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 6

활빈교회 석학 초청 사경회 차정식 교수

1974년 5월 24일 우여곡절 끝에 남양만 방조제가 완공되었다. 박정희 정부가 야심차게 시작한 최초의 외국 차관을 도입하여 시행한 간척사업으로 아산만 방조제와 동시에 완공한 것이다. 이렇게 '남양황라'라 불리는 대규모 평야인 남양만 간척지가 생겨나는 순간이다. 남양만 간척지는 화성지역에서 경제적 변화는 당연하고 인문지리적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당시 1979년 화성군 우정면 (현 화성시 우정읍) 화산리 봉화산(조선시대 연변봉수 흥천산 봉수) 아래 서울 청계천에 밀려나온 사람들이 들어온다. 바로 두레마을의 시작이었다. 마을 중심에는 활빈교회가 청계천에서 옮겨왔다. 감리교회인 독정제일감리교회를 다닐 무렵 크리스마스인지 또는 여름방학인지 기억이 가물하지만 확실한 것은 당시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빨간벽..

철도박물관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상징 철도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1894년 6월 8일 의정부 공무아문 철도국이 설치되고 1899년 9월 최초로 경인선이 개통하였다. 철도박물관은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1935년 10월 1일 용산에 개관하였다. 경기도 의왕시 부곡의 지금 자리에는 1988년 1월 26일 국립철도박물관으로 신축 개관하였다. 용산의 서울역관이 2004년 2월 18일 폐관 통합되고 현재 한국철도공사에서 운영하고 있다.

서대문 경교장

1945년 11월 4일 개인자격으로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 요인들이 귀국하였다. 8.15해방이 되고도 3달이 넘어 벌어진 일이다. 38선 이남의 어떠한 정부도 인정할 수 없다는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의 조치 이후 벌어진 우리 역사의 비극이었다. 이때 친일부역자로 임정의 후광으로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했던 금광업자 최창학이 자신의 별장 죽첨장을 임시정부 청사로 제공한다. 바로 임정 주석 김구 선생이 1949년 분단주의자 안두희의 총탄으로 서거하기까지 머물렀던 '서대문 경교장'이다.https://blog.naver.com/leelove97/223561419739 민족의 사랑 『백범일지(白凡逸志)』1949년 6월 26일 낮, 12시 36분. 경교장에서 여러 발의 총탄소리가 들린다. 향년..

경복궁

'하늘이 내린 큰 복''경복(景福)'이다.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창하고 한양 천도를 하면서 지은 최초의 궁궐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곳이나 조선의 영화보다는 역사의 비운이 점철된 곳이다. 2024년 8월 22일, 처서 경복궁을 간다. ​"궁원(宮苑)의 제도는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힘들게 하고 재물을 잃는다. 너무 누추하면 조정의 존엄을 보일 수 없다.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아름다우나 사치스럽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미(美)이다. 검소한 것은 덕과 같고, 사치스러운 것은 악(惡) 중에서도 큰 것이다. 사치스러운 것보다는 검소한 것이 낫다.(宮苑之制, 侈則必至勞民傷財. 陋則無以示尊嚴於朝廷也. 儉而不至於陋, 麗而不至於侈, 斯爲美矣. 然儉 德之共也, 侈 惡之大也. 與其侈也 寧儉.)"..

고려대학교 둘, 박물관

구한말 민씨 척족에 붙어 승승장구하였으나 민족교육을 일군 이용익, 고려대학교의 출발이다. 이용익은 고려대의 전신 보성전문학교를 1905년 세웠다. ‘보성(普成)’은 고종이 지어준 이름으로 ‘널리 이룬다’라는 뜻이다. 이용익은 이후 국운이 기울자 러시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암살된다. 우리나라 최초 사립대학인 보성전문학교를 다시 일군 것은 동학의 제3교조이저 천도교를 개창한 의암 손병희다. 3.1운동을 일으키는 중심에 있었고 민족대표 33인이다. 일제강점기는 학교 든, 기업이든 조선인이 소유한 것은 운영이 어려웠다.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던 보성전문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명망 있는 민족기업가 인촌 김성수가 주변의 강권으로 나선다. 인촌은 호남의 대지주로 일제의 미곡 정책에 따라 성장한 식민..

고려대학교 하나, 민족 고대

"순간이고 찰라이다"​구한말 민씨 척족에 붙어 승승장구하였으나 민족교육을 일군 이용익, 고려대학교의 출발이다. 이용익은 고려대의 전신 보성전문학교를 1905년 세웠다. ‘보성(普成)’은 고종이 지어준 이름으로 ‘널리 이룬다’라는 뜻이다. 이용익은 이후 국운이 기울자 러시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암살된다. 우리나라 최초 사립대학인 보성전문학교를 다시 일군 것은 동학의 제3교조이저 천도교를 개창한 의암 손병희다. 3.1운동을 일으키는 중심에 있었고 민족대표 33인이다. 일제강점기는 학교 든, 기업이든 조선인이 소유한 것은 운영이 어려웠다.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던 보성전문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명망 있는 민족기업가 인촌 김성수가 주변의 강권으로 나선다. 인촌은 호남의 대지주로 일제의 미곡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