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청문당

달이선생 2019. 11. 9. 09:00

청문당(淸聞堂)


  충청북도 괴산에서 살아오던 유씨 집안은 유시행의 아들 유적이 선조의 부마(진안위)가 되면서 부곡동 일대를 사패지로 하여 세거하였다. 청문당은 진주유씨 성산공파의 종택으로 16대손 유시행의 형 유시회가 건립한 것으로 되어있다. 현재 청문당 뒤 구릉에 유시회의 아들 강원감사 유석의 묘와 신도비(전서의 동방제일인자 미수 허목 씀)가 있다. 그의 묘가 능같이 크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능안이라고 한다. 유석은 후사를 남기지 못해 사촌 유영(유시행 아들)의 아들 유명천을 양자로 삼았다. 부곡동에서 세거한 진주유씨 가문은 목래선(睦來善)의 사천목씨(四川睦氏)와 민희(閔熙)·민암(閔黤)의 여흥민씨(驪興閔氏)와 더불어 조선 후기 기호(畿湖) 남인 3대 가문이다.
  남인에 속한 유씨 가문은 조선 후기 서인(노소론)과 경쟁에서 경신환국(1680), 갑술환국(1694)과 이인좌의 난(1728) 등으로 완전히 조정에서 실각하고 소외된 소북 등의 문사들이 청문당을 드나들면서 문화예술이 꽃피웠다. 이러한 역할의 중심에는 이조판서를 역임한 유명현의 손자 유경종이 있다. 해암(海巖) 유경종(柳慶種,1714~1784)은 정재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오교촌장(午橋村莊)의 주인으로 안산 일대의 넓은 사패지(賜牌地)와 바닷가의 어염권에 의해 쌓은 부로  '오천시사(午川詩社 : 오천은 마을 앞 개울을 말한다.)'를 결성하여 전국 각지의 많은 문인이 드나들었는데, 안정복, 채제공, 강세황, 안산 15학사 등 많은 문사들과 교우하였다. 특히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이웃한 첨성리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공부를 한 사이였고, 또 청문당 만권루에서 책을 빌리는가 하면 70세의 안정복이 손녀가 시집을 가자 가마와 말을 빌릴 정도로 교분이 두터웠다. 시서화삼절인 강세황(姜世滉, 1713~1791)은 매형이 된다. 

  특히 유경종과 강세황의 관계는 처남매부를 떠나 매우 친밀하였다. 강세황이 가세가 기울어 서울살이가 힘들어지자 안산 처가로 내려와 5리 정도의 거리에 살면서 유경종의 지원을 받고 살았다. 그리고 유경종은 일찍이 강세황의 예술적 경지를 알아보고 강세황과 함께 중국 그림이나 화보를 구해서 보며 서화의 새 정보를 공유하였던 동지였다. 이러한 유경종에 대해서 강세황이 평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마음과 취미가 서로 좋아하는 것이 젖과 물을 한데 조화한 것 같았다. 나는 본시 불우하여 평민으로서 곤궁하게 지냈고, 중년에 아내를 잃고 쓸쓸히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는데, 공(유경종)은 누님이 있고 없는 것을 관계치 아니하고 정리와 사랑이 더욱 두터웠다. 나도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라고 서로 허락하고 시 한 편이나 글씨나 그림 한 장이 있을 적마다 서로 마주않아 감상하며 칭찬하였다.-출처 : 안산시사 4권, 123쪽(2011) 


  유경종은 1673년(현종 14) 정시문과에 장원하였던 이조판서를 역임한 유명현의 손자이다. 특히 유명현은 숙종 대 서인(노소론)과의 권력투쟁에 있어서 형들인 유명견, 유명천과 남인의 중심에 서서 이를 주도하였다. 때문에 말년은 유배지에서 죽었다. 이렇듯 문과 장원자로 뛰어난 문재이지만 그가 추구했던 것은 오로지 생과 사를 가르는 당론에 입각한 정권 창출이었다. 반면에 선조들이 모두 실각하면서 자연히 조정에서 밀려난 유경종은 애초에 과거와 출사를 고민하지 않고 선조에게 물려받은 뛰어난 머리와 재산으로 안산을 넘어 조선사회 문예부흥을 일으키는데 유감없이 두각을 나타냈다. 만권루를 만든 유명현보다 만권루로 문인들과 교류하였던 유경종이 지역에서 혹은 우리 역사에서 그 이름이 두고두고 날 수 있는 것이 여기에 있다. 유경종의 스승이었던 성호 이익도 강진 유배지에서 학문을 집대성했던 다산 정약용이 그러하다.  

