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서원은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아버지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을 기리고자 친우인 백인걸(白仁傑)과 이이(李珥), 그리고 그 문인들이 세운서원이다. 세울 당시는 청송서원이었고 '파산'으로 효종대 사액을 받은 것이다. 성수침은 조광조의 제자로 기묘사림인데 이때 처가에 낙향하였다.(파평윤씨 본향)
파산서원 자리는 성수침(죽우당)에 이어 성혼이 서실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우계서실(牛溪書室)'이다. 우계는 앞의 눌노천을 이르는 것으로 성혼은 일찍이 이곳에 살며, 후학을 양성하고자 서실을 열고 이름하였다. 현재 파산서원 왼쪽의 수풀이 우거진 곳이 서실터이고, 비석을 세워놓았는데 확인이 어렵다.(공덕비와 우계서실 유허비) 우계서실에 대해서는 성혼의 외증손인 윤증이 지은 '우계서실 중수기'가 전한다.
우계서실에서는 많은 제자들이 수학하였다. 특히 시흥지역에서는 시흥시 산현동에 우거한 파평윤씨인 윤민헌(尹民憲, 1562~1628)과 동생 윤민일(尹民逸)이 대표적이다. 눌노리의 서실에서 공부한 윤민헌은 '스승이 매양 명리(名利)를 쫓지 말라'고 타일렀다는 가르침이 전한다. 윤민일은 스승 성혼과 인척으로도 얽혔는데 성혼의 외손자인 윤선거(尹宣擧, 1610∼1669)가 그의 외손주사위이다.(사위 이장백) 이처럼 성혼의 학맥은 집안대대로 이어져 특히 윤민헌의 가계에서 현달하였다. 아들 윤강(尹絳, 1597-1667)이 판서에 올랐고 그 아들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특히 윤지선(尹趾善, 1627~1704), 윤지완(尹趾完, 1635~1718)은 형제정승으로 유명하다. 윤지완은 소론의 영수 박세채와 더불어 정국을 주도한 숙종대 명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한편,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 1629~1714)은 시흥시 화정동 가래울에 낙향하여 살던 양명학자 정제두(鄭齊斗 1649~1736)와 그를 따라 낙향해 있던 윤지완의 사위 지포 박심의 스승으로 이들을 매우 아꼈다.
이렇듯 우계 성혼은 소론 학맥의 종주이자 시흥지역 소론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현재 파산서원 경내는 늘노천 둑방길로 가다가 입구의 하마비를 지나면 정면으로 홍살문과 서원 현판을 단 사당, 오른쪽의 종중 사택, 왼쪽으로 재실이면서 강학당으로 쓰이는 찰륜당(察倫堂)이 있고 옆으로 경현단이 있다. 사당은 성수침을 주벽으로 좌우에 성수종·백인걸·성혼을 배향하였다. 경현단(景賢壇)은 지역유림들이 조감(趙堪), 성문준(成文濬), 신민일(申敏一) 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제단을 만들고 제향을 받드는 곳이다. 1897년(순조 7년)에 사액되었다. 단의 내부에는 오른쪽부터 옥천 조선생(玉川 趙先生), 창랑 성선생(滄浪 成先生), 화당 신선생(化堂 申先生)이라고 쓴 비석과 상석이 놓였다. 현재 건물은 1988년 무진년(2월 16일)에 파산서원 유림들이 다시 건립하였다.(파산서원장 안병상 등 9인)
(사진 : 공덕비와 우계서실 유허비 / 파주싱싱뉴스 2018. 8. 21 기사)
명재유고 제32권 / 기(記)
우계서실(牛溪書室) 중수기(重修記)
우계서실은 바로 우리 묵암(默庵) 선생이 도학(道學)을 강하던 곳이다. 선생의 나이 삼십 이전부터, 그의 풍도(風度)를 들은 자들이 배울 만한 스승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원근에서 앞다투어 책 상자를 지고 찾아왔다. 선생은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고 즐거워하였으므로 오는 학생들을 맞이하기 위해 살던 집의 동편에다 세 칸 남짓의 집 한 채를 지었다. 그중에 서쪽 방이 3분의 2를 차지하고 동쪽 방은 대청(大廳)으로 대신하였다. 그 북쪽과 좌우에는 벽을 쌓아 서실을 따뜻하게 하였고 남쪽에는 네 개의 창과 두 개의 문을 내어 서실을 밝게 하였다. 또 남쪽의 창 밖에는 판자를 깔아 넓게 쓸 수 있게 하였고 화덕 위에서 용마루까지 흙으로 둘러막아 불을 쬘 수 있게 하였다. 그 체제를 보면 이처럼 검소함을 근본으로 하면서 실용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완성한 뒤에 스스로 편액을 ‘우계서실’이라고 쓰고 손수 ‘서실에서 지켜야 할 예의[書室之儀]’라는 이름의 22개 조의 규칙을 만들었는데, 지금 문집에 보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24년 뒤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그 병화(兵火)가 미친 곳마다 다 잿더미가 되었으나 서실만은 다행히도 재난을 피하였다. 