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해월 최시형 묘

달이선생 2020. 5. 26. 23:23

해월신사 최시형 묘

 

  조선시대 신분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가부장 중심 사회에서 여성을 천대한 것과 달리 며느리를 한울로 높임하였던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 그는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를 이어 제 2교조였다. 그가 수운과 더불어 교조가 된 이유는 수운이 혹세무민(惑世誣民 : 세상 사람을 속여 미혹시키고 어지럽힘)을 들어 비명에 가자 그의 사상이 담긴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 필사본을 보존하여 정리 간행하였고, 인내천 사상에 더해 모든 사물이 한울이라는 사상적 확대와 그를 통한 동학 교세의 확장으로 제2교조라는 지위를 갖게 하였다.

  더욱이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통해 수운의 신원을 끊임없이 독려하는 한편, 많은 동학교도를 결집시켰다. 특히 보은집회에서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 일본과 서양세력을 배척하여 의병을 일으킨다)가 주창되며, 동학이 가지는 사회변혁인 후천개벽(後天開闢 : 지금의 세상이 끝나고 백성들이 바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림)에 더해 민족운동으로까지 확장시켰던 점에서 최시형의 2교조 시대의 동학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동학은 해월의 처남이자 제자인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1 ~1922)가 3대 교주가 되어 천도교로 개창하였다. 천도교는 우리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3.1독립운동을 전국적이고 전민족적 운동으로 촉발시킨 중심된 저력이었다. 당시 천도교는 전국조직을 운영하는 것은 물론이고 3.1운동에 들어가는 기금을 중앙대교당 건립비용 모금인양 충당하여 3.1운동을 지원하여 우리 민족운동사에 큰 족적을 내었다. 고향 화성시 삼괴(우정읍과 장안면을 이름)는 일본 순사를 처단하고 후일 제암리학살사건의 원인이 되는 '수원군 우정,장안면 3.1운동'의 중심이다. 여기에도 천도교 전교이자 수촌리 구장 백낙렬이 주도적으로 지역의 많은 천도교인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제암리학살사건 역시 교회 예배당이 만행 장소가 되었지만 당시 제암리(두렁바위) 마을 사람 대다수는 천도교인이었다. 제암리와 함께 이웃한 고주리에서도 일가족이 몰살되는 참변이 일어나는데 이 김흥렬 일가도 천도교인으로 발안만세시위의 주모자로 이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보복으로 무참히 학살되었다.  

 

왼쪽부터 최제우, 최시형 손병희(위, 아래), 특기할 것은 가운데 최시형 사진은 체포되어 교형 당하기 전 사진(국가기록원 소장)이고 손병희는 동학의 교주일 때, 수운과 같은 모습의 사진과 천도교를 개창을 할 정도로 신학문에 밝았던 그의 신식 양장의 개화복 모습이다.

 

  1894년 고부에서 녹두장군 전봉준(남접)을 중심으로 수많은 농민들이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이 조정에서 교정청을 설치하고 농민들의 자치권을 인정한 집강소를 설치하면서 일단락 되었지만(전주화약) 일제의 경복궁 침탈(갑오왜란)로 다시금 봉기한다. 이때 해월은 남접과 더불어 북접도 합세하게 하여 북접농민군을 손병희에게 이끌게 하였다. 결국 이 일로 해월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마침내 1898년 5월 원주에서 체포되었다. 해월의 재판은 근대적 재판을 통해 고등재판소에서 사형 선고가 이루어졌다. 그의 나이 72세로 좌포청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당시 재판은 고부학정의 원흉 조병갑이 판사로 참여하였고 그의 사촌 조병직이 재판장(법부대신)으로 해월에게 최종 사형(교형)을 선고(음5.29)하였다. 씁쓸한 대목이다.

