 정랑으로 전임되었다. 을해년(1572) 봄에 김포현령이 되었고, 병자년(1573) 겨
울에 부친상을 당하여 삼 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기묘년(1579)에 형조 정랑에 제수되고 이어 김제군수에 배수되었으나 어머님 연세가 일흔을 넘
었다 하여 사임하니 한성부 판관으로 바꾸어 제수되었다. 또 제용감 첨정으로 승진하였고, 양근군
수에 제배되었다가, 신사년(1581) 겨울에 체직되어 돌아왔다. 임오년(1582)에 상의원 판관에 제수되
고, 계미년(1583)에 사재감 첨정으로 전임되었다가, 을유년(1585)에 장악원 첨정으로 옮겨 내승을 겸
임하였다. 정해년(1587) 3월에 선조께서 공의 셋째 따님을 뽑아 왕자군부인으로 삼으니 곧 지금의
왕비시다. 그해 여름에 모친상을 당하여 상례를 치루기를 예전 부친상 때와 같이 후하게 하였다.
기축년(1589) 가을에 경조 판관에 제수되고, 그해 겨울에는 안악현감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이때 이
고을에서 역변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언관들이 다투어 특명을
거둘 것을 청하니, 임금께서 “재주와 기량이 가히 적합하니 부임토록 하라.”고 비답하셨다. 경인년
(1590)에 안악현에 도망하여 숨어 있던 역적 무리들을 체포하니 임금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통정대
부의 품계를 제수하고 그 품계를 가지고 안악현에 거듭 재임하도록 하다가 특별히 광주목사에 옮
겨주셨다.
임진년(1592) 왜란 때 적의 선봉이 장차 서울을 침공하게 되어 관찰사 권징權徵이 공에게 한강
상류 여울의 방어를 맡기니 공이 부대를 이끌고 그곳으로 나아갔다. 그해 4월 그믐날 어가가 장
차 평안도로 파천하게 되자 광해군을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고, 그 부인을 세자빈으로 승격시켰다.
선조께서 도승지 이항복李恒福에게 “광주목사 류자신을 체임시켜 호종하게 하라.”고 하교하셨으나,
창황한 나머지 미처 그 교지를 받들어 시행하지 못하다가 개성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관찰사에게
지시하였는데, 길이 어긋나서 열흘이 되어서야 공에게 명령이 전달되었다. 공은 명을 듣자마자 만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어가를 뒤쫓아 평양의 행재소에 도착하니 돈녕부 도정에 배수되었다. 선
조께서 공에게 “동궁을 배종하여 종묘사직을 받들라.”라고 명하시니, 이에 동쪽으로 돌아가 관동
의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 그해 겨울에 왕세자를 호위하고 성천부에 머물렀다.
선조가 의주에 계시면서 공을 가선대부의 품계로 올리도록 특명을 내리고 동지돈녕부사에 임
명하였다. 계사년(1593)에 임금과 동궁이 모두 영유현에 머무르셨다. 이해 여름에 공이 춘천도호부
사에 제수되어 장차 부임하려 하는데, 재상 윤두수尹斗壽가 임금께 “피난할 때에 동궁을 모시는 일
은 인척이 아닌 신하가 할 수 없는 일이니, 청컨대 그를 외직에 보내지 마소서.”라고 계를 올리니,
선조께서 그의 진언에 따라 공을 동지돈녕부사에 체직시키고 가을에 성천도호부사를 제수하셨다.
을미년(1595)에 호군에 제수되고 한성부 우윤에 전임되어 도총부 부총관을 겸하였고, 정유년(1597)
겨울에 자헌대부 한성부판윤 겸도총관에 제배되었다.
