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 선생 묘 및 신도비
안산시 부곡동의 명문가 진주유씨 가문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은 청문당이다. 청문당은 고택으로 유시회가 처음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유시회의 아들이 바로 강원감사 유석이다. 유석은 후사가 없어 양자로 유영의 아들 유명천을 들였는데, 유영은 작은아버지 유시행의 아들로 사촌지간이다.
안산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개멸마을 초입에만 표시판이 있고 무덤을 찾는데는 아무런 표시가 없다. 다만 지도를 보고 찾는다면 무덤 출입처를 찾기는 더욱 어렵다. 개멸이라는 지명은 안산군 군내면 부곡리의 남쪽 산이 가마솥을 엎어놓은 형국이라 가마산이라고 하고 그 아래 마을이 들어서면서 가마골, 후대에 개멸로 변하였다. 이 마을 동쪽이 수리산 골짜기 안에 위치하여 안골로 불리는데, 이곳에 유석 선생의 묘가 있어 능처럼 크다고 하여 능안이라고 한다. 능안에는 종택인 청문당이 있다. 북쪽 마을은 나무가 많고 숲이 우거져 만수동(萬樹洞)이라고 한다. 만수동에는 경성당이 있다. 이들 문화유산이 진주류씨 세거지의 상징이다.
유석 선생 신도비는 남인의 영수였던 미수 허목이 비문과 전서를 썼다. 허목은 당대 서예가로 특히 전서는 동방제일인자로 꼽혔다. 그의 전서체는 성난 동해파도를 잠재웠다는 '삼척척주동해비 및 평수토찬비(三陟陟州東海碑─平水土贊碑)'가 유명하다. 이러한 허목의 신비한 전서체를 안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유석 선생 신도비이다. 현재 허목 선생에 대해서는 고향인 경기도 연천에서는 미수 문화제, 학술대회, 서예공모전 등 다양한 선양 등 문화행사를 문화원의 주도로 펼치고 있다. 허목이 신도비를 썼듯이 진주 류씨가 남인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유석을 이은 양자 유명천은 남인으로 서인과의 정권다툼 중심에 있었고 이조판서를 역임한 중진이다.
유석은 강원감사로 알려진 인물로 실록에 따르면 인조 26년(1648) 8월 19일에 강원감사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강원감사직은 효종 즉위년(1649) 8월 25일 사간원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파직된 이유는 실록에 따르면 정언 이정영(李正英)이 아뢴 것으로
"강원감사 유석은 국상을 당한 이때 방자하게 공석에서 고기를 먹고, 심지어 가장(家獐)을 마련해 먹으면서 【나라의 풍속에 여름에 개고기를 삶아서 먹는 것을 가장(家獐)이라고 한다.】 맛이 없다고 화를 내며 요리하는 사람을 매로 쳐서 죽게까지 하였으니, 어떻게 이런 사람을 풍속을 살피는 직임에 그대로 둘 수 있겠습니까.(江原監司柳碩, 當此國哀之日, 肆然食肉於公坐, 至設家獐, 【國俗於夏月, 烹炙犬肉而啖之, 謂之家獐。】 惡其味之不美, 怒笞廚人, 以致殞命。豈可以此人, 仍置觀風之任乎?)"-효종실록 1권, 효종 즉위년(1649) 8월 19일 병오 4번째기사
이일로 유석은 파직되었다. 이 집안은 가장(개장)과 참 인연이 깊다. 후대 청문당의 주인 유경종은 복날 가장(개장)을 즐기며 강세황을 통해 '현정승집도'를 그려 남기기도 하였는데, 선조가 되는 종가 유석이 복날 가장 일로 국상중에 사람을 상하게 하고 개고기를 먹어 파직되는 화를 입은 것을 생각하면 집안에서 가장을 꺼릴만도 한데 가장을 먹는 습속이 선대의 화도 넘길 수 있는 우리네 고유한 풍속임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강원감사 유석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은 강원감사를 맡아서 조선왕실의 숙원사업인 선대 묘소를 찾는 일에 나선 사실이다. 