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영응대군 묘 및 신도비

달이선생 2019. 10. 30. 10:00

영응대군 묘 및 신도비 [永膺大君墓-神道碑]

 

  시흥시 군자동 구준물(구지정) 마을에는 군자봉이 있고 그 산자락에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 묘가 있다. 영응대군은 세종대왕의 여덟째 왕자로 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사랑을 많이 받은 왕자로 알려져 있다. 묘소와 함께 신도비도 주목되는데, 신도비를 지은이가 우리가 잘 아는 간신 임사홍이다. 임사홍은 아버지 임원중이 당대 문장가로 유명하였고 그 영향으로 글을 잘 지었다. 영응대군의 사위 능성부원군 구수영의 맏딸이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에게 출가한 인연으로 임사홍이 비문을 짓게 되었다. 신도비에는 비각이 없었으나 최근에 세워졌다.

  영응대군 묘는 처음 경기도 양주군 건천면 군장리(경기도 양주시) 팔곡산(초장지[初葬址])에 있었으나 1900(광무 4) 안산군 마유면(시흥시 군자동 산70)으로 이장하였다. 영응대군 묘가 이장한 후 후손들이 많이 세거 하고 있다. 1968년 서울시 개발과 확장에 따라 관악구 봉천동에 있던 셋째 부인 연안 김씨(延安金氏)와 자손들의 묘를 옮겨 왔다. 마을 뒤의 군자봉(君子峰, 198.4m)은 지역에서는 영험한 산으로 금부대왕(김부대왕=경순왕)을 모신 시흥 군자봉성황제(경기도무형문화재 59)가 매년 음력 103일 정상에서 열리고 있다. 이곳은 옛 안산군의 읍치성황사지(시흥시 향토유적 14)1970년대까지만 해도 당집이 있었지만 화재로 불탄 이후로 재건되지 못하였다. 영응대군 후손들이 구준물 마을에 살면서 다수가 보존회를 꾸려서 보존하고 있다.

  영응대군 묘역에는 문인석, 장명등, 혼유석, 상석, 향로석, 고석의 옛 석물을 갖추고 있는데 화사석(불을 밝히는 부분)을 잃어버린 장명등과 문인석은 16세기의 특징이 있어 영응대군 사후에 만든 것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상석, 고석, 향로석은 1900년에 이장하면서 새로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 중앙의 묘표는 1968년에 세운 것이다. 그리고 2000년 조사 당시 쌍분으로 구성된 봉분에 호석이 둘렀다.

 

  

 

 

 

 

 

 

 

 

 

 

 

 

 

 

 

 

 

 

 

 

 

 

 

 

 

 

 

 

 

 

 

 

 

 

 

 

 

 

 

 

 

 

 

 

 

 

 

 

 

 

 

 

 

 

 

 

 

 

 

 

 

 

 

 

 

 

 

 

 

 

 

 

 

 

 

 

 

 

 

 

 

 

 

 

 

 

 

 

 

 

 

 

 

영응대군 신도비
유명조선국 영응대군 시호 경효공 신도비명 및 서문
통정대부 전 승정원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예문관 홍문관 직제학 상서원정 임사홍任士洪
이 글을 짓고 아울러 전액篆額을 씀


