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이곤 선생 효자문

달이선생 2020. 9. 28. 23:52

  화성시 봉담읍은 전근대시대 수원에 속하는 곳으로 고려시대 대표적 효자 수원최씨 최루백(崔婁伯)의 본향이고 조선 고종 때 재 정문된 효자 이곤(李琨, 1641~1697)의 연고지다. 사실 봉담은 정조가 수원 신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고 화성을 쌓기 전까지 수원읍이자 중심이었다. 지금의 정조와 그의 부모인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릉이 있는 융건릉 자리가 수원관아 터고 그 주변으로 토성의 수원고읍성이 현존한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금산지역은 청동기시대부터 꾸준히 역사가 이어져 온 곳으로 봉담이 원수원의 표상이며, 그 이름인 물의 고장인 것처럼 봉담 자체도 물을 뜻하고 봉담에는 지천에 오래된 저수지가 퍼져 있다. 봉담읍(峰潭邑)은 1831년(순조 31)전까지 삼봉면(三峰面), 갈담면(葛潭面)으로 되어 있었다가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을 하면서 삼봉면과 갈담면을 합하여 봉담면으로 하였고 1998년 4월 봉담읍으로 승격하였다. 또한 수원을 중심으로 본향을 삼은 수원백씨 중시조 백천장의 묘가 고금산 자락에 있고 내최로 불린 수성최씨 시조 최영규의 묘가 봉담과 지척인 매송에 있다.

  효의 고장으로 널리 이름하고 있는 화성이나 수원에서는 정조의 효심을 내세워 지역의 정체성을 세우는데 앞장서고 있다. 전국어디에나 효성 지긋한 인물은 다 있지만 이러한 사정 때문에 화성의 효자는 더 특별하다. 군왕에서 일개 선비에 이르기까지 효를 실천하였던 대표적인 사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명성과 달리 최루백이나 이곤 선생의 효자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시에서 나오는 공식적인 자료에도 정확한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2000년대 들어 전국을 무대로 풍수를 보며 묘 찾아 횡횡하는 길손들이 늘어 나면서 쉽게 찾아지지 않았던 유적들이 찾아지고 있다.

  이곤 선생 효자문을 오래전에 들었지만 정확한 주소지가 없어서 허탕을 친 일이 많았다. 다행히 앞서서 찾아준 길손들의 글을 보고 이곤 효자문을 제대로 찾았다. 선생의 효자문은 화성시 장안대학교에서 봉담으로 가다(삼천병마로) 봉담2지구로 이어지는 새로 난 네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상리로 이어지는 길로 오른쪽에 삼보폐광산 사택(봉담읍 상리 36-25)을 지나 고개를 넘으면 바로 삼거리가 나오는데 좌회전해서 조금 가면 진주숲어린이집이 나온다. 여기에 '이곤 선생 효자문'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좌회전하면 상2리 마을 안 길이다. 가든 한우농장에서 좁은 사거리가 나오는데 오른쪽 경사진 길은 삼보폐광산(봉담읍 상리 104, 1957부터 91년까지 금, 은, 납, 아연, 중정석 채굴광산)이어지는 길이 아닌 그대로 직진하여 상2리 마을버스정류장을 지나 마을 안길로 간다. 그러면 예량도예원에 못 미처서 길 오른쪽에 이곤 선생 효자문이 있다.

  이곤 선생 효자문은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상리 363(상2리)에 있다. 상리는 원주이씨 집성촌이다. 상리의 지명유래로는 봉담읍에서 가장 위쪽 높은 곳의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효자문의 모습은 곡장을 두르고 빨간 나무문과 기와를 올려 단장하였다. 효자문 글씨나 효자문이 있는 표석 등은 세월을 못이겨 글자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효자문 영내 풀을 뽑고, 관리는 잘 되고 있었다. 

 

“공휘응한자청보원주대성이춘계지후고려판위위시사휘녹규즉공구세조증조휘홍조휘승정고휘업비원주원씨휘혜훈지녀이조판서천상칠세손야(公諱應漢字淸甫原州大姓李椿桂之後高麗判衛尉寺事諱祿圭即公九世祖曾祖諱泓祖諱承考諱?妣原州元氏諱䧥訓之女吏曹判書天常七世孫也)"-이응한 묘갈 중 선계 부분

 

  이곤 선생은 정5품 상계 과의교위를 지낸 이응한(李應漢)의 아들이다. 이응한은 묘표에 따르면 1607년(만력 정미) 원주 계암촌(階巖村)에서 태어났다. 자는 청보, 본관은 원주, 즉 구원주이씨(舊原州李氏) 이춘계(李椿桂)의 후손이며, 고려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3품) 녹규(祿圭)의 9세손이다. 증조는 홍(), 조부는 참봉을 지낸 승정(承頲), 부친은 벼슬을 못한 업(?)이고 모친은 원주원씨 혜의 딸로 이조판서 천상(天常, 19세)의 7세손이다. 부인은 광주이씨 참봉 효심(孝忱)의 따님으로 광천군 극증()의 6세손이다. 

