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김씨묘문 의왕시 왕림
김정로, 김취로, 김약로, 김상로 선생 묘 등(대제학 김유 묘역)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왕림은 정국공신 김우증이 사패하여 청풍김씨 판서공파의 오랜 선영이자 세거지이다. 이러한 역사성을 바탕으로 영조대 영의정을 역임한 김치인은 '청풍김시묘문비'를 세웠다. 그곳에 김치인에게는 재종조부가 되는 대제학 김유 묘역이 있다.
이러한 김유 묘역에 2017년 6월 13일부터 8월 13일까지 김유 묘 단장 및 묘하에 후손 이장이 이루어졌다. 과천에 있던 김약로의 묘가 오래되면서 선산이 타인에게 넘어갔고 이를 소유한 사람이 무덤이장 요청하고 그 비용을 충당하기로 하면서 대역사가 이루어진다. 김약로의 묘는 물론 김유의 장자 김정로 무덤과 아울러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쌍봉산록에 있던 차남 김취로와 막내 김상로의 묘도 이장하게 되었다.(6.17) 이들 김취로와 김상로는 삼괴로 불린 화성시 우정,장안면 지역의 중요한 문화유산이었는데, 이렇게 이장되었다. 이들 묘소가 이장되면서 김취로 묘 아래 있던 증손 김숙연 묘, 김상로 묘 아래 아들 치양, 치영의 묘소도 함께 이장되었다.
이장된 묘역의 구성은 위 지도와 같다. 이장을 하면서 김유 묘는 곡장이 새롭게 둘러지고 그 아래 김정로와 김취로 묘는 김취로의 묘의 망주석과 석양을 양쪽 가장자리에 배치하였다. 다음 김약로와 김상로 묘는 김약로의 망주석과 석양을 가장자리에 배치하였다. 특기할 것은 김상로의 둘레석은 김정로와 달리 원래의 둘레돌이다. 다만 상석은 새롭게 하였다. 그 아래 김상로 아들과 취로의 증손인 김숙연 묘는 김상로 묘에서 나온 망주석 한쌍을 좌우에 배치하고 위 선영과 달리 추가 묘제석물은 하지 않았다.
김유의 장자인 김정로(金正魯)는 자가 성기(聖期)이고 1675년(숙종1) 을묘생으로 관록은 숙종 34년(1708) 무자 식년시에 34세로 생원 3등 2위가 되어 정랑을 역임하였다. 차남 김취로(金取魯)는 자가 취사(取斯)이고 1682년(숙종8) 임술생으로 1740년(영조16) 경신년에 졸하였다. 관록은 24세에 진사를 하고 29세 때(숙종36년[1710]) 경인 증광시 병과 26위로 문과 급제 후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묘역에는 없지만 삼남 김성로(金省魯)는 자가 성삼(聖三) 정묘(丁卯, 1687년 [숙종 13])생으로 41세 때인 영조 3년(1727) 정미 증광시에 진사 3등 49위로 이후 판결사를 지냈다.