 

최시형, 황만기, 박윤대, 송일회 판결선고서
출처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원본 국사편찬위원회)http://www.e-donghak.or.kr/index.jsp

판결선고서원본 [判決宣告書原本] 번역문

강원도 원주군原州郡. 평민
피고 최시형崔時亨. 나이 72세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평민
피고 황만기黃萬己. 나이 29세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평민
피고 박윤대朴允大. 나이 53세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평민
피고 송일회宋一會. 나이 33세

위의 피고 최시형・황만기・박윤대・송일회의 사건을 검사檢事의 공소에 따라 이것을 심리하였다. 피고 최시형은 병인년丙寅年, 1866년에 간성杆城에 사는 필묵筆墨상인인 박춘만朴春萬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동학東學을 전수받아 선도善道로 병을 치료하고 주문呪文으로 신神을 내리게 한다고 하며 여러 군郡과 도道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는 13자字의 주문과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라는 8자 강신문降神文 및 동학원문東學原文의 제1편 포덕문布德文・제2편 동학론東學論41)・제3편 수덕문修德文・제4편 불연기연문不然其然文과 궁궁을을弓弓乙乙의 부적符籍으로 인민人民을 선동하고 무리를 규합하였다. 또한 복주인伏誅人42) 최제우崔濟愚의 “만년지상화천타萬年枝上花千朶43) 사해운중월일감四海雲中月一鑑44)”라는 싯구를 사모하고, 법형법제法兄法弟45)의 실심實心과 경신敬信을 따라 법헌法軒의 호를 부르며 해월海月의 인장印章을 새겨 교장敎長・교수敎授・집강執綱・도헌都憲・대정大正・중정中正 등의 두목頭目을 각 지방에 임명하였다. 또한 포包와 회소會所를 설치하여 무리를 모았는데 1,000만 명에 이르렀다.

법에 따라 죽은 최제우를 신원伸寃한다고 하여 지난 계사년癸巳年, 1893년에 신도 몇 천명으로 대궐에 나아가서 상소를 올렸다가 바로 해산을 하였고, 보은報恩의 장내帳內에 많은 무리를 모았을 때에 순무사巡撫使의 선유宣諭때문에 각자 해산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894년 봄에 이르러 피고의 도당徒黨인 전봉준全琫準과 손화중孫化中등이 고부古阜 지방에서 같은 패를 불러모아 기세를 타고 일어나서 관리를 해치며 성城과 진鎭을 함락시켜 양호兩湖의 땅이 썩어 문드러져 불안한 지경에 이르렀다. 피고가 이 때에 호응하여 지휘한게 없다고 하지만 난리의 단계와 재앙의 근원을 살펴보면 피고가 주문呪文과 부적符籍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킨데서 연유하였다.

피고 황만기黃萬己는 지난 갑오년 5월에 동도東徒 임학선林學善의 협박을 받아입도入道하여 바로 귀화하였다가 지난해 7월에 다시 임학선의 말을 듣고 도道를 섬기는 처지에 대종선생大宗先生, 최시형을 의리상 보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여 도망중인 최시형을 방문하고 생선을 보내주었다.

피고 송일회는 갑오년 4월에 동학에 들어가서 최시형이 청산군靑山郡 지방에 있을 때에 1차례 찾아뵈었고, 올해 1월에 친한 동도 박윤대朴允大에게서 최시형이 이천군利川郡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옥천沃川사람 박가朴哥에게 말을 했다가 경무청警務廳 관리에게 체포되어 박윤대와 함께 길잡이가 되어 원주지방에 먼저 가서 최시형을 포획하였다.

피고 박윤대는 동학에 들어가 최시형의 사위 김치구金致九의 집에서 고용雇傭 살이를 하다가 경무청 관리에게 잡혀 송일회와 함께 길잡이가 되어 원주지방에서 최시형을 붙잡고 뒤에 이 때문에 풀려나서 돌아오는 길에 친한 동도 박치경朴致景을 만나 그의 부탁을 받고 엽전 20냥을 가지고 서울에 먼저 와서 최시형의 식비를 도우려고 경무청에 왔다가 체포되었다.

그 사실은 피고 등이 자백한 진공陳供에 증거가 분명하기 때문에 이것을 법에 비춰 피고 최시형은 대명률大明律 제사편祭祀編의 금지사무사술조禁止師巫邪術條에, “잘못된 도에 호응하여 정도正道를 어지럽히고 또는 도상圖象을 숨기며 향을 태우고 사람들을 모아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해산하면서 겉으로는 선한 일을 수행하나 인민을 선동해서 우두머리가 된 자”의 형률로 교형絞刑, 교수형에 처한다.

