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백제의 마지막 꽃, 사비 부여

달이선생 2019. 10. 29. 08:30

백제의 마지막 꽃, 사비 부여

능산리고분군, 부소산성, 삼충사, 정림사지

 

  흔히 백제는 문화예술이 꽃피운 나라로 삼국 중 제일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로 '백제 미'라고 하여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교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5년(기원전 4년) 봄 정월 기록을 인용한다.

 

 

'작신궁실(作新宮室),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새롭게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제 않다'라는 말이다. 이러한 미적 세계를 알려주는 백제의 문화유산으로는 많지는 않지만 우리들이 찾아 볼 수 있는 몇몇 유산이 있다. 백제의 미소로 익살스런 온화한 웃음띤 부처 '서산용현리마애삼존불'이 있고 탑으로는 미륵사지석탑이 있지만 온전하지 못하고 목탑식으로 잘 보존되어 있는 정림사지오층석탑이 있다. 무덤으로는 공주 고도 시기의 대표적인 왕릉이자 백제의 유일한 공식적인 왕릉인 송산리고분군의 무령왕릉과 능산리 1호분의 사신도가 있다.

  최근에는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온전한 형태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가 백제 미를 대표하고 있다.

  한가지 불편한 사실이 있다. 무령왕릉이든 금동대향로든 백제 미를 대표하는 것은 맞지만 이들 유산이 독창적인 문화유산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들은 어느 때부터인가 세계 최고(最古), 세계 제일 등에 우리의 것들을 껴맞추는데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것은 한 번에 그치지만 그것들을 모방하고 혁신을 하는 것은 무한대이다. 인류의 역사와 우리 역사를 보면 창의적인 것보다는 이러한 혁신이 더 맞다.

  인도에서 나온 불교가 한국 불교로 꽃핀 곳이 우리나라고 중국 유학이 조선 유학에서 한국유학으로 자리잡은 것도... 기독교도 한국 교회로 부흥하는 곳이 우리나나라다. 

  무령왕릉의 각종 유물과 금동대향로는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에게 멸망당한 뒤, 공주에서 중흥의 역사를 시작하여 사비, 부여에서 꽃을 피운 증거이다. 이들 문화유산은 중국 남조인 송제양진 각 나라들의 유산들과 비슷하지만 그들 유산들보다 빼어난 혁신이 이루어졌다. 백제가 남조의 문화와 기술을 적극 받아들여 자신들의 문화화 한 것이다. 마치 미국에서 반도체가 만들어져 일본이 세계적 시장을 개척하고 우리가 일본을 넘어 선 것처럼 백제는 남조를 통해 중흥의 역사를 열었던 것이다.

  백제와 중국 남조에 대한 연구는 서울대 권오영 교수가 권위자다. 아래는 그와 관련된 링크 자료이다.

`백제 금동대향로 중 남조 영향받아...
(https://m.chosun.com/svc/article.html?sname=news&contid=2004061870316#Redyho)
`백제-중국 남조 ‘닮은꼴 유물들’ 어떤 인연?(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18043.html#csidx20c682db59aec819ea87a7573f6d857 )
`잊혀졌던 미래, 백제와의 낯선 만남
(http://www.daebaekje.com/bbs/view.asp?bdiv=commu&tdiv=1&seq=17&page=3&s1=&s2=)

 

 

한성백제의 멸망과 웅진, 사비기의 중흥

 

