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하계 김상로 선생 묘 옛터

달이선생 2020. 1. 3. 12:00

하계 김상로 선생 묘 옛터(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쌍봉산 아래)

 

  화성시 우정읍과 장안면은 예부터 하나의 역사와 사회경제적 공동체를 이루어온 곳이다. 마한 상외국, 백제 6포, 고려 쌍부현, 조선 쌍창과 삼괴칠면 등 수원시의 전근대 행정구역인 수주와 수원부에 속하여 독립적인 역사와 문화를 이룬 수원 남부지역의 중심된 곳이다, 이곳이 정식 역사기록으로서 흥미로운 사실을 전하는 것은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이다. 지역의 자연지리적 특징인 두 언덕을 말하는 쌍부라는 지명과 관련하여 조선시대 역사 인물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그 인물이 바로 청풍김씨 하계 김상로(하계 김상로(霞溪,金尙魯, 1702 ~ 1766년 12월 29일)이다. 김상로는 당대 노론의 영수이자 사도세자의 비행을 들어 영조가 사사하는데, 큰 역할을 하여 영조는 정조에게 '너의 원수는 상로이다'라고 말한 인물이다. 

  이런 김상로가 영조실록에 지평 임명주의 상소에 따르면 1746년 이조참판 김상로가 수원부사 정휘량의 도움으로 수원부의 명승인 쌍부산 아래 조곡을 쌓아두던 쌍부창(쌍창)을 옮겨 자신의 장지로 삼았다고 탄핵하였다.(영조실록 권66, 영조23년[1747 정묘] 1222일[무인]실제로 쌍봉산 아래는 원래 김상로가 묘를 쓰려던 곳에 둘째 형인 이조판서 김취로(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산24-27)의 묘가 있고, 그로부터 북동쪽으로 30 여 미터 떨어져 김상로의 무덤이 있다.(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38-2 아래, 38-12 위, 산24-20 위쪽 사이에 위치) 이러한 사실을 직접 확인한 것은 2012년 봄이었고 그렇게 답사한 내용을 블로그에 남겼었다.

  그리고 늘 지역의 숨은 역사와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알리던 차에 화성문화원 계간지 '문화의 뜰' 2019 가을, 겨울호에 대한 원고청탁이 들어와 '지명 삼괴와 김상로이야기'라는 기고를 하게되었다. 그간 지역지명 연구 정리와 새로이 밝혀낸 사실, 그리고 김상로에 대한 지역에서 모르는 이야기 등을 정리하여 글을 실었다. 특히 이러한 역사성을 가진 김상로 묘역에 대해 화성시 차원의 문화재지정을 바란다는 글이다.

  하지만 계간지 발간이 완료되고 나서 김상로의 묘가 이장된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다음 블로거 '실사소재 세븐(청풍김씨 문중인 추정)'의 2017년 8월 8일 '청풍김씨 대제학 검재 휘 유 김공 묘역 공사 도면'이라는 글에서 2017년 6월 17일 쌍봉산 아래 김상로 등 묘가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김유묘역으로 이장하였는데 과천에 있는 김약로의 묘를 이장하게 되면서 그 형제인 김취로, 김상로 등의 묘도 옮기게 된 것이라는 내용이다. 

  2020년 1월 3일 고향집으로 내려가 당장 쌍봉산으로 달려갔다. 김상로와 김취로 묘 등이 이장된 것은 사실이었다.  화성문화원 계간지 '문화의 뜰' 2019 가을, 겨울호의 기고문을 고칠 수는 없으나 이 사실을 직접 답사하여 확인된 것을 글로 남긴다.

 

  김상로 선생의 묘가 이장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든 생각은 '애석하다'였다. 그리고 실제로 이를 확인하니 너무나 먹먹했다. 2012년부터 2017년 사이 김상로의 무덤을 보면서 고향의 역사를 담고 있는 그의 무덤이 나름 자랑스러웠고 든든했다. 그랬던 김상로의 무덤이 내가 관심을 못 둔 사이 지역을 등진 것을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안 좋았다. 형 김취로 선생의 묘처럼 잘 정돈된 것은 아니었지만 옛무덤으로 둘레돌을 두른 위엄있는 김상로의 묘... 이제는 그의 묘소가 있던 자리에는 갈대와 풀이 자라 마구 뒤엉켜 있다. 