 

  이곤 선생은 1641년 신사(辛巳) 2월 4일생으로 자는 봉숙(叔), 치원(致遠), 개명 전 이름은 장(璋)이다. 2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문정공 민유중(重, 숙종의 국구, 인현왕후 부친) 형제의 문인이다. 부인은 수원최씨 최천헌(崔天憲)의 따님으로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다. 진사 변욱(邊頊)에게 출가하였다. 정실부인에게서 후사를 못 두어 형의 아들 문병(文炳)을 계자로 이었다. 그러나 측실에서는 아들 문영(文煐)과 문정(文炡, 정을 혁[]으로 개명)을 두었다. 1697년 정축(丁丑) 10월 20일 음죽현감으로 있으면서 병이 나 파직되어 돌아오다 이천읍에 이르러 죽으니 향년 57세였다. 경기도 광주 사촌(沙村) 선산에 장사하였다. 광주 사촌은 강원도 원주에서 세거하던 아버지가 벼슬을 하면서 처가인 광주로 이주한 곳이다. 후에 선생의 묘표를 측실 아들 문혁(정)이 약사를 정리하여 도암 이재(縡) 선생에게 부탁하여 지었다. 이재는 노론 대학자로 이곤 선생의 스승 민유중의 외손이다.  

 

공의 성품은 청렴하고 절약, 검소하여 평소 겨울에는 명주를 입지 않고 여름에는 모시를 입지 않았다.(公性廉約節儉 冬不衣紬 夏不衣紵-좌랑이공묘지명[佐郞李公墓誌銘] 중)

 

  대사헌을 지낸 민우수(민유중의 손자)가 쓴 묘지명에 나오는 이곤 선생의 성품이다. 이곳 봉담읍 상리(上里)가 화성시이지만 당대는 수원부에 속한 곳으로 여기로 이주한 것은 부인이 수원최씨이기 때문에 입향하게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이응한도 처가입향이고 이곤 선생도 처가입향 한 것으로 친영제도가 정착하기 전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친영제도가 확립되고는 보통 '시집 간다'가 일반적이지만 예전에는 '장가 들다'가 오래된 풍습이자 일반적인 모습이었다.(모계전통)

  이곤은 개명전 이름인 장으로 1669년(현종10) 기유식년문과에 응시하여 병과 19위에 급제하였다. 특히 방목에 보면 이곤 선생이 사는 곳이 정확히 나온다. '거수원' 즉 수원에 산다라는 것이다. 

 

ㅣ 이곤 선생이 급제한 1669년 식년문과 방목(출처 국조방목,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3538 :http://people.aks.ac.kr/front/imageView/imageViewer.aks?exmId=EXM_MN_6JOb_1669_006650)
기유식년문무과전시방목(己酉式年文武科殿試榜目)』 (한국국학진흥원[안동권씨 강파(江坡[權尙任])후손가]:http://people.aks.ac.kr/front/imageView/imageViewer.aks?exmId=EXM_MN_6JOb_1669_006650)

 

 

현종(顯宗) 10  
시험일 16690601
합격자발표일 16690601
시험종류 식년시(式年試)
방목정보 방목명 : 기유10년식년방(己酉十年式年榜)
표제명 : 國朝文科榜目
권수제 : 國朝文科榜目卷之十二
시험관 명관(命官) 정태화(鄭太和)
시관(試官) 호조참판(戶曹參判) 권대운(權大運)
좌윤(左尹) 유철(兪㯙)
예조참의(禮曹參議) 이준구(李俊耉)
호조참의(戶曹參議) 박세성(朴世城)
이단하(李端夏)
민종도(閔宗道)
시험문제 책문(策問) 경유시사(經游試士).                   
문과장원 장원급제 : 이덕령(李德齡)
합격인원 : 33
무과장원 장원급제 : 김응성(金應聲)
합격인원 : 48
  출처 :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KingExmSubInfo.aks?classCode=MN&kingName=%ed%98%84%ec%a2%85%28%e9%a1%af%e5%ae%97%29&kingYear=10&exmName=%ec%8b%9d%eb%85%84%ec%8b%9c%28%e5%bc%8f%e5%b9%b4%e8%a9%a6%29&exmYMDL=1669-06-01L0

