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청풍김씨묘문 의왕시 고천, 김인백 처 안동 권씨 묘 및 몽오산인 김종수 묘

달이선생 2020. 1. 6. 13:30

청풍김씨묘문 의왕시 고천

김인백 처 안동 권씨 묘 및 몽오산인 김종수 묘

 

  김인백의 처 안동 권씨 묘는 유명한 명당자리다.(전국8대 명당) 이곳에서 발복하여 후손들이 현달해서 6명이나 재상이 나왔다고들 한다. 묘 위쪽 좌의정을 역임하고 정조의 스승이었던 김종수 묘가 있는데 김종수도 후손이다. 김종수의 묘는 2015년 이장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경기도 하남시 광암동에 있었는데 하남시가 수도권 신도시 개발로 급변하고 있어 후손들이 의왕시 선영으로 모신 것으로 보인다.

  안동 권씨 묘는 묘하에서 걸어가면 여느 왕릉 못지 않은 넓은 유택을 볼 수 있다. 오봉산 자락 그리 높지 않은 구릉에 위치한 묘는 양지바른 터에 편안하다. 주변에 의왕시청, 도서관, 보건소 등 많은 행정기관과 아파트들이 즐비하여 묘에서 보는 풍광이 많이 번다하여졌지만 요즘 시대에 이런 유택을 조성하고 유지할 수가 쉬울까 이것만 봐도 명당을 떠나 크게 홍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영의정을 역임한 김상로가 찬한 김우증 신도비를 보면 그 후손들이 크게 현달하여 그 비조가 되는 인물을 따서 분파를 하였는데, 특히 김계의 아들중 김인백의 후손들이 재상 6명이 배출되는 등 크게 현달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인백파라고 하였다. 이러한 발복에 안동 권씨 무덤이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 세인들의 평가이다. 풍수적으로...

 

 

 

 

 

 

 

 

왼쪽이 처사 김인백의 처 안동 권씨의 묘와 묘갈이고 오른쪽 구릉이 후손인 정조배향공신 몽오 김종수의 묘이다.

 

 

 

 

 

방부원수의 묘표에 '증이조판서김인백처 증정부인안동권씨지묘'라고 써 무덤의 주인이 권씨 임을 알려주고 있다. 묘표의 형태와 장식으로 보아 김인백 묘표와 유사하다. 김인백 묘표를 건립하면서 같이 한 것으로 보인다.

 

 

 

 

 

 

 

 

 

 

 

 

 

 

 

 

 

 

증이조판서김인백처 안동권씨 묘갈

후손인 영상을 지낸 봉조하 김재로가 짓고 당시 세자전 김약로(우의정 역임)가 전을 올렸다. 글씨는 봉조하로 영상을 지낸 김상로가 썼다.

 

 

 

몽오산인 김종수 묘

 

 

 

 

 

 

 

 

