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최루백 효자비각

달이선생 2020. 10. 9. 01:45

 

 

인물은 한림 학사 국자 좨주 최누백(崔婁伯)이다. (【고려 인종(仁宗) 때 사람이다. 】人勿, 翰林學士國子祭酒崔婁伯, 高麗仁宗特人)-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기 수원 도호부

 

  전근대시대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바로 수원최씨의 비조가 되는 효자 최루백(?~1206)이다. 수원을 본향으로 하는 성씨 중 최씨는 둘인데 그중 본최(本崔) 또는 원최(原崔)가 되는 것이 최루백의 수원최씨다.

  화성시 매송면에 무덤이 전하는 비조 최영규는 수원최씨, 수성최씨로 불리는 내최(來崔)이다.

  최루백은 고려 때 수원의 호장 최상저(崔尙翥)의 아들로 한림학사를 지내 인근 화산에 사도세자를 모신 정조가 "최학사"로 칭했던 인물이다. 특히 정조는 이를 더하여 최루백이 아버지 최상저의 시신을 수습한 바위를 효암으로 명하고 이곳을 효자동으로 명하였다고 전한다. 효의 고장을 표방하는 수원이나 화성은 정조라는 지체 높은 효자와 인연이 닿은 것이기도 하지만 이미 수원에는 동방을 대표하는 효자 최루백의 본향이었다.

  최루백의 효심은 최루백이 효행으로 대표된다. 아버지 최상저가 호랑이에 물려 가자 약관도 못된 어린 나의 최루백은 도끼를 들고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 홍법산에 올라 지금의 홍법사 서쪽에 위치한 바위(일명 효암)에서 이미 최상저를 먹고 쉬는 호랑이를 큰 소리로 꾸짓고 단숨에 도끼를 내리쳐 호랑이를 죽이고 그 배를 갈라 아비의 살과 뼈를 수습하여 장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효자이다. 이러한 최루백의 효행은 고려사에 아래와 같이 자세히 전한다.

최루백(崔婁伯)은 수원(水原)의 향리 최상저(崔尙翥)의 아들이다. 최상저가 사냥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해를 당했는데, 최루백은 당시 15세로서 이 호랑이를 잡으려고 하였다. 모친이 만류하자 최루백이 말하기를, “아버지의 원수를 어찌 갚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며 바로 도끼를 메고 호랑이를 추적하니, 호랑이는 이미 배불리 먹고 누워 있었다. 최루백이 곧바로 그 앞에 나아가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나의 부친을 잡아먹었으니 나도 마땅히 너를 잡아먹어야겠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범이 꼬리를 흔들며 엎드리자 도끼로 내려쳐 죽인 다음 배를 갈라 항아리에 범의 고기를 채워 개울가에 묻었다. 또 부친의 뼈와 살을 골라내어 그릇에 담아 홍법산(弘法山) 서쪽에 장사지낸 후 여막을 짓고 무덤을 지켰다. 어느 날 잠깐 졸고 있는 사이 최상저가 나타나 시(詩)를 지어 이르기를, “가시덤불 헤치고 효자여막 당도하니, 넘치는 정에 느꺼운 눈물 한없이 흐르네. 날마다 흙 져다가 무덤 위에 덮나니, 알아줄 이 밝은 달 맑은 바람뿐이로세. 살아서는 봉양하고 죽은 뒤엔 지켜주니, 누가 효도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고 했는가.”라고 하며 읊기를 마치자, 드디어 사라졌다. 상기가 끝나자 묻어두었던 범의 고기를 가져다가 이를 다 먹었다. 과거에 급제한 후 의종대에 거듭 승진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국자사업(國子司業)·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였다.(崔婁伯, 水原吏尙翥之子. 尙翥獵, 爲虎所害, 婁伯時年十五, 欲捕虎. 母止之, 婁伯曰, “父讎可不報乎?” 卽荷斧跡虎, 虎旣食飽臥. 婁伯直前, 叱曰, “汝食吾父, 吾當食汝.” 虎乃掉尾俛伏, 遽斫而刳其腹, 盛虎肉於瓮, 埋川中. 取父骸肉, 安於器, 遂葬弘法山西, 盧墓. 一日假寐, 尙翥來, 詠詩云, “披榛到孝子盧, 情多感淚無窮. 負土日加塜上, 知音明月淸風. 生則養死則守, 誰謂孝無始終.” 詠訖, 遂不見. 服闋, 取虎肉, 盡食之. 登第, 毅宗朝, 累遷起居舍人·國子司業·翰林學士.)-고려사 권121(卷一百二十一) 열전(列傳) 권34(卷第三十四) 효우(孝友)