4남 김약로(金若魯)는 자가 이민(而敏), 갑술(甲戌, 1694년 [숙종 20])생으로 계유(癸酉, 1753년[영조 29])에 졸하였다. 영조2년(1726) 병오 식년시 진사가 되어 이듬해 정미 증광시 병과 3위로 문과 급제 이후 좌의정을 지냈다. 막내 김상로(金尙魯)는 자가 경일(景一) 임오(壬午, 1702년 [숙종 28])생으로 병술(丙戌, 1766년[영조 42]에 졸하였다.(그간 포털이나 백과에서는 김상로의 졸한 연대를 미상으로 기재했으나 승정원일기 내용을 찾아 연대를 확인함 이글 김상로 부분 참조) 20세인 경종1년(1721) 신축 증광시 생원 3등 62위로 되고 33세 때인 영조 10년(1734) 갑인 정시 병과 3위로 문과 급제하고 두루 관직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김상로의 맏이 김치양(金致讓)은 자가 여득(汝得), 을사(1725년[영조1])생으로 26세인 영조26년(1750) 경오 식년시 진사 2등 11위를 하고 33세 때인 영조(英祖) 33년(1757) 정축(丁丑) 정시(庭試) 병과(丙科) 5위(8/15)로 문과 급제하여 옥당에 들어 홍문관 수찬, 대사간, 대사성, 승지,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아버지 김상로가 역신이 되자 삭탈관직되어 절도로 유배되었다. 김치영(金致永)은 자가 중사(仲思) 무신(戊申) 1728년(영조 4)이다. 23세 때인 영조(英祖) 26년(175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위가 되고 숙부 김취로의 계자가 되었다. 김치양과 김치영은 임천 조씨(조정만[趙正萬] 딸)의 소생이다. 그리고 이곳에 묘는 없지만 김상로의 구명을 위해 애쓴 배다른 아들 김치현이 있다. 김치현(金致顯)은 병인(丙寅, 1746년 [영조 22])생으로 26세 때인 영조(英祖) 47년(1771) 신묘(辛卯) 정시2(庭試2) 을과(乙科) 1[亞元]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김상로가 삭탈관직되면서 연좌된 김취로의 아들 사촌 김치양(金致良)과 유배되었다가 지도와 고금도로 이배되었다. 김치양, 김치영과는 배다른 형제로 어머니는 최홍제(崔弘濟)의 딸이다. 이렇듯 김상로는 두 부인 사이에서 5남 7녀를 낳았다. 김치양, 치영 묘와 나란히 있는 김숙연(金肅淵)은 자가 경함(敬㴠), 을사(乙巳, 1785년[정조 9])생으로 음관으로 출사하여 순흥부사를 역임하였다. 김취로의 증손으로 김취로의 아들 김치량의 계자 김종건(金鍾健)이 아비이고 김종건의 생부는 김약로의 아들 김치공(金致恭)이다.
사진에서 오른쪽이 김유의 장남 김정로의 묘이고 왼쪽이 화성시 우정읍 쌍봉산 아래 있던 김취로의 묘이다. 김정로의 묘는 상석과 둘레석 모두 최근에 세운 것이다. 기단으로 구분된 이 묘역은 김취로의 묘에 있던 망주석, 석양 한쌍으로 묘역 좌우로 세워놨다.
김취로의 묘의 둘레석이 정교하게 잘 다듬어져 있고 크다
김취로의 상석과 향로석, 고석, 계체석, 혼유석 등 은 모두 화성시 우정읍 쌍봉산에서 옮겨온 것이다. 상석에는 '조선숭록대부이조판서김공취로묘원비한산이씨부좌' 등 피장자의 신원을 표로 각자되어 있다. 각자된 서체는 당대 국서체로 명망이 높던 한호의 석봉체를 집자한 것이다.
쌍부와의 인연은 그가 수원부사로 재직(문반 신축 경종 1, 1721 윤6월 일 제배 ~ 임인 경종 2 , 1722 정월 일 사임. / 수원부읍지)하면서이다.
수원부읍지 '공해'조 수록 수원부사 김취로 시 / 출처 : 국역수원부(군).남양부(군) 읍지(2006. 화성시)
김취로 졸기
전 판서(判書) 김취로(金取魯)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하교하여 죽음을 슬퍼하고, 상장(喪葬)에 수용하는 것을 주라고 명하였다.(前判書金取魯卒。 上下敎悼惜, 命給喪葬之需。)-영조실록 51권, 영조 16년(1740) 1월 25일 정묘
김정로, 김취로 묘 동영상
김정로와 김취로의 묘 아래 단에 오른쪽 김약로와 왼쪽에 김상로의 묘가 있다. 이 묘역의 구성은 김약로의 묘의 묘제석물을 옮겨와 꾸민 것이다. 다만 김상로의 묘의 둘레석은 화성시 우정읍 쌍봉산에 있던 본인 묘의 석물이고 묘 앞 상석만 최근에 세운 것이다.