무술년(1598)에 왕세자빈께서 원손을 낳으셨다. 기해년(1599) 봄에 개성부 유수에 제배되고, 신축
년(1601)에는 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다. 무신년(1608) 2월에 세자께서 왕위에 즉위하니, 세자빈은 왕
비로 책봉되고, 원손은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공은 관례대로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원군으로 승진
하였다. 이때부터 공은 가문이 너무 번영함을 두려워하고, 더욱 돈독히 겸양하여 대문을 닫고 손
님을 사절하며 세간사에는 뜻을 두지 않은 것처럼 하였으나, 그 마음 속으로는 정치가 제대로 되
는지 현명한 이가 출세하고 사악한 이가 퇴출되는지 여부에 따라 기뻐하고 근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우리 나라의 관례에 따르면, 나이가 일흔이고 관직이 정이품 이상이면 기로소당상이라 칭
하고 봄과 가을에 잔치를 베풀어 악공을 보내고 내관을 보내어 어주를 하사하였다. 경술년(1610)
가을에 공이 일흔이 되니 이 연회를 열고 풍악과 어주를 내려 옛날에 하던 대로 하니 세상 사람
들은 영광이라고 했다. 이해에 왕세자 책봉이 천조(명나라)로부터 승인되었다. 신해년(1611) 겨울에
공은 병이 들어 임자년(1612) 2월 7일 마침내 돌아가시니 향년 72세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신중하였으며 자라서는 더욱 성품이 어질고 신중하여 자신을 다스
리는 데에는 엄격히 하고 남을 대할 때에는 온화하게 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고요하여 따로 좋아
하는 것 없이 오로지 책만을 벗 삼았다. 경서와 역사서에 마음을 두어 늙도록 책을 놓지 않았고
책에서 고인의 좋은 말씀과 선행을 보게 되면 반드시 여러 자식들로 하여금 이를 기록하여 본받
도록 하였다. 벼슬을 할 때나 하지 않을 때나 항상 법도를 지켰고 의복과 음식에 대해서는 항상
사치하고 화려함을 경계하여, 비록 존귀한 지위에 있었으나 선비 본연의 뜻은 변함이 없었다.
어머님이 혼자되신 후 십여 년간을 한결같이 기쁜 안색과 유순하고 온화한 몸가짐으로 정성을
다하여 곁에서 봉양하니 모친께서 흡족해 하셨다. 의정공이 측실을 두셨는데 그녀는 나이가 젊었
고 자식이 없었다. 의정공이 돌아가신 후에도 공이 섬기기를 처음과 같이 하니, 공의 덕행에 측실
도 감동하여 더욱 삼가며 수절하여 나이 여든에 문중에서 생을 마쳤다. 아우하고는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자리와 이불을 같이하였고 매양 같이 살고자 하였으며, 혹 벼슬에 나아가 서로 떨어지
게 되면 애달파 하고 안타까워 마지않았다. 친구를 대하면서 가난하다고 하여 버리는 일이 없었
고, 가문 사람들에 대한 구휼에는 친소를 가리지 않았다. 포부와 재능이 있으면서 출세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적극 장점을 들어 추천하였고, 가난과 질병을 구휼하고 혼례와 상례를 돕는 일
에는 온힘을 다하니, 모든 사람들은 공을 부형과 같이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만년에는 항상 성은에 감축하며 남쪽 연못 한 모퉁이에 정자를 짓고 편액을 ‘영은정泳恩亭’이라
하였다. 일찍이 「감군은사感君恩詞 7결闋」을 스스로 지어 놓고 술을 마실 때엔 반드시 시종으로 하
여금 이를 읊게 하였으니, 임금의 은혜를 잊지 않기가 이와 같았다. 병이 위중해져 어의가 왕명을
받들어 왕진할 때마다 울면서 사양하고 “성은이 이와 같으니 감격하고 망극하옵니다. 돌아보건대
노신이 남보다 뛰어난 재주나 덕행도 없으면서도 나이가 들수록 은총이 지극해지고 자손들도 많
이 현달하였으니, 이로써 인사人事는 다했다고 봅니다. 한 번 성하면 다시 쇠하는 것이 우주의 이
치인데, 어찌 저 혼자 이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며 약을 복용하여 살기를 구하지 아니 하였
다. 여러 자손들이 약을 드시게 하여 혹 작은 효험이라도 있으면, 공은 눈물을 흘리면서 목이 메
어 “내가 나라의 은혜를 입어 의약이 이렇듯 갖추어져 있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선친이 돌아가
실 때의 병환과 지금 나의 병은 같은 것인데, 그 때에는 우리 형제들이 나이가 어리고 힘이 모자
라 지금 나에게 하듯 약을 쓰지 못했으니, 지금 그 한스러움이 더욱 간절하다.”라고 말하니 그 말
을 들은 자들은 모두 그의 추모하는 정성에 감동하였다.
