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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한신대학교

늦가을 한신대학교 늦봄을 늦가을 한신에서 맞는다. 늦봄 문익환은 학생시절에는 잘 몰랐다. 배우 문성근의 아버지로 민족시인 윤동주의 친구로... 선생님이 걸어가신 길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감흥도 없었다. 사회로 나와서 늦봄이 걸었던 길이 얼마나 숭고한 길인지 새삼 많이 깨닫게 된 어른이다. 물론 학교에서는 '재야의 빛', 또는 재야대통령으로 일컬어지는 장준하 선생을... 조선신학, 민중신학의 아버지 장공 김재준 목사를... 이러한 선인들의 발자국이 길이 되었다. 나약했던 조선이 망하고 일제 36년의 식민지를 거쳐, 민족의 큰 시련으로 지금도 그 아픔이 가시지 않은 한국전쟁... 이러한 역사로 인해 우리 사회는 계층, 세대, 이념 등으로 나뉘어 엄청난 갈등이 빚고있다. 이러한 때 저마다 진보를 가치로 젊음을..

정정옹주, 진안위 유적 묘역

정정옹주, 진안위 유적 묘 유시행 묘(아버지), 유영 묘(동생) 능묘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 拜陵歸路 저 무성한 무덤을 보고 / 彼菀者阡 옛적의 우애를 생각하니 / 想昔友于 도리어 내가 서글프도다 / 顧予悢然 현위가 오른쪽에 있고 / 賢尉在右 귀주가 왼쪽에 있으니 / 貴主在左 바라건대 능히 흠향할지니 / 尙克歆止 계모와 산과를 바치네 / 溪毛山果 -홍재전서 제24권 / 제문(祭文) 6 진안위(晉安尉) 유적(柳頔)과 정정옹주(貞正翁主)의 묘소에 치제한 글(晉安尉柳頔,貞正翁主墓致祭文) 이 시는 1797년 8월 행행에서 정조대왕이 시흥지역을 행차하면서 현재의 수암동의 안산객사(행궁)에서 머물고 왕족이나 공신들에게 치제를 명하면서 정정옹주에게도 치제와 치제문을 어제로 내린 것이다. 시를 통해 원래 묘는 봉..

영응대군 묘 및 신도비

영응대군 묘 및 신도비 [永膺大君墓-神道碑] 시흥시 군자동 구준물(구지정) 마을에는 군자봉이 있고 그 산자락에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 묘가 있다. 영응대군은 세종대왕의 여덟째 왕자로 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사랑을 많이 받은 왕자로 알려져 있다. 묘소와 함께 신도비도 주목되는데, 신도비를 지은이가 우리가 잘 아는 간신 임사홍이다. 임사홍은 아버지 임원중이 당대 문장가로 유명하였고 그 영향으로 글을 잘 지었다. 영응대군의 사위 능성부원군 구수영의 맏딸이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에게 출가한 인연으로 임사홍이 비문을 짓게 되었다. 신도비에는 비각이 없었으나 최근에 세워졌다. 영응대군 묘는 처음 경기도 양주군 건천면 군장리(경기도 양주시) 팔곡산(초장지[初葬址])에 있었으나 1900년(광무 4) 안산군 마유..

백제의 마지막 꽃, 사비 부여

백제의 마지막 꽃, 사비 부여 능산리고분군, 부소산성, 삼충사, 정림사지 흔히 백제는 문화예술이 꽃피운 나라로 삼국 중 제일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로 '백제 미'라고 하여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교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5년(기원전 4년) 봄 정월 기록을 인용한다. '작신궁실(作新宮室),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새롭게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제 않다'라는 말이다. 이러한 미적 세계를 알려주는 백제의 문화유산으로는 많지는 않지만 우리들이 찾아 볼 수 있는 몇몇 유산이 있다. 백제의 미소로 익살스런 온화한 웃음띤 부처 '서산용현리마애삼존불'이 있고 탑으로는 미륵사지석탑이 있지만 온전하지 못하고 목탑식으로 잘 보존되어 있는 정림사지오층석탑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