성화成化 3년(1467) 2월 2일 영응대군이 견지방리堅志坊里 사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3월
19일 갑신일에 양주楊州 군장리群場里에 장사지냈으니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이다. 3월 경자일에 창
선대부 청풍군淸風君 이원李源이 묘 앞에 비가 없으면 대군의 훌륭한 삶을 후세에 전할 수 없다고
하여, 충주忠州에서 돌을 실어다 갈고 다듬은 뒤, 나 임사홍에게 비명을 청하였다. 나는 인척의 정
리 상 더 사양할 수 없기에 삼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대군의 이름은 염琰이고, 자는 명지明之이다. 세종 장헌대왕의 여덟째 아들이다. 대군은 태어나
면서부터 용모가 수려하고 품성이 총명하였다. 세종께서 기특하게 여기어 항상 무릎에 앉히고 즐
거워하셨으며 지극히 아끼고 보호하셨다. 대군이 커서도 내려주는 물건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두터운 총애를 입었으며, 음식이 들어오면 반드시 대군에게 나누어 주고 먹기를 기다렸다가 잡수
시곤 하였다. 또 궁 밖에 나가실 때에는 꼭 데리고 다니며 잠시라도 떨어지지 않았다. 예전에 여
러 왕자들이 궁중에서 임금을 칭할 때 ‘진상進上’이라 하였는데, 대군에게만은 전교하기를 “너는 15
세 이전에는 나를 아버지라 부르고 어머니만 진상이라 불러도 된다”고 하셨으니, 사랑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세종께서 어느 날 저녁 대군에게 놀이를 보여주며 사람을 아로새긴 영등影燈을 설치하였는데,
불꽃이 잘못 번져 다 타버리게 되었다. 대군은 그때 다섯 살이었는데 그것을 가리키며 놀라서 빨
리 끄라고 외쳤다. 임금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영등에 새겨진 사람이 다칠까 두려웠습
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본래 경전을 좋아하는 성품이라 책 읽기를 욕심내
어 내려놓지 않았다. 시종들이 병이라도 날까 걱정하여 책을 숨겨놓으면 내어놓으라 말하였다.
경오년(1450) 2월 세종께서 승하하시니, 대군이 예법에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을 상하였다. 현릉
(顯陵: 문종을 말함) 또한 막내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여, 우애가 다른 아우들과도 달랐다. 궁중의 재물
을 내어 대군의 집으로 보내자 사양하고 받지 않으니, 억지로 주어 받게 하였다. 세조가 즉위한
뒤에도 더욱 돈독히 대하시며 늘 궐내로 불러들여 만나보았고, 며칠 동안 만나지 못하면 안부를
물으러 가는 내관이 길에 이어졌다. 열흘에 두세 번은 대군의 집에 찾아가 가족 간의 예로써 ‘대
군’이라 부르지 않고 어렸을 때의 자를 불렀다. 그리고 대군의 부인에게는 ‘제수씨’라 부르며 술을
내오라 부탁하여 담소를 그치지 않다가 해가 진 뒤에야 술자리를 마치곤 하였다.
대군의 병이 깊어지자 잠시도 마음을 놓지 않고 궁중의 의관 두 명으로 하여금 탕약을 시중들
게 하였고, 또한 대신에게 명하여 이조판서 한계희韓繼禧와 공조판서 원청元淸으로 하여금 살펴보게
하였으니, 모두 특별한 은혜였다. 부음을 전해 들은 뒤 임금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고, 상례에 보
