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화성3.1운동만세길, 우정면사무소, 김천중 묘

달이선생 2020. 1. 23. 07:00

화성3.1운동만세길, 우정면사무소, 충좌위장 김천중의 묘

 

  화성시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3.1운동 당시 옛 수원군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항쟁하였던 우정,장안면의 3.1운동 유적지를 연결하여 걷는 '화성3.1운동만세길'을 만들었다. 지난해 우정읍 화수리 일제 순사 가와바타 토요타로를 처단했던 곳에 위치하는 방문자센터를 찾아서 걷기 확인용 여권 같은 수첩을 받았다. 주요 유적지에 스탬프를 설치하였는데 이를 찍고 확인하는 것이다. 

  이번에 스탬프를 더하자는 생각에 길을 나섰다. 오전 7시 화성시 장안면 사곡리 산호아파트에서 출발하여 화산리 일원동 김연방 99칸 종택터(수령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와 그 옆 재실 쌍괴재를 거쳐 우정읍 화산리 사기말에 위치한 옛 우정면사무소 터를 거치는 일정으로 다시 산호아파트로 돌아왔다. 돌아온 시간이 오전 10시 반 정도 되었으니 3시간 반 정도의 길걷기였다.

  길이 아닌 길이 이어지기도 해서 지역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면 길찾기가 어렵겠다 생각됐다. 그래도 곳곳에 만세길을 표시한 매듭이 있어서 다행이다. 이러한 길은 지역에 대한 이해를 가진 나같은 사람이 함께 동행한다면 스토리텔링할 것들이 많다고 생각되었다. 사실 이 만세길에서 김연방 지사의 가계에 대한 이해와 해풍김씨 이야기, 또는 우리 지역 삼괴이야기 등은 여길 담당하는 사람들도 잘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길을 걸으니 별 생각이 다든다.

  이번 만세길의 주요 유적지는 해풍김씨 남양쌍부파의 종택이 있는 화산리 일원동 김연방 지사 관련 유허지와 3.1운동 항쟁지인 사기말 우정면사무소와 그 길에 있는 숙종~영조대 무신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충좌위장(종2품, 중앙군 5위 전위)에 오른 해풍김씨 김천중의 묘이다.

 

 

 

 

 

화산리 일원동 김연방 지사 99칸 종택 터 앞 수령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

 

 

 

  또 다른 지명 삼괴의 유래로 괴자의 의미인 느티나무 뜻에 따라 '세 그루의 괴목'설인데 지역에 수백년 묵은 괴목이 장안면 어은리와 금의리, 그리고 여기 우정면 화산리에 있다고 하여 삼괴라고 했다는 세 그루의 괴목설이다. 실제로 수령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금의리(255-2 / 경기-화성-24)에도 있으며, 과거에는 어은리에도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데, 이를두고 장안면 독정리의 400년 넘은 느티나무(1148 / 경기-화성-27)라는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밖에 노진리에도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있다.(97-2 / 경기-화성-25) 어은리는 3.1운동 당시 장안면사무소가 있던 곳이다. 독정리는 토성인 수성최씨 한림공파 진사공파 세거지고 노진리는 남평문씨 세거지다.    

 

밭으로 변해버린 99칸 종택자리이다. 3.1운동 당시 발안정미소 운영자이자 거류민단장인 사사카 리키치의 길잡이로 하는 일제검거반이 들이닥쳐서 김연방 지사와 집사로 족문인 김태원 등을 죽이고 불을 질렀다. 이 때 집안 종중이 보유한 많은 문서와 서책 등이 불탔다.

 

99칸 종택이 불타고 행랑 2채만이 남았고 그 옆에 마련된 새로운 종택이다.(미확인)

 

 

 

 

 

김연방 지사의 손자 김진세의 주도로 새로 지어진 종중 재실인 쌍괴재와 납골당인 숭모당이다. 이곳에 해풍김씨 종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영장군 묘비, 김연방 지사 묘비, 순국비 등이 있다.