김종수 영정(경기도박물관 소장, 영인본)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秀)가 죽었다. 김종수의 자는 정부(定夫)인데, 우의정 김구(金構)의 증손이다. 젊어서부터 인품이 뛰어나고 문학이 우수하였다. 영종(英宗)무자년001) 문과에 급제한 이후 간혹 실의(失意)를 겪었었다. 그러나 일찍이 상이 동궁에 있을 때 궁관(宮官)으로서 한마디 말로 서로 뜻이 통하였기 때문에 상이 즉위함에 미쳐 그에 대한 권우(眷遇)가 백관보다 월등히 뛰어나서, 상이 그를 명의(名義)로 허여하고 복심(腹心)으로 의탁하였다. 그리하여 내각(內閣)·문원(文苑)·전임(銓任)·융원(戎垣)의 직을 두루 역임하고, 기유년에 이르러서는 한 몸에 오영(五營)의 부절을 찼다가, 얼마 안 되어 재상이 되었으니, 그 조우(遭遇)의 융성함이 제신(諸臣) 중에 비할 자가 없었다. 매양 경연에서 아뢸 때나 상소문에서 이따금 다른 사람은 감히 말하지 못할 일을 말하였다. 그래서 행동은 매양 급하게 한 때가 많았고 언론은 혹 한쪽으로 치우치는 점도 있었으나, 대체로 또한 명예를 좋아하고 의리를 사모하는 선비였다. 갑인년에 상소를 올린 뒤로 온 조정이 그를 성토하였으나, 상은 그가 다른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서 잠깐 유배시켰다가 이내 용서하였다. 을묘년에 치사(致仕)하였는데, 그후로도 은례(恩禮)가 변함없어 상의 친서(親書)와 좋은 약제(藥劑)가 늘 길에 연달았다. 어버이를 효도로 섬겼고, 관직 생활은 매우 청렴하여 그가 살았던 시골집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죽었는데, 뒤에 정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丙寅/奉朝賀金鍾秀卒。 鍾秀定夫, 右議政金構曾孫。 少有氣岸, 優於文學。 英宗戊子登第, 間經蹭蹬。 上, 在春邸, 以宮官, 一言而契, 及御極, 眷遇逈絶百僚, 許以名義, 托以心膂。 歷內閣、文苑、銓任、戎垣, 至己酉, 身佩五營之符, 未幾拜相, 遭遇之盛, 諸臣莫有比者。 每筵奏疏, 陳往往言人所不敢言。 擧措每多劻攘, 言論或涉偏係, 而蓋亦好名慕義之士也。 甲寅疏後, 擧朝聲討, 而上察其無他, 乍竄旋宥。 乙卯致仕, 恩禮無替, 雲章珍劑, 相續於道。 事親孝, 居官廉, 所居鄕廬, 不蔽風雨。 至是卒, 配食廟庭。)-정조실록 51권, 정조 23년(1799) 1월 7일 병인

 

 

 

 

 

 

 

 

 

