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김연방 애국지사 유허지

달이선생 2019. 12. 4. 12:00

화성3.1운동 만세길 답사

김연방 애국지사 유허지

 

  순절지사 김연방은 1881년 7월 21일 수원부 압정면 일원리(현재의 화성시 우정읍 화산5리)에서 출생하였다. 일원리는 조선 정조대 두각을 나타낸 무반가문인 해풍김씨 남양쌍부파의 집성촌이다. 김연방 지사의 5대조는 무반으로 포도대장을 역임한 김영 장군으로 그 역시 무반인 선전관의 갑오개혁 이후의 벼슬인 대한제국 시종원 시정분시경(시어)이 되어 광무황제(고종)를 보좌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낙향하여 삼괴지역 일원동(수원군 우정면 화산리)에서 99칸 종가를 지켰다. 그 뒤 1919년 3.1운동이 확산되면서 4월 3일 수원군 우정.장안면의 3.1운동에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독려하고 민족독립을 염원하였다.

 

 

 

 

  4월 13일, 발안리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던 일본인 거류민단장 사사카(추모비에는 발안주재소장으로 잘못 기록)가 향도(길잡이)가 되어 일제수비대를 앞세워 수원군 우정면 화산리에 들이닥쳐서 이 지역 만세운동의 배후자로 김연방 지사를 지목하였다, 일제는 김연방 지사를 엄호하던 문중 집사 김태원과 함께 잔혹하게 살해한다. 이 때 99칸 종가(수령 400년 느티나무 앞)도 불태워졌다. 그리고 20년 뒤 그의 묘를 이장할 때 그의 시신에서 탄환이 두 주먹이 나왔다고 전한다.(김선진, '제암 고주리의 3.1운동 일제의 만행을 고발한다', 미래문화사, 1983, 132쪽)

 

 

감사장

김창규
귀하의 선고장(돌아가신 타인의 아버지를 높혀 부르는 말)게서는 기미독립운동당
시 삼괴지방민의 선봉이되시
여 항일투쟁을 하시다가 불행
히도 흉악한 왜적에게 피살
당하섰습니다 우리은 선생의
불후의 공적을 찬양하며 장열
한 순난을 애모하는 징의로서
기념품을 증정하고 애심으로
감사의 의를 표하는바임니다
단기428931
우정면장 김연숙
*원 기록대로 번역함

 

  1956년 3월 1일 우정면장 김연숙은 김연방 지사에게 감사장을 수여한다.(아들 김창규 대리 수상) 그리고 이 감사장이 최근에 발견되면서 김연방 지사가 삼일독립만세에서 순절한 것이 인정되어 정부에서는 2015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연방 지사의 얼과 해풍김씨 남양쌍부파의 전통이 기려 있는 '화성3.1운동 만세길 - 김연방 애국지사 유허지'를 답사한다.

 

  고려 때부터 쌍부라 불리는 삼괴지역은 두 '쌍(雙)', 언덕 '부(阜)'를 써서 쌍부라고 하는 것인데, 지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두 봉우리의 쌍봉산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쌍부라는 명칭보다는 삼괴라는 지명이 주로 불리고 있다. 김연방 지사의 유허지로 들어서는 장안면 사곡리부터 유허지가 있는 화산리에서는 쌍봉산의 봉우리가 하나로 보인다. 해풍김씨의 집성촌으로 만세길에서 가려면 화성시 장안면 사곡리 장안여자중학교를 지나 서쪽으로 마을입구가 나오는데 만세길 표시와 문중에서 예전에 만들어 지금은 많이 낡은 '삼일운동 순국지사 추묘비 입구' 안내판이 서있다. 또한 마을표지석인 '사곡4리(멱우지)'가 잘 서있었는데 관리가 안되어선지 비석이 뽑혀 그 앞에 나뒹굴고 있다. 도로명은 밤밭일원길이다. 이곳부터 총 2.4km를 가면 3.1운동의 주요 유적지인 우정면사무소 터가 나오고 그 전에 김연방 지사 유허지가 있다.

  현재 김연방 지사 유허지는 우정읍 화산 5리로 해풍김씨 남양쌍부파의 집성촌이자 선대 묘역을 정리하여 합사한 숭모당(납골당)과 재실 '쌍괴재'가 위치한다.(화산5리[일원동] 산91-1) 특별히 김연방 지사의 묘표와 해풍김씨 남양쌍부파에 가장 현달한 인물이자 정조대 무과로 급제(1794)한 이후 포도대장으로 유명한 김영(金煐, 1772~1850) 묘표가 재실 앞 마당에 나와 있다. 김연방 지사의 5대조이다. 그 맞은편에 김연방 지사와 족문 김태원을 추모하는 '31독립운동순국지사추모비'가 서있다. 원래 순국비는 2002년 당시만해도 마을 초입 회관 근처에 있었는데 2002년 옛 사당을 허물고 재실과 숭모당을 새로 건립하면서 이곳으로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김연방 지사의 저택이자 종가인 99칸 기와집이 있던 곳은 재실 동편으로 수령 437년이 넘는 느티나무(화성시 보호수 1982.10.15)가 서있는 앞 밭이다. 느티나무 자리는 종택 앞마당이었던 곳이다.

  김연방 지사의 벼슬이 시종원 시어로 이는 갑오개혁 이후 선전관청이 폐지되어 시종원에 속하면서 선전관은 시어로 바뀌었다. 선전관의 임무가 국왕의 경호이므로 김연방 지사는 가문대대로 무반 명문가의 맥을 이은 것이다. 현재는 화성시이지만 이곳 삼괴지역은 예부터 수원에 속한 지역이다. 수원지역은

 

