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고려대학교 하나, 민족 고대

달이선생 2024. 8. 15. 12:48

"순간이고 찰라이다"

구한말 민씨 척족에 붙어 승승장구하였으나 민족교육을 일군 이용익, 고려대학교의 출발이다. 이용익은 고려대의 전신 보성전문학교를 1905년 세웠다. ‘보성(普成)’은 고종이 지어준 이름으로 ‘널리 이룬다’라는 뜻이다. 이용익은 이후 국운이 기울자 러시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암살된다.

우리나라 최초 사립대학인 보성전문학교를 다시 일군 것은 동학의 제3교조이저 천도교를 개창한 의암 손병희다. 3.1운동을 일으키는 중심에 있었고 민족대표 33인이다.

일제강점기는 학교 든, 기업이든 조선인이 소유한 것은 운영이 어려웠다.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던 보성전문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명망 있는 민족기업가 인촌 김성수가 주변의 강권으로 나선다. 인촌은 호남의 대지주로 일제의 미곡 정책에 따라 성장한 식민지 지주(소작제)로 큰 부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기업과 민족언론인 동아일보를 일군 사람이다.

분명한 사실은 인촌은 일제 하 명과 암, 즉 빛과 그림자가 분명한 사람이다. 일제의 전시동원체제에서 일제의 선전선동에 적극 협조하였던 그이고 이러한 사실과 기록은 고려대 어디에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학문의 전당이자 민족 고대이기에 이는 냉철하게 비판되어야 한다. 해방 후 우리나라의 국명의 타당함이 ‘고려’에 있다는 선점으로 경성제대(서울대)에 앞서서 개명했던 선각자이나 분명한 사실은 그는 반민족 행위를 했다는 사실이다. 감추지 말고 드러내야 한다. 그게 지성이다. 여담이지만 그의 동생 김연수는 만주로 진출한 대표적인 친일 기업가이다.(경성방직, 삼양)

 

고려대학교는 경기도교육청 1급 정교사 자격 연수로 찾게 되었다.(고려대학교 사범대 부설 교육연수원 운초우선교육관, 8.6~14) 늦깍이로 연수를 받으니 고마운 발길도 이어졌다. 복규샘, 동숙샘께서 찾아주시고 혜진샘, 성현샘, 정행샘, 은혜샘의 격려까지..

예전에는 ‘민족 고대’로 불리며 학풍이 민족적이고 합리적인 날선 비판이 서린 학자의 꼿꼿함을 본다. 강의에 나선 정호섭, 권내현, 홍용진 교수 등의 강의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머리가 트이는 경험이다.

고구려사 전공인 정호섭 교수는 역사의 이해를 강조하며 우리 역사 교과서의 민족적 서사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천리장성의 불분명함과 우리 철기시대 지도에서 사라진 낙랑, 그리고 한반도에는 무엇이든 표시해야 하는 백두산과 독도 등을 들어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성도 역대 왕조 개창자의 출신을 들어 밝혔다. 또한 흥미로웠던 사실은 안시성이 알려진 거와 달리 석성이 아닌 토성이라는 사실, 성주는 양만춘이 아니다. 그리고 동북공정 대응을 위해 중국 현지 조사로 안내판의 왜곡을 바로 잡도록 하였으나 중국 당국이 아예 없애 버리는 통에 그마저 있던 우리의 기록이 없어지니 이게 맞나라고 역설했다.

권내현 교수는 역사 인식이 중요하며 특히 조선 시대 노비의 현황을 통해서 조선 후기 노비가 감소하고 호구단자에 ‘유학’이 대거 등장하면서 신분제 사회가 동요했지만 유학이 양반 신분으로 상승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결국 노비의 해방과 유학의 증가는 조선 후기 수취 제도의 변화에 따라 부세 면탈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항상 조선 후기 양반의 증가에 대해서 의문이었는데 이런 사실 현현황에 대한 과도한 해석의 오류가 있었다.

