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장준하통일관

달이선생 2021. 1. 28. 23:27

 

재야의 빛 장준하는 한신의 큰 어른이다. 늦었지만 한신대에 그의 자취가 남겨진 것에 감사한다. 2002년 한신대 60주년을 기념해서 건립한 강의동을 '장준하통일관'으로 새롭게 명명했다. 그리고 그 로비를 '장준하기념홀'로 단장하고 건물 가운데 한 귀퉁이에 '장준하 돌베개공원'을 마련하였다. 일제의 학병을 참전하였다가 도망하여 충칭 김구를 찾아가 한국광복군이 되고 해방된 조국에서 민주화를 부르짖다 산화한 장준하 선생이다. 그를 기억하는 이정표가 한신대학교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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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역사는 영웅전이 아니다 - 미주중앙일보 (koreadaily.com)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역사는 영웅전이 아니다

━ 5·16 군사정변 60년, 다시 박정희를 생각하다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는 인물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활동했던 시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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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역사는 영웅전이 아니다

 

[한국 중앙일보] 입력 2021/05/12 08:59 수정 2021/05/12 15:36

영웅전은 무소불위·무오류로 묘사
반일주의 박정희, 한·일협정 체결
미 대한정책 비판하다 베트남 파병
현대사 인물들, 한 단어 규정 불가능

5·16 군사정변 60년, 다시 박정희를 생각하다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는 인물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활동했던 시대를 넘어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을 분석하는 것은 그 시대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이 계속되고 있는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인물에는 관심이 많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역사학자에게 돌아오는 질문 중 하나가 역사적 인물을 한마디로 평가해 달라는 것이다.

특정 인물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그와 다른 행동이나 주장이 나타날 때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역사적 인물도 인간이기에 자신의 철학과 삶에서 변화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한국사회처럼 식민지로부터 분단과 전쟁, 냉전과 탈냉전, 그리고 민주화 등 상전벽해를 겪었던 시기의 지도자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애를 통해 극적 반전을 보여준 박정희

대표적인 예가 박정희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경제성장의 지도자나 인권을 유린한 독재자 중 하나로 규정해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박정희의 삶 전체를 흑묘 백묘를 가리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다. 수많은 변화와 극적인 반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만주국의 군관학교를 나오고 일본제국의 장교로 복무했다. 그리고 1944년부터 1945년까지 1년간의 활동은 아직도 밝혀진 것이 없다. 정치적으로 극우에 해당된다. 이로 인해 그는 끊임없이 친일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 그가 1949년 극좌정당 남조선노동당의 군내 세포 책임자로 체포되었다.

박정희는 군내 공산주의자 거물 중 유일하게 사형을 면하고 사면되었다. 그런 그가 10년 후 군사정변을 주도했다. 일부 지식인들은 군사정부가 비동맹 사회주의적 길을 걸을 것이라 착각하기도 했다.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1972년에는 무혈 정변을 통해 유신체제라는 전체주의 국가를 탄생시켰다. 군국주의와 공산주의의 교집합인 전체주의를 선택한 것인가?

박정희의 글과 연설 속에서도 극적인 전환을 만날 수 있다. 군사정변 직후 출간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박정희는 미국의 대한 원조 정책에 비판적 입장을 나타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군사정부 시기 ‘지도받는 자본주의’에 기초한 경제개발계획이나 통화개혁을 통해서 정책화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곧 수정되었다.

경제개발계획은 1964년 수정되었다. 또한 박정희는 취임 직후부터 미국의 대한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한국 정부에 가장 바라고 있었던 한·일협정에 마침표를 찍은 것도 박정희였으며, 영국이나 프랑스도 파병하지 않았던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보내는 결정을 한 것도 그였다. 그러나 1970년대 코리아게이트와 인권 및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 박정희 정부와 미국 정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남북관계에서의 반전

극적인 반전은 남북관계에서도 나타났다. 1967년 비무장지대에서 남북 간의 교전 회수는 400회에 달했다. 그리고 1968년 청와대 습격사건, 푸에블로호 사건과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이 발생했다. 1969년에는 미국의 EC 121기가 북한에 의해 격추되었으며, 대한항공기가 북한에 납북되었다. 북한은 한국의 베트남 추가 파병을 막고자 했다. 북한의 도발에 대해 박정희 정부는 적극적 보복으로 맞섰고, 주한유엔군사령관은 더 이상의 보복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한 보복 공격을 막기 위하여 1968년 미국의 대통령 특사가 청와대를 방문했다.