누백포호(婁伯捕虎)婁伯捕虎【高麗】崔婁伯 水原吏尙翥之子 尙翥獵爲虎所害 婁伯時年十五 欲捕虎 母止之 婁伯曰 父讎可不報乎 卽荷斧跡虎 虎旣食飽食臥 婁伯直前 叱虎曰 汝害吾父 吾當食汝 虎乃掉尾俛伏 遽所而刳其腹 取父骸肉 安於器 納虎肉於甕 埋川中 葬父洪法山西 廬幕 一日假寐 其父來詠詩云 披棒到孝子廬 情多感 淚無窮 負土日加塚上 知音明月淸風 生則養死則守 誰謂孝無始終 詠訖遂不見 服闋 取虎肉盡食之崔父山中獵兎狐 却將肌肉餧於菟 當時不有兒郞孝 誰得揮斤斫虎顱捕虎償寃最可憐 山西廬墓又三年 小詞來誦眞非夢 端爲哀誠徹九泉최누 주001) 은 고려 적 슈원 주002) 아젼 주003) 샹쟈 주004) 의 아이니 샹쟤 주005) 산영다가 주006) 범의게 주007) 해 주008) 배 주009) 되니 이 누의 나히 십오셰라 주010) 범을 잡고져 주011) 거 어미 말린대 주012) 누이 오 아븨 원슈 주013) 엇디 주014) 아니 갑흐리오 주015) 고 즉시 돗긔 주016) 메고 주017) 범의 자최 주018) 오니 주019) 범이 이믜 주020) 다 먹고 불러 주021) 누엇거 주022) 누이 바로 알 라드러 주023) 범을 디저 주024) 오 네 내 아비 해쳐시니 주025) 내 너 먹으리라 주026) 범이 리 주027) 치고 업거 주028) 돗긔로 주029) 어 주030)  주031) 헤티고 주032) 아븨 와 주033) 을 주034) 내여 주035) 그 주036) 담고 범의 고기 항에 주037) 녀허 주038) 믈가온대 주039) 믓고 주040) 아비 홍법산 주041) 셔편에 주042) 장고 녀묘더니 주043)  주044) 을 니 그 아비 와셔 주045) 글을 읇허 주046) 오 가덤블을 주047) 헤티고 주048) 효의 집에 니니 졍이 주049) 늣기미 주050) 만흐매 주051) 눈믈이 무궁도다 주052) 흙을 져셔 주053) 날마다 주054) 무덤애 주055) 더니 주056) 지음은 주057) 명월 쳥풍이로다 주058) 사라셔 봉양고 죽으매 딕희니 주059) 뉘 주060) 닐오  주061) 시죵 주062) 이 업다 주063) 리오 주064) 읇기 주065) 다매 주066) 믄득 뵈디 주067) 아니더라 거상을 매 주068) 범의 고기 내여 다 먹으니라30. 누백포호(婁伯捕虎)【고려(高麗)】 - 누백이 호랑이를 잡다최누백은 고려 적 수원 사람이며, 아전 상자의 아들이다. 상자가 사냥을 하다가 범에게 해침을 당한 바 되니, 이때 최누백의 나이가 십오 세였다. 〈최누백이〉 범을 잡고자 하므로, 어머니가 말리었는데, 최누백이 말하기를, “아버지 원수를 어찌 아니 갚겠습니까?” 하고, 즉시 도끼를 메고, 범의 자취를 따라가니, 범이 이미 〈아버지를〉 다 먹고, 배불러 누웠거늘, 최누백이 바로 〈범의〉 앞으로 달려들어 범을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내 아버지를 해쳤으니, 내가 너를 먹겠다.”라고 하였다. 범이 꼬리를 치고 엎드리므로, 도끼로 〈범을〉 찍어 배를 헤치고, 아버지의 뼈와 살을 내어서 그릇에 담고, 범의 고기를 항아리에 넣어 물 가운데 묻고, 아버지를 홍법산(洪法山) 서편에 장사지내고 여묘하였는데, 하루는 꿈을 꾸니, 그 아버지가 와서 글을 읊어 말하기를, “가시덤불을 헤치고, 효자의 집에 이르니, 정(情)이 느낌이 많으므로, 눈물이 무궁하도다. 흙을 져서 날마다 무덤에 더하니, 지음(知音)은 청풍명월이구나. 살아서 봉양하고, 죽었는데 지키니, 누가 이르되 효(孝)의 시종(始終)이 없다고 하겠는가?” 하고, 읊기를 다하므로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거상을 마친 다음에 범의 고기를 꺼내어 다 먹었다.누백의 아버지 산속에서 토끼 여우 사냥했는데도리어 그의 몸둥이를 호랑이에게 먹히어라.당시에 어린 누백의 효도가 있지 아니하였다면누구라고 도끼를 휘둘러서 호랑이 배 갈랐을까.호랑이를 잡아 원한을 갚으니 참으로 가련해라산의 서쪽에 여막을 짓고 또 삼 년을 지냈는데.아비의 작은 시를 외우나니 정말 꿈이 아니니진실로 슬피 효성을 다하니 구천에 통함이리.
세종한글고전 (sejongkorea.org)