부인은 동래 정씨로 택호는 봉원부부인이고 좌의정 유길惟吉의 따님이며, 문익공 광필光弼이 증
조할아버지이다. 가정 갑인년(1554)에 공에게 시집왔는데, 그때 공의 나이 열넷으로, 의정공이 공
을 매우 애중히 여겨 옥윤玉潤(옥같이 윤이 난다는 뜻으로 사위를 부르는 미칭)이라 불렀다. 의정공이 정묘년
(1567)에 선조의 등극을 알리는 연행부사로 연경에 가서 조회할 때, 의정공의 맏아들 우의정 봉래
부원군 창연昌衍이 그 때 겨우 15세의 소년인지라, 의정공이 연경에 있으면서 편지를 보내 “모든
일을 공(류자신을 말함)을 따라 하면 사람 노릇 할 수 있으리라.”라 하였으니 공을 중히 여김이 이
와 같았다.
6남 4녀를 낳았다. 큰아들 희갱希鏗은 성균진사였으나 일찍 죽었고, 둘째는 희담希聃으로 행판결
사인 문원군이며, 셋째는 희분希奮으로 문창부원군 겸 병조판서이고, 넷째는 희발希發로 이조참의이
며, 다섯째는 희량希亮으로 경기도 관찰사이고, 막내 희안希安은 사복시 판관이다. 맏딸은 한성부 좌
윤 한창군 조국필趙國弼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병조정랑 이덕일李德一에게 시집갔으며, 셋째 딸은
왕비전하이고, 막내는 은률현감 김시보金時輔에게 시집갔다.
진사(장남 희갱을 말함)는 종실 기성군 이현李俔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효립孝
立은 세자시강원의 필선으로 공의 상에 승중복承重服(장손으로 아버지가 안 계셔 조부모의 상에 아버지를 대신해
상복을 입음)을 입었다. 둘째 충립忠立은 의정부 사인이고, 딸은 평강현감 박안정朴安鼎에게 시집갔다.
문원군(차남 희담을 말함)은 승문원 판교 윤현尹晛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 신립
信立은 지금 정립鼎立으로 개명하였는데 공조좌랑이고, 딸은 열세 살의 처녀 나이로 외가를 따라
대구부 임소에 가서 있다가 임진년 난 때에 적변을 만나 절개를 지키고 죽으니, 계사년 봄에 조정에서 정표하였다.
문창(삼남 희분을 말함)은 광릉참봉 성질成礩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정립正立은
생원이고, 차남은 명립命立이다. 맏딸은 호조참의 조유도趙有道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사산감역
경유후慶有後에게 시집갔으며, 셋째 딸은 익위사세마 최위崔蘤에게 시집갔고, 막내는 익위사부수 조
실구曺實久에게 시집갔다.
참의(사남 희발을 말함)는 부평부사 심신겸沈信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시립時
立은 익위사 세마이고 둘째 중립中立은 생원이며, 딸은 사간원정언 김세렴金世濂에게 시집갔다. 참의
는 후취하였는데 사직서 령 박채朴綵의 딸이다. 5남 1녀를 낳으니, 장남은 유립有立이고 둘째는 현
립顯立, 셋째는 영립英立이며 넷째는 창립昌立이고 막내는 한립漢立이다. 딸은 사인 이무李袤에게 시
집갔다.
관찰사(오남 희량을 말함)는 충의위 구사성具思誠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 두립斗
立은 진사이고, 맏딸은 사산감역 이민수李敏樹에게 시집갔으며, 둘째 딸은 사인 심익沈翊에게 시집갔
고, 셋째 딸은 사인 오세헌吳世獻에게 시집갔다.
판관(육남 희안을 말함)은 도사 정곽鄭廓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는데, 성균진사 윤상미
尹商美에게 시집갔다. 판관은 후취하였는데 감찰 정호성丁好誠의 딸이다.
한창(큰사위 조국필을 말함)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홍문관수찬인 조유선趙裕善이다. 정랑(둘째 사위 이
덕일을 말함)은 4남 2녀를 낳으니, 장남은 진사 이후재李厚載, 둘째는 이홍재李弘載, 셋째는 이상재李尙載
이며, 큰 딸은 사인 신즐申櫛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사산감역 류지호柳之豪에게 시집갔다. 은률(넷
째 사위 김시보를 말함)은 4남 2녀를 낳으니 장남은 김진성金振聲이고, 큰 딸은 예조좌랑 기준격奇俊格에
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필선(큰손자 효립을 말함)은 대사헌 정윤복丁胤福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7녀를 낳으니, 장남은 종선
宗善이고 나머지 증손들은 기록하지 않는다.
