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 답사,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추사, 그가 완성한 서체가 추사체로 조선 대표의 서체로 추앙되듯 흔히 우리는 김정희를 추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추사 선생과 그를 따르던 후학들은 김정희를 완당이라고 부른다. 완당은 김정희가 스승으로 모신 청나라 학자 완원의 제자라는 뜻이다. 이렇듯 김정희는 추사, 완당 등 그가 쓴 당호가 무려 3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예산의 추사 고택은 김정희로 인해 유명하였지만 실제로 이 고택은 그의 증조부 월성위 김한신 때문이다. 김한신은 영조의 부마로 화순옹주의 남편이다. 국혼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아버지 김흥경이 영의정을 지낸 명문이었기 때문이다. 딸 화순옹주를 아낀 영조는 이 저택을 지을 당시 충청도 53개 군현에게 한 칸씩 비용을 내게 하여 총 53칸의 건물지었다. 일찍 요절한 월성위 때문에 부왕 영조의 만류에도 애도와 금식으로 화순옹주 역시 절명하였다. 이 소식에 영조는 큰 충격을 받고 불효라고 정려하지 않았다. 후에 정조가 정려하고 홍문을 내렸다. 조선왕실의 유일한 열녀이다.
월성위와 화순옹주가 요절한 탓에 제사를 위해 조부 김이주를 양자로 하여 김정희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그의 집안은 경주김씨로 영조의 계비가 되는 정순왕후와 가까운 집안이었다. 고택을 기준으로 동편 구릉에 월성위와 화순옹주의 묘, 화순옹주 홍문이 있다.
추사 고택은 월성위와 화순옹주의 예산 저택으로 김정희가 태어난 곳이다. 조정에 나간 이후 서울 월성위궁에 살면서도 선조의 유택이 있어 자주 왕래하였다. 현재의 고택은 일부를 복원한 것이다.
내포 답사, 추사 김정희 선생 묘 및 기념관
고택 옆으로 출생에 얽힌 우물과 그의 묘가 있다. 그 아래에는 작은 기념관이 있어서 추사의 이력을 소개하고 있다.
비문 완당선생경주김공휘정희묘
추사, 그가 완성한 서체가 추사체로 조선 대표의 서체로 추앙되듯 흔히 우리는 김정희를 추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추사 선생과 그를 따르던 후학들은 김정희를 완당이라고 부른다. 완당은 김정희가 스승으로 모신 청나라 학자 완원의 제자라는 뜻이다. 평생 스승으로 모신 청나라 대학자 완원 선생은 당대 유교경전의 대가였으며 1810년 김정희와 만남에서 "젊은 사람이 매우 영리하다."라고 평했을 정도로 김정희의 뛰어난 자질을 알아봤다. 이에 김정희도 완원 선생의 이름을 따서 완당이라는 호를 썼을 정도로 각별하였다. 이렇게 맺어진 청 석학들과의 만남은 추사 평생의 벗이자 삶의 지표였다. 이렇듯 김정희는 추사, 완당 등 그가 쓴 당호가 무려 300개가 넘는다.
그리고 추사박물관에서 소장 '추사필담첩'(2020)에 따르면 그간 '추사'를 호(號)라고 널리 알려졌지만 김정희 본인이 '추사'를 이름의 별칭으로 16세에 관례를 치르고 받는 자(字)라고 밝힌다. 이는 아버지 병조판서 김노경이 1809년 순조9년 동지사로 갈 때 부친을 호위하는 자제군관 자격으로 북경행을 하면서이다. 바로 이 시기에 청나라 문인과 주고 받은 필담에서이다. 재밌는 것은 김정희 인생의 전기를 맞았던 청 북경행에서 김정희의 자인 추사가 그들의 풍속에 따라 널리 불려지고 조선에 와서도 이러한 유명세로 자가 호처럼 쓰였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당시 호는 보담재이다.
출처 : '청나라에 간 추사 김정희가 말했다 "'추사'는 나의..." KBS뉴스 2022.11.29.(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612323&ref=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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