판부사 김약로의 묘이다. 김약로의 묘는 원래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에 있었다. 위에서 말한대로 묘역이 시간이 흘러 타인의 소유가 되면서 재산권을 확보하고자 구묘 이전을 요구하고 그 비용을 모두 부담하게 되면서 종중의 결단으로 자신의 묘 뿐 아닌, 형, 동생 상로 등의 묘와 함께 이장되었다.
과천에 묘가 있을 당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는데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선 김상로의 형이 김약로라서 한양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원행을 떠나는 정조대왕이 그의 묘하로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지금의 금천구에 시흥별로를 내었다.'라는 이야기가 있어 지금도 그 지역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시흥별로는 지금의 1번 국도(목포~신의주)로 이다.
이 이야기는 상당히 설득력 있게 인과가 구성된 이야기라 사실처럼 들린다. 1900년 후반 정조연구의 권위자인 유봉학 한신대 명예교수 등은 정조가 과천의 기존 능행길을 시흥쪽으로 새로 낸 것은 단순히 자신과 얽힌 악연 때문이 아닌 정기적인 원행과 한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평탄한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방안이었으며(기존 관악산 남태령을 넘어 과천으로 이어지는 길은 산을 넘어야 하는 험한 길이었다.), 수원을 유수부로 승격하고 그곳을 방비하는데 서해 연변의 고을이 뒷받침이 될 수 있게 하였던 조처였다라고 연구되었다. 실제로 정조는 김포, 부평, 인천, 안산, 남양을 직접 돌아보는 김포 장릉에서 수원 화산 현륭원행을 1797년 8월에 단행하였다.(디지털시흥문화대전 '1797년 8월 정조 행차' 참조 : http://siheung.grandculture.net/siheung/toc/GC06900319)
김약로의 졸기
판부사(判府事) 김약로(金若魯)가 졸(卒)하였다. 부문(訃聞)하니, 3년 동안 녹봉(祿俸)을 그대로 주라고 명하였다.(判府事金若魯卒。 訃聞, 命祿俸限三年仍給。)-영조실록 80권, 영조 29년(1753) 9월 10일 임술
김약로의 둘레석은 김취로와 김상로의 둘레석 보다 작다. 그러나 잘 다듬어지고 정교한 수준 높은 작품이다. 당대 이 정도의 둘레석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예장을 한 것이다. 이들 재상들이 군왕으로 모신 영조의 능은 본인도 사양했지만 둘레석이 없다. 그리고 당대와 전후한 시기 이러한 둘레석을 한 무덤이 그렇게 많지 않다. 왕가의 일원이 아니고는 사대부로서 최고의 예장 석물인 셈이다.
김약로 묘표
'조선의정부좌의정증익충정만휴김공휘약로묘 증정경부인연안이씨부좌'
김약로의 묘표 글자는 국서체 한호의 석봉체를 집자하였다. 형 김취로의 상석에 쓰인 대해(大楷)이다. 비석의 구성은 방부개석으로 네모 반듯한 방부에 옥계석을 올렸다. 옥계석의 문양이 아름답고 비석의 비율이 좋은 작품이다. 비석의 높이는 146, 너비 60, 두께 30cm로 세운 연대는 1755년(영조31년)으로 묘갈 음기에 '숭정기원후삼을해10월모일립'이라고 하여 숭정기원후(1628년 명 마지막 황제 의종 장렬제의 연호 시작)부터 세번째 을해년에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묘갈을 지은 것은 사촌인 영의정 김재로가 짓고 유공권(중국 당대 서예가로 해서의 대가)의 글자를 집자하였다.