  청문당은 약 5천평의 대지에 현정(玄亭)·하당(荷堂)·희한당(凞閑堂)·만권루 등의 부속 건물과 괴석원(怪石園), 연지(도로 건너편) 등을 꾸민 곳으로 1만 권의 서책이 저장된 만권루(萬卷樓)가 있어서 이정구(李廷龜) 고택과 이인엽(李寅燁)·이하곤(李夏坤) 부자의 회와재(晦窩齋), 유명현(柳命賢)의 경성당(竟成堂)과 더불어 조선 후기 4대 만권당으로 꼽혔다. 이러한 만 권에 이르는 서책에 대해서는 “원컨대 유감사 댁 서고의 좀벌레가 되어 만 권 서를 배불리 먹고 싶네(公嘗貯萬卷詩書 伊時童謠 願爲柳監司宅魚 飽食萬卷書 野史載之)”라는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강세황이 그린 '지상편도(池上篇圖)'를 보면 정원 밖으로 만조 때 배를 띄울 수 있게 꾸며진 청문당의 전체 모습과 경치를 엿볼 수 있다. 청문당 앞에 바닷물이 차고 배를 띄울 수 있다는 이야기는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시화호가 막히기 전에는 안산천 수계이므로 사리 때 만조가 되면 청문당이 있는 부곡동을 지나처 북쪽으로 안산동행정복지센터 남쪽에 있는 장상동 갯다리까지 바닷물이 이르렀다고 한다. 갯다리라는 지명도 장상동과 수암동 사이 안산천 위에 갯다리를 놓아서 이른 명칭이다. 현재의 청문당은 이 모습을 모두 잃었다. 이미 문화재 지정 당시에도 많은 부분 원형과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경성당처럼 사람도 살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은 사람은 살지 않지만 시제를 지내기 위해서 부엌과 바닥에 군불도 지필 수 있는 실제 기능이 있는 집이었다. 향후 이곳이 계속적인 사람의 숨결이 닿는 살아있는 공간이 되길 기대한다.

  청문당에서 오천 건너 동편은 정재 유명현 묘와 일가의 묘역이다. 정채초등학교 역시 이 일가에서 땅을 희사하여 초등학교를 지어 그의 호를 따서 학교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정수장 부근의 유명현 묘역은 철문이 굳게 닫혀 들어 갈 수 없다. 그 위편으로는 후손으로 1919년 당시 월피리에서 잡화상을 운영하고 수암리 비석거리와 반월장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 유익수 묘가 있다. 이 역시 철문으로 닫혀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다. 수리산 자락으로 많은 등산객이 오가는 곳이라서 묘역 관리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역사적 인물이라는 점을 들어 생각해 보면 묘역 관리에 지역사회의 책임도 있는 것처럼 일반시민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개방도 생각해 봤음 좋겠다.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 일반시민들이 쉽게 만날 수 없다면 점점 시민들과 멀어질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교훈은 활자로 된 것도 있지만 실제 그 인물의 자취를 느끼는 것은 그 이상이니 말이다. 




출처 : 안산시사 4권, 402쪽(2011)



청문당 평면배치도(경기도 건축문화유산, 2000). 출처 : 안산시사 4권, 404쪽(2011)


   청문당을 가는 길은 수인로에서 입구 간판을 따라 우회하여 가다가 부곡동안내게시판을 지나면 경성당으로 이르는 만수동천길과 갈라지는데, 계속 나아가면 또 유석 선생 묘 및 신도비에 이르는 영동고속도로 아래 지하통로길이 갈라지는데, 계속 나아가면 수령 백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나오고 바로 청문당이 나타난다.

