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내포 답사, 추사 김정희 선생 유적

달이선생 2018. 10. 25. 13:30

내포 답사

 

『擇里志』 내포(內浦)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제일 좋은 곳이다. 공주에서 서북편으로 이백리쯤 되는 곳에 가야산(伽倻山)이 있다. 서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경기도 바닷가 고을과 큰 못(大澤)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했는데, 곧 서해(西海)가 쑥 들어온 곳이다. 동쪽은 큰 들판이고 들 가운데 또 큰 개(浦) 하나가 있다. 개는 유궁진(由宮津, 삽교천 지역)이라 하며, 밀물이 가득 차지 않으면 배를 이용할 수가 없다. 남쪽은 오서산(烏棲山)이 막아, 다만 산 동남편으로 공주와 통할 뿐인데, 오서산은 가야산에서 온 산맥이다.

가야산의 앞뒤에 잇는 열 고을을 함께 내포라 한다. 지세가 한 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년 병자년 남북 두 차례의 난리에도 여기에는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며, 또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기 때문에 부자(富者)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士大夫) 집이 많다.

그러나 바다 가가운 곳은 학질과 염병이 많으며, 산천이 비록 평평하고 넒으나 수려한 맛이 적고, 구릉(丘陵)과 원습(原隰)이 비록 아름답고 고우나, 천석(泉石)의 기이한 경치는 모자란다.

오직 보령(保寧)만은 그 중에서 산천이 가장 훌륭하다. 고을의 서편에 수군(234쪽)

절도사(水軍節度使)의 군영이 있고 영 안에 영보정(永保亭)이 있다. 호수와 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활짝 틔어서 명승지라 부른다.

(보령의)북쪽에는 결성(結城)과 해미(海美)가 있고, 서족으로 큰 개 하나를 건너면 안면도(安眠島)가 있다. 이 세 고을은 가야산 서쪽에 있다. 또 북쪽에는 태안(泰安)과 서산(瑞山)이 있는데, 강화도와 작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서로 마주하고 있다. 서산 동편은 면천(沔川)과 당진(唐津)이고, 당진 동쪽으로 큰 개를 건너면 아산(牙山)이다. 북쪽으로 엇비슷하게 경기도 남양(南陽)의 화량(花梁)과 작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이 네 고을은 가야산 북쪽에 있다. 가야산 동쪽은 홍주(洪州)와 덕산(德山)인데, 두 고을은 모두 유궁진 서쪽에 있다. 개 동쪽에 있는 예산(禮山)․신창(新昌)과 함께 뱃길로 한양과 통하며 매우 빠르다. 홍주의 동남쪽은 대흥(大興)과 청양(靑陽)인데, 대흥은 곧 백제의 임존성(任存城)이다. 이 열 한 고을은 모두 오서산 북쪽에 있다.

-이문종, 『이중환과 택리지』(도서출판 아라), 2014, 234~235쪽.

 

  내포에 해당하는 지역은 내포의 중심지 가야산 앞뒤의 열 고을을 내포라 하여 서쪽에 보령, 결성, 해미, 북쪽 태안, 서산, 면천, 당진, 동쪽 홍주, 덕산, 예산, 신창이다. 이 중 예산을 다녀왔다.

  충청남도 예산군은 내포 지역 중 가야산 동편에 위치하며, 중심에 삽교천이 흐르고 넓고 완만한 삽교평야가 펼쳐져 있다.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어물과 농산물)하여 윤택한 지역이었고 특히 예산사과가 유명하다.

  역사적으로는 충의 상징인 매헌 윤봉길의사가 나고 자란 지역이며, 의병항쟁에 일선에 있다가 대마도에서 순국한 최익현 선생의 묘가 일제로부터 쓰여진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산은 중요 벌열 가문도 명성이 자자했는데, 바로 추사 김정희의 증조인 경주김씨 월성위 김한신 가가 대표적이다. 이밖에 천년고찰 수덕사, 백제부흥의 선봉장 흑치상지의 임존성, 강감찬 장군과 거란을 물리친 강민첨 장군의 묘, 예학에 밝고 김육과 대동법 시행에 앞장 선 조익의 묘, 그리고 '오페르트 도굴사건'으로 서양과 척을 진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가 있다. 제천의 유명 애국지사인 이상설 선생가와 맺어진 한산이씨 애국지사 이남규 가도 예산을 대표하는 중요 명망가이다. 이남규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후손이고 한말 단재 신채호의 스승이자 의병운동을 지원하다 아들 이충구와 함께 일제로부터 살해당한 순국 의사이다.