 

  그동안 이곤 선생 효자문이 마을에 있는 이유에 대해서 뚜렷한 사실을 전한 경우가 없었다. 묘는 성남(옛 광주)에 있었는데 화장되었다고 전하나 선생의 자취가 화성에서 효자문 말고는 뚜렷하지 않았다. 더욱이 문과 급제자이지만 이를 확인한 자료도 없었다. 다행히 선생의 개명 전 이름이 장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과거 급제자 기록인 국조방목을 확인하여 수원에 살았던 연고는 물론 이름을 곤으로 개명한 사실과 자와 생년도 확인하였다. 그리고 아버지 이응한이 과의교위를 지낸 사실이라든가 과거급제 당시 ‘자시하(慈侍下)’라고 하여 아버지는 작고하여 어머니만 살아있었고, 안항(雁行)으로 형 찬(璨)을 확인하였다. 이렇듯 이글에서는 기존의 구술에 의존한 정확하지 않은 자료보다 국조방목(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명부)과 이응한 묘갈, 이곤 묘지명, 묘표의 내용을 바탕으로 이곤 선생의 세계와 신상 등을 정확히 파악하였다.

  이곤 선생은 명실공히 수원사람, 화성사람이자, 문과에 급제한 선비였다. 다만 문과에 오른 후 내직으로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공조좌랑겸 춘추관기사관을 지냈고 외직으로 양재도찰방, 의령, 옹진, 보령, 음죽현감 을 역임하였다.(이곤 선생 묘지명, 묘표) 최종 벼슬이 이를 확인하듯 방목에도 현감이라고 나온다. 아버지 이응한의 묘표와 효자문 정려에는 대표 관직이 병조좌랑(郞, 정6품)에 그치고 있다. 다만 품계는 통훈대부로 정3품 하계로 '행'이 붙는 것으로 보아 살아있을 때 관직은 정6품 이상의 직에 제수받지 않았고 이후 품계가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영조대 효행정려 되면서 가자된 것으로 보임) 또한 효행도 살아서가 아닌 영조 때 정려되어 현재 남아있는 것은 고종 때란 것 등 여러 궁금증이 남는다.

  다만 이러한 경우는 대개 조선시대 평균수명이 30안밖으로 이곤 선생이 장수하지 못한 관계로 문과급제자이지만 벼슬이 크게 오르지 못했을 수도 있고 또는 아버지가 무산계 과의교위를 지냈으나 명문벌열이 아니라서 외직을 잠시 전전하다. 그쳤을 경우라든가 또는 유력 당파인 서인이나 남인에 속하지 못하였을 경우, 조선후기 관직자 체증에 따라 실직을 제수 받기 곤란했던 상황 등 여러가지가 있다. 다만 이곤 선생 묘표(좌랑이공묘표) 등을 보면 민유중의 문인으로 붕당정치의 와중에 서인이자 노론으로 이어지는 처신의 문제로 외직을 전전함과 함께 환갑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감에 따라 관직이 더 오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영조 즉위 이후 노론이 집권하면서 선생의 효행이 인정 받을 수 있었다.

  또한 관찬사료인 승정원일기에는 이곤 선생의 관계가 현종 14(1673) 승문원 교검(6)이 처음 나오고 이어 15년 의령현감, 숙종 6(1680)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 옹진현감, 숙종 10년 사헌부 감찰, 감시관, 공조좌랑, 낭청, 통례원 찬의(5), 낭청, 숙종 11년 공조좌랑, 보령현감, 숙종 12년 중학교수, 숙종 14년 보령현감, 숙종 20년 문겸(문관 선전관 겸임), 고성현령까지 나온다.

  봉담 상리에 살던 후손들은 문과 급제와 효행을 한 선조를 둔 덕에 조상의 음덕으로 각종 부역을 면제받아 향반으로 위세를 이어가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종과 숙종시대 인물인 이곤이 정책적으로 충효의리를 강조하던 영조대 와서 효자로 정문되고 다시금 이를 고종 때 재정문 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사실 화성지역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세조 때 충절의 표상 차운혁의 후손인 장안면 석포리 버들차씨, 정남면 남산밑차씨 등도 그러한 사례들이다.             