 

  특히 최루백의 효행은 세종대 편찬한 삼강행실도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효자 4인 중 하나로 기록될 정도로 효자의 표상이었다. 때문에 이미 수원, 즉 우리 화성은 전근대시대 효의 고장이었다.

삼강행실도 누백포호


누백포호(婁伯捕虎)
32婁伯捕虎 高麗
翰林學士 崔婁伯 水原 戶長 주001)  아리러니 나히 열다신 저긔 아비 山行 주002) 갯다가 범 믈여늘 가아 자보려 니 어미 말이더니 婁伯이 닐오 아 怨讐를 아니 가리가 고 즉자히 돗귀 주003) 메오 자괴 주004) 바다 가니 버미 마 브르 먹고 누거늘 주005) 바 드러가아 구지주 주006) 네 내 아비 머그니 내 모로매 주007) 너를 머구리라 주008) 야 리 젓고 업데어늘 베텨 주009)  아 주010) 아 콰 와 내야 그르세 담고 버믜 고기란 도 다마 내해 묻고 아비 묻고 侍墓사더니  주011) 흐32ㄴ얫거늘 주012) 아비 와 그를 이푸 주013) 披榛야 到孝子廬호니≪개욤나모 헤오 주014) 孝子廬에 오니≫ 情多感야 淚無窮이로다≪데 感動호미 만야 므리 다 주015) 업도다≫ 負土야 日加塚上니≪ 지여 나날 무덤 우희 올이니≫ 知音은 明月淸風이시니라≪아시닌  와  미시니라≫ 生則養고 死則守니≪사랏거든 이받고 죽거든 디킈니≫ 誰謂孝無始終고≪뉘 닐오 孝道ㅣ 乃終 업다 더뇨≫ 다 입고 믄득 몯 보니라 婁伯이 居喪 고 버믜 고기 다 머그니라Ⓒ 편찬 | 세종(조선) 명찬 / 1481년(성종 12)

