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김씨묘문 의왕시 왕림
김인백 선생 묘 및 묘갈과 백운사
현재 의왕시 왕림에 터를 잡은 청풍김씨 김우증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김우증의 계자인 김계(처 순흥 안씨)이다. 왕림에서 후손이 크게 번창하고 현달하게된 장본인이다. 김인백(金仁伯, 1561~1617)은 위로 김충백, 김효백 두 형과 막내 동생 예백이 있다. 현령을 지낸 권대훈의 여식 안동 권씨(찬성 오겸의 외손녀)와 슬하에 장남 김익려, 차남 김극부, 막내 김극형을 두었다. 이중 김극형의 가계에서 아들 셋과 그 후손이 현달했다. 바로 손자 전라관찰사 김징과 그 아들 우의정 김구, 대제학 김유, 목사 김무로 그 아래 후손들이 번창했는데, 화성시 우정읍 쌍봉산에 있던 영의정 김상로도 김인백의 현손이다.(김유의 막내아들)
이렇게 그의 자손이 잘된 것을 두고 혹자는 아내 안동권씨의 묘(의왕시청 옆. 오봉산 아래)를 잘 써서 발복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또는 그의 손자 김징의 묘가 명당이라 발복되었다고도 한다. 풍수를 잘 안다는 사람들의 이야긴데, 사실 예전에 사대부가 쓴 묘소들이 특별히 풍수에 문제가 없다면 양지바른 곳에 묻어 찾아보면 그리 나쁘지 않다. 물론 아닌 곳도 있지만 그렇지만 후손이 잘되고 못되고는 단지 무덤 터에 기인한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와 조상을 섬기는 마음 그 효심과 전통이 가문의 내력이 되어 교육되고 후손들이 따르면서 발복된 것이 맞을 것이다. 관상도 심상이 제일이라고 하지 않던가
김인백의 묘갈에 따르면 그는 키가 8척이며, 용모가 장대하고 위엄있는 태도로 무슨 일에도 판단을 잘했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증손자 대제학 김유의 인물 됨됨이가 비슷한 것이 집안의 내력인가 한다. 일찍이 과거 준비를 그만두고 학문에 힘써, 효행과 문장이 높았다. 당대 명망가 이항복과 신응구와 매우 친하였다.
묘소에 이르는 길은 두 곳인데 묘 아래로 난 길로 왕곡천 지류를 넘어 오는 길인데 제대로 길은 나아 있지 않다. 다만 증손인 김유 묘역에서 산능선 뒤로 오르면 가까이에 김인백 묘와 김극부의 묘가 있다.
김인백 묘를 내려와 왕곡천 지류인 계곡을 따라 백운산으로 오르면 의왕시 87번 버스 종점이 나온다. 그 앞이 백운산과 청풍김씨 문중 사찰인 백운사의 입구이다.
김유 묘 뒷쪽으로 난 오솔길 지척에 김인백의 묘소이다.
김인백의 묘소와 묘갈, 김극부 묘소
김인백 묘
묘표에 '증좌승지김인백지묘 후우증이조판서'라고 되어 있어 김인백의 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손자 김징이 전라관찰사가 되어 좌승지로 추증되었는데 증손자 김구 우의정, 김유 대제학 등 현달하게 되면서 이조판서로 증직된 것을 알 수 있다. 증직 표시는 원래 묘표 내용을 갈지 않고 좌우 여백에 각자한 것이 특이하다.
묘표의 형태는 방부원수(네모난 비석받침에 둥근 머리)로 방부의 운각무늬와 연꽃무늬가 정갈하다. 상석 아래 돌이 원래 상석으로 보이고 향로석과 계체석이 오래된 것이다. 향로석은 불로초 문양 등이 장식이 되어 있다.
김인백묘갈(金仁伯墓碣)은 1742년(영조 18년) 건립된 것으로 이의현(李宜顯)이 비문을 지었고, 윤득화(尹得和)가 글씨를 썼으며, 현손인 김재로(金在魯, 우의정 김구의 아들)가 전액을 하였다. 방부개석의 형태로 옥계석의 처마가 두툼하여 장중한 모양이다. 높이 168cm, 너비 68cm, 두께 44cm 이다. 해서로 각자되었다.
