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경복궁

달이선생 2024. 8. 27. 10:13

'하늘이 내린 큰 복'

'경복(景福)'이다.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창하고 한양 천도를 하면서 지은 최초의 궁궐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곳이나 조선의 영화보다는 역사의 비운이 점철된 곳이다. 2024년 8월 22일, 처서 경복궁을 간다.

"궁원(宮苑)의 제도는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힘들게 하고 재물을 잃는다. 너무 누추하면 조정의 존엄을 보일 수 없다.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아름다우나 사치스럽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미(美)이다. 검소한 것은 덕과 같고, 사치스러운 것은 악(惡) 중에서도 큰 것이다. 사치스러운 것보다는 검소한 것이 낫다.(宮苑之制, 侈則必至勞民傷財. 陋則無以示尊嚴於朝廷也. 儉而不至於陋, 麗而不至於侈, 斯爲美矣. 然儉 德之共也, 侈 惡之大也. 與其侈也 寧儉.)"-'조선경국전' 궁원, 정도전

조선을 만든 정도전은 조선의 궁궐을 지으면서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를 참고하여 궁궐에 대한 의미를 밝혔다. 이러한 의미는 현대 한국의 전통 미학, 한국의 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경복궁에는 중국 주례에 입각하여 좌묘우사, 전조후시, 삼문삼조와 같은 형식에 입각하여 정형화된 건축적 특징을 보이고 엄숙하고 근엄한 궁궐을 이룬다. 그럼에도 그 속에는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하지 않은 경복궁의 디테일이 존재한다. 이미 문화유산답사가 유홍준 교수를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로 해치와 서수, 돌난간을 통해 복원된 월대를 시작으로 영재교 천록, 근정전 안뜰의 박석, 태종이 한양 환도와 함께 야심 차게 축조한 너른 경회지를 배경으로 300평의 웅장한 경회루, 교태전 아미산 굴뚝(경회 지 판 흙을 쌓아 조성된 후원), 자경전 십장생 굴뚝, 후원인 향원정에 이르기까지 우리 궁궐의 맛 깔라는 멋들어짐이 넘쳐난다.

그리고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공간이니 만큼 조선이 번영하고 민족문화가 정립, 발전한 중심에 경복궁이 있었다. 바로 세종대왕의 치세가 이 경복궁 시기였고 특히 현재 경회루 남쪽 수정전은 당시 학문의 중심이었던 집현전 자리다.

경복궁은 조선의 흥망성쇠를 한 몸으로 겪은 궁궐이라서 그러한 역사적 흔적도 곳곳에 보인다. 이미 궁궐 전체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이고 이를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재건한 것이다. 조선의 법궁이지만 전후 소실된 채 오랫동안 온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법궁의 자리를 창덕궁에 내주었다. 따라서 흥선대원군은 1866년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당백전을 발행하면서까지 무리하면서 재건에 앞장선다. 그래도 당초 근정전이 1측 누각이었으나 2층 누각으로 웅장하고 번듯하게 조성한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 자신의 정통성과 정치성을 상징하는 자경전을 지어 대왕대비에게 바쳤다. 대왕대비는 고종을 택군한 당사자이자 헌종의 어머니, 효명세자비 신정왕후이다. 자경전을 지을 때 흥선대원군이 얼마나 각별히 신경을 썼는지 현재도 궁궐 건축의 백미를 일컬어지는 걸작이 있는데, 바로 보물로 지정된 자경전 십장생 굴뚝, 그것이다.

조선의 국운이 쇠한 나머지 경복궁에는 이러한 사실도 드러나는데, 먼저 10여 년에 걸친 조선 왕조 왕권 강화책의 소산인 경복궁 재건이 끝나고 때마침 고종 친정이 되면서 이 경복궁 체제를 벗어난 양반가옥을 모채로 한 건청궁을 만든 것이다. 대외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정치와의 결별을 궁궐로 표현한 것이고 실제로 고종이 경복궁에 머물면서 중전 민씨(명성황후 추존)와 기거한 곳이다. 결국 민씨는 곤녕합에서 일제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어 불태워졌다. 또한 건청궁 옆 집옥재는 외관의 모습이 전형적인 청나라 건축양식을 따르는 건물임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당연히 외세, 즉 청나라에 의존했던 고종과 중전 민씨의 처지를 보여줬던 대표적인 건물이다. 1882년 임오군란에서 구식 군인을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자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고 1894년에는 삼남지방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 당시 백성을 진압하고자 또한 청나라를 끌어들이고 만다. 결국 청나라는 일본과의 조약(갑신정변으로 체결한 톈진조약)으로 진주한 일제와 청일전쟁을 벌여 패배하고 조선은 사실상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듬해 러시아를 끌어들인 중전 민씨가 큰 화를 입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을미사변)

1910년 일제 식민지가 된 경복궁은 더 이상 조선의 법궁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철저한 조선 식민지의 탄압에 상징이 될 뿐이었다. 광화문이 헐리고 그 자리에 서양식 석조 거대한 건축물인 조선총독부가 들어섰고 수많은 전각이 헐린다. 더욱이 일제뿐 아닌 민간 문화재 약탈꾼(오쿠라 기하치로)에게도 수모를 당하며 문종과 단종의 애사가 깃든 동궁 자선당이 통째로 뜯겨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조선관이란 이름으로 도쿄로 이건 된 자선당은 간토대진재로 불타고 그나마 석축 등의 존재가 알려져 1995년 이들 부재만이라도 돌아올 수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YlaJMK8PdU&t=55s

 

우리 궁궐은 빼곡한 집들의 집합소이다. 아직도 곳곳이 공터로 남아 공원 아닌 공원이 되고 있는데, 앞으로 복원이 잘 되어 예전 궁궐의 모습을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무더운 날씨 단비와 같은 곳은 경복궁 곳곳에 있지만 특히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면 노트르담대성당 증강현실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문화유산을 보여주는 시공간을 초월한 전시로 특별하다. 노트르담대성당은 특히 중세 고딕건축물의 대명사이자 역사적으로는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이 열렸던 장소로 단명한 보나파르트 황조의 서막을 알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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