32ㄴ翰林學士崔婁伯. 水原戶長尙翥之子. 年十五時. 父因獵爲虎所害. 婁伯欲捕虎. 母止之. 婁伯曰. 父讎可不報乎. 卽荷斧跡虎. 虎旣食飽臥. 婁伯直前叱虎曰. 汝食吾父. 吾當食汝. 虎乃掉尾俛伏. 遽斫而刳其腹. 取父骸肉. 安於器. 納虎肉於瓮. 埋川中. 葬父弘法山西廬墓. 一日假寐. 其父來詠詩云. 披榛到孝子廬. 情多感淚無窮. 負土日加塚上. 知音明月淸風. 生則養死則守. 誰謂孝無始終. 詠訖遂不見. 服闋. 取虎肉盡食之崔父山中獵兎狐. 却將肌肉餧於菟. 當時不有兒郞孝. 誰得揮斤斫虎顱.捕虎償寃最可憐. 山西廬墓又三年. 小詞來誦眞非夢. 端爲哀誠徹九泉Ⓒ 편찬 | 세종(조선) 명찬 / 1434년(세종 16) 11월 25일 반포

누백포호 고려한림학사 최 누백은 수원 호장의 아들인데, 나이 열 다섯인 때 아비가 사냥 갔다가 범에게 물려서 가 잡으려 하니, 어미가 말리니, 누백이 이르되, “아비의 원수를 갚지 않겠습니까?” 하고, 즉시 도끼 메고 자취 밟아 가니 범이 이미 배불리 먹고 누웠기에, 바로 드러가 꾸짖되, “네가 내 아비를 먹었으니 내 반드시 너를 먹겠다.” 하니까, 꼬리 저으며 엎드리니, 베고 배 갈라 아비의 살과 뼈를 내어 그릇에 담고 범의 고기는 독에 담아 내에 묻고 아비 묻고 시묘살이 하더니, 하루는 수잠이 들었는데, 아비가 와서 글을 읊기를, “도효자려(到孝子廬)하니≪개암나무 헤치고 효자 여막에 오니≫ 정다감(情多感)하여 누무궁(淚無窮)이로다.≪뜻에 느꺼움이 많아 눈물이 다함 없도다.≫ 부토(負土)하여 일가총상(日加塚上)하나니≪흙 지어 나날이 무덤 위에 올리니≫ 지음(知音)은 명월청풍(明月淸風)이시니라.≪알아 주시는 이는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이시다.≫ 생칙양(生則養)하고 사칙수(死則守)하니≪살아서는 봉양하고 죽어서는 지키니≫ 수위효무시종(誰謂孝無始終)고≪누가 이르되 효도가 끝이 없다 하던가?≫” 다 읊고는 문득 보이지 않았다. 누백이 거상 마치고 범의 고기를 다 먹었다.Ⓒ 역자 | 김정수 / 2010년 10월 9일
출처 : 세종한글고전 (sejongkorea.org)

  이러한 최루백은 고려시대 부부간의 사랑이 돈독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바로 고려시대 여성으로 이름이 전하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그 부인 염경애와의 사랑이다.