  백제는 700년 가까운 역사를 이어온 고대국가로 수도의 변천에 따라 한성기(기원전 18~475), 웅진기(475~538, 65), 사비기(538~660, 122)로 나눈다. 이중 한성기는 백제사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백제 총 31왕 중 21(온조~개로왕)이 통치한 시기에 해당한다. 이렇듯 백제사의 중심은 수도권인 지금의 한성위례성이 중심이었다. 지금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바로 한성백제 유적인 몽촌, 풍납토성과 석촌동고분군이다. 특히 석촌동(돌마을)1970년대까지 돌무덤이 200여기가 있었고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무덤은 8기만이 발굴 정비된 것이다. 이중 가장 큰 무덤을 4세기 후반 중국 청자편이 발굴되어 백제의 가장 전성기의 왕이었던 근초고왕의 무덤(3호분)으로 추정한다. 이 시기 돌무덤을 통해 백제가 고구려의 특징을 아직까지 이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흥하면 쇠한다' 했던가 증조할아버지 고국원왕이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의 화살을 맞아 평양성에서 죽은 이후로 백제에 큰 원한을 가진 고구려는 결국 장수왕에 의해서 백제 한성은 최후를 맞는다. 장수왕의 고구려군은 풍납토성을 7일간 공격하였고 결국 마지막날 큰 화재가 나자 백제 한성기 마지막왕 개로왕이 풍납토성을 탈출하여 몽촌토성으로 말을 타고 달려가다 고구려군에 붙잡혀 아차산에 끌려가 최후를 맞는다. 이 때가 사실상 백제의 멸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500년 가까이 이어온 백제는 다시금 부랴부랴 추스러 문주왕을 세워 지금의 공주인 웅진을 수도로 하여 개국을 한다. 하지만 고구려의 끊임없는 압박과 한성귀족세력과 공주 토착귀족 세력이 화합하지 못하고 권력다툼을 하면서 웅진기를 연 문주왕 마저도 암살되는 등 혼란을 거듭하였다.

  마침내 이러한 혼란의 종지부를 찍고 6세기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동아시아를 넘어 동남아시아까지 교류(고대 해상실크로드 무역강국)하며 가장 백제다운 시대를 연다. 이 시기의 3대왕이 25대 무령왕(501~523), 26대 성왕(523~554), 27대 위덕왕(554~598)이다. 이들 세 왕의 활약으로 웅진, 사비기의 백제의 문화는 꽃을 피웠고, 현대에 이르러 이들 흔적은 2015년 유네스코에 백제 8유적으로 등재되기에 이른다.

공주 : 공산성, 송산리고분군

부여 : 능산리고분군,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나성

익산 : 미륵사지, 왕궁리유적

 

 

위대한 발견은 우연한 기회에-권오영 서울대 교수

 

  웅진기 백제의 도약의 특징은 소통, 개방성, 국제화로 요약된다. 이러한 백제의 역사적 사실을 온전히 전해준 위대한 발굴이 있었다. 1971년 충청남도 공주시 송산리고분군 6호분 사이에 장마가 지기 전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에 고분이 발견되었다. 이 고분이 발견되기 전날 공주박물관 김영배 관장의 꿈에는 돼지인지 해태인지 모를 짐승이 달려드는 발굴몽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의 주인공이 바로 무령왕릉 입구를 지키고 섰던 석수(진묘수)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김영배 관장과 서울대 김원룡 교수 등 4명의 고고학자들은 서둘러 11시간 만에 유물수습을 하였다. 발굴을 해야했지만 발굴아닌 유물 수습을 하고 말았다. 무령왕릉 발굴은 기적 같은 발견과 최악의 발굴이라는 멍애를 가지고 있다. 전국민의 관심을 한껏 받으며, 밀려드는 주민과 이를 통제해야 하는 경찰마저도 이 위대한 발굴에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사태가 결국 단시간에 유물수습을 끝내야 했던 최악의 발굴의 오명을 만들게 된 것이다.

  사실 백제에 대한 중요한 발굴은 우리 손으로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특히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후에 1920년대 대동강 낙랑고분, 경상도 신라가야고분 도굴과 이곳 공주 지역은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라는 아마추어 고고학자(공주고보 교사, 1927~1945까지 1천여 곳 도굴)의 도굴이 극성을 부렸는데, 다행히도 무령왕릉이 봉분이 백제 멸망 때부터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망실되어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다. 이렇게 도굴 안 된 무령왕릉은 우리 역사에 기적이었다.

