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204

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농림학교, 수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4

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 2019. 3. 3, 3. 9(2일 2차례 답사) 농촌진흥청과 함께 한국농업 발전을 이끈 것은 수원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1992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개칭), 일명 '수원 농대'이다. 원래 이곳은 전신인 농상공학교가 1904년 서울에서 개교하고 1907년 농림학교로 분리되어 수원으로 옮긴다. 이때부터 수원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수원농림전문학교 등 교명이 바뀌다 해방후 1946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정식 설치되면서 바야흐로 수원 농대의 역사를 열었던 학문의 전당이다. 그러나 2003년 9월 수원의 캠퍼스를 떠나 서울의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농업대학이 가지는 위상과 의미가 퇴색하였다. 옮겨간 이후도 농업생명과학대학으로 실질적인 연구가 필요하여 여전히..

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축만제[서호], 항미정) 3

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 2019. 3. 3, 3. 9(2일 2차례 답사) 전근대 수원은 화성시, 오산시까지 아우르는 큰 고을이었다. 수원(水原)이라는 한자 명을 보더라도 물이 풍부한 것을 알 수 있는데, 현재 수원시와 화성시 등에는 많은 저수지들이 즐비하다. 삼한시대 모수국(牟水國) '벌물'의 뜻으로 '수원'의 뜻인 '물벌'과 같다. '모수'도 물을 뜻하고 고구려의 '매홀(買忽)'도 물을 뜻하는 것처럼 고려 때 '수성(水城)', '수주(水州)'에서 현재의 수원으로 변천한 명실공히 물의 도시가 수원이다. 이런 수원이 근현대 농업에서 중요한 변화를 맞는다. 조선후기 정조가 화성행행을 하며, 화산에 아버지 장헌세자묘(현륭원, 현재 융릉)를 천봉하고, 이어 화성행궁과 화성성곽을 연이어 축조하였다. 또한 신도시..

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여기산, 우장춘, 정남규, 김인환 박사묘) 2

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 2019. 3. 3 농촌진흥청이 위치했던 서호 서쪽 구릉은 여기산으로 이곳은 청동기 원삼국기의 대단위 생활유적(집터, 부뚜막) 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한국 농업사의 큰 스승인 우장춘 박사와 농업진흥청 초대 청장 정남규 박사, 그리고 배고픔에서 해방시킨 벼의 혁명 '통일벼'의 아버지 김인환 박사의 묘가 있다. 입산이 통제되는 곳이라 쉽게 찾을 수는 없는 곳으로 입산금지 푯말이 서있는 초입에서 경사로를 올라가면 먼저 정면으로 우장춘 박사묘가 나오고 무덤 좌측 구릉에 김인환 박사 묘가 연이어 있다. 여기를 지나 올라온 만큼 더 가면 정상부에 정남규 박사의 묘가 자리한다. '씨없는 수박'으로 잘 알려져 있는 우장춘 박사, 실제 우리가 더 그를 가까이 대하고 있는 것은 바로 배추..

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권업모범장, 농촌진흥청) 1

근현대 농업의 산실 수원 2019. 3. 3, 3. 9(2일 3차례 답사) 전근대 수원은 화성시, 오산시까지 아우르는 큰 고을이었다. 수원(水原)이라는 한자 명을 보더라도 물이 풍부한 것을 알 수 있는데, 현재 수원시와 화성시 등에는 많은 저수지들이 즐비하다. 삼한시대 모수국(牟水國) '벌물'의 뜻으로 '수원'의 뜻인 '물벌'과 같다. '모수'도 물을 뜻하고 고구려의 '매홀(買忽)'도 물을 뜻하는 것처럼 고려 때 '수성(水城)', '수주(水州)'에서 현재의 수원으로 변천한 명실공히 물의 도시가 수원이다. 이런 수원이 근현대 농업에서 중요한 변화를 맞는다. 조선후기 정조가 화성행행을 하며, 화산에 아버지 묘를 천봉하고, 이어 행궁과 화성을 연이어 축조하고 수원이 명실공히 대도회지로 자족적인 신도시가 되도록..

