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고려대학교 둘, 박물관

달이선생 2024. 8. 15. 13:29

구한말 민씨 척족에 붙어 승승장구하였으나 민족교육을 일군 이용익, 고려대학교의 출발이다. 이용익은 고려대의 전신 보성전문학교를 1905년 세웠다. ‘보성(普成)’은 고종이 지어준 이름으로 ‘널리 이룬다’라는 뜻이다. 이용익은 이후 국운이 기울자 러시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암살된다.

우리나라 최초 사립대학인 보성전문학교를 다시 일군 것은 동학의 제3교조이저 천도교를 개창한 의암 손병희다. 3.1운동을 일으키는 중심에 있었고 민족대표 33인이다.

일제강점기는 학교 든, 기업이든 조선인이 소유한 것은 운영이 어려웠다.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던 보성전문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명망 있는 민족기업가 인촌 김성수가 주변의 강권으로 나선다. 인촌은 호남의 대지주로 일제의 미곡 정책에 따라 성장한 식민지 지주(소작제)로 큰 부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기업과 민족언론인 동아일보를 일군 사람이다.

분명한 사실은 인촌은 일제 하 명과 암, 즉 빛과 그림자가 분명한 사람이다. 일제의 전시동원체제에서 일제의 선전선동에 적극 협조하였던 그이고 이러한 사실과 기록은 고려대 어디에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학문의 전당이자 민족 고대이기에 이는 냉철하게 비판되어야 한다. 해방 후 우리나라의 국명의 타당함이 ‘고려’에 있다는 선점으로 경성제대(서울대)에 앞서서 개명했던 선각자이나 분명한 사실은 그는 반민족 행위를 했다는 사실이다. 감추지 말고 드러내야 한다. 그게 지성이다. 여담이지만 그의 동생 김연수는 만주로 진출한 대표적인 친일 기업가이다.(경성방직, 삼양)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고려대는 ‘4.18’이라 기념하며 4.19혁명의 중심에서 역사를 이끌었던 한국 민주화의 전당이었다. 정문 앞 ‘4.18 선언’ 동판이 말해주듯 ‘민족 고대’는 흘러간 또는 불온한 운동권의 때 지난 구호가 아니다. 고대의 영원한 스승 조지훈(시인)은 교수로 있으면서 제자들이 4.19에 당당히 일어섰는데 바로 나서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하며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를 남겼는데 문과대에서 인촌기념관으로 가는 언덕길 한편에 ‘조지훈 시비’에 적혀있다.

이러한 민족 고대가 그러나 현재 그 전통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시비도 그리 찾는 사람이 드물고, 물론 고대 곳곳에 청소노동자의 노동 권익 쟁취를 위한 연대의 모습도 보이나 ‘고대신문’ 학보에 ‘고대 괴담’ 시리즈로 문과대 입구의 의암 손병희 흉상을 두고 무서움과 흉물로 치부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100주년 전시실에 ‘확인된 민의에 순응하라!’(1987.6.19. 고려대학교 교수들-)라는 글씨가 말해주듯 민족 고대라는 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민주광장의 김두황 열사 추모비(80년대 운동권 학생 강제징집 희생자), 민주광장 강사 투쟁 기림판 등 민족 고대의 빛나는 사회변혁을 위한 투쟁사가 잊혀지지 않길 바란다.

세상이 변한들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불의에 맞서고 정의에 몸 사르는 용기, 민족 고대이다. 사학명문으로 SKY이 안주하면 언제나 서울대 다음이다. 그러나 기억하자 실천 지성에선 민족 고대는 언제나 일류였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 학생회관을 들어선다. 정말 낡았다. 학생회 관계자가 아닌 이상 학생들이 잘 안 찾는 듯 누추하고 벽면에는 때 지난 벽화인 김연아(체육교육학과 09학번)가 그려져있다. 그러나 이곳은 1980년대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에 맞섰던 고대인의 피땀이 서린 곳이다. 또한 이곳은 영원한 고대 총장 김준엽이 1983년 학내 점거 시위 당시 500 학우를 교문 밖에서 같이 밤을 지세며 학생 안부를 챙기며 연대했던 고대의 치열하나 따뜻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사사건건 전두환 정권에 부닥치며 학생의 총장이었던 김준엽은 ‘장정’으로 알려진 일군 탈출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에 참여한 독립지사로 이때 재야의 대통령 장준하와 같이 뜨거운 우정을 나누고 평생의 동지가 된다. 이후 장준하는 ‘사상계’와 정치 참여를 통해 민주화 운동에 적극 나서다 결국 비운으로 졌으나 김준엽은 정치권의 끊임없는 요구에도 아랑곳 않고 총리 임명마저 뿌리치며 고려대에 남은 학자였다. 생전 “총리보다 높은 자리가 고대 총장자리다”라던 그의 기개가 엿보이는 일화는 유명하다.

 

삼성의 후원으로 지어진 100년 기념관은 이름도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삼성관이다. 이곳에 고대 100년 전시실, 박물관이 있다. 1층에 고대 100년 사를 함축적으로 전시를 하고 이어 2층 3층 4층으로 100년사 전시실을 비롯한 역사민속전시실 등 여러 전시실이 위치하며 고대가 소유한 국보 제249호 ‘동궐도’(1824)며 보물 제853호 ‘수선전도 목판’(1840) 등 격조 높은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이 밖에도 개항의 주인공 대신 신헌의 초상화와 민영환의 유품 등 대학 박물관치곤 여느 박물관 못지않은 대단한 유물과 전시이다.

박물관 주변에는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이곳이 박물관이라고 하듯 각종 문인석, 동자석 등 묘제 석물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묘제 석물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 전통 무덤에 치장하는 석조 모형물인데 근래 우리 장례 문화가 대부분 화장으로 바뀌면서 무덤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오래전 모신 묘와 선산조차 지키지 않으면서 이들 석물들이 갈 곳을 잃게 되었다. 결국 전국에 많은 박물관들이 여기 고려대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를 위한 장식품이 산 자의 문화 공간을 꾸미고 있는 웃픈 현실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구제발굴로 옮겨온 지석묘, 부처 사리를 모신 석탑, 아기 태를 모신 태함(국보 제177호 분청사기인화문태호 출토품-본 박물관 고미술 전시실)까지 이곳은 ‘삶과 죽음이 한 가지다’라는 철학적 명제의 상징 아닌 상징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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