수원은 본디 무향이다.(水原本武鄕)-효종실록 효종4년 2월 23일
 농사에 힘쓰고 활쏘기에 힘쓴다.(務稼穡 力於射藝) -동국여지지 수원도호부 풍속 편
무예를 좋아하고 인심은 질박하며 글이 짧고 밭농사를 주로 한다.(好武技人心多質小文而好田作)-수원부읍지 풍속 편
*수원부읍지는 편찬시기 미상이나 부사선생안을 보면 "부사 이제민李齊閔(만력 병자 선조9, 1576 정월 일에 부임 그해 3월 부의 강등으로 체직遞職 현감 우성전 문반 ~ 부사 이경무李敬懋 무반 임자 정조 16, 1792 정월 일 제배. 계축 정조 17, 1793 정월 일 형조판서로 이배."가 나오므로 편찬시기가 정조나 순조대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듯 수원과 수원사람에 대해서는 무향이라고 하고 무예를 좋아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수원의 속성을 대표하는 가문이 바로 해풍김씨 남양쌍부파인 것이다. 특히 이 가문은 화성지역의 명문가중 삼괴지역인 우정,장안면을 본거지로 한 지역의 명가이다. 화성지역에는 저마다 특성을 가진 대족이 있는데, 남양을 본관으로 하는 홍씨인 당홍, 토홍의 삼한갑족과 아울러 매송면 야목리를 근거지로 하는 풍양조씨로 애국지사 조문기를 배출한 '들목조씨'와 어천리의 실학자 취석실 우하영을 배출한 단양우씨, 해풍김씨와 마찬가지로 무반으로 명문인 봉담 분화천의 함평이씨(함성군파), 그리고 삼괴지역 삼일운동을 주도한 차희식, 차병혁, 차병한, 차인범 , 차경규 지사의 가문으로 세조 때 이시애의 난으로 순절하고 삼강행실도에도 나오는 차운혁의 묘가 있는 석포리 '버들차씨' 등이다. 이 집안은 연안차씨로 정조대 현달한 정남면 괘랑리의 '남산밑차씨'와 같이 차운혁을 선계로 한다.

 

  해풍김씨는 고려 공민왕대 예부상서를 지냈다는 해풍부원군 김숭선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해풍은 경기도 개풍군 지역이다. 이곳에 여러 대 실전하였던 시조 김숭선의 묘를 19세손이자 김연방 지사 5대조인 김영이 1829년(순조 29)년에 본관지에서 묘를 찾아서 새로 정비하였다. 남양쌍부파는 7세 풍덕수운파에서 분계하였다.(해풍김씨대종회http://haepungkim.or.kr/ 참조) 대대로 무반가문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그 시작은 12세 김우추(金遇秋)이다. 그는 선조대 무장으로 선조 21(1588) 1월 1일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이 추도(楸島)의 적을 소탕하라는 명으로 기병 4백 명을 이끌고 여진족 33급을 베는 공을 세웠다. 아래는 실록에 기록된 그날의 기록이다.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이 순찰하던 중 경흥(慶興)에 당도하여 우후(虞候) 김우추(金遇秋)를 보내 4백 기(騎)를 거느리고 얼음을 타고 도강하여 새벽에 추도(楸島)를 엄습하게 해서 배반한 호인(胡人) 33급(級)을 베었다. 이어 길주(吉州) 이북 제진(諸鎭)의 군사 2천여 기(騎)를 출동시켜 회령 부사(會寧府使) 변언수(邊彦琇), 온성 부사(穩城府使) 양대수(楊大樹), 부령 부사(富寧府使) 이지시(李之詩)를 장령(將領)으로 삼아 몰래 군사를 도강시켜 밤에 시전(時錢)의 반호(叛胡)를 엄습, 2백여 집을 불태우고 3백 80급을 베었다. 이는 녹도(鹿島)를 침입한 죄를 성토한 것이다.(北兵使李鎰巡到慶興, 遣虞候金遇秋, 領四百騎, 乘氷渡江, 曉襲楸島, 斬三十三級。 繼發吉州以北諸鎭兵二千餘騎, 會寧府使邊彦琇穩城府使楊大樹富寧府使李之詩爲將領, 潛師渡江, 夜襲時錢, 焚二百餘家, 斬三百八十餘級, 蓋討鹿島之罪也)-선조수정실록 권22, 선조 21년(1588) 1월 1일 을유                          

  김우추는 무과 급제 후 최종 관직이 정3품 절충장군 북우후(증 병조참판, 가선대부 함경북병사)에 이르렀다. 화성시 향토박물관에서는 국난극복에 앞장서는 화성을 빛낸 화성의 영웅들'이라는 기획전시에서 여진정벌의 선봉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 김우추는 편찬미상이나 정조대 수원부사까지 나오는 '수원부읍지' 인물 조에(김우추 무반에 급제했으며 북관의 우후[虞候]가되었다.)도 나와 명실상부 수원 즉, 화성의 위인이다.

  김우추의 후손들은  영정조대 무반진출이 활발하였다. 특히 그의 8세손으로 항렬자에 '화(火)'변을 쓰는 후손들이 주목된다. 화성성역에 관련하여 고신류 등이 전하는 김희, 김후, 김혁과 정조의 친위군 장용영에 등용된 김의, 그 아래 항렬인 김종철 등이다. 그리고 김우추의 8세손으로 직계 종손이자 지역에서 묘가 장군총으로 불린 순조와 헌종대 포도대장으로 유명한 김영 등이 현달하였다.

  이중 김후는 정조의 신임이 두터워 화성건설의 책임자로 종2품 별감동을 맡아 수원신도시 화성축성에 큰 공을 세웠다.

 

김후 영정(경기도유형문화재 291호[2014],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원출처는 해풍김씨 남양쌍부파 종가 사당 보관[현 쌍괴재 이전])

 

  김후와 더불어 김혁도 화성성역에 감동을 김희도 별군직으로 화성성역에 참여하여 그 공로로 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희의 친아우이지만 다른 계통으로 양자를 간 김의는 1796년(정조 20) 장용외영 친구위별장을 장용위에서 확대하여 장용영을 꾸리기 위한 1793년(정조 17) 경과로 나가  6년만에 장용영초관에 임면된 김종철 등 해풍김씨 쌍부파의 주요 인물들은 정조와 화성성역에서 주요한 활동을 한 인물들이다. 화성시가 정조의 애정과 숨결이 있는 곳이니 해풍김씨 남양쌍부파 무반들은 정조와 함께 조선의 중흥을 꿈꾸고 함께했던 정조시대 주역이다.