황통(皇統) 6년 병인년(1146, 인종 24) 정월 28일 무술일에 한남(漢南) 최루백(崔婁伯, ?~1205)의 처 봉성현군(峯城縣君) 염씨(廉氏, 1100~1146)가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순천원(順天院)에 빈소를 마련하였다가 2월 임인일에 개경 북쪽 박혈(朴穴)의 서북쪽 산등성이에서 화장하였다. 유골을 봉하여 임시로 도성 동쪽에 있는 청량사(淸凉寺)에 모셔두었다가, 3년이 되는 무진년(의종 2, 1148) 8월 17일에 인효원(因孝院) 동북쪽에 장례 지내니, 아내의 아버지 묘소 곁이다. 루백이 다음과 같이 묘지(墓誌)를 짓는다.
아내의 이름은 경애(瓊愛)로 검교상서 우복야 대부소경(檢校尙書右僕射 大府少卿) 염덕방(廉德方)의 딸이고, 어머니는 의령군대부인(宜寧郡大夫人) 심씨(沈氏)이다. 아내는 25세에 나에게 시집와서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장남은 단인(端仁)이고, 2남은 단의(端義)이고, 3남은 단례(端禮)인데, 모두 학문에 뜻을 두었고, 4남 단지(端智)는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1) 장녀 귀강(貴姜)은 흥위위녹사(興威衛錄事) 최국보(崔國輔)에게 시집갔는데 최씨가 죽자 집에 돌아와 있고, 2녀 순강(順姜)은 아직 어리다.
아내는 사람됨이 아름답고 조심스럽고 정숙하였다. 제법 문자를 알아 대의(大義)에 밝았고 말씨와 용모, 일솜씨와 행동이 남보다 뛰어났다. 출가하기 전에는 부모를 잘 섬겼고, 시집온 뒤에는 아내의 도리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어른의 뜻을 먼저 알아 그 뜻을 받들었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님을 효성으로 봉양하였고, 친척들의 경조사를 힘써 살피니 훌륭하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내가 패주(貝州)와 중원(中原)의 수령으로 나갔을 때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어려움을 꺼리지 않고 함께 천 리 길을 갔으며, 내가 군사(軍事)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동안 가난하고 추운 규방(閨房)을 지키면서 여러 차례 군복을 지어 보내 주었다. 혹은 엄환(閹宦)에 참여하는 동안에는 있는 것 없는 것 다 털어서 음식을 만들어 보내기도 하였으니, 무릇 나를 좇아 어려움을 겪은 23년 간의 일들을 모두 적을 수가 없다.
우리 돌아가신 아버지 2)를 섬기지 못하여 명절이나 복일(伏日)과 납일(臘日)3)이 되면 매번 몸소 제사를 드렸다. 또 일찍이 길쌈하여 이것을 모아서 저고리 한 벌이나 바지 한 벌을 지어 제삿날이 될 때마다 영위(靈位)를 모시는 자리를 마련하고 절한 다음 이것을 바쳤으며, 곧 재에 나아가 무리가 많든 적든 버선을 지어 승려들에게 시주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잊지 못할 일이다.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독서하는 분이니, 다른 일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집안의 의복이나 식량을 주관하는 일을 맡았는데, 비록 여러 번 힘써 구하더라도 맘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때때로 있습니다. 설사 불행하게도 뒷날 내가 천한 목숨을 거두게 되고 그대가 후한 녹봉을 받아 모든 일이 뜻대로 되더라도, 제가 재주 없었다고 하지 마시고 가난을 막던 일은 잊지 말아 주세요”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고는 크게 탄식을 했다.