일기(日記)에 나오는 이른바 “계사년(1593, 선조26) 5월에 주상(主上)의 명을 받아 정릉(靖陵)을 봉심(奉審)한 뒤에 집에 이르러 보니, 옛집은 모두 불타 버리고 단지 서실만 남아 있었다. 죽우당(竹雨堂) 뜰 안으로 들어가서 한동안 슬피 통곡하고 땅속에 묻어 두었던 신주(神主)를 꺼내어 서실에 봉안하였다.”라고 한 것이 이를 말해 주는 것이다. 난리가 안정되고 나서 을미년(1595, 선조28) 봄에 선생은 다시 우계로 돌아왔는데 그대로 서실을 사당으로 쓰게 되었다. 그 이유는 큰 난리를 막 겪은 터라 사당을 수선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인데, 그 뒤로 2대를 지나는 동안 가난으로 인해 더욱더 사당을 지을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증손인 성희주(成熙冑) 씨 대에 와서 비로소 재력(材力)을 모아 사당을 건립한 뒤에 신주를 봉안하였고 서실도 옛 모습대로 복구하여 썩은 서까래와 망가진 기와를 바꾸고 벽도 새로 발랐다. 그리고 선생께서 손수 크게 ‘우계서실’이라고 썼던 네 자의 옛 편액 글씨를 다시 찾아내어 서각(書刻)한 다음에 내다 걸었다. 들보와 도리도 바뀐 것이 없고 뜰의 섬돌도 옛것 그대로여서 완연히 옛날 모습 같았다. 이해가 숭정(崇禎) 기원 후 경술년(1670, 현종11)으로 서실을 세운 융경(隆慶) 경오년(1570, 선조3)부터 계산해 보면 101년이 된다.
성희주 씨가 근간에 한 번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청송(聽松)께서 처음 이곳 파산(坡山)에 거처하신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합해서 모두 5대입니다. 우리 선조의 유택을 계승하여 지금까지 우리 고향을 지키며 보전하고 있으니, 어찌 조상이 끼친 영향 때문이 아니겠으며 후인들에게 있어서는 큰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앞 시내와 뒷산의 나무 하나 돌 하나에도 선조의 발자취가 깃들어 있고 대대로 전해 오는 유물 아닌 것이 없습니다만, 유독 이 서실의 경우에는 더더욱 남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 서실을 지을 때 선생께서는 직접 지켜야 할 규칙을 정해 주시고는 이곳에서 시서(詩書)를 읽고 예악을 익히면서 24년 동안 강학하셨습니다. 이 서실은 임진왜란 후에 다시 병자호란을 겪었으면서도 홀로 병화를 입지 않고 보존된 것을 보면 마치 신물(神物)이 지켜 주고 보호하여 적들을 막은 듯하여 참으로 기이하게 여겨집니다. 지금 나는 다행히 국가의 유학자를 존숭하고 현자를 본받고자 하는 성대한 예전(禮典)에 힘입어 벼슬길에 나아갔고 그 결과 2대 동안 경황이 없어 행하지 못했던 일을 거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섯 도리[五架]에 네 감실(龕室)이 있는 일반적인 체제를 제대로 갖추어 사당을 만든 다음 우리 선조의 제사를 공경히 행할 수 있도록 하고, 이 서실은 다시 독서하는 곳으로 삼아 옛날에 보관되어 있던 서적을 수습하여 다시 보관함으로써 다행히 권위가 실추되는 일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우리 자손 중에 책을 끼고 이곳을 드나드는 젊은 사람과 학동들이 20명 정도는 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아마도 우리 조상들이 후손들을 계도하고 보우하여 묵묵히 이끌어 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가 우리를 위해 이런 사실을 기록하여 우리 자손들에게 보여 주고 그로 인해 권면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면전에서 감탄하면서 “공은 참으로 효자이십니다. 참으로 효성스럽습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예전에 우계 선생이 백중열(白仲悅)에게 준 편지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편지에 보면 “주자(朱子)는 고정(考亭)에 집을 지어서 선대의 뜻을 받들었고, 이천(伊川)은 하남(河南)에서 별세하였는데 자손들이 대대로 그곳에서 살았으니, 옛사람의 깊은 뜻을 헤아려 보면 고향 마을을 영원히 보전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예기(禮記)》의 이른바 “음악은 그것이 배태된 근원을 좋아하고 예(禮)는 처음 근간이 된 것을 잊지 못한다.”라는 것이며 효도의 한 가지 일이라 할 수 있다. 