김인백묘갈
증이조판서김공묘갈명 유명조선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김공묘갈명 -서문을 겸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치사봉조하 이의현 지음 외현손 가선대부 행 승정원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 상서원정 윤득화가 씀 현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재로가 전자를 씀 공의 휘는 인백이고, 자는 군수이며, 본관은 청풍이다. 청풍김씨는 고려 때 시중을 지낸 대유에게서 나왔는데 본조에 와서 호조참의를 지낸 관이 한성부윤을 지낸 의지를 낳았고, 의지가 부사를 지낸 리를 낳았으며, 리가 군수를 지낸 극함을 낳았으니 이가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인 우증은 정주목사를 지냈고, 할아버지인 여광은 대호군을 지냈다. 아버지인 계는 처사로서 사헌부집의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순흥안씨로 사직을 지낸 광옥의 딸이다. 공은 가정 신유년(명종 16, 1561년) 2월 4일에 출생하여 만력 정사년(광해군 9, 1617년) 10월 4일에 작고하니 향년 57세이며, 광주 왕윤리에 있는 갈산의 경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의 사람됨은 신장이 8척으로 용모가 매우 장대하였고, 태도가 엄정하고 강직하여 무슨 일을 당해도 판단을 잘했으며, 물욕이 적어서 구차하게 얻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찌감치 과거 준비를 그만 두고 학문에 힘썼으며, 더불어 교류한 사람들이 모두 당대의 명망 높은 인물이었는데 백사 이항복과 만퇴 신응구가 가장 친하였다. 어떤 이는 공의 효심과 우애를 칭찬하고, 어떤 이는 공의 언론이 풍자하는 뜻을 찬탄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공의 재주가 세상에 쓰이지 못함을 아까와 하였는데, 모두 공을 잘 알고서 한 말이다. 처사공은 학행이 있었고, 그의 형으로서 참의에 추증된 충백은 효심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니 공이 가정에서 얻은 바가 실로 남달랐다. 천성이 본래 순수하였고 사람으로서 해야 될 도리를 극진히 하였으며, 집에 있을 때의 평범한 행동으로부터 생전에 어버이를 섬기는 일과 돌아가신 뒤 치르는 장례·제사 등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예법대로 하여 지나침은 있었어도 미치지 못함은 없었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으나 편안한 듯이 보였고 몸가짐을 단속하고 지조를 지키는 데 힘썼으며 뜻은 고상한 절개를 지향하였으니, 일찍이 자신의 절개를 굽혀 남을 따른 적이 없었고, 세력 있는 사람에게 바쁘게 찾아다니는 자를 보면 자신이 더럽혀지는 것처럼 부끄럽게 여겼다. 아내는 안동권씨로 현령을 지낸 대훈의 딸이자 찬성을 지낸 오겸의 외손녀인데, 성품이 깨끗하고 단정하여 집안을 다스리는데 법도가 있었으며, 친정 식구들이 비록 명망을 떨쳐도 절대로 무엇을 요구하는 일이 없었다. 덕에 부합하고 엄정하면서 아름다우며 진실로 내규를 쫒았다. 공보다 15년 후에 69세의 나이로 작고하니 공의 묘소에서 몇 리쯤 떨어진 오봉산에 장사지냈다. 후에 손자와 증손자의 신분이 고귀해졌기 때문에 공은 이조판서에 거듭 추증되고 부인도 그에 따라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3남을 두었는데 큰 아들 익려와 가운데 아들 극부는 모두 요절하였고, 막내 아들 극형은 독실한 학문으로 천거를 받아 정랑의 벼슬을 지냈다. 가운데 아들이 딸을 두었는데 경완에게 출가하였고, 막내 아들이 낳은 아들로서 징은 관찰사를 지냈고 첨은 생원이며, 혼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순은 동지돈녕부사를 지냈으며 현은 학생이다. 딸들은 진사 조세달과 군수를 지낸 박상일, 사간을 지낸 임원구에게 출가하였다. 관찰사인 징의 아들로서 구는 우의정, 유는 참판, 무는 목사를 지냈는데, 관찰사 희로와 영의정 재로는 우상을 지낸 구의 소생이요 좌랑을 지낸 정로, 판서를 지낸 취로, 목사를 지낸 성로, 참판을 지낸 약로, 관찰사를 지낸 상로는 참판의 소생이며 흥로와 도사를 지낸 득로, 감역을 지낸 익로는 목사의 소생이다.