  이곤 선생 효자문은 삼봉산자락 상리마을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곡장을 두르고 소문을 세웠다. 효자문 정문각 오른쪽으로는 이곤 선생의 부친 묘소의 석물인 문인석(금관조복형)과 망주석 한쌍이 있고 방부원수(方趺圓首)의 묘갈(과의교위이공응한지묘공인광주이씨부좌)이 있다. 내용과 형식상 이곤 선생이 문과 급제 후 영조대 효자정문 된 이후의 형식으로 추정된다. 석물의 표현과 재질이 우수하다. 그 아래로 1982년 10월 1일 세운 원주이씨사용공파 봉담종친회에서 남긴 표석이 있는데 정문과 마찬가지로 글자의 색이 바래서 잘 보이지 않는다.      

  이곤 선생의 효행은 이미 12세에 아버지의 상을 치루면서 효자로 칭송되었다. 대사헌 민유수의 묘지명과 이재 선생이 찬한 묘표에서 이곤 선생이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양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시킨 효동으로 칭송되었다고 했다. 또한 이곤 선생은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계신 어머니 광주 이씨가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 추운 겨울에 잉어와 오이가 먹고 싶다고 하자 온갖 노력을 다하여 구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효성은 죽은 지 1년이 되어 광주의 선비들이 이곤 선생의 효행을 본부(本府)에 정문(呈文)을 올려 조정에 알려졌다.

  후에 1737년(영조 13) 효행상과 효자정문을 하사 받았다. 현재의 정문은 1883년 (고종20) 9월 세워진 것이다. 이곤 선생 효자문은 1986년 5월 20일 화성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고 2019년 화성시 고시에 따라 유형문화재 3호가 되었다. 

 

정문은 본래 나무로 되어 있었으나 비바람에 삭게 되어 1982년 10월 1일 벽돌로 만들고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었다. 이곤 선생의 묘는 성남시에 있었으나 개발로 인하여 아버지 이응한의 묘와 함께 원주이씨 사용공파 봉담종친회에서 화장하여 묘를 정리하였다고 하며, 효자문 영내 석물은 이때 옮겨온 이응한 묘의 석물이다.(봉담읍 상2리 이석연[李石淵, 49세], 이병세[李秉世, 52세] 증언['화성의 충효열', 화성문화원, 2004, 64~69쪽]) 

1986년 이곤 선생 효자문(출처 : 화성시포토갤러리_사진 김경수)

 

*일러두기

이곤 선생 자료는 그간 정돈된 자료가 없이 구술에 의존한 나머지 그 내용이 정확하지 않고 부족했다. 그래서 답사를 통해 정려문 한켠에 위치한 이곤 선생 아버지 이응한의 묘표를 통해서 이곤 선생의 신상 등을 파악하였으나 비석의 글자가 오래되어 잘 볼 수 없어 국조방목을 비교하여 글을 작성하였다. 그러던중 화성지역학연구소 정찬모 소장님께서 연구소에서 펴낸 자료집을 주셔서 이곤 선생 묘지명과 묘표 원문 자료(좌랑이공묘지명[정암집 권11], 좌랑이공묘표[도암선생집 권38 묘표1])를 볼 수 있어서 기존의 내용을 바로 잡는다. 

 

삼봉산 아래 상리마을이다.
삼보폐광산 사택
상2리 마을 입구. 효자문 표지판이 잘 되어 있다.
효자문에 이르기 전 50m지점 마을 안 버스정류장에 마지막 표지판이 있다.
상리마을 오래된 느티나무

  상리 웃골(윗골)의 입구에 위치하는 나무로 이곤선생효자문에서 북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져 있고 주변은 논이다. 나무 옆에는 오래된 정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마을회관이 들어서 있다. 주민들이 신성시하여 나뭇가지를 집안으로 들이지 않았고 가지를 꺾어나 해롭게 하면 가정과 마을에 좋지 않다고 한다. 매년 가을에 제를 올렸으나 사라졌다.(화성 상리 느티나무, 지정사항 : 경기-화성-12(노거수, 1982.10.15.)

삼봉산 자락 굽이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보이는 효자문 전경이다.

 

효자문 정문각에 들어가는 소문이다. 굳게 닫혀있으나 작은 난간시설로 하여 쉽게 경내로 들어갈 수 있다.

