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암孝巖의 유래
소재지 :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수기리
홍법산弘法山 기슭에 있는 이 효암은 고려 의종毅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효자 최누백崔婁伯이 사냥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죽자 곧 도끼를 매고 추적해 이 바위 아래에서 범을 잡아 부친의 원수를 갚고 또 호환虎患으로 난리를 겪던 이곳 백성들의 걱정을 덜어 주어 칭송을 받았던 곳이다.
지금의 수기촌과 분천 일대는 고려 때에 용성현龍城縣에 속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삼봉三峯이라 불리던 것을 일제가 삼봉 갈담葛潭을 합쳐 봉담으로 개명하였다.
조선 제22대 정조대왕正祖大王은 효성이 지극했던 임금으로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陵을 이곳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자주 이곳에 행차 했는데 행차 길에 최공의 후손을 불러 훌륭한 조사이라 극찬하며 수기촌을 「효자문골」 큰 바위를 「효암」이라 부르게 한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또 정조대왕은 최공의 효행을 포호도捕虎圖와 함께 누구나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를 간행케 하여 만인의 귀감龜鑑으로 삼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충효겸전忠孝兼全의 성장聖將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이 백의종군白衣從軍 할 때 이곳 수원부에서 하룻밤을 머무렀으니, 가히 효의 3절絶이 여기 삼봉에서 꽃을 활짝 피워 국민 모두의 효원孝園의 순례지巡禮地로 돋보이게 하여 더없이 자랑스럽다.
-출처 : 홍법산 효암 표지판
전근대시대 효자의 표상으로 수원의 대표적인 효자인 최루백의 유허지인 효암에 대한 설명이다. 최루백은 수원최씨 비조 최상저의 아들로 고려에서 현달했던 인물이다. 그를 숭앙하며 정조가 현륭원에 납시어 친히 불러 본 후손은 헌납공파최경으로 최루백의 효자비각이 위치한 뒷산의 선산에 그의 묘가 있다. 이 효암은 최루백의 고사가 얽힌 곳으로 현재는 화성시에 속하지만 전근대시대에는 이웃한 융건릉 자리가 수원읍치(관아 위치, 현재 수원 고읍성이 수원대에 걸쳐 남아 있다)로 수원의 중심지였다. 그래서인지 최루백의 아버지인 최상저는 일찍부터 수원부의 향리로서 이곳을 터전으로 삼고 있었다.
효암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융건릉에서 수원대 후문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조계종 사찰인 홍법사가 나오고 그 맞은편이 수기초등학교인데, 홍법사 뒷산이 홍법산으로 바로 서쪽 구릉에 효암이 있다. 이렇듯 홍법사 뒷산 오솔길로 올라 '홍법사 서쪽'이라는 지리적 단서를 알고 있었지만 오른쪽 길로 무작정 갔는데, 수원대 사학과 학생들이 붙인 표지에 뒤로 400m(700걸음)라는 표시를 확인하고 길을 돌아섰다. 이것이 없었음 한참을 헤멨겠다. 효암의 위치를 대강 알았지만 실천하지 않으면 이런 낭패를 본다. 홍법사에서 효암을 찾아 막상 올랐지만 효암에 이르기까지 제대로된 표지가 없어서 난감했는데 다행히 수원대 사학과 학생들이 정성들인 표지가 있어서 다행이고 고맙다. 다시 돌아서 오솔길로 걸어가니 솔가지 밟힘이 좋다. 옛날이였으면 이 솔가지가 발에 밟힐 정도로 쌓일 수 있을까 옛날 할머니댁을 기억하면 아궁이에 불을 때니 솔가지를 거두어 부엌에 한켠에 잔뜩 쟁여 놓는 것이 일이었다. 그러니 소나무 아래 솔가지가 그 옛날에는 남아 나겠는가 옛날 할머니집도 생각나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걸으니 어느덧 두 갈래의 길이 나와 멈췄다. 어디로 갈까생각하다 왼쪽으로 오르니 효암과 봉담 걷길 표지가 나온다. 아랫길로 갔어도 효암에 이르기는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효암 문턱에 '봉담 행복담아 함께걷길'로 이름 붙인 표지판이 소나무에 걸렸는데, 주민들이 붙인 나들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솔가지와 밤나뭇잎이 쌓여 서걱서걱 소리가 즐거운 산책로로 그 끝이 효암과 수원대학교 후문에 이른다.
효암에 올라서니 이런 야특막한 산에 정말 장엄한 크기의 바위가 있다는 것에 크게 놀랐다. 홍법산은 효암과 더불어 곳곳에 야산 답지 않게 큰 바위를 여럿 볼 수 있다. 홍법사 뒤에도 큰 바위가 있다. 효암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효암 표지판이 서 있는 바위와 그 옆으로 떨어져 나간 세로로 서있는 바위, 그리고 그 아래 넒은 선반처럼 깔린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선반처럼 되어 있는 바위 아래에는 산신제단이 위치하고 있어 이 바위가 상당히 신령스럽게 주민들에게 모셔지는 바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의자와 훌라후프 등도 있는 거 봐서는 산책이나 운동삼아 즐겨 찾는 사람들도 많은 듯 하다.
효암은 최루백의 고사처럼 생태적으로 호랑이와 친숙한 곳이다. 예전 호랑이가 살던 호랑이굴로 보이는 부분은 찾기 힘들었지만 선반처럼 너른 바위와 그 위에 있는 바위는 큰 호랑이가 사방을 경계하며 머물기에는 아주 적당한 곳이었다. 우리나라 곳곳에 호랑이가 살던 곳도 효암과 비슷한 곳이 많아 호랑이의 습성상 선호된 곳임은 한번에 알 수 있었다. 최루백의 고사에서 아버지 최상저를 먹고 부른 배를 쉬고 있던 호랑이를 도끼로 내리쳐 잡았다는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가 아닌 실제 가능한 사실인 것이다.
2020.11.16.12:30
효암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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