내는 물건이 평소의 두 배나 많았다. ‘경효敬孝’란 시호를 내렸으며, 은천군銀川君 이찬李穳으로 하여
금 장례 일을 도맡아 돌보도록 하였다.
대군은 선덕宣德 갑인년(1434)에 태어나 34년을 살았다. 마음가짐이 침착하고 조용하였으며, 예
를 행함에 공손하고 신중하였다. 윗사람을 공경하고 친척들을 친애하였으며, 사람을 대하고 사물
에 접할 때 온화한 기색이 충만하였다. 책을 읽으면 대의大義에 통달하였고 서예와 그림을 좋아하
여 날마다 몇 폭을 그렸는데, 짐승과 화초를 눈으로 보고 그려도 실물보다 낫게 그렸다. 음악과
여색, 사냥매와 사냥개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급하게 말하거나 낯빛을 바꾸는 일도 없었다. 노비들
이 잘못을 저질러도 성내어 꾸짖는 일이 없었으니, 인후한 군자라 할 수 있다. 불행히도 하늘이
세월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길이 행복을 누리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부인은 여산礪山의 명문 송씨宋氏이며, 좌의정 복원復元의 딸로 대방부부인帶方府夫人에 봉해졌다.
1녀를 낳았는데, 길안현주吉安縣主에 봉해졌으며, 구수영具壽永에게 시집가서 5남 5녀를 낳았다. 장남
숭경崇璟은 참봉이며, 차남은 희경希璟, 승경承璟, 문경文璟, 길경佶璟 등이다. 맏딸은 병오년(1486) 진사
시에서 장원을 차지한 임희재任熙載에게 출가하였고, 2녀는 참봉 심광문沈光門에게 출가하였다. 3녀
는 안양군安陽君 이항李㤚에게 출가하였는데 성종대왕의 왕자이며, 4녀는 최?崔?에게 출가하였고,
5녀는 아직 어리다. 측실 소생으로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원源은 청풍군淸風君으로, 조원지趙元祉
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았는데, 맏이는 진사 유방柳房에게 둘째는 유광동柳光同에게 출가하였다.
그리고 후취로 목사 윤자영尹子濚의 딸을 다시 얻어 2남을 낳았는데, 첫째 단檀으로 화림수花林守이다.
그의 맏딸은 현감 배사종裵嗣宗에게 출가하여 3남 2녀를 낳으니 첫째 아들은 배윤겸允謙이고 둘째
아들은 윤공允恭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둘째 딸은 참봉 조은趙穩에게 출가하여 5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아름답다 우리 세종, 동방의 성군이로다.
덕은 요사(姚姒: 순임금과 우임금을 말함)와 짝하고, 다스림은 성왕成王·강왕康王보다 낫도다.
인仁을 쌓고 덕德을 쌓음이 과질爪瓞의 창성함과 같으니,
금지옥엽金枝玉葉과 같은 체악(棣萼: 형제)이 함께 향내를 뿜는구나.
우리 대군 덕성이 온화하고 선량하여,
영등影燈을 끄라 하며 사람 다칠까 염려했네.
소처럼 왕성해도 몸가짐은 각별하니,
서사書史를 탐독하여 진귀한 책 다 읽었네.
예의를 잘 지키며 충효를 간직하니,
명망이 하늘의 규장圭璋 같도다.
두 임금께 귀염받고 두루 총애 받았으며,
문종과 세조 우애가 더욱 두터웠도다.
보살핌은 융숭하고 하사품이 끝없구나.
하지만 하늘이 어찌 무심하여 이치 또한 망망한가?
묘소를 살펴보니 경기의 양주楊州로다.
산은 팔곡八谷이오 마을은 군장群塲이라.
푸른 언덕 휘감았는데 초목 또한 푸르구나.
자손은 천억千億인데, ????.
성대한 아름다움을 전하려 묘 옆에 비를 세우니,
지나는 길손은 공경할지어다! 이 비명碑銘의 문장을.