다음 을축년(인종 23, 1145) 봄에 내가 사직(司直)에서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로 자리를 옮기니, 아내는 얼굴에 기쁜 빛을 띠면서 말하였다. “우리의 가난이 끝나려나 봅니다.” 내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간관(諫官)은 녹봉이나 지키는 자리가 아니오.” 그러자 아내는 “혹시라도 어느 날 그대가 궁전의 섬돌에 서서 천자(天子)와 더불어 옳고 그른 것을 논쟁하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 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아가게 되더라도 또한 달게 여길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평범한 부녀자의 말 같지 않았다. 그 해 9월에 아내는 병이 들었는데 병인년(인종 24, 1146) 정월에 병이 위독하여 세상을 떠나니, 한(恨)이 어떠하였겠는가.
나는 병인년 여름에 우사간(右司諫)에 오르고 12월에는 좌사간(左司諫)으로 옮겼다. 정묘년(의종 1, 1147) 봄에 시어사(侍御史)로 옮겼다가 그 해 겨울에는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로 좌천되었다. 무진년(의종 2, 1148) 봄에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옮겼다가 다시 청주부사(淸州副使)에 임명되었다. 여러 번 벼슬이 오르면서 계속하여 후한 녹을 먹게 되었는데, 집안을 돌아보면 의식(衣食)은 오히려 아내가 어렵게 애써서 구할 때와 같지 못하니 누가 아내를 말하여 재주가 없었다고 하겠는가. 아내가 장차 목숨을 거두려 할 때 나에게 죽은 뒤의 일을 부탁하였고 여러 자식들에게도 유언을 남겼는데, 그 말들이 모두 이치에 닿아 들을 만한 것이 많았다. 세상을 떠날 때 나이가 47세였다.
명(銘)하여 이른다.
믿음으로써 맹세하노니, 그대를 감히 잊지 못하리라.
아직 함께 무덤에 묻히지 못하는 일이 매우 애통하도다.
아들딸들이 기러기처럼 뒤따르니
부귀가 대대로 창성할 것이로다.
(皇統六年丙寅正月二十八日戊戌, 漢南崔婁伯之妻, 峯城縣君廉氏, 卒於里. 第殯于順天院, 二月壬寅, 火櫬于京城北朴穴西北崗. 緘骨權安于京城東淸凉寺, 其三年戊辰八月十七日, 葬於因孝院東北, 君皇考墓之側. 婁伯誌其墓曰.
君諱瓊愛, 檢校尙書右僕射大府少卿廉公德方之女也, 母宜寧郡大夫人沈氏. 君年二十五歸于我, 生六子. 一男曰端仁, 二曰端義, 三曰端禮, 俱志學, 四曰端智, 度爲僧. 一女曰貴姜, 適興威衛錄事崔國輔, 崔氏亡還在室, 二曰順姜, 尙幼.
君爲人玲瓏謹肅. 頗識字, 曉大義, 言容功行出人之右. 未嫁善事父母, 旣嫁克勤婦道, 先意承旨. 孝養吾先夫人, 內外親戚吉凶慶弔, 咸得其情, 人莫不以此多之昔.
我出倅貝州⋅中原, 不憚跋涉偕至千里, 或從軍事, 守因寒閨, 屢寄征衣. 或預閹䆠, 供饋有無, 凡從我于艱難二十三載之事, 不可殫記.
然不及事吾先君, 歲時伏臘, 每躬奠獻. 又嘗親自紡績銖積寸累, 手縫一衣或一褌, 每至諱日, 設靈座拜獻, 仍隨赴齋衆多小, 作襪子幷施于僧, 此最不可忘者.
平日嘗與我言曰, 子以讀書, 不事事爲尙. 吾以主家衣糧爲職, 雖復僶俛求之, 不如意者時或有之. 設或不幸他日, 我殞賤命, 而子饗厚祿動輒稱意, 無以我爲不才, 而忘其禦窮也. 言訖大息.
越乙丑春, 吾自司直傳右正言知制誥, 君喜動於顔曰, 吾貧幾濟矣. 吾應之曰, 諫官非持祿之地. 君曰, 儻一日子立殿陛, 與天子爭是非, 雖荊釵布裙荷畚計活, 亦所甘心. 此似非尋常婦言也. 其年九月, 君疾作, 至丙寅正月疾篤而逝, 何恨如之.
予於丙寅夏傳右司諫, 冬十二月傳左司諫, 丁卯春轉侍御史. 其年冬貶禮部員外. 戊辰春轉禮部郎中, 仍授淸州副使. 累遷官序繼食厚祿, 顧家衣食, 反不如君僶俛求時, 孰謂君爲不才也. 君之將死遺囑於我, 及命諸子, 言皆詣理, 多可聽者. 其死時蓋年四十七.
矣銘曰. 尋信誓不敢忘, 未同穴甚痛傷, 有男女如鴈行, 期富貴世熾昌.)

