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안동 퇴계 유적 답사(퇴계 선생 묘)

달이선생 2018. 11. 6. 09:00

안동 퇴계(退溪) 유적 답사

 

  낙동가 지류인 토계천 하류에 이르면, 퇴계의 후손이 주로 모여 살았던 하계마을이 있고 건지산(搴芝山) 남쪽 봉우리 중턱에 퇴계 선생의 묘가 있다. 아파트 15층 높이와 거리에 해당하므로 숨이 찰 수 있다. 

  선생이 70세 되던 1570년(선조 3)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신축일 유시, 정침에서 돌아가다. 이날 아침에 모시고 있는 사람을 시켜서 화분에 심은 매화에 물을 주라 하였다. 유시 초에 드러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는 부축되어 일어나 앉아서 편한 듯이 운명하였다."-『퇴계집』 연보

 

   퇴계 선생의 유언은 앞서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다.

 

“첫째는 예장(禮葬)을 사양할 것이고, 둘째는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단지 조그마한 돌에다 그 전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략하게 향리와 조상의 내력과 지행(志行)ㆍ출처(出處)를 쓰되, 《가례(家禮)》중에 말한 것처럼 하라. 만약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짓는다면, 서로 아는 기고봉 같은 이는 반드시 실상 없는 일을 장황히 늘어놓아 세상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전부터 스스로 뜻하였던 것을 기술하려고 먼저 명문(銘文)만을 지어 놓았고, 그 나머지는 이럭저럭하다가 마치지 못하였는데, 초한 글이 여러 초서 속에 함부로 섞이어 있을 것이니, 찾아내거든 그 명문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들이 사방에서 보고 듣고 있으니, 너의 거상(居喪)하는 것도 다른 예가 아니니, 모든 일과 법도를 예절 아는 유식한 사람에게 묻는다면, 지금 세상에도 마땅하고 옛날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퇴계집』 연보

 

 

 

 

 

 

 

 

 

 

 

 

 

 

 

 

 

 

 

퇴계 선생 묘를 오르는 중간에는 며느리 봉화 금씨 묘가 있다. 봉화 금씨는 유언으로

 

"시아버님 살아계실적에 내가 모시는데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사후에 다시 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내가 죽거든 나의 시체는 반드시 아버님 묘소 가까운 곳에 묻어 주기 바란다”

 

하여 선생 묘 아래 무덤을 썼다. 봉화 금씨는 선생이 돌아가고 이듬해인 1571년 2월에 죽었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불과 2개월만이다. 퇴계 선생은 장남 이준을 이웃 마을 외내로 장가를 보냈다. 예안훈도(禮安訓導)를 지낸 봉화 금씨 금재(琴梓)의 딸로 금재는 외내에 광산 김씨 김효로(金孝盧)의 사위로 처가입향하였다. 당시 양가 혼례에서 봉화 금씨 문중의 반대가 심하였다. 선생이 비록 문과로 검열을 지냈다 하나 집안이 한미하다고 하여 퇴계 선생이 사돈댁을 찾았을 때 바깥사돈만 맞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서는 이후 앉았던 자리를 물로 씻고 대패로 밀어 모욕을 당했다. 이처럼 사돈댁에서 예의에 어긋난 일이 있고 나서도 며느리를 생각해서 그 허물을 다 묻어 두고 평생을 아끼며, 살았다. 이러한 퇴계 선생의 성품이 며느리에게 큰 감동이었고 평생을 시아버지 은혜로 알았을 것이다.

 

 

 

 

 

 

 

 

 

 

 

 

 

 선조 5년 (신미) 3월 임오, 예안 건지산(搴芝山) 남쪽에 장사 지내다. 자좌오향(子坐午向 정남향)의 언덕이니, 선생의 살던 곳과 거리가 2리(里)쯤 되는 곳이었다. 아들 준(寯)이 유언이라 하며 두 번이나 글을 올려 예장을 극력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묘비에는 유언대로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 썼다. 처음에 선생이 돌아가신 뒤 원근에서 조상하기를 미처 하지 못할까 염려하였으며, 비록 평소에 일찍이 문하에 와 수업하지 못한 자라도 모두 슬퍼하여, 동네에서 서로 조상해서 탄식하였고, 무지한 백성과 천한 사람들도 비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여러 날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장사 때에는 사대부로서 모인 사람이 3백여 명이었다.- 퇴계집 연보

 

 

 

 

 

 

  퇴계 선생의 묘앞에 묘갈(墓碣)을 세우고 퇴계 선생 생전에 쓴 명문을 전면에 '퇴도만은 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 眞城李公之墓)'라 썼다. 묘갈명은 선생의 자명(自銘)과 기고봉(寄高峰)이 지은 묘갈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 진사(進士)를 진사(晉士)로 표기된 것은 후서(後序)한 기대승의 부친 휘(諱)자가 진(進)이므로 피휘(避諱)한 것이다.

  퇴계 선생의 묘갈은 이후 안동 선비의 전범이 되어 선생 묘갈 이상으로 큰 비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퇴계 선생을 존경하는 의미였을 것이다.

 

 

 

 

 

 

 

 

 

 

 

 

‘양진암고지(養眞庵古址)’는 퇴계 선생이 46세가 되는 1546년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 작은 집을 짓고 살며 양진암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1904~1944)의 고향 마을이 이 하계마을이다. 남쪽으로 흐르는 물이 낙동강이다. 

본관은 진성(眞城), 퇴계 이황 선생의 14세 손이다.  육사의 어머니 김해 허씨는 한말 의병장 허위의 조카이다.  또한 임청각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부였던 허은 또한 허위의 재종조카였다. 이육사는 어려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어린 육사에 대한 어머님의 가르침이었다. 이육사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당숙 이훈호는  "성격이 대쪽같아서 어른이 야단쳐도 자신은 잘못했다 항복하지 않았다. 그가 한 행동은 나름대로 옳게 판단한 뒤에 실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조부 치헌 이중직은 일찍이 개화하여 노비를 풀어주고 땅을 나누어 준 사람이다. 육사는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