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진무공신 한풍군 최응일 묘

달이선생 2020. 1. 23. 15:00

진무공신 한풍군 최응일 묘

 

"진무 공신(振武功臣) 27인을 책정하였다. 장만(張晩)·정충신(鄭忠信)·남이흥(南以興)을 1등에 세 자급(資級)을 올리고, 이수일(李守一)·변흡(邊潝)·유효걸(柳孝傑)·김경운(金慶雲)·이희건(李希健)·조시준(趙時俊)·박상(朴瑺)·성대훈(成大勳)을 2등에 두 자급을 올리고, 신경원(申景瑗)·김완(金完)·이신(李愼)·이휴복(李休復)·송덕영(宋德榮)·최응일(崔應一)·김양언(金良彦)·김태흘(金泰屹)·오박(吳珀)·최응수(崔應水)·지계최(池繼崔)·이락(李洛)·이경정(李慶禎)·이택(李澤)·이정(李靖)·안몽윤(安夢尹)을 3등에 한 자급을 올렸다.(策振武功臣二十七人。 以張晩鄭忠信南以興爲一等, 超三資; 李守一邊潝柳孝傑金慶雲李希健趙時俊朴瑺成大勳爲二等, 超二資; 申景瑗金完李愼李休復宋德榮崔應一金良彦金泰屹吳珀崔應水池繼崔李洛李慶禎李澤李靖安夢尹爲三等, 加一資。)-인조실록 5권, 인조 2년(1624) 3월 8일 임술"

 

  최응일은 강동현감으로 이괄의 난에서 공을 세워 '갈성분위진무공신' 3등에 책록되고 한풍군(漢豊君)에 봉작되었다.

 

 

 

공신교지 '교 갈성분위진무공신통정대부행강동현감최응일서'

출처 : e뮤지엄 전국박물관소장품검색. 국립중앙박물관

 

 

정3품 통정대부는 상계로 당상관에 해당된다.

 

"신·구 공신(新舊功臣) 및 여러 적장(嫡長)들에게 각각 1등급씩 가자하도록 명하였다(중략)... 이정(李靖)·김태흘(金泰屹)·최응일(崔應一)은 가선 대부로 승진했는데, 이상은 진무 공신(振武功臣)이다.(命新舊功臣及諸嫡長, 各加一資... 李靖金泰屹崔應一陞嘉善, 此則振武功臣也 ) -인조실록 19권, 인조 6년(1628) 9월 26일 계미"

 

  특명으로 가자 되어 종2품 가선대부가 되었다.

  최응일(1578~1651)은 자는 여순(汝純)이다. 1624년(인조2) 이괄이 인조반정에 대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자 평안도 강동현감 최응일은 평양으로 가서 향도장(響導將)을 맡아 무악재 전투에서 중견사(中堅使)로 전투에 참여하여 정충신, 유효걸, 이희건, 김경운, 조시준, 신경원 등과 고개 위에 먼저 진을 치고 역당들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최응일은 인조 2년 3월 진무공신 3등, 한 자급이 오르는 상을 받고 가자되어 가선대부에 오르고 그해 11월 한풍군에 봉해졌다. 이후 그의 행적은 효종대 승정원일기에 금송에 대한 상소(1649), 반숙마 1필을 하사 받는(1650) 등 현종 초기까지 조정 중신으로 국정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이렇게 출세한 최응일이 지역에서 존숭되면서 전설이 전하는데 병자호란이 나자 최응일이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피신하다 적당에 팔이 잘리어 죽게되자 효종은 감사의 표시로 마을을 방문하여 '정상머리'라 불리는 곳에서 장례를 지켜보고 묘가 있는 곳을 '능우산(능머루)'으로 부르게 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최응일에 대한 중요포털 검색에서는  수성최씨가 아니라 전주최씨 최응일로 소개되고 있다. 내용은 전라북도 '임실군사'를 인용하고 있다. 여러 사료들을 살펴보면 임실의 최응일은 문과로 입신한 전주최씨라서 무과로 입신하여 진무공신이 된 최응일과는 동명이인으로 파악된다. 수성최씨 최응일은 무과로 입신하여 외직에서 난리통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된 사람인데 아무래도 임실군사 를 정리할 때, 공신조서에 본관에 대한 정확한 내용이 없는 수성최씨 최응일의 공적을 임실의 최응일로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최응일은 수원을 본관으로 하는 수성 최씨로 수원 사람이고 수원에서 살았다. 현재 그의 묘도 전라도 임실이 아닌 과거 수원부였던 화성시 장안면 독정1리 능우산(능머루)에 있다. 그가 수원의 적을 둔 사실은 수원부읍지 인물조에 최응일이 수원의 인물로 나오기 때문이다.

 

 

 

수원부읍지 인물 조 최응일 수록 부분.

출처 : 국역 수원부(군).남양부(군)읍지(2006. 화성시)

 

 

  임실에 묘가 있는 전주최씨 최응일은 진무공신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응일에 대한 진무공신 내용, 인물 검색 내용 등 인터넷 자료에서 전주최씨 최응일을 한풍군, 진무공신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하루 속히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최응일의 가계는 수성최씨 시조 최영규의 6세손 한림공파의 시조 최이기(崔李起)의 여덟 아들 중 문과 급제자인 7자 석령(碩齡)을 소조로 하는 정림종중으로 고조부 림(, 진사로 우봉현감 역임) 증조부 수손(守孫) 조부 곤(-차남 형 균[]) 아버지 경립(敬立)으로 이어진다.