 

김희(金爔, 1749~1811) 자 원보(字 元甫) 1773년 계사등무과(癸巳登武科) 가의대부 병사(嘉義大夫 兵使)겸훈련원도정(兼訓鍊院都正) 화성성역도소감궤 역임(華城城役都所監饋 歷任  
김후(金㷞, 1751~1805) 자 광중(字 光中) 등무과(登武科) 통정대부 수황해병사(通政大夫 守黃海兵使) 화성성역독성중군별감동 역임(華城城役禿城中軍別監董 歷任)    
김혁(金爀, 1751~1814) ) 자 중명 (字 仲明) 1775년 을미등무과(乙未登武科) 통정대부 수병사(通政大夫 守兵使)화성성역도소감동 역임(華城城役都所監董 歷任)
김의(金燨, 1755~1817) 자 계명(字 季明) 1777년 정유등무과(丁酉登武科) 가선대부 남병사(嘉善大夫 南兵使)증자헌대부 병조판서겸지의금부훈련원사 (贈資憲大夫 兵曹判書兼知義禁府訓鍊院事)
김종철(金宗喆, 1759~1812) 자 백길(字 伯吉) 1784년 갑진등무과(甲辰登武科) 통훈대부 행광양현감(通訓大夫 行光陽縣監

 

 

 

 

 

 

 

화성3.1운동 만세길 답사 김연방 애국지사 유허지(화산5리, 일원동 해풍김씨 남양쌍부파 집성촌)

 

 

 

 

 

 

 

 

 

 

 

 

 

 

 

 

 

 

 

 

 

 

 

 

 

 

 

 

 

 

 

 

 

 

 

 

 

  김연방 지사의 고향 일원동은 현재 화성시 우정읍 화산리(花山里)이다. 화산리의 지명에 대해서는 '예부터 지형이 둥글고 편편한 야산으로 둘러있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농경에 적합하고 특히 봄에는 산과 들에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화산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라고 하며, 자연마을로 배미, 사기말, 일원동(日院洞), 장자터, 한마을(閑村)이 속해있다.

  하지만 화산리라는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지명은 아니다. 위의 자연마을은 야미리, 시여촌, 장포리, 일원리, 한촌으로 각기 리(里)로 되어있었다. 이를 1914년 면리통합으로 우정면 화산리가 된 것이다. 화산리의 유래는 위와 같이 이해를 하지만 실은 이 지역이 바다와 접한 곶지형으로 곶이 '꽃'이 되고 이것을 한자로 차자하여 '화'가 되었고 '산'은 곶의 안, 즉 '곶안'이라는 뜻이다.

  '화산'은 '곶안'을 말하는 것으로 곶지형이었던 이곳 일대를 부르는 명칭이다. 현재 차자된 한자 본연의 뜻으로 해석하여 마을 유래로 들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고 다만 지명이라는 것이 무한한 것이 아닌만큼 현재 사는 사람들이 진달레꽃이 만발한 동네를 꿈꿔 현재는 화산리라는 뜻을 쓴다라고 한다면 이도 현재 화산리 지명의 뜻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화산리의 유래가 한자의 꽃 '화'자를 따와서 진달레꽃이 핀 동네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니 잘 구분하여야 할 것이다.

  일원동은 한자로 예전 일원(一院)과 현재 일원(日院)으로 쓰고 있는데 이웃한 사기말과 함께 서해애 인접하여 대중무역이 성행할 때 이들의 숙소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다른 삼괴의 유래로 괴(槐)자의 또 다른 의미인 느티나무 뜻에 따라 세 그루의 괴목이라 하여 수백년 묵은 괴목(槐木)이 어은리, 금의리, 화산리에 있어서 삼괴라고 불렸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수령 400년이 넘는 느티나무다. 이 나무는 해풍김씨 역사와 함께한다. 99칸 저택의 앞마당을 지켰고 화성 삼괴의 역사의를 간직한 곳이다.

 

 

 

 

  느티나무 위쪽이 김영방 지사의 99칸 종가 저택 자리이다. 3.1운동 당시 일제검거반이 불태웠다. 지금은 밭으로 변하였다. 느티나무 자리가 당시 종택의 앞마당 자리이다. 불이나고 행랑채 2개는 남아 족문들이 드나들며 종손가와 더불어 살았다. 한국전쟁 때 이마저 소실되었다. 99칸 종택이 불타고 그 옆에 종가를 1919년 이래 이어오고 있다. 종가는 김연방 지사의 아들 김창규, 손자 김진세, 증손 김주용(독립운동사 전공 원광대 교수)으로 이어졌다. 종부 이신열(충무공 후손, 아산 출신)이 2003~4년 구술조사에서 종가에 관련 인터뷰(2004, '경기도 전통종가 여성생활사' 경기도)를 했는데, 종부 이신열의 시할머니가 되는 김연방지사 아내께서 홀로 되시며, 그날부터 흰소복을 입고 죽는날까지 상복으로 입고 살았다고 한다. 시부모인 김창규와 시어머니는 여는 시가와 달리 이해심이 깊어 종부살림에 대한 시집살이가 없었고 집안 가풍이 여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같이 도와 하는 것이 기본이라 지금의 종손인 남편 김진세도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집안은 친정보다 부유해서 지역에서는 '김대장', '김대감댁'으로 통용되어 해방 전에 많은 가산을 보유하여 농사를 지었다. 불타고 남은 행랑 2채에서 족문들이 거처하며 농사도 짓고 종가 살림에 도움을 주어 농삿일은 하지 않았다.

  집안은 해풍이랑 이북지역에 많이 살고 이곳을 중심으로 남한지역은 족문을 이뤘는데 196~70년대 개발과 함께 흩어졌다. 집안의 가산은 대개 족문들과 더불어 소작이 이루어진 점이 특이하다. 이신열이 시집 온 계기는 무관집안과의 통혼 전통에 따라 충무공과와 연결된 것으로 김연방 지사 고모들도 아산 충무공가에 출가를 할 정도로 통혼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윗대 김영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이력을 더욱 중시하였다. 해풍김씨 쌍부파가 무반벌열까지는 아니었지만 무반으로 중상의 위치가 되면서 충무공가의 지파와 자연스럽게 통혼이 되었던 것이다. 또 종손가가 꾸준히 무반으로 관록이 이어지며, 가산이 유지된 것도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연방 지사가 시종원 시어를 역임하였고 당시 99칸 저택을 소유할 정도의 재력을 가진 것에서 알 수 있다.  

