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안동 퇴계 유적 답사(도산서원)

달이선생 2018. 11. 5. 14:46

안동 퇴계(退溪) 유적 답사

  도산서원은 산남의 중심 교육기관이자 성현을 모신 곳으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퇴계 선생이 낙향하여 계상서당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후학들은 너무 협소하여 늘 고민이었다. 결국 좋은 자리를 잡아 새로 서당을 연 곳이 '도산서당(1561, 명종 16년)'이다. 나이가 많건 적건 간에, 지위가 높고 낮건 간에 퇴계 선생은 손님이 온다는 기별을 받으면, 도산서당의  완락재(玩樂齋)에 앉아 책을 읽으며, 낮은 담 넘어로 손님이 오신다 싶으면 그 아래 강가까지 나아가 손님을 맞았다고 한다. 떠나 보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사람을 대할 때 퇴계 선생은 늘 공손히 먼저 인사로 대했고 맑고 온화한 표정으로 사람을 맞았다. 제자를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으며, 훈계와 꾸중보다는 늘 칭찬으로 배움을 인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퇴계 선생의 교육관을 잘 드러내는 시가 훈몽시다. 


訓蒙(훈몽) 

多敎等揠苗(다교등알묘)  많이 가르치는 것은 싹을 뽑아 버림과 마찬가지

大讚勝撻楚(대찬승달초) 큰 칭찬이 회초리보다 오히려 났네

莫謂渠愚迷(막위거우미)  자식에게 크게 어리석다 말하지 말고

不如我顔好(불여아안호) 차라리 보이게나 좋은 낯빛을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은 도산서당이 나온다.  퇴계 선생이 직접 써 내걸은 편액 '도산서당'이 소박하게 맞이한다. 그리고 서당 마루 한켠에 처마끝 덧되어 넓힌 부분이 보인다. 서당이 큰 것을 늘 염려한 퇴계 선생이 한양을 간 사이 제자들이 몰래 넓혔다고 한다.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자 찾는 전국의 후학의 발디딜 곳이 없어서 였을 것이다.


  도산서당에 앉아서 윤병택 선비문화수련원 지도위원의 설명을 들었다. 윤병택 위원은 퇴계 선생의 인애사상을 강조하며, 늘 아이들에게 칭찬하는 교육과 웃는 낯을 강조하였다. "종아리 치는 것보다 크게 칭찬하는 게 좋다"라고 하며, 퇴계 선생이 그러했듯이 실천을 강조하였고, 그리고 "말로하면 잔소리 생각하게 하면 공부다"라는 신념을 밝히며 퇴계 선생의 사상이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실천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설명하였다.



  도산서당 주변에는 퇴계선생이 자연물을 친구로 친근하게 이름을 붙여주어 서당 안 연못은 연꽃이 피는데 깨끗한 친구가 있는 곳이라 하여 정우당(淨友塘) 옆 사군자중 난초 대신 소나무를 심어 절개 있는 친구들이라고 절우사(節友社)로 불렀다. 

  도산서당을 높은 담이 둘러 고즈넉함이 떨어지는데 원래는 담이 낮아 퇴계 선생이 글을 읽다가 서당 아래 먼 발치서 손님이 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담이 낮았다고 한다. 지금의 사립문 높이였고, 복원을 너무 잘 못 했다. 서당 주변으로 퇴계 선생이 좋아한 매화나무를 가득 심었다. 뭐든 과하면 독이 된다고 선생이 보셨음 좋아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퇴계 선생의 매화 사랑은 대단하여 '매형(梅兄)'으로 불렸을 정도였다. 자신이 지은 매화시 91수를 모아 '梅花詩帖 : 매화시첩'이라는 시집(詩集)을 유묵으로 남겼고, 매화시도 75제 107수(시첩 62제 91수)로 가장 많다. 특히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1570.12.4.)에 본인의 불결한 모습을 매화분재에게 보이기를 싫어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하시고, 돌아가시기 직전(1570.12.8.아침)에는 “매화분재에 물을 주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겼을 정도였다.