  오늘 예산의 거인 윤봉길의사의 유적과 조선후기 서화가이자 금석학자인 김정희의 고택, 그리고 예산 장터를 돌아본다.

  추사, 그가 완성한 서체가 추사체로 조선 대표의 서체로 추앙되듯 흔히 우리는 김정희를 추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추사 선생과 그를 따르던 후학들은 김정희를 완당이라고 부른다. 완당은 김정희가 스승으로 모신 청나라 학자 완원의 제자라는 뜻이다. 평생 스승으로 모신 청나라 대학자 완원 선생은 당대 유교경전의 대가였으며 1810년 김정희와 만남에서 "젊은 사람이 매우 영리하다."라고 평했을 정도로 김정희의 뛰어난 자질을 알아봤다. 이에 김정희도 완원 선생의 이름을 따서 완당이라는 호를 썼을 정도로 각별하였다. 이렇게 맺어진 청 석학들과의 만남은 추사 평생의 벗이자 삶의 지표였다. 이렇듯 김정희는 추사, 완당 등 그가 쓴 당호가 무려 3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추사박물관에서 소장 '추사필담첩'(2020)에 따르면 그간 '추사'를 호(號)라고 널리 알려졌지만 김정희 본인이 '추사'를 이름의 별칭으로 16세에 관례를 치르고 받는 자(字)라고 밝힌다.  이는 아버지 병조판서 김노경이 1809년 순조9년 동지사로 갈 때 부친을 호위하는 자제군관 자격으로 북경행을 하면서이다. 바로 이 시기에 청나라 문인과 주고 받은 필담에서이다.  재밌는 것은 김정희 인생의 전기를 맞았던 청 북경행에서 김정희의 자인 추사가 그들의 풍속에 따라 널리 불려지고 조선에 와서도 이러한 유명세로 자가 호처럼 쓰였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당시 호는 보담재이다. 

출처 : '청나라에 간 추사 김정희가 말했다 "'추사'는 나의..." KBS뉴스 2022.11.29.(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612323&ref=D)

 

청나라에 간 추사 김정희가 말했다 “‘추사’는 나의…”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년). 우리는 주로 '추사체'라는 독특한 글씨체로 기억하지만, 그 시대가 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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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산의 추사 고택은 김정희로 인해 유명하였지만 실제로 이 고택은 그의 증조부 월성위 김한신 때문이다. 김한신은 영조의 부마로 화순옹주의 남편이다. 국혼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아버지 김흥경이 영의정을 지낸 명문이었기 때문이다. 딸 화순옹주를 아낀 영조는 이 저택을 지을 당시 충청도 53개 군현에게 한 칸씩 비용을 내게 하여 총 53칸의 건물지었다. 일찍 요절한 월성위 때문에 부왕 영조의 만류에도 애도와 금식으로 화순옹주 역시 절명하였다. 이 소식에 영조는 큰 충격을 받고 불효라고 정려하지 않았다. 후에 정조가 정려하고 홍문을 내렸다. 조선왕실의 유일한 열녀이다.

  월성위와 화순옹주가 요절한 탓에 제사를 위해 조부 김이주를 양자로 하여 김정희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그의 집안은 경주김씨로 영조의 계비가 되는 정순왕후와 가까운 집안이었다.

  고택을 기준으로 동편 구릉에 월성위와 화순옹주의 묘, 화순옹주 홍문이 있다.

 

 

 

 

 

 

 

 

 

 

 

 

 

 

 

 

 

 

비문은 유명조선수록대부월성위겸오위도총부총관 증익정효김공지묘 화순옹주부좌

 

 

 

 

 

 

 

 

 

 

 

열녀수록대부월성위겸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정효공김한신배화순옹주지문 상지7년 계묘 1월12일 특명정려

(烈女綏祿大夫月城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貞孝公金漢藎配和順翁主之門 上之七年 癸卯一月十二日 特命旌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