『역주 고려묘지명집성』 상(김용선 편저,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3), 최루백 처 염경애 묘지명
출처 : 염경애 묘지 < 사료로 본 한국사 (history.go.kr)

  이처럼 많은 이야기의 주인공이지만 그의 무덤은 볼 수 없다. 이는 아마도 고려시대 불교가 융성하던 시기에 태어나서 죽은 인물이라 당시 널리 이루어진 장례풍습인 화장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당시에 널리 행해진 화장으로 이 시기의 묘가 현재까지 전하는 것이 드문이유 중 하나이다. 보통의 시조나 중시조의 묘가 없는 경우가 흔한데 이러한 이유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나 그 이전의 인물의 묘가 전하는 경우는 보통 조선 중후기에 종법이 강화되면서 위선사업을 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곳에는 현재 홍법산 아래 무덤의 자취는 없지만 효자비각과 아버지 최상저의 유허비가 남아 최루백의 자취를 전하고 있다.

  그간 최루백의 명성에 그의 자취를 찾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는데 다행히 근처로 길이 새로이 나면서 쉬이 찾게 되었다. 현재 비각 앞길은 '최루백로'로 지정되어 최루백을 알리고 기린다. 최루백 효자비각 뒤로는 종중에서 위선사업을 크게 일으키다 중단된 듯 종회관 건물이 외관은 다 지어졌는데 내부 공사를 마치지 못한채 남아 있다. 이러한 사정으로 효자비각에 이르는 기존의 길은 앞 마당이 여러 공사장비들이 뒤엉켜 들어가기 어렵고 사적비와 종중회관을 지으면서 새로낸 길이 효자비각 왼쪽으로 길이 났다. 잡목이 우거지고 도통 관리가 되지 않는듯 생각되었으나 이후에 찾아보니 10월 19일부터 공사를 진행하여 효자비각 주변에 대한 정비가 일주일에 걸쳐 완료 된 것을 보니 종중과 화성시에서 크게 정비를 하느라 그런 것으로 생각된다.

  효자비각과 함께 중요한 것은 종중회관 뒤로 최상저의 12세손이 되는 통정대부 사헌부 헌납을 지낸 최수정을 파조로 하는 헌납공파의 무덤이 줄지어 있는 선산이다. 이중 주목되는 인물은 최수정의 후손으로 1789년 이곳에 행차한 정조가 최루백의 후손을 친히 불러 보는데, 이 때 정조를 배알한 인물인 최경(景, 1725~1794)이다. 이 일로 방축동은 효자동으로 바뀌었다. 최경은 무과로 입신하여 70세로 장수하여 정조에게 궤장을 하사받았다. 당상관으로 종2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수원최씨사적비 위선사업을 크게 일으키고 회관과 일대정비 중이었으나 중단되었다.

 

새로난 길 우측으로 효자비각으로 이르는 길로 관리가 잘 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최루백 효자비각
고려효자한림원학사최루백지려
왼쪽은 최루백 효자비각이고 오른쪽 뒤는 최상저 유허비각이다.
원래 효자비각에 이르는 길이다. 하지만 앞마당에 건설장비 등 여러 물건들을 쌓아놓아서 들어가기 어렵다.
최루백의 아버지 최상저의 유허비각
고려양광도수주부호장최공상저유허
최상저의 유허비 뒤 각자는 고려사 열전의 최루백 내용을 적은 것이다.(본문 참조)
공사가 중단된 종중회간
최루백 효자비각 뒷산의 헌납공파 묘역(선산)
헌납공파조 최수정 묘, ,묘 앞 비는 최수정 직계 3대 후손 설단비 '헌납공파이하3세 계단비 호장공12세손 휘수정 장남 통정랑수원최공항 숙인모봉모씨 호장공13ㄷ세손 휘항 장남 선교랑장락원주부수원최공유근 영인여산송씨 호장공14세손 휘 유근 장남 수원최공윤령 유인연안차씨'
'시조호장공십일세손 제2 헌납공파 효안공 휘 성노2남 통정대부사간원헌납 수원최공수정계지묘 숙부인모봉모씨부좌'
세종7년을사 진사16년병진 문과관찰숭록대부행 / 병조판서수원백증익효안공휘성노 / 자혜애친왈효호화부쟁왈안 / 비정경부인순흥안씨 후비정경부인한양조씨 / 장남 수영 참판공 2남 수정 헌납공 / 서연안인관문사
헌납공파조 최수정 묘에서 바라본 서봉산 자락
1789년 정조를 배알하고 최루백의 봉사손으로 고명된 최경의 묘(맨 오른쪽)