피고 황만기는 같은 편編의 같은 조條에, “종범從犯이 된 자”의 형률로 태형笞刑 100대에 종신終身 징역형에 처하고, 피고 송일회는 같은 편의 조에, “종범이 된 자”의 형률로 태형 100대에 종신 징역형에 처하나 피고 최시형을 잡을 때에 길잡이를 한 공로가 없지 않아 본래 형률에서 2등급을 감해 태형 100대에 10년의 징역형에 처한다.

피고 박윤대는 같은 편의 같은 조에, “종범이 된 자”의 형률로 태형 100대에 종신 징역형에 처할만하나 최시형을 잡을 때에 길잡이를 한 공로가 없지 않아 송일회와 똑같이 2등급을 감해야 하지만 최시형이 갇혀있을 때에 식비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1등급을 감하여 태형 100대에 15년 징역형에 처한다.

광무光武 2년二年, 1898년 7월 18일에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검사檢事 윤성보尹性普와 태명식太明軾 및 검사시보檢事試補 김낙헌金洛憲이 입회立會, 참관하였다.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재판장裁判長조병직趙秉稷
판사判事 주석면朱錫冕
판사判事 조병갑趙秉甲
예비판사豫備判事권재운權在運
예비판사豫備判事김 택金 澤
주사主事 김하건金夏鍵

광무光武, 대한제국의 연호 11년十日年, 1907년 7월 26일에 법부法部의 훈령訓令을 받아
원본原本을 삭제하였다.

41) 동학론(東學論)* : 동학의 기본 경전인 <동경대전>에는 ‘논학문(論學文)’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착오로 보인다.
42) 형벌을 순순히 받아들여 죽은 죄인
43) 만년동안 가지 위에 천개의 꽃잎
44) 사해의 구름속에 달이 한번 비추네
45) 동학을 믿는 신도를 형제로 표현

*「최시형판결선고서崔時亨判決宣告書」는 최시형崔時亨을 비롯하여 황만기黃萬己, 박윤대朴允大, 송일회宋一會에 대하여 고등재판소에서 1898(광무 2)년 7월 17일 에 선고한 판결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최시형崔時亨에 관한 부분이다. 여기에는 안타깝게도 그의 행적이 너무 소략하게 다루어져 동학농민혁명과 의 관련을 심도있게 밝히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따라서 자료로서의 내용 이 빈약하여 활용가치가 낮은 게 흠이다. 또 내용상 드러나는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동학이 갖는 당시 사상계에서 의 위상이라든지 반상차별을 부정하는 동학의 교의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외면하고 주문과 부적을 사용하여 혹세무민하는 사교 정도로 처리하고 있 으며, 동학농민혁명의 발발 배경을 단순히 동학과 연결시키는 수준 이하의 시각이 발견된다. 또 최시형이 1866년(병인丙寅) 필묵상筆墨商 박춘서朴春瑞로부 터 동학에 입도하였다. 라는 부분은 오류도 지적할 수 있다. 또 이때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이 복권되어 재판관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 고 있어 흥미롭다.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다.
*해월의 동학 입도를 1861년 수운에게 입도하였다. 

출처 : 동학관련판결선고서(2015), 234~237쪽

 

  선고 이틀 후 교수형이 집행되어 그의 유해는 4일간 효수되었다. 광희문 밖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가 이종훈 등이 경기도 송파의 한 도인집 뒷산에다 매장하였다. 시신을 수습할 당시 묘에 동학괴수 팻말로 확인하였고 효수 당시 동학에 원한진 사람의 소행으로 보이는 몽둥이질로 뒷머리가 깨진 시신을 비가 많이 오는 가운데 수습하려니 매우 어려웠다고 전한다. 그후 1900년 5월 1일 경기도 여주 이곳 원적산 천덕봉 아래(주록리) 이장하였다. 1907년 고종에 의해 신원되었으나 제대로된 장례를 치루지 못하다 2006년 6월 3일 제1회 동학문화예술제에서 108년 만에 장례식이 이루어졌다.

  경상도 경주의 황오리에서 태어난 까막눈에 인자한 노인, 마치 신선과 같은 풍모, 단순히 사민평등을 넘어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모든 자연만물을 한울로 존귀히 여긴 선인 해월, 오늘날 우리 나라 민중종교에 있어서 해월은 유교의 맹자, 기독교 베드로, 우리 불교의 원효와 같은 입지적인 인물이다.