아  래 옛 터 사진 속 인물은 해풍김씨 종중 김진영 선생님이다. 2002년 3.1운동 실태 조사 및 2003년 해풍김씨 남양쌍부파 집안내력 조사 등 주요 증언자로 참여하였다.

 

출처 : 화성시.수원대학교박물관, '화성지역 3.1운동 유적지 실태조사 보고서', 2003

 

 

 

 

 

 

 

 

 

 

 

 

  쌍괴재(雙槐齋)

  쌍부파 대사헌 7세 김장계 재실(雙阜派 大司憲 7世 樟公系 齋室) 총 43위를 모셨다. 2002년 종산을 처분하고 재실 3억, 숭모당(납골당) 1억의 건립비용을 들여 건립하였다. 이 자리는 쌍부파의 사당이 있던 곳이다. 2003년 준공식을 하였고 현판 쌍괴재는 종손 김주용 교수(원광대)의 부탁으로 장천 김성태가 썼다.
 

 

 

 

 

 

 

삼일독립운동순국지사추모비

 

나라는 경술국치(1910)로 일제에게 감정되고 국권은 침탈을 당하니 이에 항거하여 의병과 열사들이 일어나 구국운동에 나섰다. 이에 일제는 무단정치로 탄압하고 가혹한 식민지배 정책으로 수탈을 일삼으며 온갖 박해를 가하니 수난과 인고의 10년 세월이었노라 때에 미국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부를짖으매 마침내 우리민족의 분노도 터져 기미(1919) 31일 자주독립을 만방에 선언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니 함성은 천지를 진동하며 방방곡곡에 파급되고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으로 승화하여 요원의 불꽃처럼 전개되어 갔도다. 수원(화성) 지방에서도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하여 기세를 떨쳤으며 이 고장은 331일 발안장터에서 시위를 시발로 때를 같이하여 42일 우정 장안면의 민중이 봉기하여 쌍봉산 산정에서 봉화를 올리고 노도와 같이 연일 시위를전개하니 일제는 이를 제압하며 보복의 총검을 휘둘러 지방의 지도적인 세력과 유지를 제거 말살하려고 혈안이 되어 46일부터 검거를 시작으로 삼괴 지방을 휩쓸며 방화와 양민을 살상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나니라 413일 일제는 육군 보병 제20사단 소속 병력을 급파하여 중위 아리따(有田俊夫)가 발안장의 수비를 맡아 주둔하였고 오후에 발안주재소장 사사까(佐板[名未詳])가 헌병 십여명을 이끌고 연방공을 제거 말살코자 엄습하여 태원공이 연방공의 앞을 가로막고 엄호하니 총을 난사하여 살해하고 또한 연방공을 살해한 후에 아흔아홉간 종가에 방화하니 화염은 삼일주야 충천하였고 가보와 문헌은 소진되었나니 통한을 금할 수 없노라 이는 우정 장안면사무소와 화수리 주재소 파괴방화 시위가 있은 지 10일 후요 제암리 교회 방화와 학살사건 2일전에 희생된 참상이니라, 연방(자 중양[字 仲良])공은 해풍김씨 24세손이며 조선조 초기부터 삼괴지역에서 세거한 호반(虎班)의 후예이고 쌍부파 18세 종손으로 지덕을 겸비한 장신의 후손으로 약관에 출사하여 시종원 시어에 이르렀고 망국의 통한을 품고 관직에서 물러나 항시 우국지심이 불타고 국권회복의 일념으로 선도적인 위치에서 민족의 자주와 자존심을 드높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 민중을 계도하고 중인의 추앙을 받았으니 향년이 39요 태원(泰元, 자 재근[字 在根])공은 해풍김씨 22세손이며 문시파 13세손으로 일찍이 쌍부파 종가의 집사로 항상 연방공과 거동을 같이하였으니 향년이 58이니라 순국지사들이 구국운동의 지도 세력과 유지로서 무참하게 희생된 지 74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명리를 밝히고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으니 실록 면목이 없노라

광복의 그날도 어언반세기 만시지탄이나마 이제 지난날 순국하신 두분을 비롯한 제영령들의 숭고한 뜻과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넋을 위로하고자 해풍김문에서 정성을 모아 비를 세워 추모라고 기념하나니 영령들이시여 명명지중에 고이 잠드소서

서기 19931114일 해풍김씨 대종회 근립

 

   여기 당시 삼괴지역에서이 피해상황을 남기나니 일제의 수비서류제745(1919423일부)조선헌병사령관조선총독부경무총장兒鴨惚次郞의 보고서에 우정면8개부락에서 가옥소실35호 사망7명 부상1명 재판회부11(화산리소실1호사망2) 장안면6개부락에서 가옥소실50호 사망6명 부상5명 재판회부19명으로 기록되어있나니라

 

  아래 수원대박물관에서 2003년 펴낸 '화성지역 3.1운동 유적지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위의 추모비가 원래는 화산5리 마을회관 근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 화성시.수원대학교박물관, '화성지역 3.1운동 유적지 실태조사 보고서', 2003

 

 

 

 

 

 

 

 

 

 

 

 

 

 

 

 

 

 

 

 

 

 

 

 

 

 

자헌대부형조판서겸오위도총부도총관지훈련원사(資憲大夫 刑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 知訓鍊院事) 해풍김공휘영지묘 정부인밀양박씨부좌

 

 

 

  김영(자 경명[字 景明])은 앞서 살펴 본대로 포도대장을 역임했고 조상에 대한 뿌리 의식이 강해 실전된 시조 김숭선의 묘를 찾은 인물이다. 해풍김씨 파시조 7대 김장(金樟)의 후손으로 선조대 여진정벌 선봉장 북우후 김우추가 7대조이다. 향남지역에서 그의 묘소가 일명 '장군총'이라고 불린 인물이다. 그리고 김연방 지사의 5대조이다. 그래서 남양쌍부파 종가는 지역에서 '김대장댁', '김대감댁'으로 불렸다.