  지금처럼 차근차근 발굴이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고대 백제에 대한 무수히 많은 당대 자료를 얻을 수 있는 귀한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발굴된 무령왕릉에서는 중국문헌에도 소개된 백제 삼년상을 알려주는 단서가 되고 있다. 바로 무령왕릉 지석을 통해서 고구려부터 시작된 삼년상(대략 27개월) 전통의 확인이다.

 

무령왕 사망 계묘년(523) 37일 장사 을사년(525) 812
왕비 사망 병오년(526) 12월 장사 기유년(529) 212
백제의 장례 제도는 고구려와 같다.(喪制如高麗)”- 隋書東夷列傳 百濟
사람이 죽으면 집 안에서 빈을 치르고 3년이 지나면 길을 택하여 매장한다.(死者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隋書高句麗傳

 

  지석과 중국문헌을 통한 삼년상의 실체를 밝혀주는 중요한 발굴이 1996년 공주 정지산에서 있었다. 이 유적은 공산성 서쪽에 위치하며, 무령왕릉 출토 유물과 유사하고 빈전의 역할을 하였을 기와집 터가 확인되었다. 특히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으로 무령왕비 지석 명문에

 

병오년(526) 12월 백제 국왕태비가 수명이 끝나니 거상이 유지에 있었다. 기유년(529) 212일에 다시 대묘로 옮기어 장사지내며 기록하기를 다음과 같이 한다(丙午年十二月百濟國王大妃壽終居喪在酉地己酉年二月癸未朔十二日甲午改葬還大墓立志如在)”

 

  이렇듯 거상은 상중에 있다. 유지(酉地)는 서쪽 따라서 빈전이 서쪽에 있다는 것으로 백제 3년상은 정지산 유적을 통해 확인된다. 아울러 금강변에 위치한 것은 삼년동안 시신을 보존하고자 사용할 얼음 때문이었다. 금강의 얼음을 채취하여 시신을 보존한 것이다. 이미 백제시태부터 빙고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한양에 있던 여러 빙고 들 역시 임금 등 국장을 위해 조성된 시설이었다.

  무령왕릉은 중국 양조의 벽돌무덤 양식이다. 이는 당시 중국 남조 양나라 기술자를 도입하여 시설한 것으로 당대 양나라의 수도 남경은 국제무역도시로 번성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무제의 아들 소역이 그린 양직공도로도 확인된다.

 

普通 2(A.D. 521; 新羅 法興王 8), 이름은 [신라]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普通二年, 王姓募名秦校勘 始校勘 使使隨百濟奉獻方物)- 양서 동이열전

 

  사실 양나라의 번영과 역사는 양무제의 역사이다. 또한 무령왕은 왜 계체왕을 소국시절부터 후원하여 왜의 천왕으로 등극시켰다. 이렇게 중국 양나라와 왜와 교류를 통해 백제를 중흥에 이끈 왕이 사마, 무령왕이다.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 흉상 2014.2.9.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칭하다 ( 538[] 十六年, , 移都於泗沘 一名所夫里.國號南扶餘.)"-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26(卷第二十六) 백제본기(百濟本紀) 제사(第四) 성왕(聖王)
성왕은 하늘의 와 땅의 이치에 통달하여 명성(名聲) 48(온 천하)에 퍼졌습니다.(聖王妙達天道地理 名流四表八方)“-日本書紀 19 天國排開廣庭天皇 欽明天皇 百濟王子 餘昌를 보내 聖明王의 죽음을 아룀 ( 55502() )

 

  무령왕의 아들로 사비시대를 연 성왕은 불국토의 전륜성왕이 백제에 현실화 한 것이다. 성왕의 업적 사비 천도와 함께 부여에 백제의 무역항 구드래나루 건설하였다.