  1800년(정조 24년) 경기도 하남시 광암동 산 청뜰 건립된 김종수묘표(金鍾秀墓表)로 스스로 비문을 짓고, 앞의 글자는 국서체인 한호(韓濩)의  석봉체를 집자하였으며, 뒷면의 글자는 고려시대의 명필인 유공권(柳公權)의 글자를 집자하였다. 방부원수의 형태로 높이 135cm, 너비 49cm, 두께 28cm이다. 살아생전 검소하였다는 평에 맞게 재상의 묘갈 답지 않게 작고 단정하다. 그의 인품을 느낄 수 있다.
  김종수(金鍾秀, 1728~1799년)의 자는 정부(定夫)이고, 호는 진솔(眞率), 몽오(夢梧)이다. 1768년(영조 44년) 문과에 급제하여 영조와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좌의정을 역임하고 봉조하가 되었다. 저서로는 몽오집(夢梧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김종수묘표
몽오산인 김공 휘 종수묘
정경부인 해평윤씨 부좌
자표 임자
산인의 이름은 종수이고 자는 정부이며 김씨로 본관은 청풍이다. 충헌공 구의 증손이고, 조부 희로는 호조 참판을 지냈다. 아버지 치만은 세자익위사 시적을 지냈고, 비 정경부인 풍산홍씨는 이조 참판 석보의 따님이다.
그가 몽오산인이라 하였으니 몽과 오는 모두 선산의 이름이다. 산인은 영조 무신년(영조 4, 1728년)에 태어나 어려서 일찍이 학문하는 것을 배웠을 뿐 문장은 이루지 못하였다. 진사를 거쳐 세자세마에 보임되고, 문과에 급제하고 춘방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지금 임금이 동궁에 계셨으니, 강론하고 아뢴 내용이 군주의 덕을 바로잡고 의리를 밝히는 데에 있었다. 임금도 마음을 다하였다. 그러나 늘 시골에 있었고 조정에 있었던 시간은 수십 일에도 차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당수에 연좌되어 바닷가로 유배되고 고폐되어 서민이 된 기간이 6년이었다.
지금 임금이 즉위한 다음 가장 먼저 일으켜 등용하여 승지가 된 때로부터 한 해가 못되어 병조 판서로 승진하고 여러 해를 지내다가 어버이가 노쇠하였다는 것을 들어 봉양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청하고 돌아와 모두 8년을 보냈다. 임금이 대장의 부절로 불러들여 전병과 문병을 맡겼으므로 각신으로서 수시로 임금의 앞을 출입하였고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매번 상의 앞에 나아갈 때마다 번번이 춘방 시절의 옛 이야기만을 아뢰기를 매우 부지런하게 하고 건의하여 밝히는 것이 없이 이따금 뭇 사람들과 더불어 부침을 함께 하였으므로 사우들이 많이 비난하였다. 재상이 된 지 몇 달만에 물러났다가 몇 달 뒤에 다시 재상이 되고 또 몇 달만에 우환을 당하여 물러났다가 모년 모월 모일에 죽었다.
산인은 집이 없어 도성과 시골을 오가며 나고 자라고 늙고 죽었는데 모두 종자의 집에 있었다. 모월에 광주 성 서쪽 정림의 오좌 언덕 선공의 묘소 오른쪽에 장사하였다. 정경부인 해평윤씨는 홍문관 교리 득경의 따님이다. 아들 약연은 요절하고, 딸은 서유수에게 시집가고, 서녀는 어리다. 약연의 계자는 동선이다.
산인은 사람됨이 고집스러워 우활한 말을 많이 하고 경솔하게 내키는 대로하여 남들이 많이 원망하였다. 조정에 나아가 음사를 물리치고 염치를 장려하여 조정을 맑게 하고 왕실을 높이고자 힘썼다. 그러므로 기뻐하지 않는 자가 더욱 많았다. 일찍이 기장에 유배되고 금갑도에 위리안치되었고, 또 일찍이 부령에 귀양보내고 울진에 귀양보내라는 명이 있었으나, 결국 시행되지 않았다. 이는 임금도 다른 뜻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또 당의 도움이 없음을 가엽게 여긴 것이었다. 임금이 일찍이 산인의 초상에 제하기를 “조정에서는 홀로 대의를 담당하고 재야에서는 세속에 물들지 않으니, 이 사람이 이른바 자취가 우뚝하고 마음이 겸허하고 넓은 사람이런가?”하였다. 아! 신하를 아는 것이 임금만한 이가 없다는 말이 어찌 사실이 아닌가.
산인이 일찍이 동선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내가 부모를 섬김에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고, 임금을 섬김에 대우하고 은혜를 베풀어주심이 옛날에도 비길 데가 없을 정도였으나 마침내 조금도 보탬이 되지 못하고 임금을 저버린 것이 많으니, 대신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죽거든 시호를 청하지 말고 비석을 세우지 말 것이며 편석을 세워, ‘몽오산인의 묘’라고 쓰고 이어 돌의 뒤에 이상과 같이 쓰도록 하면 충분하다”하였다.
이상은 부군께서 임자년(정조 16, 1792년)에 스스로 지으신 것이다. 그 이후 갑인년(정조 18, 1794년) 봄에 상소하여 경모궁에서 재숙할 때의 정청에 잘못이 있음을 논하였는데, 삼사가 합계하여 처음에 평해 기우도로 귀양갔다가 남해로 이배되고 여름에 사면되어 돌아왔다. 겨울에 서추로 서용되었는데, 곧 사직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정사년(정조 21, 1797년)에 기로소에 들어가고 기미년(정조 23, 1799년) 정월 7일에 불초의 포천 임소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2세이다. 유명에 따라 시호를 청하지 않았으나 임금이 특명으로 문충이라고 시호를 내려주셨다. 시법에, ‘명민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함을 문’이라 하고, ‘임금을 섬김에 절의를 다함을 충’이라 한다고 나와있다.
3월에 정림의 부인 묘 좌록에 따로 장사지냈다가, 다음해 3월에 부인의 묘와 합봉하였다. 이는 곤좌의 언덕으로 남쪽으로 선공의 묘와 언덕 하나가 떨어져 있다. 부인은 경술년(영조 6, 1730년) 7월 13일 태어나 임자년(정조 16, 1792년) 9월 22일에 졸하셨다. 사위 서유수의 계자는 후보이고 서녀는 요절하였다. 동선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어리다.
불초손 동선은 눈물을 머금고 추서하다.
숭정기원후 세 번째 경신년(정조 24, 1800년) 월 일에 세운다.
전면은 한호의 글자를 집자 한 것이고,
음기는 유공권의 글자를 집자 한 것이다.

