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은 한림 학사 국자 좨주 최누백(崔婁伯)이다. (【고려 인종(仁宗) 때 사람이다. 】人勿, 翰林學士國子祭酒崔婁伯, 高麗、仁宗特人)-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기 수원 도호부
전근대시대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바로 수원최씨의 비조가 되는 효자 최루백(?~1206)이다. 수원을 본향으로 하는 성씨 중 최씨는 둘인데 그중 본최(本崔) 또는 원최(原崔)가 되는 것이 최루백의 수원최씨다.
화성시 매송면에 무덤이 전하는 비조 최영규는 수원최씨, 수성최씨로 불리는 내최(來崔)이다.
최루백은 고려 때 수원의 호장 최상저(崔尙翥)의 아들로 한림학사를 지내 인근 화산에 사도세자를 모신 정조가 "최학사"로 칭했던 인물이다. 특히 정조는 이를 더하여 최루백이 아버지 최상저의 시신을 수습한 바위를 효암으로 명하고 이곳을 효자동으로 명하였다고 전한다. 효의 고장을 표방하는 수원이나 화성은 정조라는 지체 높은 효자와 인연이 닿은 것이기도 하지만 이미 수원에는 동방을 대표하는 효자 최루백의 본향이었다.
최루백의 효심은 최루백이 효행으로 대표된다. 아버지 최상저가 호랑이에 물려 가자 약관도 못된 어린 나의 최루백은 도끼를 들고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 홍법산에 올라 지금의 홍법사 서쪽에 위치한 바위(일명 효암)에서 이미 최상저를 먹고 쉬는 호랑이를 큰 소리로 꾸짓고 단숨에 도끼를 내리쳐 호랑이를 죽이고 그 배를 갈라 아비의 살과 뼈를 수습하여 장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효자이다. 이러한 최루백의 효행은 고려사에 아래와 같이 자세히 전한다.
최루백(崔婁伯)은 수원(水原)의 향리 최상저(崔尙翥)의 아들이다. 최상저가 사냥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해를 당했는데, 최루백은 당시 15세로서 이 호랑이를 잡으려고 하였다. 모친이 만류하자 최루백이 말하기를, “아버지의 원수를 어찌 갚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며 바로 도끼를 메고 호랑이를 추적하니, 호랑이는 이미 배불리 먹고 누워 있었다. 최루백이 곧바로 그 앞에 나아가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나의 부친을 잡아먹었으니 나도 마땅히 너를 잡아먹어야겠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범이 꼬리를 흔들며 엎드리자 도끼로 내려쳐 죽인 다음 배를 갈라 항아리에 범의 고기를 채워 개울가에 묻었다. 또 부친의 뼈와 살을 골라내어 그릇에 담아 홍법산(弘法山) 서쪽에 장사지낸 후 여막을 짓고 무덤을 지켰다. 어느 날 잠깐 졸고 있는 사이 최상저가 나타나 시(詩)를 지어 이르기를, “가시덤불 헤치고 효자여막 당도하니, 넘치는 정에 느꺼운 눈물 한없이 흐르네. 날마다 흙 져다가 무덤 위에 덮나니, 알아줄 이 밝은 달 맑은 바람뿐이로세. 살아서는 봉양하고 죽은 뒤엔 지켜주니, 누가 효도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고 했는가.”라고 하며 읊기를 마치자, 드디어 사라졌다. 상기가 끝나자 묻어두었던 범의 고기를 가져다가 이를 다 먹었다. 과거에 급제한 후 의종대에 거듭 승진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국자사업(國子司業)·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였다.(崔婁伯, 水原吏尙翥之子. 尙翥獵, 爲虎所害, 婁伯時年十五, 欲捕虎. 母止之, 婁伯曰, “父讎可不報乎?” 卽荷斧跡虎, 虎旣食飽臥. 婁伯直前, 叱曰, “汝食吾父, 吾當食汝.” 虎乃掉尾俛伏, 遽斫而刳其腹, 盛虎肉於瓮, 埋川中. 取父骸肉, 安於器, 遂葬弘法山西, 盧墓. 一日假寐, 尙翥來, 詠詩云, “披榛到孝子盧, 情多感淚無窮. 負土日加塜上, 知音明月淸風. 生則養死則守, 誰謂孝無始終.” 詠訖, 遂不見. 服闋, 取虎肉, 盡食之. 登第, 毅宗朝, 累遷起居舍人·國子司業·翰林學士.)-고려사 권121(卷一百二十一) 열전(列傳) 권34(卷第三十四) 효우(孝友)
특히 최루백의 효행은 세종대 편찬한 삼강행실도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효자 4인 중 하나로 기록될 정도로 효자의 표상이었다. 때문에 이미 수원, 즉 우리 화성은 전근대시대 효의 고장이었다. 이러한 최루백은 고려시대 부부간의 사랑이 돈독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바로 고려시대 여성으로 이름이 전하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그 부인 염경애와의 사랑이다. 이처럼 많은 이야기의 주인공이지만 그의 무덤은 볼 수 없다. 이는 아마도 고려시대 불교가 융성하던 시기에 태어나서 죽은 인물이라 당시 널리 이루어진 장례풍습인 화장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당시에 널리 행해진 화장으로 이 시기의 묘가 현재까지 전하는 것이 드문이유 중 하나이다. 보통의 시조나 중시조의 묘가 없는 경우가 흔한데 이러한 이유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나 그 이전의 인물의 묘가 전하는 경우는 보통 조선 중후기에 종법이 강화되면서 위선사업을 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곳에는 현재 홍법산 아래 무덤의 자취는 없지만 효자비각과 아버지 최상저의 유허비가 남아 최루백의 자취를 전하고 있다.