조선왕실은 태조의 선조들을 규명하는 것이 왕실의 정통성을 위해서 아주 중요하였다. 그래서 목조 이안사의 부친 묘 이양무와 비 삼척이씨의 무덤을 찾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선조 때 정철이 지금의 삼척에서 묘를 찾았다고 밝혔으나 쉽사리 인정되지 못하고 이후 태백 황지에 있다는 등 혼란이 많았다. 이에 인조는 강원감사 유석으로 하여금 태백 황지의 고분을 찾아 실증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유석은 현지 답사하고 치계하였다.(인조실록 49권, 인조 26년[1648] 12월 17일 정미 2번째기사 ) 유석의 노력에도 불구하여 조선왕실에서는 쉬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분묘 보존에만 힘쓰다 1899년 대한제국에 와서 정철이 지목한 삼척의 고분에 대해서 준경,영경묘로 사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석 선생 묘가 있는 곳과 능안 경성당, 만수동 청문당은 하나의 마을 공간이었는데 고속도로가 나면서 분리되었다. 특히 유석 선생 묘를 비롯한 진주류씨 세장지는 고속도로에 편입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신도비와 함께 옮겨진 것이다. 묘소를 찾아가려면 우선 만수동과 능안마을을 갈라지는 초입에서 청문당으로 조금 가면 작게 갈래길이 나온다. 바로 가면 청문당이 앞이다. 왼쪽 갈래길로 빠지면 고속도로 아래로 통로길이 나오고 여기로 나가면 길은 막히고 점집이 나온다. 점집이 위치하는 곳이 경성당이 위치한 만수동이기도 한데, 경성당으로 이어지는 길이 없다. 통로 바로 앞에서 고속도로로 이어지는 경사로에 빗물 배수로가 있는데, 여기로 오르면 유석 선생 신도비가 나온다. 그 위로 묘역이 있다.
묘역에는 비석이 없어서 무덤 주인을 알아보기 힘들다. 더욱이 여러 자료를 보면 안산시 디지털향토문화대전은 묘역 정 중앙의 쌍분의 묘표가 없어진 방부와 있는 묘를 유석 선생 묘라고 사진을 첨부하였다. 그리고는 설명은 모두 합장묘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설명은 고속도로가 나기전에 조사된 설명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쌍분 양쪽으로 있는 무덤이 봉분이 하나로 된 무덤인데, 설명에 따르면 합장묘라고 하였으니 이 두 분묘 일도 있는데, 하나는 동쪽 가장자리에 있고 문인석이 없다. 서쪽 가장자리 무덤은 문인석과 기단석을 갖추고 있는데, 정확히 선생의 묘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무덤들을 이장하면서 원래 무덤 그대로 이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무덤 주변으로 망주석이 넘어져 있고, 묘역 산경계에 망주석이 버려져 있어 무덤 이장과 관련하여 무슨 문제가 있지 않았나 싶다. 고속도로가 나면서 급하게 이루어진 문제로 보인다. 고속도로가 조선 중기 기호남인 3대 가문으로 꼽히는 진주류씨 마을을 망가뜨렸다. 수리산 자락 계곡에 자리잡은 마을이 한 때는 고요하고 정겨운 풍경이었을텐데, 지금은 고속도로가 여기저기 나면서 마을을 갈라 놓았고 시끄럽다. 더욱이 수도권에 위치하여 축사와 작은 공장들이 난립하여 옛 정취는 사라진지 오래다.
하여간 여러가지 합리적으로 추론하면 가장 유석 선생 묘 우선 되는 것은 서쪽 가장자리의 봉분으로 무덤설명에서 합장묘고 문인석, 동자석, 향로석, 상석, 망주석 등의 석물을 갖추고 있다는 설명과 부합되며, 다른 무덤과 달리 기단석으로 무덤의 단을 높인 것으로 볼 때, 능처럼 큰 무덤이라는 전하는 이야기와도 맞아 떨어진다. 무덤을 크게 하려면 단도 해야하고 둘레돌도 해야는데, 이곳에 여러 옛 무덤 중에 유일하다.