홍용진 교수는 재정군사국가의 실체를 절대주의와 동일시하지만 절대주의는 그 포함 범주에 불과하며 재정군사국가 즉 근대국가의 태동에 대한 올바른 이해, 나아가 1950년대 일본이 정립한 세계사적 교육과 시각을 탈피함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역사의 맥락과 개념 이해를 강조하였다. 사실 프랑스의 절대군주는 사실과 부합하나 영국만 보더라도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 등을 이야기하지만 이들 군주는 후에 찰스 1세와 달리 의회와 함께했던 군주로 의회를 배제하고 군주권을 강화했던 절대주의와 논리적 모순된다고 밝혔다. 이밖에도 중국사 조영헌(벌거벗은 세계사 등 대중강연으로 유명), 일본사 정순일, 한국근현대사 한승훈, 서양근현대사 김동혁 교수 등 주옥 같은 강의가 있었다.

 

"자유로울 수 없음에 자유를 꿈꾼다"

 

100주년 기념관 뒷편 길은 '자유로'라고 되어 있다. '자유', '자유'를 외치는 자 자유롭지 않다라는 이야기가 있듯 사람들은 늘 자유를 갈망한다. 현 정부의 그분도 대통령 유세부터해서 지금까지도 한결 같이 외치는 것이 자유다. 모르겠다. 일단 고대에서 만난 자유는 고대 역사 속에서의 이정표다. 하여간 자유로에 들어서서 가다보면 그 길 옆에 학교의 상징 호상(호랑이)이 있다. 이렇듯 고려대에는 호랑이를 표현한 것이 등굣길인 고려대역 1번 출구 계단의 호석을 시작으로 100주년 기념 삼성관 입구 계단 소맷돌도 호석, 심지어 우수관 뚜껑도 호랑이 문양 등 곳곳이 호랑이다. 그리고 고려대의 학교 건물을 보면 보성학교 시절 근대 건축물의 영감을 얻었는지 현재도 많은 기증자들의 후원으로 지어진 현대 건축물에도 석조미의 특징이 이어지고 있다. 디테일, 디테일이다.

이런 고대 대학 건물 가운데 흰색에 유독 허름하고 웅장한 건축물이 붉은 벽돌 바닥의 민주광장 끝에 우뚝 서있다. 바로 민족 고대의 실천 지성, 민주 투쟁의 요람이었던 학생회관이다. 개발 독재시기를 대변하는 전형적인 건축이다. 시맨트 철근으로 육중하고 웅장한 모습 수원 구 경기도청이 유명하고 지방 관공서나 대학들에 많이 볼 수 있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 학생회관을 들어선더. 정말 낡았다. 학생회 관계자가 아닌 이상 학생들이 잘 안 찾는 듯 누추하고 벽면에는 때 지난 벽화인 김연아(체육교육학과 09학번)가 그려져있다. 그러나 이곳은 1980년대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에 맞섰던 고대인의 피땀이 서린 곳이다. 또한 이곳은 영원한 고대 총장 김준엽이 1983년 학내 점거 시위 당시 500 학우를 교문 밖에서 같이 밤을 지세며 학생 안부를 챙기며 연대했던 고대의 치열하나 따뜻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사사건건 전두환 정권에 부닥치며 학생의 총장이었던 김준엽은 ‘장정’으로 알려진 일군 탈출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에 참여한 독립지사로 이때 재야의 대통령 장준하와 같이 뜨거운 우정을 나누고 평생의 동지가 된다. 이후 장준하는 ‘사상계’와 정치 참여를 통해 민주화 운동에 적극 나서다 결국 비운으로 졌으나 김준엽은 정치권의 끊임없는 요구에도 아랑곳 않고 총리 임명마저 뿌리치며 고려대에 남은 학자였다. 생전 “총리보다 높은 자리가 고대 총장자리다”라던 그의 기개가 엿보이는 일화는 유명하다.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고려대는 ‘4.18’이라 기념하며 4.19혁명의 중심에서 역사를 이끌었던 한국 민주화의 전당이었다. 정문 앞 ‘4.18 선언’ 동판이 말해주듯 ‘민족 고대’는 흘러간 또는 불온한 운동권의 때 지난 구호가 아니다. 고대의 영원한 스승 조지훈(시인)은 교수로 있으면서 제자들이 4.19에 당당히 일어섰는데 바로 나서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하며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를 남겼는데 문과대에서 인촌기념관으로 가는 언덕길 한편에 ‘조지훈 시비’에 적혀있다.