 

 

 

  그의 묘소가 장군총(화성시 향남면 행정리)으로 불리며 숭상된 것은 포도대장을 무려 24번 하고 도적떼를 잘 잡아 민생을 편안케 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명성이 동요로도 불러 졌는데

 

 

세월아 네월아 가지를 말어라

이현장신(이현장신)이 다 늙어 가노라

영웅호걸은 늙던지 말던지

이현장신만 늙지를 마소서

세월아 네월아 가지를 말어라

 

이현장신이 다 늙어 가노라

앉아서 천리요 서서 만리라

눈만 뜨시면 자버대령

 

세월아 네월아 가지를 말어라

이현장신이 다 늙어 가노라

좌우포장 스물네 번에

조선천지가 잔잔하고나

 

  이현장신은 김영이 서울 이현에 살아서 불여진 이름이다. 김영이 죽고 50여년이 넘어 고종대 도적이 들끓자 김영을 그리워한 동요가 불려졌다.

 

붙잡던 세월은 가고야 말었오

이현장신도 가고야 말었오

유명한 포장 이현장신공

이 세상 이 때에 다시 한 번 오소서

(출처 : 화성문화원, '화성 사람들, 정조를 만나다', 2004, 98~99쪽 : 김영규, '해풍김씨세덕록, 해풍김씨대종회, 1999, 176~177쪽)

 

  김영은 목민관으로 나서서도 능력을 보인 모양이다. 통영에 삼도통제사로 부임(1829)하였을 때 큰불이 일어나 4개동 인가 수백호가 불타버려 남망산(南望山)의 소나무를 베어다 집을 짓게 하여 주민을 구휼(救恤)했다고 한다 그러나 금송(禁松)을 남벌(濫伐)하였다는 국법으로 파직(罷職)을 당하니 이듬해에 통영의 주민들은 김영의 은덕을 기리는 비문을 뜬 바위에 세웠다. 이 바위는 김영이 올라가 수일동안 진화작업을 지휘하였던 바위이며 통영군지(統營郡誌)인편에 실려 있다. 비문에는 「화재(火災)의 고난(苦難)을 겪은 백성(百姓)들이 공이 안전(安全)하게 조치해주신 덕택으로 걱정근심을 덜어 버리니 춥고 배고픔 막아주시니 은혜(恩惠)크고, 많은 집들을 전과 같이 다시 짓게 해 주시니 재난은 이미 지난일 되었고 옛 과 같이 살게 되었도다」 라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그밖에 세병관(洗兵館) 후정에도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져 있다.

  이러한 전력은 집안의 자랑이 되었다. 김연방 지사 고모들이 아산 충무공가로 출가하였고, 자신의 손부도 아산 충무공의 후손인 이신열 종부를 맞았다. 무반의 전통이 무반가의 통혼으로 이어진 것이다. 특히 김영이 충무공과 같은 삼도통제사를 역임한 것은 대단한 자랑이었다. 

 

 

 

 파직된 그 해 본관 해풍을 찾아 시조묘를 찾아 모신다. 해풍김씨에서는 가장 큰 위선사업이었다. 그리고 바로 김영은 기용(起用)되어 포도대장(捕盜大將)을 24번, 한성판윤(漢城判尹)(833대)을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 도총관(都摠管) 금위영대장, 어영대장 총융사(禁衛營大將, 御營大將 摠戎使)에 오른다. 

 

   

 

 

 

 

 

 

통훈대부시종원시어 해풍김공 휘 연방지묘 숙인한산이씨부좌(비는 2003년 재실 쌍괴재와 숭모당을 건립하면서 손자 김진세가 세웠다.)

 

  김연방 지사의 묘 앞에 있던 묘표이다. 지금은 선대 묘들을 모두 합사하여 납골당 숭모당에 안치하고 있다.

  김연방 지사의 가계와 순절 이후 아들 김창규의 행적에 대한 흥미로운 자료가 있어서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우정면 일원동에 살고 있는 김창규씨의 아버지 김연방(金然昉)은 삼괴지역의 유지이며 선비였다. 김연방의 7대조 김수(金壽)는 병사의 직을 지냈고, 6대조 김상옥(金相玉)은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5대조 김영은(金永銀)은 형조판서를 지냈다. 또한 고조부 김한철(金漢哲)은 어영대장을 거쳐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으며 조부 김태인(金泰麟)은 청어방어사를 지냈다. 이러한 가문에서 태어난 김연방은 일찍이 선전관 벼슬을 지내다가 일제가 강점하자 벼슬을 지내다가 일제가 강점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화산리 일원동에서 99칸 대가 집에서 살았다. 1919년 4월 13일 발안 경찰주재소 순사부장인 사사카 리키치(佐板)가 수비대를 이끌고 나와 살해하고 방화를 하여 99칸 대가가 전소되고 말았다.
  김창규씨는 자라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아버지의 원수는 당시 발안 경찰주재소에서 근무하고 있던 순사부장 사사카 놈이 저지를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의 뒤를 추적하여 기회를 노렸으나 기회를 못 잡고 세월을 보내다가 사사카가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간 사실을 알고 추적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산에서 그의 모습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김창규씨는 불효자의 죄책감으로 항시 괴로운 삶을 살았다고 괴로워했다."
-김선진 동천교구, '일제의 말살정책과 화성지역', 기획 3.1운동 84주년(출처 : http://cafe.daum.net/donghcdso/8fVa/75?q=%EA%B9%80%EC%97%B0%EB%B0%A9%20%EA%B9%80%EC%B0%BD%EA%B7%9C    

  위의 내용은 삼괴지역 등 화성지역 3.1운동과 지역 향토사에 밝았던 김선진의 구술자료이다. 김연방 지사의 아들 김창규의 구술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위의 김수 이하 가계에서 5대조 형조판서를 역임한 김영은의 기록은 포도대장을 역임하고 묘소가 장군총으로 불린 김영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김수와 이하 조상의 이름은 한자 오기가 발견된다. 이름 교정하면 다음과 같다.

 7대조 김수(金洙, 1680~1728) 6대조 김상옥(1722~1790) 5대조 김영(金煐, 1772~1850) 고조부 김한철(金翰喆, 1802~1856) 증조부 김현(金鉉, 1828~1845, 계자) 조부 김태인(1835~1882) 부 김능모(金能模, 1859~1881, 계자) 이는 아래 남양쌍부파 파시조격인 김우추 이하 김연방 지사 5대조 김영까지 종손으로 이어지는 세계도를 통해 정확하게 확인이 된다. 

 

 

 

 

 

  이처럼 김선진의 구술자료는 다소 부정확 것이 보이지만 김연방 지사의 벼슬인 시종원 시어가 선전관으로 증언기록 되었으나 갑오개혁 이전의 벼슬이기 때문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것처럼 김선진의 구술자료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다.