 

효자문 정문각과 안내 표지판이다.
효자문 정문각 정면, 편액에 효자문이라고 써있다.
효자문 정각 양쪽 지붕 처마에 도끼비 문양의 기와를 해놓았다. 매우 다른나라 괴물과 같은 도깨비가 아닌 해학적인 모습이다.
효자문이다. 홍살문에 효자로 정문 된 것으로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를두고 예전 탁본을 하면서 훼손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효자

행통훈대부병조좌랑겸춘추관기사 증통훈대부홍문관응교지제교겸경연시강관춘추관편수관교서관교리중학교수한학교수세자시강원보덕이곤지문

상지이십년계미구월 일

명정

 

 

이곤 선생의 아버지 이응한과 광주이씨 묘표과 생김이 다른 문인석(금관조복형) 한쌍과 생김이 다른 망주석(촛대석) 한쌍으로 이응한 묘의 석물로 전해온다. 생김이 다른 것으로 보아 이응한과 이곤 선생 묘를 정리할 때 이 두 묘의 온전한 석물만을 취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된다.
'과의교위이공응한지묘 공인광주이씨부좌' 이곤 선생의 부모님 묘표

 

 

'차곤문과좌랑' 즉, 차남 곤이 문과 급제, 좌랑으로 비문 왼쪽 중간 두번째 줄에 나와 있다.
묘표의 건립연대는 ''황명숭정기원후무진 5월모일'로 나와 있어 1748년으로 추정된다. 이는 비석양식과 내용 중 이곤이 문과급제와 병조좌랑 역임 내용 부기가 나와 이 이후이자 이곤이 처음 정문되는 것이 1737년이므로 이 때 이후로 후손들이 이응한의 묘소를 단장하는 등 위선사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응한의 벼슬로 볼 때 석물과 묘표의 재질과 작품성은 상당한 것으로 아들 이곤이 문과 급제자이자 효자로 정문되어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곤(李琨) 선생 효자문

이곤선생은 19세기 중엽 즉 조선후기에

일찍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시여 위대한삶

학자로서 병조정랑(兵曹正郎)과 의영(宜寧)

보령(保寧)옹진(甕津)음죽(陰竹) 등의 현감(縣監)

을 역임하시던 중 부모에게 효행(孝行)

지극하여 왕(영종 13)으로부터 효행상 및 효자문을 하사받으셨던바 본 효자

문의 모습이 노후되어 이번에 다시 개축

함이니라

1982. 10. 1.(중추절)

원주이씨사용공파 봉담종친회 개축위원 일동

 

 

효자문에서 내려다 본 마을 전경이다. 길 너머로 멀리 칠보산이 보인다.

 

 

이곤 선생 효자문 동영상

 

 

 

 

참고자료

(이곤 선생 묘지명, 묘표)

 

원문자료

출처 : 한국문집총간 편목색인 (itkc.or.kr)

 

한국문집총간 편목색인

 

index.itkc.or.kr

 

貞菴集卷之十一 / 墓誌

佐郞李公墓誌銘 幷序 

孝子故佐郞李公琨字致遠。原州人。生而重厚。志操過人。其於孝有至性。年十二喪父。身不脫衰服。哭泣不絶聲。執喪如成人。人以孝童稱之。稍長受業于我王考文貞公昆季間。讀小學。慨然慕古賢人。一言一行。動有據依。未或苟也。公自以蚤孤。奉養偏母盡其誠。而家貧菽水不繼。且方客寓廣州。無可相資者。時時歸原州乞貸。而至原去廣三百里。躬負任艱甚。路上行者或愍而分其勞。母夫人疾革。公割兩指灌血。母夫人絶而復甦曰。入我口者何物耶。其味淸利。令我沉痾若失。病間思食生魚。時天寒氷凍。公又病指瘡。乃跣足踏氷。涕泣彷徨。忽於氷穴中有魚潑剌。刺取以來。人謂孝感所致也。己酉登明經科。內則成均館典籍,司憲府監察,工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外則良才道察訪,宜寧縣監,瓮津縣令,保寧縣監,陰竹縣監。其履歷也。公性廉約節儉。冬不衣紬。夏不衣紵。爲邑宰食不重肉。歷典四邑。秋毫無所犯。親族聞公罷官。則每灑掃一奴家。聚米以待之曰是本無屋可處。無糧可食也。公之貧如此。然其恤人如不及。苟有一斗粟一襲衣。則輒分以與飢者寒者。無所吝也。其在陰竹。邑小俸薄。而値乙丙饑荒。洞開官門。以延親舊來者。每朔以料米賑族戚朋友死亡之家。至於二十餘處云。丁丑六月。自陰竹得疾罷歸。以十月二十日卒。去其生辛巳二月初四日。得年五十七。葬于廣州沙村先山側巽向原。其治喪葬。皆以親舊之賵賻。而後子孫亦貧不能聊生。鄕人多歎息言廉吏不可爲也。公歿幾年。廣之人士以公孝行。呈文本府。請轉聞于朝。公議可見也。公曾祖諱承頲參奉。祖諱?不仕。考諱應漢果毅校尉。妣廣州李氏參奉孝忱女。廣川君克增六世孫也。配水原崔氏天憲女。後公七年而生。於丁亥十一月初四日年四十九歿。乙亥七月初一日也。葬原州途道里未向原。亦公祖墓右麓也。有一女適進士邊頊。取兄子文炳爲後。又有側室子文煐,文炡。文炳二子堉,壎。堉子元錫亨錫。餘幼。文炡子埝,墄。墄爲文煐後。嘗聞公被劾於臺官呂必容。我先君忠文公遇呂於闕中。語之曰李某居官淸白。不畏彊禦。君劾之誤矣。呂卽以論人不審自劾。我先君未嘗以私好惡苟譽毁人。故言出而人信之。於此足以槩公之平生。而况其孝行。爲居官行己之本也與。系之以銘曰。