  이렇게 옮겨간 김상로의 무덤을 2020년 1월 6일 의왕시 왕곡마을에서 확인하고 참배하였다. 고향 삼괴에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던 둘레석은 옆에 위치한 형 김약로의 둘레석보다 크고 위엄이 있었다. 좌의정을 역임한 김약로의 묘제석물도 당대 상당히 격식있게 잘 조성된 분묘로 평가되는 것인데, 그의 둘레석보다 큰 김상로의 둘레석을 보니 당대 노론의 영수이자 영의정을 역임한 김상로 답다고 생각이 든다. 풍수가들이 쌍봉산 아래로 김상로 묘를 찾아서 무덤이 단촐하다는 등 말이 많아서 김상로의 무덤은 당대 최고로 예장된 무덤임을 블로그에 글을 써서 주장했는데, 훤희 드러난 그의 둘레돌을 보니 내 말이 주장이 아닌 사실이었다. 그리고 문중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로 정조가 삭탈관작할 때 묘제석물 모두를 철거하고 망주석과 둘레돌만 남겼다고 했는데 이도 사실로 보인다. 장대한 둘레돌을 두르고 문인석 등 다른 묘제석물을 갖추지 않는 경우는 없다. 김취로의 둘레석과 김상로의 둘레석이 비슷한 것으로 봐서는 김상로의 묘제석물 구성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최소한 말이다. 

  김상로와 형 김취로의 묘가 옮겨간 곳은 대제학을 역임한 아버지 김유의 묘 아래이다. 김유 묘 윗쪽구릉으로는 증조할아버지 김인백의 묘가 있고 그 건너편 구릉으로는 입향조가 되는 김우증과 아들 김여광, 양자 김계의 묘 등 백운산 아래 왕림동 일대가 청풍김씨 판서공파 묘역이다. 이곳에서 김계의 후손들이 발복하여 특히 막내아들 김인백의 후손에서 김구, 김재로, 김약로, 김상로, 김치인, 김종수 등 정승 6명과 대제학, 판서 등이 배출되어 여느 잘나가는 문중 이상으로 크게 현달하게 되었다. 바로 인백파의 발흥지 인 것이다. 인백파라는 명칭은 김상로가 그의 선조가 되는 정국공신 김우증의 신도비를 찬하면서 김인백의 후손임을 자랑으로 이른 명칭이다. 김인백의 후손 말고도 충백, 효백 등 김계의 아들들의 후손은 인백파보다는 덜하지만 나름 현달하고 번성하였다. 김계는 청풍김씨 족문에서 김여광의 계자가 된 인물이다.    

  이장된 무덤을 보니 역적의 나락으로 떨어져 지역에서도 돌봄받지 못했던 그의 묘소가 그의 가문의 선영에서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정돈되어 모셔져 있는 것을 보니 애석했던 마음이 다행이다 싶다.

   이장된 김취로, 김상로의 묘에 대한 게시글은 다음과 같다.

청풍김씨묘문 의왕시 왕림, 김유 선생 묘 및 신도비(http://blog.daum.net/ilovepk/303)

청풍김씨묘문 의왕시 왕림, 김정로, 김취로, 김약로, 김상로 선생 묘 등(http://blog.daum.net/ilovepk/304)

 

  이제는 쌍봉산 아래 그의 무덤자리와 형 김취로의 묘자리이자 원래 김상로의 묘자리는 이들 묘소가 이장되었지만 지역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내포한 곳인 만큼 문화유산 지정은 어렵지만 그 유허지로 길이 전승되고 전해질 수 있도록 기록을 남긴다. 사실 표식이라도 시차원에서 혹은 지역 차원에서 하자고 주장하고 싶으나 무덤이 있을 때도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꼭 김상로의 자취를 남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비록 정조에게는 악인으로 원수로 지목되었지만 영조에게는 충신이고 조선 조야를 이끌던 노론의 영수였다. 성군 정조로 인해 사극이나 문학작품에서 이 시기 노론이 절대악으로 묘사되곤 하지만 노소는 물론 4색당파가 균형을 이루던 시기에 특히 노론이 정도를 갈 수 있도록 이끈 것은 김상로이다. 물론 천륜에 반하는 사도세자에 대한 비극에 서있었지만 사실 사도세자의 비행과 아버지에 대한 불충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대 내관 등을 죽인 일은 세자를 죽이는 일까지는 비화되지 않았다지만 미쳐 날뛰며 사람을 죽이는 자가 사도세자였다. 어쨌든 김상로 선생은 사도세자의 직계후손인  고종 때 신원 되었다.