문창(삼남 희분을 말함)의 서자인 장남 익립益立은 진사이고, 둘째는 복립福立이며, 셋째는 후립厚立,
넷째는 위립偉立이고 딸은 학생 윤선행尹善行에게 시집갔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공은 화락하고 단아하였으니
이는 덕업의 기반이 되었도다.
빼어난 재주 있었으나
여러 차례 과거에서 떨어졌네.
우리 조정은 사람을 쓰는 데에
혹 얽매이는 바 있으니
과거에 등제하지 못하고는
현달한 벼슬길에 나아가기 어려웠더라.
공의 이력은 조정에서 일반 관료를 지냈고
외직으로는 주현을 다스렸을 뿐이네.
사람은 혹 방해할지라도
하늘은 본디 선한 이를 복되게 하는 법이니,
공은 성대한 여경餘慶(착한 일을 많이 한 보답으로 그 자손이 누리는 경사)을
생전에 누렸다네.
공의 거룩하신 따님은
중전에 오르셨고
원자를 낳으시니
세자가 되셨네.
태임 · 태사 · 등후 · 마후 등도
이러한 융성함에 비할 손가!
훌륭하도다! 국모의 거동과 범절.
이는 본디 가정의 법도에서 연유함이라.
공은 항상 겸손하고 또 겸손하여
편안할 때에는 위태로움을, 가득 차면 넘침을 염려하였네.
아들과 사위들이
모두 영달하였으니
공께서 심고 퍼뜨린 덕업의 꽃향기
참으로 혁혁하고 진진하도다.
시와 서에 칭찬한 바
이보다 더할 수는 없으리라.
내가 명을 돌에 새기나니
공의 빛난 자취 영원하리라!
근정양효절협책호성공충분의병기익사공신 보국숭록대부 진원부원군 류근柳根이 짓고, 통정대부
병조참의 지제교 오정吳靖이 씀
숭정대부 행지중추부사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씀
만력 45년(1617) 4월 일에 세움
文陽府院君 贈領議政 ◯◯公 神道碑銘
有明朝鮮國 贈竭忠盡誠同德贊謨佐運衛聖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文陽府院君 行輔國崇祿大夫 領敦寧府事
文陽府院君 贈謚□□公 柳公 神道碑銘 幷序
上即位之五年, 領敦寧府事文陽府院君柳公, 卒于好賢坊私第. 訃聞, 上震悼, 輟視朝三日, 自歛
殯至葬, 皆官庀用一等禮, 禮官率禮吊祭之外, 上特遣中使護喪. 致吊致祭, 中殿亦如之, 東宮臨哭.
自我朝以來, 居國舅之重, 夫婦偕老, 子孫昌而顯, 福祿俱隆, 哀榮兩至, 未有盛於公者. 是歲四月二
十七日, 葬于安山郡西廣谷里先墓下寅坐申向之原, 從治命也.
旣葬, 公之諸子, 斬然憂服之中, 未能來請, 使公第二子文原之子信立, 持家乘抵于根曰, “先友
在世秉筆者, 惟公一人, 敢以墓道之碑相託”. 噫! 根登從賢季游, 受知最久, 義不可以孤陋辭. 第念
公以達尊, 法宜謚, 有謚而後, 宜有銘, 以是遲之.
癸丑春, 追第公, 衛聖之功, 爲元勳, 贈“竭忠盡誠同德贊謨佐運”十字六號, 加贈“大匡議政府領
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文昌諸公速銘曰, “碑己具”, 乃序而銘之.
公諱自新, 字止彦. 系出文化, 麗代大丞車達, 即鼻祖也. 有諱悌根, 軍器寺僉正, 贈吏曺判書,
曾祖考也, 諱壽千, 敦寧府正, 贈議政府左贊成, 祖考也. 是生諱潜, 工曺判書, 贈議政府領議政, 公
之考也. 推恩三世, 皆以公貴. 妣河東鄭氏, 贈貞敬夫人, 河東府院君麟趾曾孫女, 贈戶曺叅判承廉
之女也, 嘉靖辛丑, 十二月壬子, 生公.
公早登靜存李大司諫湛之門, 爲一時輩流所推許. 中甲子進士. 乙丑, 文定之喪. 議政公膺守泰陵
之命, 明廟下敎曰, “守陵官, 身有疾病, 其以子爲陵叅奉, 使看護其父”. 公因是?命始入官. 丁卯,
服闋, 復命爲敦寧府直長. 己已, 遷內資寺主簿, 轉掌苑署掌苑, 出掌平康縣. 辛未, 以事解任爲司
果. 壬申, 陞戶曺佐郞, 遷刑曹正郞. 乙亥春, 爲金浦縣令, 丙子冬, 丁外艱, 廬墓三年.