그간 최루백의 명성에 그의 자취를 찾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는데 다행히 근처로 길이 새로이 나면서 쉬이 찾게 되었다. 현재 비각 앞길은 '최루백로'로 지정되어 최루백을 알리고 기린다. 최루백 효자비각 뒤로는 종중에서 위선사업을 크게 일으키다 중단된 듯 종회관 건물이 외관은 다 지어졌는데 내부 공사를 마치지 못한채 남아 있다. 이러한 사정으로 효자비각에 이르는 기존의 길은 앞 마당이 여러 공사장비들이 뒤엉켜 들어가기 어렵고 사적비와 종중회관을 지으면서 새로낸 길이 효자비각 왼쪽으로 길이 났다. 잡목이 우거지고 도통 관리가 되지 않는듯 생각되었으나 이후에 찾아보니 10월 19일부터 공사를 진행하여 효자비각 주변에 대한 정비가 일주일에 걸쳐 완료 된 것을 보니 종중과 화성시에서 크게 정비를 하느라 그런 것으로 생각된다.
효자비각과 함께 중요한 것은 종중회관 뒤로 최상저의 12세손이 되는 통정대부 사헌부 헌납을 지낸 최수정을 파조로 하는 헌납공파의 무덤이 줄지어 있는 선산이다. 이중 주목되는 인물은 최수정의 후손으로 1789년 이곳에 행차한 정조가 최루백의 후손을 친히 불러 보는데, 이 때 정조를 배알한 인물인 최경(景, 1725~1794)이다. 이 일로 방축동은 효자동으로 바뀌었다. 최경은 무과로 입신하여 70세로 장수하여 정조에게 궤장을 하사받았다. 당상관으로 종2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수원 최씨 호장공 이십일세손
헌납공파(景)경 자는 (大哉)대재
서기 1725년 을사 2월 26일 화성군 봉담면 수길리 방축동에서 (天擧)천거
의 삼남으로 태어낳으며, 서기 1757년에 무과에 급제하여(都事)도사로 역
임하셨다. 서기 1789년(正祖)정조 13년에 륭능설치시 정조대왕이 방축동
現孝子洞 에 이르러 금등 바위(現孝岩)에 좌정하여 문무제신이 입시한 자리
에서 고려조 효자 치학사(婁자伯자)에 후손을 부라라 하시매(景)경 도사공
이 부복하시였으며 그 후 (正祖)정조를 (禮)예를 다해 모시였다. 해남현감을
봉직하시다. 수직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正二品)정이품으로 오르셨으
며, 정조임금께서 특별히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 하시였다. 서기 1794년 2월
9일 향년 70세로 돌아가시니 정조대왕이 호조에 영을 내려 장지를 화성군
봉담면 당하리 태봉산 길엽(갓댕이)묘좌로 정하시고장의용품을 내려주셨다.
첫째 정부인 여산송씨 서기 1723년 계모3월15일 출생하시여, 서기 1755년
3월10일 돌아가셨고, 둘째 정부인 해남윤씨 서기 1730년 경술 9월7일 출생
하시여, 서기 1773년 계사 12월12일 돌아가셨으며 윤씨 소생중 아들 9형제
딸 1녀이며, 그 후손이 수백으로 번성하였다. 서기 1998년 대한민국 80년
무인 10월 14일 경부고속철도 부설로 인하여 조선국 정조대왕이 내리신 사패
지에서 화성군 봉담면 분천리 홍법산 선산아래 자좌지원으로 세 분을 합장하
여 모이였습니다.
서기 1998년 무인 10월14일
수원최씨 헌납공파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景)공 후손 종중일동
10월 중순 새로이 단장된 효자비각
22. 02. 14.
블로그를 통해 후손분께서 연락을 주셔서 다시금 방문하였다. 처음 글을 쓸 때는 공사중이었다. 평소에도 이곳을 자주 지나가기에 이후 공사를 마친 상황도 알아 새로 글을 쓰기 보다는 이처럼 끝에다 새로운 사실을 이었다. 후손분께서는 새롭게 정돈된 최루백 유허지의 모습으로 새로운 글을 원하셨지만 동국효자 최루백 선생의 자취를 찾아 보는 데는 이 글과 후기를 이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에 새롭게 쓰진 않는다.
보통 유적을 대할 때 잘 꾸며진 것을 선호하지만 글쎄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모습, 낡고 초라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 모습이 더 좋다. 흙바닥이라고 해도 풀 한포기 쓰레기 하나 정성스레 잘 치우고 돌보는 곳이라면 족하다. 아니 넘친다. 옛모습을 지키는 것, 문화재를 지키는 가장 큰 덕목이자 어려움이리라
최루백효자비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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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와 싸운 최루백
호랑이와 싸운 효자 최루백 조선시대 윤리서인「삼강행실도」에는 호랑이와 관련된 인물이 나온다. 바로 수원 최씨 최루백(崔婁伯)의 이야기로 호랑이를 잡아 효도를 다한 이야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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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992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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