이러한 민족 고대가 그러나 현재 그 전통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시비도 그리 찾는 사람이 드물고, 물론 고대 곳곳에 청소노동자의 노동 권익 쟁취를 위한 연대의 모습도 보이나 ‘고대신문’ 학보에 ‘고대 괴담’ 시리즈로 문과대 입구의 의암 손병희 흉상을 두고 무서움과 흉물로 치부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100주년 전시실에 ‘확인된 민의에 순응하라!’(1987.6.19. 고려대학교 교수들-)라는 글씨가 말해주듯 민족 고대라는 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민주광장의 김두황 열사 추모비(80년대 운동권 학생 강제징집 희생자), 민주광장 강사 투쟁 기림판 등 민족 고대의 빛나는 사회변혁을 위한 투쟁사가 잊혀지지 않길 바란다.

학부시절 민족주의자로 기독교 민중신학을 신념으로 강단에서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일깨워 주신 역사학자 서굉일 교수님도 민족 고대였다. 내 마음 속 고대는 이런 곳이다. 세상이 변한들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불의에 맞서고 정의에 몸 사르는 용기, 민족 고대이다. 사학명문으로 SKY이 안주하면 언제나 서울대 다음이다. 그러나 기억하자 실천 지성에선 민족 고대는 언제나 일류였다.

삼성의 후원으로 지어진 100년 기념관은 이름도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삼성관이다. 이곳에 고대 100년 전시실, 박물관이 있다. 1층에 고대 100년 사를 함축적으로 전시를 하고 이어 2층 3층 4층으로 100년사 전시실을 비롯한 역사민속전시실 등 여러 전시실이 위치하며 고대가 소유한 국보 제249호 ‘동궐도’(1824)며 보물 제853호 ‘수선전도 목판’(1840) 등 격조 높은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이 밖에도 개항의 주인공 대신 신헌의 초상화와 민영환의 유품 등 대학 박물관치곤 여느 박물관 못지않은 대단한 유물과 전시이다.

박물관 주변에는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이곳이 박물관이라고 하듯 각종 문인석, 동자석 등 묘제 석물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묘제 석물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 전통 무덤에 치장하는 석조 모형물인데 근래 우리 장례 문화가 대부분 화장으로 바뀌면서 무덤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오래전 모신 묘와 선산조차 지키지 않으면서 이들 석물들이 갈 곳을 잃게 되었다. 결국 전국에 많은 박물관들이 여기 고려대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를 위한 장식품이 산 자의 문화 공간을 꾸미고 있는 웃픈 현실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구제발굴로 옮겨온 지석묘, 부처 사리를 모신 석탑, 아기 태를 모신 태함(국보 제177호 분청사기인화문태호 출토품-본 박물관 고미술 전시실)까지 이곳은 ‘삶과 죽음이 한 가지다’라는 철학적 명제의 상징 아닌 상징이 되고 있다.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

그날 너희 오래 참고 참았던 義憤의분이 터져

努濤노도와 같이 거리로 거리로 몰려가던 그때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硏究室연구실 창턱에 기대앉아

먼 산을 넋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午後二時오후2시 거리에 나갔다가 비로소 나는

너희들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물결이

議事堂의사당 앞에 넘치고 있음을 알고

늬들 옆에서 우리는

너희의 불타는 눈망울을 보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면 나는 그날 비로소

너희들이 갑작이 이뻐져서 죽겠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까닭이냐.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길은 무거웠다.