연성촌사.. 박동량

연성촌사(蓮城村舍) 연성촌사는 조선 선조대 중신 박동량(朴東亮,1569~1635)의 손자인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남긴 시에서 시흥시 군자동 가능골과 비앞골을 이르는 말이다. 박세채는 시흥시의 가래울마을에 연고가 있는 양명학자 정제두(鄭齊斗)의 스승으로 이 마을 동쪽으로 가깝게 가래울이 위치한다. 그리고 박세채는 당대 소론의 영수였다. 노소분당과 갈등이 첨예하였으나 그는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손자인 송순석을 사위로 맞았을 정도로 평소 당론에 엄격하기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노소의 균형을 이루었다. 이러한 박세채 선생이 종손이자 사촌형인 박세교(朴世橋, 1611∼1663)가 있는 가능골과 비앞골의 연성촌사를 찾아서 시를 남겼다. 박세교는 금양위(禁陽尉) 박미(朴瀰)와 정안옹주(貞安翁主,..

윤강 선생 묘 및 신도비

윤강(尹絳, 1597~1667) 선생 묘(墓) 및 신도비 윤강 선생은 '안산윤씨'로 불린 안산지역의 명문가로 일군 인물로 가문이 현 시흥시 산현동에 대대로 세거하였다. 입향조는 윤승유(尹承柳)와 그 아들 성종의 부마 영평위(鈴平尉) 윤섭(尹燮)이지만 집안이 크게 현달하게 된 것은 증손 윤민헌(尹民憲,1562~1628)과 그 자손들이다. 윤강은 바로 윤민헌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특히 아들들이 모두가 문과(지인,지선,지완,지경,지인)에 올랐다. 그중 윤지선(尹趾善)과 윤지완(尹趾完)은 형제정승이 되어 가문의 위상이 높았다. 윤강의 아버지 윤민헌은 사림으로 파주 우계서실에서 수학한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제자였다. 당시 동생 윤민일(尹民逸)과 함께 사사하였..

안동 퇴계 유적 답사(퇴계 선생 묘)

안동 퇴계(退溪) 유적 답사 낙동가 지류인 토계천 하류에 이르면, 퇴계의 후손이 주로 모여 살았던 하계마을이 있고 건지산(搴芝山) 남쪽 봉우리 중턱에 퇴계 선생의 묘가 있다. 아파트 15층 높이와 거리에 해당하므로 숨이 찰 수 있다. 선생이 70세 되던 1570년(선조 3)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신축일 유시, 정침에서 돌아가다. 이날 아침에 모시고 있는 사람을 시켜서 화분에 심은 매화에 물을 주라 하였다. 유시 초에 드러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는 부축되어 일어나 앉아서 편한 듯이 운명하였다."-『퇴계집』 연보 퇴계 선생의 유언은 앞서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다. “첫째는 예장(禮葬)을 사양할 것이고, 둘째는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단지 조그마한 돌에다 그 전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

안동 퇴계 유적 답사(계상서당)

안동 퇴계(退溪) 유적 답사 낙동가 지류인 토계천 상류는 상계라고 하여 상계마을에 여러 퇴계 선생과 관련한 곳이 있다. 종택 맞은편으로 토계천을 건너면 고성이씨 탑동파 파조 이적의 추모 공간인 산천정사와 고계정이 있다. 고계정(古溪亭)은 퇴계의 10대 종손인 이휘영의 정자로 선생의 호인 고계를 따서 고계정이라 부르며 3개의 방과 대청마루가 있다. 백운서당(白雲書堂), 한서암(寒栖菴), 장서각(藏書閣)이 나란히 위치해 있으며, 한옥 숙박지로 개방하고 있다. 고계정이란 편액은 흥선대원군이 당호로 고계산방(古溪山房)이라 내렸으나 없어지고 현재 고계정이 달려 있다고 한다. 그리고 상계마을은 계상서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고자 애쓴 곳이다. 퇴계 선생이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던 계상서당(溪上書堂)이 있었다. 현재..

안동 퇴계 유적 답사(퇴계 종택)

안동 퇴계(退溪) 유적 답사 낙동가 지류인 토계천 상류는 상계라고 하여 퇴계 선생이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던 계상서당이 있었다. 그 곁에 현재 퇴계 선생 종택이 있다. 종택의 사랑채와 같이 손님을 맞이하고 회합을 하는 곳인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주자의 추월조한수[秋月照寒水]의 말로 천년을 내려온 마음이 가을 달빛에 비치는 한수와 같다는 의미, 옛 성인들의 마음을 이른다)의 안에는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 도학이 연원한 집)', '산남궐리(山南闕里, 궐리는 공자의 고향으로 이곳 산남이 궐리이다.)', '해동고정(海東考亭, 주자가 강학을 하던 고정과 같다하여 이곳이 해동의 고정이라) ', '이운재(理韻齋, 공자의 도학을 받아들여 퇴계가 완성한 이 여운을 기리는 집)', '완패당(玩佩堂, 마음에 간직한 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