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혼이 낳은 아들은 색과 억인데 적로는 색의 소생이고 첨로는 억의 소생이다. 동지돈녕부사를 지낸 순의 아들은 승지를 지낸 고와 우, 군수를 지낸 방이고 최로·술로·항로·승로는 승지의 소생이며, 진사인 갑로와 우의 후사가 명로는 군수의 소생이다. 학생의 아들은 규와 병사를 지낸 후, 생원의 후사가 된 희, 그리고 요와 서이다. 연로는 규의 소생이고, 문로와 세로는 요의 소생이다. 바로 이들이 공의 아들과 손자· 증손· 현손이다. 그리고 시직을 지낸 치만, 현령을 지낸 치일, 생원인 치인과 치언, 생원인 치량, 생원인 치온, 진사인 치공, 그리고 치각·치양·치영·치복·치록·치희·치성·치경·치건·치신·치택·치익이 공의 5대손이고, 생원인 종후는 6대손이다. 어려서 아직 이름을 짓지 않은 자와 서출과 증손 이하의 사위 및 외손 등에 이르러서는 또 매우 번다하므로 모두 기록할 수 없다. 공의 선세는 대부분 혼자 이어왔고 또한 일찍 작고하여 자식을 두지 못한 사람도 있어서 문중의 족인이 적었으며, 또 공도 덕을 숨기고 광채를 감추어서 자신의 몸에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에 후손을 크게 거두어 자손들의 많음이 이와 같고 공경대신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니 아! 어찌 천도가 아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이 한다. 아! 공은 그 성품이 온화하였으니 묻고 배움이 한결같았고 몸가짐이 늠름했도다. 이와 같은 행실을 가지고도 크게 쓰이지 못했으나 남은 복을 거두어서 후손들에게 주었도다. 무덤의 비석에 내가 글을 지은 것은 그가 남긴 미행을 열거하여 오래토록 밝게 드리우고자 함이로다. 숭정기원후 두 번째 임술년(영조 18, 1742년) 3월에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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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극부 묘표
김인백 아들 김극부의 차남으로 묘표에 '처사 김공극부묘 원비문화류씨부 우비함평이씨부'라고 써있어서 김극부의 묘임을 알 수 있다. 묘표는 방수원수의 형태이다.
백운산, 백운사에 이르는 계곡 등산로가 이어져 있다.
고려 전기 호족이 물러나고 새롭게 등장한 세력이 있었다. 문사를 겸비한 이들로 이들은 고려가 시행한 관인등용제도인 과거제를 적극 활용하여 누대에 걸쳐 문벌을 형성한다. 바로 문벌귀족들이다. 김부식 등 경주김씨, 윤관 등 파평윤씨 등 유명한 가문이 망라되었고, 특히 경원이씨 혹은 인주이씨로 불린 지금의 인천을 기반으로 하는 가문이 대표적이다. 이 가문은 이자겸에 이르러 더욱 권세가 높아졌는데, 이러한 문벌귀족과 대형사찰들이 가문의 기반이 되었다. 인주이씨는 현화사라는 절 등을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하고 확대하였다.
이러한 불교의 폐단은 결국 성리학을 국시로 한 조선에 들어와 철저히 배척된다. 그럼에도 삼국시대 전래된 불교가 조선초 신진사대부에 의해서 몰락하였지만 여전히 민간 구복신앙의 중심 종교로 역할을 해왔다. 여기 청풍김씨도 성리학적 이념으로 연산군을 몰아낸 비조 김우증이나 처사로 불리며 철저한 선비로 살았던 김계 등 가문이 성리학적 전통에 철저한 사류들이다. 이러한 사류들 역시도 조상에 대한 구복이나 발복은 불교를 떠날 순 없었다. 물론 무속도 마찬가지 그래서 조선이 개창되고 숭유억불을 단행하지만 태조, 태종, 세종, 세조 등 역대 군왕들마저도 불교중창에 나섰다. 명종 때는 대비 문정왕후가 승려 보우를 통해서 중창을 넘어서 국시처럼 떠받들게 되기까지도 했다. 이처럼 불교는 사대부의 나라 조선에서 배척되기도 했지만 사대부가 개개에서는 문중결속에서 역할을 하였다.
백운산 아래 백운사 여시도 청풍김씨 판서공파와 밀접한 문중사찰이었다. 인근에 남양홍씨 가문의 사찰인 홍법사(화성시 서신면)도 같은 맥락이다.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등으로 신분제가 동요하는 가운데 사대부들은 나름의 자구책으로 동족촌(반촌=집성촌), 가문 서원 등으로 결속하는데 이러한 변화에 사찰도 문중에 포섭되었다. 기득권을 지키는 것, 안정을 바라고 미래의 구복을 비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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