김약로묘갈
공의 자는 이민이고 만휴거사라고 자호하였다. 청풍김씨로서 고려 때에 시중을 지낸 휘 대유의 후손이다. 본조에 이르러 대대로 벼슬을 지낸 이가 잇달았으며 증조인 휘 극형은 공조정랑 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인 휘 징은 전라도관찰사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아버지인 휘 유는 이조참판· 대제학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시호는 문경이다. 어머니는 여산 송씨로 군수를 지낸 박의 딸이자 참판을 지낸 시길의 손녀인데, 숙종 갑술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금상 병오년에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인 정미년에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실록낭청에 선발되었는데, 소를 올려 숙종실록을 고치는 일의 불가함을 논하다가 흉악한 권신에게 거슬리어 섬에 유배되었으며 무신년에 풀려나 돌아왔다. 기유년에 설서에 제수되었고, 신해년에 병조좌랑에 승진하여 정언· 지평 등에 옮겼는데, 그 사이에 경기도관찰사의 막좌를 지냈다. 계축년에 옥서에 뽑혀 들어가서 수찬 · 교리 등을 역임하고 헌납 · 이조좌랑에 전직되었으며, 을묘년에 응교 군자감 정에 승진하여 광주부윤에 발탁되었다. 호조· 예조의 참의 및 승지, 대사간, 대사성, 주사의 부제주 등을 역임하였다. 정사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했고, 경신년에 병조참지에 제수되고 송도유수에 발탁되었으며, 공조 · 병조 · 예조 등 3조의 참판, 동지경연, 동지의금, 동지춘추, 주사유사당상 등을 역임하였다. 임술년에 품계가 승진되어 한성판윤에 제수되었고, 관서의 관찰사로 나갔다가 갑자년에 대사헌, 호조판서, 세바진객 등에 옮겼으며, 인원왕후의 산릉 역사에 정성을 다했으므로 정헌대부에 올라 병조판서에 옮겼다. 을축년에 특별히 의금부판사에 뽑히어 좌참찬, 공조 · 형조 · 예조 등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정묘년에 특별히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는데, 한 집안의 형제가 나란히 의정부와 전조의 우두머리가 되기 때문에 의를 끌어다가 고사하고 끝내 응하지 않자 특별히 여주목사에 보임시켰다. 얼마 되지 않아서 서울로 불려 와 다시 공조 · 호조의 판서에 제수되었고, 무진년에 진전의 건립을 감독한 공로로 숭록대부에 올라 동지성균관사를 겸임하였다. 기사년 봄에 외임으로 기보를 안찰하고서 그해 가을에 특별히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후 좌의정에 올라 세자부, 호위대장을 겸임하였다. 신미년에 이존중의 참혹한 무고가 있자 임금의 처분이 매우 엄격· 분명하였고, 공을 위로하고 깨우침이 극진하였지만 공은 곧바로 하향하고서 극력히 사양하였으므로 마침내 갈리어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약원의 관직을 띠고 있던 중 임금의 체후가 좋지 않아서 억지로 서울에 들어가 부지런히 보호한 지가 모두 4년이었다. 계유년에 병이 악화되어 9월 10일에 작고하니 향년 60세이다. 