  오래된 마을의 상징은 어디나 오랜 세월 그 땅을 지키는 고목이 서있다. 처음 이른 길이지만 은행나무를 보고 아 이쯤 되겠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눈앞에 청문당이다.
























  청문당에서 강세황은 35세 되던 정묘년(1747) 6월 초복 다음 날에 처남 유경종 등과 함께 모여 복달임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지역에서는 최근에 극단과 안산학연구소에서 현정승집 재현 행사를 청문당 안채를 무대로 개최하고 있다. 사람이 살지 않은 고택에 간간히 사람의 숨결을 불어 넣는 좋은 일로 보인다. 우리네 가옥은 사람이 살아야 한다. 사람의 온기와 숨겸이 천년을 가는 것이다.  


출처 : 안산시사 4권, 126쪽(2011)


복날은 가장(개)를 잡아 모여 먹는 것이 풍속이다. 정묘년(1747) 6월 1일은 초복이었다. 이날 마침 일이 있어 다음날로 미루어 현곡의 청문당에서 복달임을 하였다. 술이 거나해지자 광지(光之, 강세황(姜世晃))에게 부탁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여 뒷날의 볼거리로 삼고자 하였다. 모인 사람은 모두 11명이었다. 방안에 앉은 사람이 덕조(德祖, 유경종(柳慶種)), 문밖에 책을 들고 마주 앉은 사람이 유수(有受, 유경용(柳慶容)), 가운데 앉은 사람이 광지, 옆에 앉아서 부채를 부치는 사람이 공명(公明, 유경농(柳慶農)), 마루 북쪽에서 바둑을 두는 사람이 순호(醇乎, 박도맹(朴道孟)), 갓을 벗은 채 머리를 드러내고 대국하는 사람이 박성망(朴聖望), 그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강우(姜佑), 맨발인 사람이 중목(仲牧)이다. 관례를 하지 않은 젊은이는 두 사람인데 책을 읽고 있는 자가 경집(慶集, 강흔(姜俒)), 부채를 부치고 있는 자가 산악(山岳, 유성(柳煋))이다. 대청마루 아래에 서서 대기하고 있는 자는 심부름꾼 귀남(貴男)이다. 이때 장맛비가 막 걷히자 초여름 매미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문고와 노랫소리가 번갈아 일어나는 가운데, 술 마시고 시 읊조리며 피곤함을 잊고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그림이 완성되자 유경종이 기문을 짓고, 다들 각각 시를 지어 그 아래에 붙였다.(伏日, 設家獐會飮俗也. 丁卯六月一日, 爲初伏. 是日有故, 其翌日追設, 玆會于玄谷之淸聞堂. 酒闌, 屬光之爲圖, 以爲後觀. 會者凡十一人, 坐室中者爲德祖, 戶外執書而對坐者爲有受, 中坐者爲光之, 傍坐搖扇者爲公明, 奕于軒北者爲醇乎, 露頂而對局者爲朴君聖望, 側坐者爲姜佑, 跣足者爲仲牧. 童子二人, 讀書者爲慶集, 搖扇者爲山岳. 軒下侍立者爲家僮貴男. 于時積雨初收, 新蟬流喝. 琴歌迭作, 觴詠忘疲, 致足樂也. 畵成, 德祖爲記, 諸人各爲詩, 系其下. ) - 유경종(柳慶種, 1714~1784)의 강세황 그림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에 부친 기문(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문 '복날의 풍경' 2016년 8월 15일 사백마흔 번째 이야기) 















  청문당을 나와 경성당으로 가기 전 바로 갈라져서 오른쪽으로 올라서면 유선 선생 묘역으로 이어지는 영동고속도로 밑 지하통로가 있는데, 그 앞에 밭 위에서 본 청문당의 전경이다. 청문당 앞쪽으로 방음벽은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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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현 선생 묘역에 있는 후손 애국지사 유익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