2019년 11월 9일(토)[음력 10월 13일] 청문당에서 유시회를 시조로 하는 파종중의 시제가 있었다. 우연찮게 들려서 종가 회원 어른들을 통해 유석 선생 묘역과 청문당 관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현재 유석 선생 묘는 앞서 추론했듯이 서쪽 가장자리가 맞고 가운데 묘소가 양자였던 유명천, 그 다음이 손자 유모의 묘소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유명천의 묘소는 충청북도 괴산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비석도 옮겨왔어야 하는데 못했다고 한다.
청문당 시제는 입향조이자 대종존인 유시회와 이하 선조를 모시고 진안위 유시행가는 따로 하고 있다. 경성당은 시제를 폐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은 청문당 시제 선조 묘역도이다.(청문당 종가 제공)
전서에서 동방제일인자로 손꼽히던 허목이 쓴 유선 선생 신도비 전자이다. '관찰사유석신도비'라고 썼다. 이 묘역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미수 허목의 서체와 전자를 확인할 수 있어 서예사에 아주 중요한 유산이다.
신도비의 글씨를 허목이 쓰고 전을 썼다.(許穆書幷篆)는 내용 부분이다.
조선국 고 통정대부 수 강원도관찰사 겸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 진주 유공 신도비명 병서
숭정대부 행 판중추부사 조경趙絅이 짓고
통훈대부 전 행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쓰고 아울러 전액篆額을 쓰다.
유공의 휘는 석碩이고 자는 덕보德甫이며 호는 개산皆山이다. 만력 을미년(1595)에 태어나서 을미년(1655)에 돌아가셨다. 보계譜系는 진주에서 나왔으며 조부의 휘는 격格으로 정언을 지냈고 부친은 휘가 시회時會로 사옹원정을지냈으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임진왜란 때 순국한 상주판관 길吉의 딸이다.
공은 사람됨이 강직하니 타고난 품성이었다. 우뚝 서서 독자적으로 행한 지조를 가졌고 문장 또한 그 사람됨을 닮았다. 선배인 남곽南郭, 박동열朴東說같은 이는 공께서 지은 변려문을 평하여 가히 소장공蘇長公(蘇東坡) 문하에 들어갈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또한 공은 정사에도 뛰어난 능력이 있어 인조를 거의 30년 동안 모셨고 효종을 7년 동안이나 섬겼다. 두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은총을 입음이 결코 적었다고는 할 수 없겠다.
을축년(1649)에왕자공珙(인성군)께서문망文網을당하니공이이르기를, "포속布粟의 노래는 한 문제文帝도 싫어하였거늘 하물며 지금에 와서 그러한 말을 올릴 수 있겠느
냐?”하고 항소를 올려 극언을 하였다. 이에 조정대신들의 물의가 사방에서 분분히 일어나공을공격하였으나상께서는오히려비답하기를,“ 공의언론이정직하다”하니, 사람들은 모두말하기를, 신하를 알기로는 임금만한 이가없다”고하였다.
정축년(1637)에 이르러 왕께서 호적胡敵들에게 굴욕을 당함이 말도 못할 정도였다. 상서 김상헌?尙憲은 본래 뛰어난 절의로 자처하였으나 마침내 왕보다도 자신의 이해
만을 우선한다는 평을 면치 못하였다. 이때 공은 장령으로 있었는데 이를 가차 없이 논박하였다. 공의 일생이 위험한 가운데에 있었던 것은 이 두 가지 일 때문이라고 한다.
부인 경주이씨는 승지 정혐廷의 딸인데, 공과는 덕으로 결합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명천命千은 장가를 들고는 바로 죽었고, 딸은 군수 홍주후洪柱後에게 시집갔다. 홍주후의 아들 만최萬最는 진사이니, 승지 안후열安後說의 사위이다. 공은 종제인 응교 영潁의 셋째 아들인 명천命天으로 후사를 이었는데, 명천은 19살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공이 죽자 안산 부곡리釜谷里간좌艮坐(동북 방향 등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 후 7년이 되던 해에 진사께서 자당 이 부인의 명으로 공의 행적과 경력을 기록하여 나에게 와서 부탁하기를“, 오직 집사만이 내 남편을 안다 할 수 있기에 감히 묘도의 글을 청하옵니다”
하였다. 나는 도의상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마침내 서를 쓰고 명銘을 다음과 같이 쓴다.