그런데 1970년 8·15 선언을 통해 박정희는 북한과 대화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적십자 회담이 시작되었고, 1972년에는 7·4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1973년에는 6·23 선언을 발표하여 남과 북이 각각 국제기구에 가입할 수 있다고 선언했지만, 1976년 북한군이 주한미군 장교 2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극적인 반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1961년 미국을 방문할 때 일본에 들러서 군관학교 시절의 은사들을 만났고, 굴욕외교라는 비판 속에서도 한·일협정을 밀어붙였던 박정희는 정치적으로 반일주의자였다. 그는 재일교포가 더 많아야 일본이 우리의 식민지가 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고, 한국의 경제정책이 일본의 원조와 조응해야 한다는 일본 대표단의 요청을 거절하기도 했다. 1970년대 김대중 납치사건과 문세광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한·일관계는 국교 단절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다.

물론 이상과 같은 변화와 극적인 반전들을 시대적 상황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단지 상황에 따른 변화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극적인 반전이기에 과연 박정희 정부 시기 대외정책의 기본 원칙이 무엇인지를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성장 정책의 변화와 한계

정책의 변화는 기업에 대한 정책에서도 나타났다. 어쩌면 변화라기보다는 약속 위반이었다. 1960년대 말 부실 기업 문제가 심각해졌을 때 박정희는 8·3 조치를 선언하면서 부동산 투기와 위장사채에 몰두한 기업가들의 부도덕을 질타하였다. 더 이상의 관용은 없다고 못 박았지만, 대기업은 재벌이 되었고, 정경유착은 더 심각해졌다. 살아난 재벌들은 중화학공업화를 위한 정부의 보조금이 늘어나고, 중동에서 오일달러가 들어오자 다시 한번 땅 투기를 시작했고,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부정부패가 시작되었다.

무리한 중화학공업화의 추진과 재벌의 투기는 1979년의 경제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지만, 박정희 정부는 8·3 조치 때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979년 4월 성장 위주의 정책을 중단하는 경제안정화 종합시책을 발표하였지만, 당시의 경제위기는 석유파동의 후유증으로 치부되어 10·26 이전에 실행되지 못했고, 결국 1980년의 경제위기를 야기하였다. 미국이 1980년부터 한·미 정례회의를 통해 한국의 산업 구조조정을 중요한 안건의 하나로 제시할 정도로 중화학공업화로 인한 부작용은 심각한 것이었다.

베트남 파병문제는 또 다른 반전을 보여준다. 처음 파병을 결정할 때의 원인은 ‘돈’이 아니라 한·미동맹에 대한 고려와 함께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감축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파병이 전쟁특수와 연결되면서 애초의 목적보다는 돈에 더 치중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닉슨 행정부에서 미군이 철수함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은 마지막까지 베트남 전선에 남게 되었고, 1972년 베트남에 있는 한국군의 수는 미군의 수보다 더 많았다.

미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한국군은 안캐패스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베트남에 남거나, 태국이나 캄보디아에 계속 주둔하겠다는 견해를 미국 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마지막까지 베트남으로부터의 철수 계획이 없다고 했지만, 결국 1973년 초 미군과 함께 철수하였다.

박정희만 변화무쌍했던 게 아니다

영화 ‘사도’에서 영조가 보여주었던 것과 같이 이러한 반전의 원인이 친일과 공산주의라는 중요한 경력에 대한 콤플렉스로 나타났을 것이라고 심리학적 추론도 가능하다. 그렇다고 역사학자가 심리학의 영역을 침범할 수는 없다.

거대한 반전을 보여준 지도자는 박정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반탁운동을 주도하다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김구도 그랬고,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장관을 했고, 결국은 북한의 간첩 혐의로 처형된 조봉암도 그랬다.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살았던 그 누구도 하나의 단어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한 단어로의 합리화는 자신이 애정을 갖고 있는 역사적 인물의 철학과 생각을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역사는 영웅전이 아니다. 영웅전은 대상 인물을 무소불위의, 그리고 무오류의 사람으로 묘사한다. 전체주의 체제 하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이 인간계가 아닌 신계에 있는 그런 존재였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 보여주는 극적인 반전이 있기에 오늘도 역사학자들은 지속적으로 그 인물들에 대해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이러려고 혁명을 했습니까?”라고 반문했던 김재규의 말이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5·16 군사정변 60년을 앞둔 오늘, 박정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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