持己之廉。撫民之慈。恤人之義。皆愛親之推。是惟孝子之藏。銘以識之。

* 정암집은 대사헌을 역임한 정암 민우수(閔遇洙, 1694~1756)의 문집으로 정암은 이곤 선생의 스승 민유중의 손자이다.

陶菴先生集卷三十八 / 墓表[一]

佐郞李公墓表 

有位卑於潛郞而行高乎古人者。李公琨字致遠是已。公原州人。曾祖承頲參奉。祖?不仕。考應漢果毅校尉。世居原州。至校尉公始遷于廣。公幼事吾外王考閔文貞公兄弟。受讀小學書。一言一行。動以是爲法。年甫十二。遭校尉公喪。常居倚廬。執喪如成人。身不脫孝服。哭不絶於口。人稱孝童。其病時公割兩指出血以進。校尉公絶而復甦曰。灌我口者何物耶。其味淸利。沉痾如失矣。病間思食生魚。而時天寒冰凍。公又指瘡甚。乃跣足踏冰。彷徨涕泣。忽於冰穴間有魚潑剌。遂刺取之。人謂之孝感。公奉養偏母。家貧菽水不繼。乞貸於原州。負米而至廣。廣與原三百里。觀者愍其勞。多有願分其任者。己酉擢明經及第。內則成均館典籍。司憲府監察。工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外則良才道察訪。宜寧縣監。瓮津縣令。保寧縣監。陰竹縣監。其履歷也。公仁心惻怛。家有一斗粟則見人之飢。輒分與之。身有一襲衣則見人之寒。亦分與之。歷典五邑。秋毫無所犯。親族聞公褫官。每灑埽一奴家。聚米以待之曰。是子本無屋可居。無糧可食也。丁丑六月。自陰竹罷歸利川邑底。十月二十日卒。年五十七。返葬廣之沙村巽向之原。從先兆也。其治喪葬。皆以親舊賵賻而爲之。子孫亦貧。無以爲生。鄕人歎息言廉吏何可爲也。公性節儉。冬不衣紬。夏不衣紵。爲邑宰。食不重肉。其在陰竹。邑本至殘。而値乙丙大饑。洞開官門。以延親舊來者。每朔以料米分於親戚朋友死亡之家。凡數十處。公歿後幾年。廣之人以公孝行呈文本府。請轉聞于朝以旌表之。公議可見也。配水原崔氏。天憲女。先公二年歿。葬在原州途道里未向原。亦公之祖墓右麓也。無嗣。取兄子文炳爲後。一女適進士邊頊。文炳二男堉,壎。側室子二人文煜,文爀。文爀子埝,墄。墄出後文煜。余嘗及見公於伯舅趾齋公座上。蓋重厚長者人也。又竊聞公嘗被劾於臺官呂必容。趾齋公遇呂於闕中。爲言李某居官淸白。不畏強禦。君劾之誤矣。呂卽自劾其論事不審。噫。趾齋公非阿其所好者。惟此一言。可以蓋公平生。而况其出天之孝。尤爲卓異。有足以勵俗而範世者。略書此以遺文爀。使刻于碑陰云。

*도암선생집은 노론 대학자 도암 이재 선생의 문집으로 도암은 이곤 선생의 스승 민유중의 외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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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곤 선생 효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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