유씨는 진주에서 나왔으며 휘 정挺에서 시작되었다.
홍림洪林은 추밀원부사였으니 현달함은 다른 사람들이 따르지 못하였다.
아름다운 양화공이여! 고려조에 크게 이름을 날렸네.
그 후에도 이어져서 다섯 번 전하여 종식宗植은
가문을 빛내고 은덕이 많아 돌아가서 후손을 이루었네.
사간원에서 언론으로 이름을 떨치니 누가 이에 짝할 것인가?
집안을 이은 장공長公은 상상上庠(성균관)에서 출발하여
여러 차례 수령을 지냈는데. 으뜸가는 치적을 뉘라서 당하리오.
힘겹게 삼품에 올라 사옹원정이 되었다.
열문烈門에서 배필을 구하여 공을 낳아 가문을 높였네.
공은 어려서부터 뛰어났고 풍골도 깎은 듯하였다.
과거에 합격하니 때는 그의 나이 아주 어렸을 때이다.
의정부에서 활보하니 사람들이 모두 낯빛을 바꾸었도다.
을축년(1625)에 봉장封章올리니 지극한 마음은 붉었도다.
임금의 욕심을 저지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너그러이 법이 관대하였도다.
임금이 하교하시여 포가하시니 여러 사람이 오히려 시끄럽도다.
나아갈 길이 비록 막혔으나 강직한 명성은 자자하네.
정묘년(1628)에 서쪽 오랑캐가 쳐들어왔는데
공은 그때 산직散職에 있었으나 분조分朝로 달려가 안부를 물었네.
난리는 평정되었건만어찌하여 적소가 가로놓였단 말인가!
누구만 같지 못하여 골짜기에 매어 둔단 말인가.
성균관을 거쳐 어사가 되고 어찌 적신지탄積薪之歎을 응하리.
개성에 경력으로 가니 관장이 제멋대로 헐뜯었네.
죄인이 되었다가 바로 풀려나니 어찌 성상의 보살핌이 없겠는가.
정축년에 상복을 벗고 사유師儒를 제수받아 관에 나아가니
사람들은 그가 늦게 옴을 한탄하였네.
백부栢府(사간원)는 공직이라
말은 부드럽지 않고 강해도 뱉지 않았네.
교만하여 임금을 업신여기는 것을 공이 가장 미워하는 바인데
가르침에 탄핵문이 쏟아지니 아! 옛날과 같지 않구나.
융단 위에서 기뻐하시며 상서로운 소리라고 비답 내리셨네.
잇달아 세차게 나왔으나 공의 명성을 누가 다투겠는가?
돌이켜 보매 공의 재주와 슬기는 세상에서 참으로 버리기 어렵도다.
들어가면 교서를 짓고 나오면 포장을 받았네.
영광靈光에서의 공적은 창창하여 더욱 빛났도다.
흉년에 곡식을 먹인 것이 얼마나 많은 백성이던가!
대농大農이 진언하니 품질이 오른 것은 이 때문이라네.
예조참의와 승지를 거쳐 병조와 공조에도 계시고
비록 아려亞旅(상대부)로 있었으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영동을 관찰할 때 문득 부모님 상을 당하니,
용골대?骨大를 잡지 못하고 물여우처럼 틈을 엿보아
복구지법僕區之法을 행한 것처럼 간특한 자들을 적복摘伏하였다.
국원國原에서는 노기를 떨치고
금성에서도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고 세금을 고르게 하여 빠짐이 없도록 하였다.
입 다물고 사는 것이 어찌 해로울 게 있으랴? 돌아와 문을 닫고 한가하게 살면서
겨우〈한거부閑居賦〉를 읊으면서 기나긴 밤 성상의 돌봄이 없었네.
공의 수립한 바는 내행內行을 근본으로 삼았다.
삼생三牲의 봉양이 있고 온 집안도 모여들었다.
오로지 꼿꼿이 지킬 뿐 세도의 부정과는 타협하지 않았네.
온 세상이 백안시하였으나 알아 준 이는 저상渚相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밀어 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 말로만 추켜 주었을 뿐인 것을!