己卯, 授刑曹正郞, 拜金堤郡守. 以慈親年七十辭, 遞施授漢城府判官. 陞濟用監僉正, 拜楊根郡
守, 幸已冬, 遞還. 壬午, 授尙衣院判官, 癸未, 轉司宰監僉正, 乙酉, 移掌樂院僉正, 兼內乘. 丁亥
三月, 宣祖以公第三女, 選爲王子君夫人, 即當代王妃也. 是年夏季, 丁內艱, 執禮猶前喪. 己丑秋,
授京兆判官, 是冬, 特除安岳縣監. 是時逆變起于是縣, 故有是命, 言者爭特命請寢之, 聖批以爲“才
器可合濆許赴任”. 庚寅, 捕獲本縣在逃逆類, 先朝嘉之, 命授通政階, 仍莅是邑, 特移廣州牧使.
壬辰之變, 兇鋒將逼畿甸, 觀察使權徵, 委公上流淺灘防守, 公領衆, 方赴灘上. 四月晦, 車駕將
西幸, 冊上爲王世子, 夫人陞世子嬪. 宜祖下敎于都承旨李恒福曰, “廣州牧使柳自新, 遞任使扈從”.
蒼黃之際, 未遑奉旨, 及到松都, 始行會于觀察使, 因道挭經, 旬始達公. 聞命即, 赴冒萬死, 追及箕
壤行在, 拜敦寧府都正. 宣祖命公陪東宮奉廟社, 東還, 跋涉關東諸路, 是冬, 衛王世子駐成川府.
宣祖在龍灣, 特命陞公嘉善階, 同知敦寧府事. 癸已, 大駕東宮偕駐永柔縣. 是夏, 授春川都護府
使, 將之任, 相臣尹斗壽啓于榻前曰, “當此播越之日, 東宮陪衛, 不可無親之臣. 請勿許補外”, 宣祖
從之, 遞授同知敦寧府事, 秋, 拜成川都護府使. 乙未, 授護軍, 轉漢城府右尹兼都摠府副摠管, 丁酉
冬, 拜資憲漢城府判尹兼都摠管.
戊戌, 王世子嬪誕生元孫. 己亥春, 拜開城府留守, 辛丑, 拜知敦寧府事. 戊申二月, 聖上嗣服踐
祚, 嬪冊封王妃, 元孫冊爲王世子. 例陞公爲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院君. 自是, 盛滿是懼, 謙恭彌
篤, 杜門謝客, 若無意於世間事, 其心未嘗不以時政得失, 賢邪進退爲憂喜. 我朝舊規, 年七十, 爵正
二品以上, 稱耆老所堂上, 春秋設宴賜樂, 遣中使承宣宣醞. 庚戌秋, 公以年七十, 與是會賜樂宣醞,
一如故事, 世以爲榮. 是年, 王世子受封于天朝. 辛亥冬, 公遘疾, 壬子二月七日, 遂下起, 享年七
十有二.
公幼而端重, 長益醇謹, 律己則嚴, 接物以和. 素性恬靜, 無所玩好, 惟以圖書爲長物. 留心經史,
至老不釋, 如見古人嘉言善行, 必令諸子書紳而取法焉. 居家奉職, 動遵法式, 衣服飮食, 每戒靡麗,
雖至極貴, 猶不替韋布之志. 大夫人寡居十有餘年, 愉色婉容, 盡其誠意, 左右奉養, 得其歡心. 議政
公有副室, 年少無兒, 議政捐館舍之後, 公事之如初, 副室感德, 守節益謹, 年垂八袤, 終于門下. 友
一弟最篤, 連床共被, 每欲與之同居, 或綠仕宦相離, 則輒嗟惜不能已. 待故舊, 毋棄貧賤, 恤宗族,
無問親疏. 如有抱才不售者, 必欲吹噓, 窮病婚喪, 竭力相救, 人皆愛戴, 如其父兄.