  최응일의 묘가 있는 이곳 화성시 장안면 독정1리는 수성최씨 한림공파 진사공종중의 오랜 세거지다. 일찍이 동생 익령(장안면 어은리 남산에 묘가 있음)이 후사를 못이어 둘째아들 최표()로 익령의 계자로 보냈다. 정림종중에 최응일이 속하나 혈통적으로는 이곳 독정리의 익령의 후손들인 진사공파는 익령의 계손이나 생조부 석령의 혈손들이다. 그리고 한림공파에서 최서(다섯 째 형 백령[百齡]의 차자)와 함께 첫번째 문과 급제자인 최석령의 묘는 최응일 묘 서편 구릉에 위치한다. 원래 이곳에서 세거하다 14세 최두추가 화성시 정남면 제기리에 선영의 만들고 세거하면서 최석령가의 후손들을 정림종중으로 되어있다. 정림(正林)은 정남면의 옛 명칭이다

  이곳 독정리의 유래는 독쟁이로부터 시작되며 또 다른 이름이 한천이다. 독쟁이와 한천(찬우물)을 합쳐서 지금의 독정리가 됐다. “자는 항아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가마굽는 사람들이 처음 살았다고 한다. “은 찬우물(한천([寒泉])에서 유래한 것으로 찬우물은 독쟁이의 명소이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샘이 너무 솟구쳐서 모래가 올라와 물을 먹을 수 없어 돌로 샘구멍을 약간 막았다는 설이 있다. 1600년경에 발간된 수성최씨 대동보에는 독정리(篤井里)로 표기되어있다. 이후 약 500년 이상 된 느티나무가 큰 정자를 이루어 이를 기념하여 1774(영조39) 수원부 수류면 독정리(篤亭里)로 바꾸게 되었다. 1895(고종32) 남양군 장안면에 편입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독쟁이(한천寒泉), 버섭말(신촌[薪村]), 이천서씨 집성촌, 거묵골(감묵[甘墨]), 단양우씨 집성촌을 합쳐 화성군 장안면 독정리 자연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세거 성씨는 1539(중종34) 수성최씨 한림공파 독정종중의 중시조 통정대부 형조참의 최함(호 한천)이 어은리 독지골에서 나서 1567(선조즉위) 37세 때 생원이 되고 한양서 살다가 독쟁이로 이거 하면서 수성최씨 세거집성 마을로서 자리를 잡았다. 최함은 찬우물를 보고 호를 한천(寒泉)이라 지어 마을이름이 한천이 되었다. 1740(영조16)경에 청송심씨 안효공파 후손인 심인수가 처가입향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박식하여 수많은 후학을 배출하였다. 1800년대 말에 전주이씨, 후로 오씨 등 여러 성씨 등이 들어왔으며 1950년대 집성촌 조사에서 수성최씨 36호가 살고 있다고 조사되었고 이후 마을 호가 100호가 넘도록 번성하였다.(참고 : http://www.수성최씨.kr/board/bbs/board.php?bo_table=i9zbktuo2g&wr_id=19)

 

 

 

 

 

 

 

 

 

 

 

 

 

 

최석령의 묘

 

 

 

 

 

 

 

 

 

 

 

 

 

 

 

 

 

 

 

 

 

 

 

 

 

 

 

 

 

 

 

 

 

 

 

  최석령의 묘를 내려와 바로 옆 최응일 묘로 오르기 전에 독정리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 이 마을 유래가 된 찬우물, 한천이 있다. 가물어도 마을지 않는 시원한 우물이다.

 

최응일 묘

 

 

 

 

 

 

 

 

 

 

 

 

최응일 묘

 

 

 

 

 

 

 

 

 

 

묘소에는 오래된 묘비가 방부만 남아 최근에 비를 세웠다. 전면에 '건안현참진무공신 강동현감증병조판서 봉한풍군 수성최공응일지묘 비정부인영해박씨 비정부인경주이씨묘좌합부'로 쓰고 뒷면에 최응일에 대한 행장을 적었다.

 

 

  "공은 수성최씨의 시조 문혜공영자규자의 십이제손이시며 조선조무과서전관(증병조판서 한남군)을 지내신 자가 경자립자의 아드님이시다. 공은 무인년에 출생하시여 무과에 급제하시고 1624년 갑자 인조2년에 강동현감에 오르시고 반란군을 일으켜 공주에 쳐들어온 이괄(이괄의 난)을 진무공신한풍군최응일이 정성을 다해 세력을 분발시켜 진압의 효력이 컷기에 임금님이 행하여 공신에 추재되였으며(관직문서왕조경성회의시에 기재인조2년책) 공은 1636년 병자 인조14년 병자호란시에는 임금님을 등에 업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다 청나라 군사에 상해 한팔이 잘렸으나 계속달려 피신시키신 충신이시다. 공은 신묘년에 졸하셨으니 증병조판서를 봉하시고 사폐지지를 봉하셨다. 묘소 앞산을 능머루라 칭함"

 

   비 내용은 나름 정성을 기울인 흔적이 많이 보이나 일반적인 묘비명의 정돈된 문장은 아니다.

 

 

 

 

 

 

 

 

 

 

 

 

 

 

 

 

 

 

 

 

 

 

 

최응일 묘 동영상

 

 

 

 

참고자료

이상균, 이상일, '뿌리깊은나무 바람에 아니흔들리니-수성최씨한림공파진사공파후손가-', 화성시의고문헌7(2013, 화성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