그러나 이것은 모두 명이 아니겠는가?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불후한 행적이 있어 우뚝하니 무슨 유감 있으랴.
나는 빗돌에 명銘하노니 그 말이 지나치지 않으리라.
선비 정부인貞夫人이씨는 정유년(1597)에 태어났으며 본적은 경주慶州이다. 부친은 승지 정험이고 조부는 사직령 탕宕이고 증조는 진사 달존達尊이며, 외조는 군수 오이순吳以順이다. 정부인은 어려서부터 법문에 젖어 익숙하게 의를 들었으며 16세에 시집와서 거동이 조용하고 틀이 잡혀 자연히 큰사람의 운치가 엿보였다. 온화한 덕성은 조금도 악착스러운 데가 없었다. 일을 처리함에는 물정에 맞게 하였으며 식견은 뛰어나 뚜렷이 통달한 선비와 같은 곳이 있어 선군께서도 간혹 의심쩍은 일이 있으면 곧 물어서 결정하곤 하였다. 누이동생 영인令人이 일찍 홀로 되어 집안도 빈궁하고 의지할 곳도 없으니 여종을 보내어 생계를 돌보게 하였고 이웃에 집을 빌려 주어 왕래가 편케하고 조석 음식이나 여름 겨울 옷가지를 모두 집에서 마련하여 영인이 걱정하지 않도록 하였다. 여러 종들을 보살펴 정의를 다하였으니 모든 일이 이와 같았다. 을유년(1645)에 외아들을 잃고 슬퍼함이 병이 되었고, 을미년(1655)에는 가장의 상을 당하여는 채소와 미음만 들면서 예법에 지나쳤으나 변함없이 십수 년을 지냈다. 내가 입양되었을 때는 나이가 이미 장성하였으나 당신의 자식처럼 사랑과 가르침이 모두 지극하였다.
경신년(1680)에 내가 지례知禮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신유년(1681) 4월에는 귀양지로 따라와서 우연히 한열증[感寒熱]에 걸려 임시 거처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85세였다. 이는 진실로 불초한 불효자가 하늘에 죄를 얻어 천 리 길을 흔들리면서 오셔서 하잘것없는 질병으로 돌아가시니, 이 아픔은 하늘과 땅이 다하도록 끝이 없을 것이다. 10년 후에 나는 은혜를 입어 이조판서가 되었고, 선고先考를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예에 따라 겸대하게 하셨다. 나는 아들이 없어, 판서 명현命賢의 아들을 데려와 후사를 이었는데 이제 8세이다. 딸 셋은 세마洗馬조구원趙九, 강학姜木學, 진사 목천임睦天任에게 각각 시집갔다. 조구원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홍만최洪萬最는 지금 공조낭청으로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중정重鼎과 중현重鉉은 다 같이 승문원정자이다. 선비의 세계와 자손들의 관작이 비문을 지을 때 기록되지 않았기에 불초자 명천은 눈물 흘리며 추기한다.
숭정 후 47년51) 경오년(숙종 16, 1690) 가을에 새겨서 세우다.