부음이 전해지자 임금께서 애도함이 보통을 넘었고, 유사에게 명하여 장례를 돕게 함이 규정보다 지나쳤으며, 얼마 후에 또 몸소 제문을 지어 치제케 하였다. 12월 16일에 과천 냉정동의 임좌의 언덕에 예장하였고, 갑술년에 행장을 기다릴 것 없이 시호를 의논하라고 명하여 '사군진절'의 두 가지 법을 취해 '충정'의 시호를 내렸다. 아내인 연안이씨는 아버지가 관찰사를 지낸 해조인데, 공과 같은 해에 출생하여 무신년에 앞서 작고하였으며, 정경부인에 추증되고 공의 무덤 왼쪽에 합장하였다. 아들인 치공은 정랑이 이고 치검은 채 관례를 치르기 전에 요절하였으며, 치각은 생원이고 딸은 박 형원에게 출가하였다. 치공의 아들은 종최이고 나머지는 어리며, 치각은 아들 하나인데 어리며, 박 형원의 양자는 상악이다. 공은 관대하면서도 지조가 있었고, 엄격하면서도 남을 해치지 않았으며, 마음을 공평하게 가지고 청렴으로써 자신을 단속하였다. 재상이 되어서는 체통을 세우는 데 힘쓰고 변함없이 충성을 두텁게 하여 죽음에 이르러서도 더욱 독실하였다. 평소의 언행과 사업은 마땅히 국가의 사적에 실릴만한 것이고 또 장차 신도비의 기술이 있을 것 이므로 다만 생몰년과 대략을 묘표의 뒷면에 오른쪽과 같이 기록한다. 당종 의정부영의정 재로 찬 함 숭정기원후 세 번째 을해년 10월 ▨일 세움 전면은 한호의 글씨를 모았고, 음기는 유공권의 글씨를 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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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若魯墓碣
公字而敏自號晚休居士淸風金氏高麗侍中諱大猷之後迄本朝世載簮纓曾祖諱
克亨工曹正郞贈左賛成祖諱澄全羅道觀察使贈領議政考諱楺吏曹參判大提學
贈領議政謚文敬妣礪山宋氏郡守博女參判時吉孫 肅宗甲戌生公今 上丙午
進士丁未增廣文科差實錄郞廳疏論 肅廟實錄不可追改忤權凶被島竄戊申宥
還己酉除說書辛亥陞兵曹佐郞遷正言持平間出佐幾幕癸丑選入玉署徧歷修撰
校理轉獻納吏曹佐郞乙卯陞應敎軍資正擢廣州府尹歷戶禮曹參議承旨大司諫
大司成籌司副提調丁巳遭內艱庚申拜兵曹參知擢松都留守歷工兵禮三曹參判
同知經筵義禁春秋籌司有司堂上壬戌進秩拜判尹出觀察關西甲子遷大司憲戶
曹判書 世子賓客祇役 明陵陞正憲移判兵曹乙丑 特擢判義禁歷左參賛工
刑禮判丁卯 特授吏判以同堂兄弟並長政府銓曹引義固辭終不膺 特補驪州
牧使無何召還復拜工戶判戊辰監蕫 眞殿陞崇祿兼同知成均己巳春出按畿輔
秋 特拜右議政尋陞左兼 世子傳扈衛大將辛未有李存中
誣 上處分極嚴
明慰諭公備至而公即下鄕力辭竟禠授判中樞以方帶藥院 上侯未寧黽勉入城
勤勞保護者凡四載癸酉疾欲九月十日考終享年六十計聞 哀綸出常命有司庀
喪逾例已又 親製文致祭十二月十六日禮葬于果川冷井洞之壬原甲戌 命不
待狀議謚取事君盡節以正服人二法 賜謚忠正配延安李氏父觀察使海朝生同
公年戊申先均贈貞敬夫人葬祔公左男致恭正郞致儉未冠夭致恪生員女適朴亨
源致恭子鍾㝡餘幼致恪一子幼朴亨源繼子相岳公寬而有執嚴而不劌秉心以公
律已以廉爲相務尌體統斷斷忠藎至死彌篤平日言行事業當具載國乘且將有徑
碑之述只記始終大略于表陰如右堂從議政府領議政在魯撰
崇禎紀元後三乙亥十月 日立 前面集韓濩字陰記集柳公權字
출처 :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화성시 우정읍 쌍봉산에 있던 김상로의 묘이다. 무덤 둘레석 빼곤 앞에서 혼유석, 상석, 향로석, 고석, 계체석은 최근 것이고 문인석, 석양, 망주석 한쌍은 김약로의 묘제석물이다.
예전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쌍봉산 아래 김상로의 묘는 그 흔한 장식도 석물도 하나 없이 둘레석과 땅에 묻혔던 망주석 한쌍만이 있었다.