  소설가 최인호의 '소설 유림'(6권 239쪽)에서 “생전에 그토록 상사하던 매분이었으므로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게 물을 주라는 퇴계의 유언은 이 세상에 모든 삼라만상이 너와 나의 대립관계가 아니라 둘이 아닌 하나라는 상생의 철학을 의미하고 있는 심오한 최후의 설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퇴계 선생의 매화 사랑을 두고 퇴계의 애절한 사랑이 이유라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단양군수 시절에 만났던 관기(官妓) 두향(杜香)과의 사랑이다. 단양군수로 부임한 48세의 퇴계가 18세의 두향이를 가슴에 담았다. 두향은 시(詩)와 서(書)와 가야금에 능했고 특히 매화를 좋아했다고 한다.






천원권 도안(출처 : 한국조폐공사)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출처 : 블로그 박영오 그림 여행(산수화 화첩기행)http://blog.daum.net/05sonamu/47


  도산서원 앞 시사단이  지금은 너른 호수 가운데 섬처럼 되어있지만 이곳은 낙동강변의 골짜기 였다. 이런 도산서원의 풍경을 겸재 정선이 실제 모습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이 천원권 새 도안이 된 『계상정거도 』이다. 이름은 퇴계 선생이 처음 서당을 열고 율곡과 만난 계상이라고 하였지만 풍경의 실경은 협소한 계상이 아닌 도산서당의 모습이다. 놀란에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의 판단에도 계상이 아닌 도산이라 하였다. 겸재 정선이 오기 한 것보다는  도산이나 계상이나 같은 산등성이에 위치한 곳으로 처음 이곳에 발디딘 선생의 발자취를 기념하여 이름 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풍광이 밤처럼 보이지만 역광에 따라 한낮이다.







  도산서원 강당인 전교당에서 백록동규를 현대화한 실천목록으로 학습을 하고 복식을 갖춰 뒷편 사당 상덕사에 퇴계 선생에게 알묘례를 행하였다. 보통 사당 출입인 동쪽문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나와야 하지만 도산서원은 중앙의 문으로 들어가 동쪽문으로 나온다. 이러한 것을 두고 김병일 이사장의 해석은 도산서원만의 특이점인데 이는 주향이 퇴계 선생이지만 동편에 종향으로  제자인 조목(趙穆) 선생이 있어서 예를 하는 사람들이 동쪽 문으로 들어가면 퇴계 선생보다 먼저 제자에게 예를 해야하는 꼴이 되므로 이를 방지하고 선생께 직접 예를 하는 중앙문 출입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서원장이기도 한 김병일 이사장은 덧붙여 "전교당이 강당인데 보통 양쪽에 방을 두고 동편을 원장실로 한다. 그런데 도산서원은 서쪽 방만 있어서 이곳을 현재는 원장실로 쓰고 있는데, 이도 퇴계 선생을 영원한 스승으로 모시는 것으로 후학들은 퇴계 선생이 영원히 원장이 된다는 의미에서 동쪽 방을 내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했다.

  서원은 퇴계 선생이 돌아가고 서당 위편에 지은 것이니 설득력이 있는 설명이다.
















  산남 즉, 영남을 얻으려는 자 누구를 만나리까? 바로 퇴계가 아닐까 한다. 조선후기 영민한 군주였던 정조가 영남의 선비들을 위무하고 왕권 강화를 도모하고자 많은 인재를 갈구하는데 바로 이곳 도산서원에서 특명으로 도산별과(1792, 정조 16년)를 치렀다. 이를 기념하여 비를 세운 시사단이다. 시사단은 현재 안동댐으로 인해 안동호 가운데 섬으로 남아있다. 도산서원의 풍광이 많이 바뀌었다.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프로그램으로 6일 새벽 5시 30분에 희망자에 한하여 모여서 퇴계 선생이 거닐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산길로 수련원에서 명명된 퇴계 명상길을 따라 도산서원에 왔다. 옛 성현이 거닐었던 길을 성현된 마음으로 걸어보고팠던 차에 좋은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