 

부여, 은진부터는 바다의 조수와 통하게 되므로 백마강 이하 진강일대까지는 모두 배가 통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이중환, 택리지

 

  구드래가 백제를 뜻하는 일본어 구다라의 어원으로 무령왕대의 백제 문화의 번영이 사비 구드래를 통해 일본에 전해져 붙여진 것이다. 이렇듯 백제 문화의 중흥을 이끈 성왕의 무덤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고분군 가운데 아래 위치한 2호분 중하총으로 추정된다. 2호분은 여기 무덤 중 무령왕릉의 아치형태와 고분군에서 가장 중앙으로 가장 먼저 입지한 무덤이 좋은 곳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옆 1호분 동하총은 아들 위덕왕릉으로 추정된다. 위덕왕릉은 1910년 일본인에 의해 도굴되었고 송산리고분 중 유일하게 무덤방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무령왕릉과 마찬가지로 1993년 우연한 기회로 기적같은 발굴이 있었다. 바로 능산리고분과 사비 부여나성 사이에 위치한 능사지 주차장 공사에서 백제인이 숨긴 것으로 보이는 금동대향로가 발굴되었다. 무려 1330년 만이다.

  대향로의 전체 모습은 용(받침)이 연꽃(몸통)을 받치고 그 위 신선이 사는 곤륜산을 표현(뚜껑) 백제의 이상향 구현하였으며, 명상, 낚시, 승마를 하는 신선과 호랑이, 사슴, 원숭이에 코끼리까지(중국 남방 및 동남아시아 코끼리 서식 이들 지역과 백제 교류) 표현되었다. 거기에 우리 음악사에 소중한 자료인 백제의 고대 악기인 배소, 종적, 완함(월금), 거문고까지 표현된 걸작이다.

  그러나 이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해서 누가 왜 만들었는지 풀리지 못한 수수께끼였다. 그러다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2년뒤 내동댕이 처있는 부여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국보 288)이 발견되었다. 돌로 만든 사리감 감실은 있지만 기교를 부린 화려한 사리엄구는 없어진 채였다. 그러나 사리감 좌우로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백제 창왕13(567)에 매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매형공주는 창왕의 누이이고 창은 위덕왕의 이름이다. 성왕 사후 13년만에 성왕의 넋을 위로하고 명복을 비는 사찰을 창건하고 탑을 세워 제를 지냈던 것이다. 위덕왕이 그토록 정성드린 성왕은 최고의 군주였지만 비극적 최후를 마친 왕이다. 백제는 개로왕으로 잃었던 한강유역을 성왕이 신라와 함께 되찾았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유역을 다시 빼앗기자 백제의 조정에서는 태자 창이 신라와 싸우자고 하고 조정에서는 이를 반대하엿다. 이에 창은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老矣 何怯也-日本書紀 卷第十九 天國排開廣庭天皇 欽明天皇 百濟 聖明王戰死)”하며 신라와의 전쟁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창은 신라 관상성을 포위하고 싸웠으나 오히려 신라군에 재 포위 되는 등 전쟁상황이 악화되었다. 결국 이를 구원하고자 50기만 대동해 전장에 가던 아버지 성왕이 관산성에서 김유신의 할아버지 신라명장 김무력에 의해 붙잡혀 참수되었다.

 

  백제의 왕인 명농(明襛)이 가량(加良)과 함께 와서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였다. 군주(軍主)인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伊湌)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新州)의 군주인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였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138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크게 이겨서 좌평(佐平) 네 명과 군사 296백 명의 목을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百濟王明襛與加良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校勘 027都刀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眞興王 十五年

 

  이때 가야, 왜의 지원군도 몰살되었다. 신라가 이렇게 강경했던 것은 백제가 다시금 일어나지 못하도록 완전히 짓밟은 것이다.(원래 강국이라서) 창 위덕왕은 본인의 경거망동으로 아버지 성왕이 비운으로 가고 그 시신마저 온전하지 못한 한을 명복을 빌기 위해 바로 나성 옆에 능사를 창건하고 그 제사를 받들 제기로 금동대향로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듯 위덕왕대 백제는 불교적으로 위대한 예술품을 많이 만들었는데 또 하나가 10년 뒤 백마강 북쪽 부여 왕흥사지 출토사리기가 그것이다. 국보 327호로 사리기 명문에