  그리고 김연방 지사가 순절한 이후 김연방 지사의 아들 김창규는 아버지 김연방의 원수 사사카 리키치를 발안주재소 순사부장으로 기억하고 해방과 함께 단죄하기 위해 그를 추적하여 부산까지 다녀온 사실은 상당히 가슴 뭉클한 사연이다. 당시 화성지역에서는 일본인거류민단장인 사사카를 순사와 동일시 한 것을 여러 자료에서 확인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사사카는 거류민단장의 지위로 순사 이상의 특권과 월권을 자행했고 3.1운동 보복에 앞장섰던 장본인으로 당시 수비대의 향도(길잡이)를 하였다. 그가 지역에 지리에 밝은 이유는 발안장(현재 화성시 향남읍 발안리)에서 정미소를 운영하였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조선에 진출해서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과 함께 그 확장을 노렸던 것이 지역에서 악행으로 빚어진 이유로 보인다. 사사카는 일제의 경제적 침탈과 수탈, 일본인 이주의 그늘을 여실히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화성지역에서 일본인의 진출은 조선인들의 반감을 빚고 있었던 것이다.(3.1운동 당시 발안장 일본인 가옥 점포 방화되고 사사카의 지휘로 일본거류민은 진위군 청북면 삼계리[3.1운동 관련 여러 자료에서 삼괴로 잘못 표기되기도 함]로 피신) 경제적 갈등이 결국 민족적 갈등으로 불거져 결국 우정, 장안면과 팔탄면 고주리와 향남면 제암리에서 선량한 조선인의 대량 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숭모당(崇慕堂)
 쌍부파 대사헌 7세 장에서 25세 김창규에 이르는 43위묘당 (雙阜派 大司憲 7世 樟公 25世 昶圭公 43位墓堂)

 25세 김창규는 김연방 지사의 아들이다. 김장에서 직계종손들의 묘당이다. 현재 종손은 김창규의 손자이자 김진세의 아들 김주용 교수(원강대, 독립운동사 연구자)이다. 김연방 지사의 수훈을 대리한 것도 김주용 교수였다. 자신이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의 권위자면서도 자신의 증조부에 대한 자료를 찾지 못해 이제껏 수훈되지 못했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깍은 건지 아니면, 겸양이었는가 하여간 늦었지만 화성시에서 감사장을 발굴하여 수훈까지 하고 큰 일을 하였다. 

 

 

 

 

 

 

 

 재실 쌍괴재 동영상

 

 

 

 

화성지역 3.1운동 유적지 실태조사 보고서 

 

 

해풍김씨 남양쌍부파 자료 '화성사람들, 정조를 만나다'

 

 

 

 

 

 

 

 

  위 2004년 책에서 김영 장군에 대한 집안의 자료가 없어서 아쉬움을 본문에 수록하고 있는데, 이는 김영이 쌍부파 종손으로 그의 자료는 종가에서 대대로 보존하여 이어져 왔는데, 그의 현손인 김연방 지사가 4월 3일 삼괴지역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살해 당하고 이때 종가 99칸 저택이 불태워졌기 때문에 종가의 선대 유적은 남아있을 수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기념비에서는 '연방공을 살해한 후에 아흔아홉간 종가에 방화하니 화염은 삼일주야 충천하였고 가보와 문헌은 소진되었나니 통한을 금할 수 없노라'고 밝히고 있다. 그에 반해 위 자료의 김후 등 쌍부파 가문의 무신들의 여러 고신 등은 종손이 아닌 쌍부파 방계이기 때문에 종가에서 보존하던 자료가 아니기에 전승되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참고자료

기획/3·1운동 84주년
일제의 말살정책과 화성지역

김선진 동천교구


한글폐지와 일본어 교육강화
수원 남양 출신의 홍난파는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민족의 슬픔을 봉선화란 노래 속에 표현하여 서민 대중들에게 불려졌는데, 당시 일제는 일본의 통치를 반대하는 불량한 노래라고 트집을 잡아서 부르지 못하게 강력히 금지시켰다. 이와 같이 화성군 사람들의 가슴 속 깊이 새겨져 있는 일본인들은 알 수 없는 커다란 사건들이 응어리져 있었다.
1919년 해군대장 '사이또 마고또'가 조선총독으로 부임되어 왔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서둘러 보통학교 6년제를 4년째로 개편하는 한편 고등보통학교 4년제도 5년제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대학과 사법학교를 서둘러 신설하여 일본어 교육을 강화해 나가면서 내선융합에서 내선일체로의 정치를 꾀하여 나갔다. 화성지역에서도 1개 면에 한 개의 보통학교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19개의 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지금의 발안지역에 있는 향남초등학교는 1926년 설립하여 1929년에 제1회 졸업생 46명을 배출하였다. 이 해 전국에서는 항일학생운동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1930년에 제2회 졸업생 36명, 여학생은 10%정도 밖에 안되었다.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1년에는 제3회 졸업생 32명을 배출하였다. 1932년 제4회 졸업생 26명은 모두 한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으며, 1933년에는 25명을 배출시켰다. 이 해부터 전국 학생들에게는 신사참배가 강요되었다. 1935년 제7회 졸업생 34명을 배출하였다.
그런데 이듬해 미나미 지로우가 조선총독으로 부임을 하고 일본은 전쟁태세를 강화하고 내선일체를 위해 황민화정책을 강력히 추진시켜 나갔다. 이에 따라 1938년부터 한글수업이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뀌었으며 1941년에 이르러서는 전면 폐지되는 동시에 일본어만을 사용하도록 강력히 조치하였다. 해방되던 1945년의 졸업생은 남자 79명, 여자 42명으로 121명이 배출하였다. 이러한 전쟁 말기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은 소년시절의 기억을 창피해서 이야기하기를 꺼리고 있는 실정이다.

