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안동 퇴계 유적 답사(계상서당)

달이선생 2018. 11. 5. 17:00

 

안동 퇴계(退溪) 유적 답사

 

  낙동가 지류인 토계천 상류는 상계라고 하여 상계마을에 여러 퇴계 선생과 관련한 곳이 있다. 종택 맞은편으로 토계천을 건너면 고성이씨 탑동파 파조 이적의 추모 공간인 산천정사와 고계정이 있다. 고계정(古溪亭)은 퇴계의 10대 종손인 이휘영의 정자로 선생의 호인 고계를 따서 고계정이라 부르며 3개의 방과 대청마루가 있다. 백운서당(白雲書堂),  한서암(寒栖菴), 장서각(藏書閣)이 나란히 위치해 있으며, 한옥 숙박지로 개방하고 있다. 고계정이란 편액은 흥선대원군이 당호로 고계산방(古溪山房)이라 내렸으나 없어지고 현재 고계정이 달려 있다고 한다. 

  그리고 상계마을은 계상서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고자 애쓴 곳이다. 퇴계 선생이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던 계상서당(溪上書堂)이 있었다. 현재 그곳에 사택이었던 한서암(寒栖菴)이 있고 그 우측 아래 계상서당, 좌측 아래 기숙사로 사용한 계재(溪齋)를 복원하고 있다.

  협소한 계상서당 때문에 많은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기 힘들자 지금의 도산서원 자리에 도산서당을 지었으나 퇴계 선생은 이곳을 없애지 않고 겨울바람 센 도산서당을 떠나 겨울에 머물렀고 결국 그 마지막도 이곳에서 마쳤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계상서당은 당대 최고의 수재 율곡이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자 3일간 머물렀던 역사적인 곳이다. 58세의 거목과 23의 생기발랄하고 의기양양한 천재 율곡의 만남..

  이러한 만남을 율곡 이이는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율곡 평생 퇴계 선생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그가 남긴 유사이다.

 

 

퇴계집 언행록 6 부록 유사(遺事) [이이(李珥)]


선생은 성품과 도량이 온순하고 순박하며 순수하기가 옥과 같았다. 성리의 학문에 뜻을 두었으므로, 젊어서 과거를 보아 급제하였으나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을사사화에 이기(李芑)가 선생의 명예를 시기하여 임금께 아뢰어서 관작을 깎아 버리니, 사람들은 모두 억울한 일이라 일컬었다. 그래서 이기는 다시 아뢰어 벼슬을 회복시켰다. 선생은 여러 간신들이 권세를 잡는 것을 보고 더욱 조정에 나설 뜻이 없어서,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명종은 그의 물러남을 아름답게 여겨, 여러 번 벼슬의 품계를 올려 자헌대부(資憲大夫)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예안(禮安)의 퇴계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스스로 퇴계라고 호하였다. 의식(衣食)은 겨우 유지하였으나 담박한 데 맛을 들여, 세리(勢利)와 분화(紛華)를 뜬구름같이 보았다. 만년에 도산에 집을 지으니, 자못 임천(林泉)의 흥취가 있었다. 명종 말년에 소명(召命)이 여러 번 내렸으나, 굳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명종은 이에 ‘어진 이를 불러도 이르지 않는다.[招賢不至]’라는 것을 시제(詩題)로 내어, 가까운 신하를 시켜 시를 지으라 하고, 다시 화공을 시켜 그가 사는 도산을 그려서 바치게 하였으니, 그 선생을 공경하고 사모함이 이와 같았다.
선생의 학문은 의리가 정밀하여 오로지 주자의 가르침을 따랐고, 그 밖의 여러 다른 학설도 분명히 알고 자세하게 통달하였으나, 주자의 학설로써 절충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언제나 한가히 혼자 있으면서 전분(典墳) 이외의 다른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고, 혹 때로는 수석(水石)을 찾아 거닐면서 생각한 바를 읊어 한가한 흥취를 나타내었다. 학자들이 혹 무엇을 물으면 곧 자기가 아는 바를 다 일러 주었고, 그리고 또 사람을 모아 자기 스스로 스승인 체하지 않았다. 보통 때에도 잘난 체하지 않아 조금도 남과 다른 것이 없는 듯하였다.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이나 사양하고 받는 경우에 있어서는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어서, 남이 무엇을 보내도 의가 아니면 끝내 받지 않았다.
지금 임금이 즉위한 초에, 조야(朝野)에서 모두 올바른 정치가 실현되기를 바랐으며, 사론(士論)은 모두 “선생이 아니면 임금의 덕을 성취시키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임금의 뜻도 선생에게 위촉하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쇠하고 글러서 유자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임금의 마음이 바른 정치를 하기에 정성되지 않고, 대신들도 학식이 없어 한 가지도 시험해 볼 것이 없음을 보고, 선생은 간절히 벼슬을 사양하여 꼭 물러나기를 결심하였다. 도산으로 돌아간 뒤에 한마디도 시정(時政)에 대해 언급하지 않자 세상 여론은 그래도 선생이 다시 나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자 선생이 갑자기 돌아가니, 나이는 70세였다. 조정이나 백성들은 모두 슬퍼하였고, 임금은 부고를 듣고서 못내 슬퍼하면서 영의정으로 추증하시고, 1등의 예로써 장사하게 하였다. 그 아들 준(寯)은 선생의 유언이라 하여 예장을 사양하였으나,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았고, 태학생 성균관의 학생 들은 제물을 갖추고 제문을 지어 가서 제사를 지냈다. 선생은 비록 별다른 저서(著書)는 없으나, 의론하는 가운데 성인의 모범을 펴 밝히고 현인의 교훈을 드러내 밝힌 것이 세상에 많이 행해지고 있다. 중종 말년에 화담 서경덕(徐敬德)이 도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으나, 그의 학설은 기(氣)를 이(理)로 인정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선생은 그것을 잘못이라 하여 낱낱이 설명하여 분변하니, 그 말이나 뜻이 밝고도 환해서, 배우는 자들은 모두 그것을 깊이 믿었다. 선생은 유학의 종장이 되어, 조정암(趙靜菴) 뒤로는 그와 비교할 사람이 없었다. 그 재주나 그릇[器局]은 혹 정암에 미치지 못할지 모르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정미함을 다하기는 정암이 그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

(출처 : 고전번역DB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L&cate2=&dataGubun=최종정보&dataId=ITKC_BT_0144B_0500_010_0030)

 

 

 

 

 

 

 

 

 

 

 

 

  선비문화수련원에서 보면 맞은편으로 왼쪽은 산천정사이고 오른쪽은 고계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