 

夢梧山人金公諱鍾秀墓」
貞敬夫人海平尹氏祔左」
自表壬子」
山人名鍾秀字定夫金氏淸風人忠憲公構之曾孫也祖希魯戶曹參判考致萬 世子」
侍直妣貞敬夫人豊山洪氏吏曹參判錫輔女其曰夢梧山人者夢與梧皆先山名也山」
人以 英宗戊申生少嘗學爲學問文章不成由進士補 世子洗馬及爲文科及第則」
入 春坊時今 上在東宮侍講敷奏意在匡 主德明義理 上亦傾心焉然常在野」
仕於 朝不滿數十日旋坐黨首流海上錮廢爲庶民者六年今 上卽位首起之自承」
旨一歲中陞兵曹判書居數年以親老乞養歸田凡八年 上以大將符趣召之畀以銓」
柄文柄以閣臣時時出入 前席遂擢爲相每於 上前輒申 春坊時舊說頗惓惓而」
無所建明往往隨衆浮沈士友多短之爲相數月而黜黜數月復相又數月以憂去某年」
某月某日卒山人無家於都於野生長老死皆於宗子家某月葬于廣州城西靜林坐午」
原先公墓右貞敬夫人海平尹氏弘文館校理得敬女男若淵夭女適徐有守庶女幼若」
淵繼子東善山人爲人狷而迂言爲多率爾任情由是人多怨之立 朝務欲屛陰邪礪」
廉恥以淸 朝延以尊 王室故不悅者滋益多嘗流于機張囚棘于金甲島又嘗有竄」
富寧竄蔚珍之 命而卒不行盖 上亦察其無他且憐其無黨湲也 上嘗題山人像」
曰在朝獨任大義在野不染緇塵是所謂跡突兀心空蕩底人耶嗚呼知臣莫如 君豈」
不信哉山人嘗顧語東善曰吾事父母不能盡子道事 君際遇恩造於古無比而卒無」
毫髮裨補負 君多矣大臣云乎哉吾死勿請諡勿立碑立片石題曰夢梧山人之墓足」
矣仍令刻于石背如右云」
右府君之所自著於壬子年間者也其後甲寅春上䟽論 景慕宮 齋宿時庭請之有」
做錯三司合 啓始竄平海己又島配于南海夏 宥還冬叙拜西樞仍卽乞骸蒙 允」
丁巳入耆社己未正月七日考終于不肖抱川任所享年七十二用遺命不請諡 上特」
命贈諡文忠諡法敏而好學曰文事君盡節曰忠三月別葬于靜林之夫人墓左麓翌年」
三月合封子夫人之墓寔坐坤原南去先公墓隔一岡夫人以庚戌七月十三日生卒於」
壬子九月二十二日徐婿繼子厚輔庶女夭東善有一男幼不肖孫男東善泣血追書」
崇禎三庚申 月 日立 前面集韓濩字陰記集柳公權字」

출처 :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김인백처 안동권씨 묘 및 몽오산인 김종수 묘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