나의 두 뺨을 적시는 아 그것은 뉘우침이었다.

늬들 가슴속에 그렇게 뜨거운 불덩어리를 간직한 줄 알았더라면

우린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氣慨기개가 없다고

병든 先輩선배의 썩은 風習풍습을 배워 不義불의에 팔린다고

​사람이란 늙으면 썩느니라 나도 썩어가고 있는 사람

늬들도 자칫하면 썩는다고...

그것은 정말 우리가 몰랐던 탓이다

나라를 빼앗긴 땅에 자라 악을 쓰며 지켜왔어도

우리 머리에는 어쩔 수 없는 병든 그림자가 어리어 있는 것을

​너의 그 淸明청명한 하늘 같은 머리를 나무램 했더란 말이다.

​나라를 찾고 侵略침략을 막아내고 그러한 自主자주의 피가 흘러서 젖은 땅에서 자란

늬들이 아니냐

​그 雨露우로에 잔뼈가 굵고 눈이 트인 늬들이 어찌

民族萬代민족만대의 脈脈맥맥한 바른 핏줄을 모를 리가 있었겠느냐.

사랑하는 학생들아

늬들은 너희 스승을 얼마나 원망했느냐

現實현실에 눈감은 學問학문으로 보따리장수나 한다고

너희들이 우리를 민망히 여겼을 것을 생각하면

정말 우린 얼굴이 뜨거워진다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사실은 너희 先輩선배가 약했던 것이다 氣慨기개가 없었던 것이다.

每事매사에 쉬쉬하며 바로 말 한마디 못한 것 그 늙은 탓 純粹순수의 탓 超然초연의 탓에

어찌 苛責가책이 없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너희를 꾸짖고 욕한 것은

너희를 경계하는 마음이었다. 우리처럼 되지 말라고

​너희를 기대함이었다 우리가 못 할 일을 할 사람은 늬들 뿐이라고ㅡ

​사랑하는 학생들아

​가르치기는 옳게 가르치고 行행하기는 옳게 行행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스승의 따귀를 때리는 것쯤은 보통인

그 무지한 깡패 떼에게 정치를 맡겨놓고

원통하고 억울한 것은 늬들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럴 줄 알았더면 정말

우리는 너희에게 그렇게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가르칠 게 없는 훈장이니

​선비의 정신이나마 깨우쳐 주겠다던 것이

이제 생각하면 정말 쑥스러운 일이었구나

사랑하는 젊은이들아​

붉은 피를 쏟으며 빛을 불러 놓고

어둠 속에 먼저 간 수닭의 넋들아​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늬들의 공을 온 겨레가 안다.​

하늘도 敬虔경허히 고개 숙일 너희 빛나는 죽음 앞에

해마다 해마다 더 많은 꽃이 피리라.

아 自由자유를 正義정의를 眞理진리를 念願염원하던

늬들 마음의 고향 여기에

이제 모두 다 모였구나

​우리 永遠영원히 늬들과 함께 있으리라

1960. 4. 20

이 시는 지훈 선생이 고려대학생들의 4.18 의거를 목격하고 4.19 혁명을 지켜

보면서 4월 20일에 지어 1960년 5월 3일자 고대신문 제238호에 발표한 것

이다. 민주혁명에 앞장 선 죽은 제자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타성에 젖어 있던

스승으로서의 늬우침을

民族민족의 힘으로 民族민족의 꿈을 가꾸어 온

民族민족의 보람찬 大學대학이 있어

너 恒常항상여기에 自由자유의 불을 밝히고

正義정의의 길을 달리고 眞理진리의 샘을 지키느니

地軸지축을 박차고 咆哮포효하거라

너 불타는 野望야망 젊은 意慾의욕의 象徵상징아

宇宙우주를 향한 너의 부르짖음이

民族민족의 소리되어 메아리치는 곳에

너의 氣槪기개 너의 志操지조 너의 叡智예지는

祖國조국의 永遠영원한 鼓動고동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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