본래는 김상로가 김취로 묘가 있던 자리를 장지로 삼은 것을 형에게 양보하고 그 왼편에 묘를 잡았다. 둘레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대 영의정을 지낸 권신이니 만큼 예장을 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등극하면서 역신이 되자 모든 묘제석물을 철거하하였다. 그 후 고종 때 신원되면서 1920년에 7대손 김진한(金鎭漢)이 비문을 지은 묘비가 있었다고 하나 쌍봉산 아래 있을 때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영의정을 지내고 영조의 후원으로 당대 세도가이자 노론 벽파의 영수인 김상로는 역신으로 떨어지면서 조선왕조실록에 졸기 하나 남기지 못했다. 따라서 그의 출생 연대는 알려졌으나 졸한 연대는 미상이다. 정조가 얼마나 철저하게 그를 몰락시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상로가 죽기 전후로 영조실록에 보이는 기록이다.
임금이 봉조하 유척기(兪拓基)는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이었으며 김상로(金尙魯)는 대관(大官)임으로 해서 잔치에 쓰이는 비용을 하사하도록 명하는데, 김상로는 이때 나이가 70이 못되었다.(上以奉朝賀兪拓基爲先朝舊臣, 金尙魯爲大官也, 命賜宴需, 尙魯時年未及七十也。)-영조실록 106권, 영조 41년(1765) 11월 3일 갑술
신상권(申尙權)을 장령으로, 성덕조(成德朝)를 지평으로, 정창순(鄭昌順)을 헌납으로, 이득일(李得一)을 우윤으로 삼았으며, 졸(卒)한 영의정 정호(鄭澔)에게 문경(文敬)의 시호를 우의정 조도빈(趙道彬)에게 정희(靖僖)의 시호를 우의정 민응수(閔應洙)에게 문헌(文憲)의 시호를,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에게 효강(孝剛)의 시호를, 봉조하 김상로(金尙魯)에게 익헌(翼獻)의 시호를, 영의정 신만(申晩)에게 효정(孝正)의 시호를 추증하였다.(以申尙權爲掌令、成德朝爲持平、鄭昌順爲獻納、李得一爲校理、鄭昌聖爲右尹, 贈謚卒領議政鄭澔 文敬、右議政趙道彬 靖僖、右議政閔應洙 文憲、領議政李宗城 孝剛、奉朝賀金尙魯 翼獻、領議政申晩 孝正。)-영조실록 112권, 영조 45년(1769) 6월 30일 경진
다만 김상로의 죽음을 실록에는 없지만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봉조하 김상로가 실록에 보이는 잔치에 쓰이는 비용은 하사 받은 이듬해인 영조 42년 1월경부터 노환으로 그 이전부터 조정에 입시를 못하고 있다가 대사간 박사해가 예조에서 올린 대신상에 대한 계를 통해 마침내 영조 42년(1766) 12월 29일 을축에 김상로가 졸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朴師海, 以禮曹言啓曰, 五禮儀大臣喪, 自上擧哀之節, 而取考謄錄, 則或因特敎擧行, 而不敢循例取稟。今此奉朝賀金尙魯之喪, 擧哀一節, 何以爲之? 敢啓。以承傳色口傳下敎曰, 靜攝中, 置之。-승정원일기 1262책 (탈초본 70책) 영조 42년(1766) 12월 29일 을축 ) 죽은 뒤 영조에게서 내려진 시호는 익헌(翼獻)으로 익헌은 사려가 깊고 원대한(思慮深遠) 것이 익(翼)이고 충성을 향하여 덕을 간직한(嚮忠內德) 것이 헌(獻)이다.(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의 시호 참조)
김약로, 김상로 묘 동영상
김상로 묘 아래 아들 김치양, 김치영, 김취로의 증손 김숙연의 묘가 있다. 단 좌우로 화성시 우정읍 쌍봉산 아래 김상로 묘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망주석 한쌍이 놓여있고 여타 묘제석물은 생략되었다.
김상로 묘에서 나온 망주석은 단아하면서도 질박한 멋이있다. 또한 큰 특징은 세호(細虎)가 생략된 것이다. 일반적인 망주석에는 다람쥐 형상의 상상의 동물이 양각으로 표현되어 있기 마련인데, 세호가 없는 것도 상당히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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