 

  답사는 청정계곡 상류에 위치한 청정계곡펜션에서 시작하였다. 이곳부터 거리는 짧으나 묘소에 이르는 길은 가파른 산길이다. 기울기가 60도 정도이다. 그래도 묘 아래까지는 시멘트포장길이라 쉬이 오를 수 있고 묘 1km 전방 숲으로 이어진 길은 70도 정도 가파른 길을 걷는데 다행인 것은 바닥은 흙길은 아니고 마줄로 엮은 바닥재가 깔렸다. 첩첩산중이다 보니 일부 통신사는 불통이다. 가는 종종 다람쥐 등 산동물을 볼 수 있다. 오르다보면 중간에 왼쪽 오솔길로 빠지면 장남 애국지사 최동희와 장손자 최익환의 묘가 있다. 산 정상에 오르면 탁트인 산마루에 최시형의 묘가 나오고 바로 아래 처 손시화(의암 손병희 동생)의 묘가 있다. 참배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 묘소 바로 아래쪽에서부터 샘 솟음을 본다. 샘물은 쪼르륵 흘러 금새 작은 개울을 이루고 흘러 청정계곡으로 이어져 시원한 물줄기가 된다. 해월이 시작한 동학도 이렇듯 민족의 고단한 역사와 함께하면서 작은 샘이 솟아 내를 이루고 창해로 나아갔다.  

   

출발지 청정계곡펜션이다. 산세가 깊어선지 공기가 매우 맑고 물이 깨끗하다.
오른쪽 펜션에서 나와 왼쪽 길로 오른다.
청정계곡의 물줄기다.
해월 신사묘까지는 이렇듯 계속 오르막이다.
두 번째 갈래길에서 오른쪽으로 계곡을 건너 오른다.
가다가 사찰인 성혈사 경내라 머뭇할 수 있다. 경내로 들어가 올라야 한다. 
경사를 오르다 뒤를 본 모습이다.
사찰 내 요사채인지 통행금지이다. 조용히 지나쳐 우측 산길로 올라야 한다.
사찰 경내를 벗어나 본격적인 산행이다. 안내판 등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해월의 장남, 장손자의 묘소이다. 왼쪽 오솔길로 지척이다.
먼저 최익환의 묘소가 나온다.
장손자 최익환의 묘소 위로 장남 최동희의 묘가 보인다.
애국지사 최동희 묘
다시 원 산행을 시작한다.
해월의 묘소가 산 꼭대기라 지척에 가느란 샘이 솟아 흐른다.
산마루이다. 경사가 완만하다. 그 끝에 묘소이다.
해월의 묘다. 묘소를 지키는 적송 든든하다. 묘 정비로 한 때 잘라 내려다가 살린 흔적이 있다.(전기톱 자국) 참으로 잘한 선택이다.
해월신사 묘소
천도교 제2세 교조 해월신사 최시형묘

 

천도교 제2세 교조 해월신사 최시형 묘비문
 
해월신사의 가계
해월신사는 최고운선생의 후손으로서 부친은 종수요 모친은 배씨다 큰따님은 윤이요 사위는 정수현이다. 의암성사의 여동생 손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동희는 상해에서 고려혁명당의 당수로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환원하여 건국독립포장을 받았고 둘째 동호는 기미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 끝에 환원하여 건국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받다 동희는 부인 남양 홍씨 사이에 큰딸 문환 맏아들 익환 작은아들 진환을 두었는데 익환은 천도교 도정을 지냈고 부인은 홍창섭이며 아들 재홍 처 박진숙 재원 처 김덕순 재형 처 이혜용 재신 처 정순과 딸 정혜(차광수처) 경혜 영혜(이진봉처) 인혜를 두었고 현손이 많다.
 