창씨개명
1939년 창씨개명을 하라는 조선총독부령이 공포된 후에 1940년도의 향남초등학교의 학적부를 살펴보면 당시까지만 해도 몇몇 학생은 한국식 이름이 그대로 기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나 1941년의 학적부에는 모두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일제는 무단통치로 한국인들에게 말을 빼앗았고 또 글자를 빼앗아 버렸으며 마침내는 성과 이름까지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이것은 세계 식민지사상 대단히 드문 동화정책으로 일제는 아주 철저하게 추진하였다.
화성지역에서 당시 일본의 창씨개명정책에 반대하던 한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들이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학교에서 담임선생이 이 학생을 교무실로 불러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다고 야단을 치고 괴롭혔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에게 개명하여줄 것을 울면서 간곡히 요구하자 그 아버지는 조상님께 불효죄를 지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서 마침내 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신라시대부터 대대로 내려온 양반의 가문으로서 이름은 설진용, 호는 남파라는 인물이었다. 남파선생은 26세 되던 해 일인에 의해 민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울분을 참지 못해 일제에 항의하기 위해서 의병에 가담하여 왜병들과 싸우기도 하였다. 또 일제의 강점 이후에는 고향 주변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하여 왔다. 그런데 일본이 창씨개명을 강행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이것을 거부하는 유서 한 통을 남기고 스스로 논 가운데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은 순청 설씨의 족보에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한 집안의 가계를 매우 소중히 여기고 있어서 태어나면 곧 족보에 오르며 결혼을 하여도 여자들의 성은 바뀌지 않는 것이다.
남파 선생의 손자 설동순씨는 지금도 남아있는 논 가운데 그 우물로 필자를 안내하여 주었다. 그는 조부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조부와 한 방에서 잠을 함께 잤다고 말을 하였다. 설씨의 논에 들어가 그 우물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사각형의 형체를 이룬 우물로 수심이 깊은 것을 보니 물이 잘 솟구쳐 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남파 선생은 조상님께 욕되게 할 수 없다는 마음에서 갓과 도표 신발을 가지런히 우물가에 벗어 놓고는 물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남파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다음 시의 구절 속에서 선생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성을 바꾸지 않는 맹세'
성을 바꾸고 조상의 묘에 이를 고하면 크게 조상의 혼을 놀라게 할 것이다. 그래서 태양이 비치는 이 세상을 떠나 어둠의 저 세상으로 갈까 하노라. 이제 가계의 흐름은 나로 하여 끊어지고 하늘과 땅에 오직 나만이 죄인이로다. 얼굴을 들고 어디로 가리오. 물 속으로 당장 내 몸을 던지리라.