 

정유년(577) 2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탑(또는 사찰)을 세우고 사리 2매를 묻었는데 신의 조하로 3매가 됐다.(丁酉年二月十五日 百濟王昌 爲亡王子 立刹 本舍利二枚 葬時神化 爲三)’

  마치 러시아 민속 나무인형 마트로시까처럼 원통형 청동사리기 속에 은제 사리호, 그 속에 금제 사리호가 들어있는 걸작이다. 이렇듯 백제 위덕왕은 불국토를 구현하고 이를 왜에까지 문물을 전한 장본인이다. 왜의 아스카데라 창건과 호류지 구세관음상은 모두 위덕왕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백제 걸작들이다.

 

“(원년, 588) 이 해 백제국에서 사신과 승려 惠總·令斤·惠 寔 등을 보내어 佛舍利를 바쳤다. 백제국이 恩率首信·德率蓋文·那率 福富味身 등을 보내어 調를 진상하고 아울러 佛舍利, 승려 聆照 律師·令威·惠衆·惠宿·道嚴·令開 등과 寺工 太良未太·文賈古子, 鑪盤博士將德白昧淳, 瓦博士麻奈文奴·陽貴文·㥄貴文·昔麻帝彌, 畫工 白加를 바쳤다.001蘇我馬子宿禰가 백제 승려들을 초청하여 受戒의 법을 묻고, 善信尼 등을 백제국 사신 恩率首信 등에게 부탁하여 보내어 學問을 배우도록 하였다. 飛鳥衣縫造의 선조 樹葉의 집을 허물어 비로소 法興寺를 지었다. 이 땅은 飛鳥眞神原이라 이름하기도 하고, 또한 飛鳥苫田이라고도 일컫는다.((元年) 是歲 百濟國遣使幷僧惠總·令斤·惠寔等 獻佛舍利 百濟國遣恩率首信·德率蓋文· 那率福富味身等 進調幷獻佛舍利 僧聆照律師·令威·惠衆·惠宿·道嚴·令開等 寺工太良未太· 文賈古子 鑢盤博士將德白昧淳瓦博士麻奈文奴·陽貴文·㥄貴文·昔麻帝彌 畫工白加蘇我馬子宿禰 請百濟僧等 問受戒之法 以善信尼等 付百濟國使恩率首信等 發遣學問 壞飛鳥衣縫造祖樹葉之家 始作法興寺 此地名飛鳥眞神原 亦名飛鳥苫田)”-日本書紀 卷第廿一 橘豊日天皇 用明天皇, 泊瀨部天皇 崇峻天皇 元年(588)

 

  이처럼 왜와 각별했던 위덕왕은 삼국 중 가장 먼저 중국 북조와 통일제국 수와 연달아 교류하면서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기민하게 대응하며 백제의 중흥을 이끈 왕이었다. 태자시절 호기가 아버지 성왕의 죽음으로 불법에 귀의하여 자애롭고 신실한 왕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참조 : jtbc 차이나는클라스 160회 한국 고대사학자 권오영 교수, 서울대, 백제학회장 강연)

 

 

  10월 초, 사전 답사에서 둘러보지 못한 곳을 중심으로 찾아 보았다. 특히 청동기시대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길지를 택하여 집이든 무덤을 썼는데, 능산리고분군에 올라서 명당의 모습을 확인하였고, 토성으로 이루어진 부소산성의 성곽과 남문지를 확인하였다. 아울러 백제 마지막 충신 세 명을 모신 삼충사와 백제 멸망의 기록을 당대 기록한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 쓰여진 백제의 아름다운 균형미의 탑, 정림사지오층석탑을 찾아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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