朝鮮國故通政大夫守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晋州柳公神道碑銘幷序
崇政大夫行判中樞府事趙絅撰
通訓大夫前行三陟府使許穆書幷篆
柳公諱碩 字德甫 號皆山 生於萬曆乙未 卒於乙未 其先系出晉陽 祖諱格 正言 考諱時會 司饔正 安東權氏壬辰死事尙州判官吉女也 公爲人剛方 天得也 有特立獨行之操爲
文章亦肖爲人 先輩如南郭朴東說 稱公騈儷可入蘇長公堂 又有政事才 事仁祖大王幾三十年 事孝宗大王七年 於兩朝受知受恩蓋亦不淺乙丑 王子珙扞文網 公曰 布粟之謠漢文
病之 況進於此者乎遂抗疏極言 群議鵲起攻公 上批猶曰 言論正直 人皆謂知臣莫如君至丁丑 主辱至矣 金尙書尙憲素以名節自與終未免後君 公及爲掌令 又論之不顧蓋公一生出入羿彀中 由此二事云 夫人慶州李氏 承旨廷馦之女 與公合德 生一男一女 男命千始室而夭 女適郡守洪柱後 子萬最 進士 承旨安後說 壻也 公取從弟應敎潁第三子命天爲後十九成進士 公歿 葬於安山釜谷里坐艮之原 后七年 進士以慈圍李夫人命 狀公行治歷官屬不侫曰 惟執事知吾夫 敢請墓道之文不侫義有不可辭者 遂序而銘 銘曰
柳出于晉 始自諱挺 洪林樞密 顯人莫竝 懿哉良和 大鳴麗國 于後蟬聯 五傳宗植 榮門隱德 歸成後人 薇垣言颺 亦旣尠倫 承家長公 發軔上庠 累綰銅章 治最誰當 危得衣緋 長周官饔 室於烈門 生公亢宗 童而秀發 風骨戍削 摘髭科第 齒才治立 平步槐署 人皆改觀 乙丑封章 寸心如丹 畜君何尤 蔡蔡法寬 聖敎褒嘉 衆口猶讙 進途雖遏 直聲則噪 維歲丁卯有寇西虣 公時置散 奔問分朝 難已敍復 奈隔赤霄 誰之不如 馽驥幽谷 歷泮乘騐 應宿薪積 經歷松京 官長恣齕 衣赭旋雪 豈無皓日 制除丁丑 師儒洊席 人遲其至 柏府公職 有舌不柔 有剛不吐 驕蹇慢上 公所深惡 誨也袖彈 於今非古 細氈動色 批以鳳鳴 頻頻雖盛 公名孰爭 顧公才諝 世難忍棄 入則制敎 出必褒璽 靈光之勣 彰彰尤異 歲荒乃粒 凡幾赤子大農進言 增秩由此 禮樂龍喉 騎省水曹 雖居亞旅 不貶所操 觀風嶺東 奄遭通喪 龍胡莫攀 蜮夭伺傍 僕區摘伏 國原奮髥 錦城露冕 稅均洪纖 留噤何咎 歸來閉門 閑居纔賦 長夜無暾 繄公樹立 內行爲根 三牲養至 群從家歸 唯其棘棘 唾棄脂韋 擧世白眼 知音渚相 推轂何有 空言吹奬 玆非命歟 歸咎無處 不朽者存 睪如奚憾 我銘玄石 辭非瀏濫
先妣貞夫人氏 生丁酉 籍慶州 考承旨廷馦 祖社稷令宕 曾祖進士達尊 外祖郡守吳以順 貞夫人自幼濡染法門 習聞義方 十六于歸 令儀淵凝 自有大家之韻 德性和婉 少無齷齪之節 論事稱物 識量超倫 巍然 有達士之見 先君或有疑 輒咨以決焉 其娣令人早孀甚貧窮無所依 輟送女奚 以資契活 借與比屋 以便來往 其朝哺飮啖 寒暑衣具 皆自家分焉 不令令人憂 其撫愛羣從 曲盡情意 多類此 乙酉喪獨子推毁成疾 乙未遭所天之痛 麗溢䟽糜 過中制而猶不變 殆十數稔 命天當過房之時 年已長大 而視同己出 愛敎備至 庚申 命天責配知禮 辛酉四月 隨到配所 偶感寒熱 八月十二日 不諱于僑舍 享年八十五 良由不肖不孝 獲戾于天 千里撼頓 末疾 仍殊窮天極地 抱痛無涯 後十年 命天蒙恩時 任吏曹判書 追贈先考吏曹判書兼帶如例 命天無子 取判書命賢子爲後 方年八歲 女三人 洗馬趙九畹姜木學進士睦天任 趙九畹有四子皆幼 洪萬最方官水曹郞 有七子 重鼎重鉉俱承文正字 先妣世系及子姓爵秩 皆撰碑時所未錄不肖子 命天泣血追識
崇禎後四十七年庚午秋刻立
출처 : 시흥금석총람 379~391쪽(1988)
유석 선생 신도비 동영상 미수 허목 서체
유석 선생 묘역
유석 선생 묘(서쪽 가장자리)
동영상
유명천 선생 묘(가운데[쌍분])
동영상
유모 묘(동쪽 가장자리)
아래 무덤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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