황국신민 정책
1936년 조선총독으로 취임한 육군대장 미나미 지로우는 조선인을 오직 충성된 일본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것은 일본의 전쟁 목적을 위해서 조선인들을 강제로 끌어내기 위한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피해 나가고자 화성지방에서도 돈을 벌기 위한 핑계를 대고 또한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떠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몇 년 전 장안면 수촌리에 살고 있는 손상례 할머니를 만났다. 이 분은 사할린에 간 채 행방불명이 된 남편을 찾아 달라고 호소한 적이 있었다.
마침 필자의 저서 『일제 학살만행을 고발한다』를 읽어본 일본 NHK방송국 기자가 '역사적 근거의 사실을 책임질 수 있느냐'는 전화가 와서 필자는 부산에서 "의문스럽거든 화성 현장인 제암리 고주리에 나와서 조사해 보라"고 안내하였다. 이리하여 일본 NHK 방송국 기자가 화성군 3·1운동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제암리 고주리를 거쳐 수촌리에 찾아와 취재하였다.
또 이웃해 있는 우정면 조암리에서도 중년의 여성이 사할린에 계신 아버지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받은 바 있었다. 이 딸이 태어나 5개월 되던 어느 날 아버지는 사할린으로 돈을 벌려고 떠나갔다 한다. 이 편지도 비디오로 찍었다. 아버지 송경호씨는 1936년 탄광으로 일하러 사할린에 갔다가 2년 후 돈을 벌어 귀국하여 결혼을 해서 딸 송영주씨를 낳고 생활을 하다가 가정이 어려워 1943년 다시 사할린으로 일하려고 떠났다. 일본이 패망할 당시 사할린에는 4만3천여명 정도의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 NHK 방송국 취재반은 사할린에서 방송국의 협조를 얻어서 송영주의 아버지 송경호씨를 만나서 아버지가 보내는 편지를 비디오에 담아서 다시 우정면 조암리 집으로 전하여 왔다. 편지 내용인즉, 아버지 송경호씨는 2차대전이 끝난 후 하루하루 품을 파는 노동자로서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다가 1957년 사할린 유지노에 정착해서 소련 국적을 취득하고 1962년 조선계의 여성과 결혼하여 지금은 연금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전하여 왔다. 딸 송영주씨는 비디오로 처음 보게 된 아버지 송경호씨의 얼굴을 보고는 목이 멘 채 말을 잃었다. 여기에서도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역사의 아픈 상처가 남아있었다.
이외에도 화성지방 곳곳에 강렬하게 인상에 남는 인생들이 있었다. 안상진씨는 제암리학살사건 때 증조부, 조부, 부친, 작은아버지, 사촌형제 여섯 사람이 한꺼번에 일본 수비대에 의해서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을 아무리 물어봐도 슬픈 눈빛으로 말 없이 먼 하늘만 잠자코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또 우정면 일원동에 살고 있는 김창규씨의 아버지 김연방(金然昉)은 삼괴지역의 유지이며 선비였다. 김연방의 7대조 김수(金壽)는 병사의 직을 지냈고, 6대조 김상옥(金相玉)은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5대조 김영은(金永銀)은 형조판서를 지냈다. 또한 고조부 김한철(金漢哲)은 어영대장을 거쳐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으며 조부 김태인(金泰麟)은 청어방어사를 지냈다. 이러한 가문에서 태어난 김연방은 일찍이 선전관 벼슬을 지내다가 일제가 강점하자 벼슬을 지내다가 일제가 강점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화산리 일원동에서 99칸 대가 집에서 살았다. 1919년 4월 13일 발안 경찰주재소 순사부장인 사사카 리키치(佐板)가 수비대를 이끌고 나와 살해하고 방화를 하여 99칸 대가가 전소되고 말았다.
김창규씨는 자라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아버지의 원수는 당시 발안 경찰주재소에서 근무하고 있던 순사부장 사사카 놈이 저지를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의 뒤를 추적하여 기회를 노렸으나 기회를 못 잡고 세월을 보내다가 사사카가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간 사실을 알고 추적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산에서 그의 모습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김창규씨는 불효자의 죄책감으로 항시 괴로운 삶을 살았다고 괴로워했다.
또한 박상이씨는 당시 수비대에게 잡혀 발안 경찰주재소로 끌려나가서 만세운동의 주동자를 대라고 순사들이 몽둥이로 두들겨 패서 피투성이가 된 채 냇가에 버려졌다가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때 혹독하게 당한 고문의 여독으로 살아오면서 그 고통을 천도교의 가르침으로 일본에 대한 원한의 감정을 삭이며 살아왔다고 토로했다.
박영귀씨는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시느라 논밭을 전부 팔아서 사용하였기 때문에 빈털터리가 되어서 가난에 찌들어 말도 못하는 수모와 고생스러운 삶을 살아왔다고 원망스럽게 한탄하였다. 홍영창씨는 집이 가난하여 일본인 집에서 일을 하였는데, 당시 안주인으로부터 받은 모욕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이현경 조암교구장은 학교에서 조선 노래를 부르고 조선말을 한 죄로 교무실에 끌려가 야단을 맞았지만 그 후에도 노래를 계속 부르며 살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마음이 무거웠던 것은 사할린의 방송국으로부터 온 하통의 편지를 손상례 할머니에게 갖다드리는 일이었다. 손상례 할머니의 남편 김호경씨는 2차대전 당시 사할린에서 같이 일한 적이 있는 같은 고향 출신인 노인 한 분을 만날 수 있어서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김호경씨는 2차대전이 끝난 직후 얼마 안되어서 병을 얻어 앓다가 마침내 타향에서 사망하였다는 내용의 편지가 전해졌던 것이다.
1942년 육군대장 고이소 구니아키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여 왔다. 1939년에 나온 국민징용령을 비롯하여 패전할 때까지 악몽과 같은 징용과 징병의 시대가 계속되어서 한국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장안면 기림골 김종갑씨는 농사를 짓다가 징용에 징집되어서 나카타켄의 댐 공사에 끌려가 혹독한 고생을 하다가 해방이 되어 구사일생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또 발안시장에 거주하는 송원석씨와 주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도중에 또 다시 그 당시 거류민단 단장이며 발안 경찰주재소 순사부장 사사카(佐板)의 이름이 많은 사람들의 화제에 올랐다. 그 당시 향남초등학교 학생들 중 사사카가 경영하는 과수원에 강제동원 당해 가서 과수원에 풀을 뽑아주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의 참사
1923년 9월 1일 정오 경에 돌발된 관동 대지진은 동경 횡빈(橫濱)을 중심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이때 전소되었거나 파괴된 가옥이 약 58만 가옥이었고 사망, 실종자가 14만2천8백여 명이 넘게 발생하였다. 이런 혼란한 와중에서도 '조선인이 3 1운동의 무자비한 탄압에 앙심을 품어 그 보복으로 폭동을 일으켰다.'라고 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자경단과 관헌 등이 무자비하게 닥치는 대로 조선인들을 죽창 또는 일본도, 도끼를 휘둘러 학살하였다. 이로 인해 6천6백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처참하고 잔혹하게 살해되었다. 유언비어는 '관동지방의 이 처절하고 참담한 피해는 조선인들의 폭동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또 조선인들은 관동인들을 전멸시키기 위해서 관동지방에 있는 우물마다 독약을 풀어 넣어서 일본인들을 몰살시키려 했다. 우물물을 먹지 말라' 등이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차량을 동원하여 외부지역에서 음료수를 수송하여 급수를 해주었다. 정부가 서둘러 이러한 행동을 하니 어찌 주민들이 이 유언비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 같은 행위를 사실로 인정한 관동지역 주민들은 죽창, 일본도, 낫, 도끼, 쇠스랑 등으로 무장하고 거리로 몰려나와 통행인들을 검문하고 조선인들을 기습 공격하였다.
이와 같이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자 동경 횡빈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이 궤멸상태에 빠져서 혼란상태에 이르고 만다. 일본 경제가 큰 타격을 받게 되자 일본 정부는 이 난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조선인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일본 정부가 직접 조작하여 널리 유포함으로써 관동지방을 혼란지경에 빠뜨려 이 난국을 수습하려 하였다.
이처럼 관동 대지진은 일제가 '조선인들을 사냥한' 그 책임을 유언비어나 폭동의 조짐이 있어서 미연에 방지하려는 뜻에서 대량 학살하게 된 것같이 책임전가에 급급하고 있었다. 또 그렇지 않으면 우연히 발생한 것처럼 애매 모호하게 초점을 흐리고 있는 일본인 학자의 특유의 필법을 구사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 이것은 매우 가증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최승만(崔承萬)은 당시 관동에서 참변을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유언비어의 조작은 일본 군부, 내무성, 경찰측에서 조작하여 그들이 고의적으로 유포시킨 사건이다. 그것은 한국인들과 사회주의자들을 관동대지진을 이용하여 이 기회에 전원 몰살시키려는 것이 일본 군부의 정략이었던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일본내의 법조인 학자 언론 등에서는 그 진상을 규명하려고 빗발치는 요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살펴본다고 해도 알 수 있는 문제이다. 온순한 한국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자 한 것은 물론 아닌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천인공로 할 만행을 회개는 못할망정 은폐 축소하거나 불가피성으로 몰아 부치고 있는 일제의 잔혹성에 새삼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다."
일제는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역선전을 퍼부어 재일 한국인들을 학살하였음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는 어떠한 이유로든지 정당하고도 명쾌한 해명이 될 수 없다. 일제는 이 엄청난 폭행을 사죄하는 뜻에서 분명하게 진상을 규명한 뒤 명백히 흑백을 가려 일본인 2.3세에게 진실을 알리고 교육시켜야 할 것이다.

일제는 무단통치로 한국인들에게 말을 빼앗았고 또 글자를 빼앗아 버렸으며 마침내는 성과 이름까지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이것은 세계 식민지사상 대단히 드문 동화정책으로 일제는 아주 철저하게 추진하였다.
일제는 한민족의 말살정책을 사죄하는 뜻에서 지난날의 역사적 사실을 분명하게 진상을 규명한 뒤 명백히 흑백을 가려 일본인 2,3세에게 진실을 알리고 교육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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