경기도 여주고을 이 산속에 묻히신 천도교 제2세교조 해월신사 최시형 님은 포덕전33년(1827년) 신라의 고도 경주 황오리의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5세에 어머님을 12세에는 아버님을 여의고 혈혈단신의 고아가 되어 하루 세끼 식생활을 유지하기도 매우 고달픈 신세였다. 하지마는 17세 때부터 비로소 제지소의 일꾼이 되어 부지런히 일하고 저축한 결과 자립생활의 기틀을 마련한 다음 19세에 밀양 손씨댁 규수와 결혼하여 성가하게 되니 날이 갈수록 더욱 근면 성실한 역량을 발휘하여 그 이름을 인근에 떨치고 남다른 소임도 맡아보게 되었다. 35세 되던 포덕2년(1861년) 한울님의 조화와 이치를 직접 수운대선사께 배워 깨닫기 위하여 동학교문에 들게된 바 밤낮없이 정진하는 이 분의 모습과 줄기찬 신앙생활은 어느덧 대선사의 눈길을 끌고 드디어 막중한 도통의 계승자로 지목받게 되었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뛰어난 선각자와 성인이 내세우는 진리의 교훈은 매양 억세인 거부반응과 시련을 겪는 것이 사실이라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천도를 외치며 온갖 수난 속의 농민대중을 신바람 나게 고무격려 하면서 민족적 차원의 인간혁명을 기도하고 제창하는 사민평등의 동학운동이 오백년 왕조 말기의 완명고루한 양반 권력층에서 용납될 리도 만무하여 위선 수운대선사가 포덕5년(1864년)에 억울하게도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피흘리고 순교하게 되니 동학교문 전체가 무자비한 탄압과 박해를 받고 얼핏 보아 재기불능의 괴멸상태에 빠졌다. 하지마는 이미 대선사의 도통을 계승한 해월신사만은 엄동설한을 맞이한 거목의 뿌리처럼 지하로 깊숙이 파고들어 교문의 소중한 문서 보따리를 둘러메고 계속 은밀한 포교 행각을 일심정력을 바칠지언정 결코 실망하거나 중단하지 않고 각지에 숨어사는 열신동덕들을 두루 찾아 위로 격려 하는가 하면 후일의 포덕천하를 위한 기본대책을 용의주도하게 다져나가는 것이라 우선 대선사에게 물려받은 필사본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비밀리에 판각 간행하여 보급시키고 둘째는 사람을 한울님같이 섬기라고 하는 새 윤리도덕의 본보기로 어린이와 부녀자의 인격부터 존중할 것을 강조하고 셋째는 누구나 근로정신을 발휘하여 유진무퇴할 것을 당부 하였다 이같이 20년동안 배양한 저력이 있었기에 동학운동은 마침내 농민대중을 이끌어 포덕35년(1894녀)의 갑오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청일양국의 무력간섭으로 성공 직전에 실패하고 포덕35년(1898년) 해월신사 또한 순교 하시고 말았다 하지마는 두 분 교조계서 차례로 이 땅을 적신 순교의 혈맥은 포덕60년(1919년)의 기미독립운동으로 다시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영광된 대한민국 건국 정신의 원천이 되었으니 이 자리에 묻히신 스승님의 유훈 유덕은 정녕 이 나라의 역사와 더불어 영생불멸 할 것이다
포덕121년(1980년)3월21일
문학박산 이선근은 글을 짓고 관암 양재환은 글씨를 쓰고 김한은 제자하고 해월신사묘비건립위원회의 전체교인의 성금으로 삼가 이 비를 세우다

 

해월의 고향 경주 황오리 모습 출처 : 울산저널i(성강현 문학박사)http://www.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065592892250985 : '신인간' 통권 제1111호(1927.3) 아래 가족 사진과 실렸다.
최시형 가족. 가운데 손시화 여사, 아들 최동희((뒷줄 학생복[왼쪽 사각형]. 최동호(앞줄 오른쪽[오른쪽 사각형] ] 출처 : 울산저널i(성강현 문학박사)http://www.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065592892250985 : '신인간' 통권 제1111호(1927.3)

 

산중을 굽어보는 최시형 묘소의 전경이다. 후세들이 선생을 잘 모셨다. 이 산중에 

 

최시형 묘 전경 동영상

 

 

 

해월 묘소 바로 아래 처 손시화 여사의 묘소가 위치한다.
오래전에 해월 묘 옆으로 낸 계단으로 손시화 묘로 이어진다.
해월 신사 부인 손시화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