晚年恒感祝聖恩, 南湖有一區之亭, 扁曰 ‘泳恩’. 嘗自製 ‘感君恩詞七闋’. 居常對洒, 必令侍者,
詠歌之, 其不忘君恩如此. 疾革, 每遇御醫承命來診, 輒泣而辭之曰, “聖恩至此, 感激罔極, 顧念老
臣, 無過人才與德, 而年至寵極, 子孫多在顯列, 人事盡矣. 盈虛替代之數, 何可獨免”, 不須服藥求
生. 諸子勸進藥餌, 或有少效, 則必垂涕哽塞曰, “我蒙國恩, 醫藥備至. 追念先君易簀時, 疾頗類余
今曰之病, 而其時吾兄弟年少力微, 用藥不能如救我之, 亐憾終天之痛, 到此益切”云, 其追慕之誠,
聞者莫不感動.
夫人東萊鄭氏, 號蓬原府夫人, 左議政惟吉之女, 文翼公光弼, 實曾祖考也. 嘉靖甲寅, 歸于公,
時公年十四, 議政公頗重之, 指以爲玉潤. 議政公, 於丁卯, 以登極副使朝京師, 議政胤子, 右議政蓬
萊府院君昌衍, 纔成童, 議政公在燕京, 寄書云, “凡事薰灸于公, 可以成人”, 其取重如此.
生六男四女. 男長希鏗, 成均進士, 早逝, 次希聃, 行判決事, 文原君, 次希奮, 即文昌府院君,
兼兵曺判書, 次希發, 吏曹叅議, 次希亮, 京畿觀察使, 次希安, 司僕寺判官. 女長適漢城府左尹漢昌
君趙國弼, 次適兵曹正郎李德一, 次即王妃殿下, 次適殷栗縣監金時輔.
進士娶宗室箕城君俔之女, 生二男一女. 男長孝立, 世子侍講院弼善, 承重服公之喪. 次忠立,
議政府舍人, 女適平康縣監朴安鼎.
文原娶承文院判校尹晛之女, 生一男一女. 男信立, 今改鼎立, 工曹佐郞, 女年十三以處子, 隨外
家, 在大丘府任所, 遭壬辰賊變節死, 癸已春, 朝廷旌表.
文昌娶光陵叅奉成礩之女, 生二男四女. 男長正立生員, 次命立. 女長適戶曹叅議趙有道, 次適四
山監役慶有後, 次適翊衛司洗馬崔蘤, 次適翊衛司副率曺實久.
叅議娶富平府使沈信謙之女, 生二男一女. 男長時立, 翊衛司洗馬, 次中立, 生員, 女適司諫院正
言金世濂. 後娶社稷令朴綵之女. 生五男一女, 男長有立, 次顯立, 次英立, 次昌立, 次漢立. 女適士
人李袤.
觀察使娶忠義衛具思誠之女, 生一男三女. 男斗立, 進士, 女長適四山監役李敏樹, 次適士人沈
翊, 次適士人吳世獻.
判官娶都事鄭廓之女, 生一女, 適成均進士尹商美. 後娶監察丁好誠之女.
漢昌生一男, 弘文館修撰趙裕善. 正郞生四男二女, 男長進士李厚載, 次李弘載, 次李尙載, 女長
適士人申櫛, 次適四山監役柳之豪. 殷栗生四男二女, 男長金振聲, 女長適禮曹佐郞奇俊格, 餘皆幼.
弼善娶大司憲丁胤福之女, 生四男七女, 男長宗善, 諸曾孫不能盡載.
文昌庶子, 男長益立, 進士, 次福立, 次厚立, 次偉立, 女適學生尹善行.
銘曰, 維公愷悌, 維德之基, 公有儁才, 屢屈有司, 我朝用人, 或有所拘, 不由科第, 鮮達亨衢,
公所踐履, 庶僚州縣, 人或尼之, 天固佑善, 餘慶果大, 於身親見, 恭惟聖女, 正位中殿, 夙誕元良,
主鬯春宮, 任姒鄧馬, 不啻此隆, 巍乎母儀, 本之家法, 公即謙謙, 不危不溢, 有子若婿, 繼圖麒麟,
種德流芳, 赫赫振振, 詩書所稱, 蔑以加之, 我銘在石, 庶其昭垂.
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忠奮義丙幾翼社功臣 輔國崇祿大夫 晋原府院君 柳根 撰
通政大夫 兵曹叅議 知製敎 吳靖 書
崇政大夫 行知中樞府事 金尙容 篆
萬曆 四十五年 四月 日 立
출처 : 시흥시 향토사료실,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시흥의 금석문-신도비명의 원문 표점. 번역-', 시흥역사문화총서2(동문인쇄출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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