 

수원 최씨 호장공 이십일세손

헌납공파()경 자는 (大哉)대재

서기 1725년 을사 226일 화성군 봉담면 수길리 방축동에서 (天擧)천거

의 삼남으로 태어낳으며, 서기 1757년에 무과에 급제하여(都事)도사로 역

임하셨다. 서기 1789(正祖)정조 13년에 륭능설치시 정조대왕이 방축동

現孝子洞 에 이르러 금등 바위(現孝岩)에 좌정하여 문무제신이 입시한 자리

에서 고려조 효자 치학사()에 후손을 부라라 하시매()경 도사공

이 부복하시였으며 그 후 (正祖)정조를 ()예를 다해 모시였다. 해남현감을

봉직하시다. 수직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正二品)정이품으로 오르셨으

, 정조임금께서 특별히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 하시였다. 서기 17942

9일 향년 70세로 돌아가시니 정조대왕이 호조에 영을 내려 장지를 화성군

봉담면 당하리 태봉산 길엽(갓댕이)묘좌로 정하시고장의용품을 내려주셨다.

첫째 정부인 여산송씨 서기 1723년 계모315일 출생하시여, 서기 1755

310일 돌아가셨고, 둘째 정부인 해남윤씨 서기 1730년 경술 97일 출생

하시여, 서기 1773년 계사 1212일 돌아가셨으며 윤씨 소생중 아들 9형제

1녀이며, 그 후손이 수백으로 번성하였다. 서기 1998년 대한민국 80

무인 1014일 경부고속철도 부설로 인하여 조선국 정조대왕이 내리신 사패

지에서 화성군 봉담면 분천리 홍법산 선산아래 자좌지원으로 세 분을 합장하

여 모이였습니다.

서기 1998년 무인 1014

수원최씨 헌납공파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공 후손 종중일동

 

 

10월 중순 새로이 단장된 효자비각 

 

22. 02. 14.

블로그를 통해 후손분께서 연락을 주셔서 다시금 방문하였다. 처음 글을 쓸 때는 공사중이었다. 평소에도 이곳을 자주 지나가기에 이후 공사를 마친 상황도 알아 새로 글을 쓰기 보다는 이처럼 끝에다 새로운 사실을 이었다. 후손분께서는 새롭게 정돈된 최루백 유허지의 모습으로 새로운 글을 원하셨지만 동국효자 최루백 선생의 자취를 찾아 보는 데는 이 글과 후기를 이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에 새롭게 쓰진 않는다. 

보통 유적을 대할 때 잘 꾸며진 것을 선호하지만 글쎄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모습, 낡고 초라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 모습이 더 좋다. 흙바닥이라고 해도 풀 한포기 쓰레기 하나 정성스레 잘 치우고 돌보는 곳이라면 족하다. 아니 넘친다. 옛모습을 지키는 것, 문화재를 지키는 가장 큰 덕목이자 어려움이리라

 

최루백효자비각 동영상

 

 

 

 

 

http://blog.daum.net/ilovepk/33

 

호랑이와 싸운 최루백

호랑이와 싸운 효자 최루백   조선시대 윤리서인「삼강행실도」에는 호랑이와 관련된 인물이 나온다. 바로 수원 최씨 최루백(崔婁伯)의 이야기로 호랑이를 잡아 효도를 다한 이야기이다.   ��

blog.daum.net

 

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992686

 

중앙귀족의 표본家...고려전기 3대 명문 최씨가문 '수주최씨'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

경기도가 본관인 성씨 인물-수주최씨이재범 경기대교수수주최씨는 수원최씨라고도 하는데, 그 연원은 수주지역의 지명과 지역의 변천에서 유래한다. 수주최씨는 경주최씨, 해주최씨와 함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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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백 효자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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