홍치弘治 11년 무오년(1498) 3월 임인일에 어모장군 행 용양위 부사정 박경朴耕이 씀
광무光武 4년 경자년(1900) 9월 17일 안산安山 군자산君子山의 서쪽 북동쪽 언덕에 이장한 뒤,
경신년(1920)에 14세손 이덕증李德增이 기록하고 16세손 이문수李文洙가 글씨를 씀

 

永膺大君神道碑
有明朝鮮國永膺大君 諡敬孝公 神道碑銘 幷序
通政大夫 前承政院都承旨 兼 經筳參贊官 春秋館 藝文館 弘文館直提學 尙瑞院正 任士洪撰 幷篆額


成化三年二月初二日, 永膺大君卒于堅志坊里私第, 以其年三月十九日甲申, 定于楊州治之群場里,
計今爲十二年, 三月庚子, 彰善大夫淸風君源, 以墓道無碑, 乃不能揚休於來世, 輦石忠原, □斷□□, 索
銘於士洪, 洪以姻婭之誼, 不復辭謹叙之. 曰, 大君諱琰, 明之其字, 我世宗莊憲大王第八子也. 大君生
而丰姿秀麗, 品性聰穎, 世宗奇之, 常置之膝上, 以爲娛嬉, 其所保護, 靡不至焉. 旣長, 寵眷日深, 錫賫
無等, 凡進膳羞, 必分而與之, 竢其食乃御. 如幸于外, 必隨之□□, 未嘗頃刻相舍. 先是, 諸王子在宮中
常稱上曰‘進上’, 至於大君則敎曰, “汝年十五以前, 呼我以父, 母曰‘進上’, 可也”. 其見愛重, 類如此.
世宗一夕爲大君觀玩, 設影燈, 有雕人物之狀, 火焰誤觸將燼. 大君方五歲, 指之驚駭, 亟諸撲滅. 上問
其故, 對曰, “恐傷人也”, 上益異之. 性嗜經籍, 貪讀不置, 侍者恐病, 隱其卷, 固出之而言. 庚午二月,
世宗上賓, 大君哀毀踰禮. 顯陵以年少最受重, 友愛異於諸弟, 至傾內帑, 輸之于第, 大君辭謝不受, 强
與之, 而後受之. 光廟踐祚, 眷顧益篤, 常引見闕內, 若數日不接, 中使問候, 連絡於道, 旬日之間, 幸其
第者再率, 用家人禮, 不大君, 以小字, 其夫人以嫂氏, 命酌相酬, 談笑袞袞, 竟晷乃罷. 及疾劇, 軫念不
少懈, 命內醫二人, 常侍湯劑, 又命大臣, 吏曹判書韓繼禧及又工曹判書元淸視之, 皆異恩也. 訃間, 上
悲悼不自勝, 賻贈倍常, 賜謚敬孝, 命銀川君穳, 監庀葬事. 大君生於宣德甲寅, 得年三十四, 秉心沈靜,
執禮恭謹, 敬順兄長, 親愛姻族, 待人接物, 和氣挹掬. 讀書通大義, 又好書畫, 日模寫數紈, 翎毛花卉,
目輒畫之過眞, 不喜聲色鷹犬, 亦無疾言遽色. 僕隷有過, 未嘗譴怒, 可謂仁厚之君子. 不幸天嗇其年,
不克永幸福祿, 是可恨已. 配, 礪山望族宋氏, □左議政復元之女, 封帶方府夫人. 生一女, 封吉安縣主,
即具壽永配, 生五男五女. 男長曰崇璟, 今參奉, 次希璟, 次承璟, 次文璟, 次佶璟. 女長適任熙載, 丙午
進士居魁, 次適沈光門, 今參奉, 次適安陽君㤚, 成宗大王子也. 次適崔□, 餘幼. 側室生一男二女, 男曰
源, 淸風君, 娶判事趙元祉女, 生二女, 長適進士柳房, 次適柳光同. 後娶牧使尹子濚女, 生二男, 長曰
檀, 花林守, 女長適縣監裵嗣宗, 生三男二女, 男長曰允謙, 次允恭, 餘幼. 次適參奉趙穩, 生五男一女,
皆幼. 銘曰, 懿我世宗, 寔君東方, 德媲姚姒, 治邁成康. 累仁積慶, 爪瓞攸昌, 金枝玉葉, 棣蕚聯芳. 惟
此大君, 德性溫良, 影燈之滅, 恐其人傷. 窺牛氣雄, 固己異常, 貪淫書史, 閱盡縹緗. 禮儀是蹰, 忠孝是
將, 令聞令望, 如圭如璋. 思媚兩殿, 徧承寵光, 顯陵光廟, 友愛彌彰. 眷注之隆, 錫賚無疆, 天何不吊,
理亦茫茫. 相彼玄扃, 維畿之楊, 山曰八谷, 里云群塲. 岡巒藍靛, 草樹亦蒼, 子孫千億, □□□□. 播玆
盛美, 樹石墓傍, 過者其式, 視此銘章.


弘治十一年戊午 春三月壬寅, 禦侮將軍 行龍驤衛副司正 朴耕書
光武四年庚子 九月 十七日, 移葬于安山治君子山西寅坐之原 後庚申, 十四世孫德增記, 十六世孫文洙書

 

 

  출처 : 시흥시 향토사료실,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시흥의 금석문-신도비명의 원문 표점. 번역-', 시흥역사문화총서2(동문인쇄출판, 2010)

 

 

 

출처: 시흥시의 역사와 문화유적(기전문화재연구원, 2000)

 

  영응대군 신도비의 건립연대는 '홍치11년 무오 춘 3월 임인'으로 1498년(연산군4)이다. 비신의 우측에 추기된 기사에 '광무4년경자9월17일'내용에 의하면 1900년 초장지 양주에서 이장하고 1920년 신도비를 보수하였다. 원래 신도비 양식은 연산군대 유행하던 방부이수양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의 귀부(58cm)는 이장하면서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1999년 기전문화재연구원 조사에서는 비각이 없었고 이후 새로 건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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