또 선생이 창랑옹(滄浪翁)에게 준 편지를 읽었는데 그 편지에 보면 “자식에게 독서를 가르쳐 밤낮으로 부지런히 읽게 함으로써 우리 집안에 대대로 전해 오는 학문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문헌(文獻)과 시서(詩書)가 이후로 계속 끊어지지 않게 하라.”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중용》의 이른바 “선조의 뜻을 잘 계승하고 선조가 하던 일을 잘 이어간다.”라는 것이며 효도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공(公)이 이미 서실을 중건하여 앞 단락에서 말한 선조의 뜻을 잘 계승하였고 또 선조의 가르침과 사업을 이어받는 데에 뜻을 두어 뒤 단락에서 말한 선조의 훈계를 잊지 않고 있으니, 어찌 부족함이 없는 큰 효심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앞 단락에서 말한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 해도 뒤 단락에서 말한 일은 실제로 계속해 나가야 할 일이니, 또한 다른 것을 추구할 수는 없는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선생이 만드신 ‘서실에서 지켜야 할 예의[書室之儀]’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이른바 독서, 의리에 대한 강론, 의론에 대한 사색 등이 바로 옛날로 치면 이치를 연구하는 것[窮理]이며, 이른바 체인(體認)하고 실천하는 것과 ‘근(勤)’ 자와 ‘근(謹)’ 자를 가슴에 새기는 것이 바로 옛날로 치면 힘써 행하는 것[力行]이며, 이른바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정제하는 것과 단정하고 엄숙한 것과 마음이 조금이라도 방만하고 안일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옛날로 치면 경에 거하는 것[居敬]이니, 여기에는 아래로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배우는 방법이 거의 모두 갖추어져 있어 이를 통해 위로 천리(天理)를 깨달을 수 있다. 이른바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학문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다시 어찌 다른 것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효는 온갖 행실의 근본이면서 우리 성씨(成氏) 집안에 대대로 전승되는 미덕이다. 따라서 나는 선생의 서실에 들어가 선생의 책을 외우는 선생의 자손들이 앞으로 그 자리에 나아가 그 예를 행하면서 선생이 훌륭하게 여겼던 분을 존중하고 선생이 가까이했던 분을 친애하다 보면 감동하고 존모하고 격려되고 흥기되는 마음을 자연히 억제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진실로 기록을 남겨 후세를 경계시키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지만 또한 굳이 따로 권면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또 이곳과 관련하여 감개무량한 것이 있다. 나의 조부께서 이조 참의로 있을 때 처음 이곳에 집을 마련하셨는데 그때 뜰에 소나무 여덟 그루가 있었다. ‘팔송(八松)’이라는 자호(自號)는 대체로 여기에서 뜻을 취하신 것으로 지금 우계 남쪽에 그 유허(遺墟)가 있다. 우리 선친께서도 일찍이 이곳에 와서 살고 싶어 하면서 그것을 시로 표현하신 적이 있는데, 그중에 “백년의 도(道)가 실추되지 않았으니 내 이 언덕에서 늙어 가고 싶어라.[百年文不墜 吾欲老斯丘]”라는 구절이 있다. 끝내 그 뜻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셨지만 자식으로서 감히 잊을 수 없는 일이므로, 만약 천지신령의 도움으로 죽기 전에 이곳에 내려와서 우리 선조 양대(兩代)의 소원을 내가 받들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우리 성씨(成氏) 제현들과 선생의 서실에 귀의하여 선생의 혼령을 대하면서 위에서 말했던 것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유감없이 내 여생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써서 벽에 이름이 오르는 것을 행운이라 여기기에 졸렬한 글솜씨에도 사양하지 않은 채 감히 이렇게 그 전말을 서술하여 기문을 짓고 아울러 마음속으로 느낀 바를 이렇게 적어 덧붙이는 바이다.
숭정 기원 후 46년 계축년(1673, 현종14) 9월 하순에 선생의 외증손으로 파평 사람인 후학 윤증은 삼가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