 

  역사의 평가는 양면이다. 비판받아 마땅한 것도 있지만 칭송받아 마땅한 사실도 있다. 특히 김상로라는 인물을 통해서 우리 지역이 쌍부현이 폐현되고 중앙정부에서는 수원부에 속한 쌍부에 조곡을 쌓아두던 관아인 쌍창을 설치했고 그 쌍창을 중심으로 지역 편재를 하고 있던 사실을 실록과 수원부읍지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기여하였다. 더욱이 지역의 중심된 산인 쌍봉산이 수원부에서도 이름난 승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영조실록에 기록되면서 쌍봉산은 지역을 넘어 우리나라에서도 주목되는 명산임이 드러났다.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남길 수 있는데 역할을 한 하계 김상로 선생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실제로 쌍봉산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여 수원지역에서 가열차게 전개될 때 일제의 폭압에 대한 항쟁의 중심이 된 곳이 바로 쌍봉산이었다. 쌍봉산에서 독립만세를 알리는 화톳불과 봉화가 피어올랐고, 독립을 염원한 삼괴민이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그 아래 화수리 일제순사주재소에서 무단통치의 주범으로 지역민에게 가혹한 수탈과 만행을 저지르던 가와바타 순사를 처단하였다.(현재 그 자리에는 '화성3.1운동만세길 방문자센터'가 세워져 있음)  

 원래 김상로의 무덤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이 블로그 게시글은 다음과 같다.

쌍봉산록에 묻힌, 김상로 역적인가1(http://blog.daum.net/ilovepk/230)

쌍봉산록에 묻힌, 김상로 역적인가2(http://blog.daum.net/ilovepk/231)

 

 답사는 2012년과 마찬가지로 장안면 어은사거리에서 올라가 한라아파트 뒤 우정2호 어린이 공원에 있는 마을입구에서 시작하여 김취로 묘 옛터와 마을길을 이용해 쌍봉사 아래 위치하는 김상로 묘 옛터를 답사하고 삼괴고등학교(중학교)를 지나 조암시장을 거쳐 조암터미널에서 마쳤다.

 

 

 

쌍부산 전경으로 그 아래 쌍창과 김취로, 김상로의 묘가 있었다. 

 

 

 

묘터가 있는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장안면 어은사거리-한라아파트 뒤 우정2호 어린이공원 아래)

 

 

 

김취로 묘 옛터(아래에서 본 전경)

 

 

김취로의 묘 터 전경(위에서 아래로 본 모습)

 

김취로 묘터에서 오른편으로 보면 김상로 묘터가 보인다.(정면 나무 뒤 대지)

 

전봇대 뒤 밭 뒤 둔덕의 김취로 묘터

 

 

김취로 묘 옛터 전경 동영상

 

 

 

 

 

김상로 묘터로 이어지는 마을길 이 길로 나아가면 멱우리가 나오고 쌍창이 옮겨진 창말이 나온다.

 

쌍봉사 표지판 아래가 김상로 묘터

 

 

 

 

 

김상로 묘 옛터

 

 

 

 

 

 

 

 

 

 

김상료 묘 옛터 전경 동영상

 

 

 

 

 

 

삼괴고등학교 옥상에서 본 모습

산허리 뒷편 고개를 넘어 가면 김상로가 옮긴 조곡창 쌍창이 있던 마을 창말이다.(우정읍 멱우리)

 

 

 

 

 

 

 

 

 

 

 

 

 

조암터미널 내외

 

조암터미널은 조암장(시장)이 서는 곳이다.
우정읍이라는 말보다 조암이라는 말이 친숙한 읍내에는 5일장(4, 9일)이 선다. 삼괴지역의 중심상권인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의 조암시장은 조선 후기 장안면 사곡리에 있던 '사슬곶장'이 일제시대 이곳으로 옮겨와 삼괴장(삼괴시)으로 개시되어 오늘날 조암장으로 불리고 있다.(아래 사진 2014년 1월 19일 장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