 

 

 

 

 

 

 

 

 

 

 

대장댁, 대감댁으로 불린 해풍김씨 김연방 지사 종가의 큰 인물 김영 장군 묘비와 옆으로 김연방지사, 그 아들 김창규의 비이다. 손자 김진세가 세웠다.(2003.4.8)

 

자헌대부형조판서겸 오위도총부도총관지훈련원사 해풍김공휘영지묘 정부인밀양박씨부좌

 

김영(1772~1850) 장군은 무반 명족인 해풍김씨에서도  '등단록 선생안'에 오른 인물이다.  등단록은 선조대 조경부터 고종대 민영준까지의 202명의 군영대장명부이다. 김영 장군 외에도 후손인 고종대 어영대장을 지낸 김건(金鍵1798~1869)이 있다.

 

 

 

 

 

 

 

통훈대부시종원시어 해풍김공휘연방지묘 숙인한산이씨부좌

 

 

 

해풍김공휘창규지묘 유인평강채씨부좌

김연방 지사의 아들로 종손이다. 발안장 정미소 운영 거류민단장 사사카 리키치를 평생의 아버지 원수로 곱씹으며 한으로 살았다. 어머니 한산 이씨는 죽는 날까지 소복을 입고 상중으로 살았다고 전한다.

 

작은 마을길 삼거리에서 화산리 일원동 마을을 뒤로 하고 꺽어져 우정면사무소로 향한다.

 

 

 

 

 

 

우정읍 화산리, 호곡리 등은 발닿는 곳곳이 해풍김씨의 터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우정면사무소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해풍김씨 남양쌍부파 김천중 선영이다. 포승향남로(77번국도) 통로암거 화산3 바로 앞 도로변에 있다.

 

 

 

 

 

관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충좌위장(영조4년분무원종공신3등훈 녹권44장11행유기) 해풍김공휘천중지묘 비정부인여흥민씨부좌

 

 

  김천중은  본관은 해풍, 남양쌍부파, 자가 여진 (汝珍), 1672~1744)으로 무반 최고위직인 동지중추부사 충좌위장에 오른 인물이다. 실록에는 김천중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이 보인다.  

 

사간원에서 【정언 조정(趙侹)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양덕 현감(陽德縣監) 김천중(金千重)은 곧바로 윤리를 모독한 죄인 김협(金浹)의 아비이니, 진신(搢紳)의 반열에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해 버리소서." 하니, 윤허하였다.(諫院 【正言趙侹。】 申前啓, 不允。 又啓: "陽德縣監金千重卽是黷倫罪人金浹之父, 不可置之於衣冠之列, 請削去仕版。" 允之。)-영조실록 35권, 영조 9년(1733) 8월 23일 신미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이태징(李台徵)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중략) 김협(金浹)의 아버지 김천중(金千重)은 바로 역적 민암(閔黯)의 첩(妾)의 사위입니다. 민암복법(伏法)  되기에 이르자 민희(閔熙)의 사위를 가칭(假稱)하면서 세상을 속이고 행세를 한 것은 진실로 이미 매우 놀라운 일인데, 지난번 서읍(西邑)에 제수되었을 적에는 그의 아들이 음간(淫奸)한 여자를 데리고 가서 그 아이를 밴 자취를 숨기려고 하다가 대신(大臣)에게 저지당하였으니, 정상(情狀)이 음흉하고 교묘합니다. 김천중을 마땅히 먼곳에 유배해야 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憲府 【掌令李台徵】 申前啓, 不允。 又啓:  (중략) 金浹之父千重卽賊之妾女壻也。 及伏法, 假稱閔熙之壻, 欺世行身, 固已痛駭, 而向除西邑, 欲挈去其子之所淫奸者, 以掩其懷孕之跡, 而見阻於大臣, 情狀 凶巧, 千重宜遠配。" 幷從之。)-영조실록 38권, 영조 10년(1734) 7월 7일 경진

 

 

  승정원일기에 그의 관록을 살펴보면 숙종24년(1698) 서천만호(舒川萬戶)가 처음 등장하고 숙종39년(1713) 차령첨사(車嶺僉使)를 거쳐 숙종43년(1717)에는  드디어 중앙군 5위의 전위가 되는 충좌위의 으뜸 장수인 충좌장(忠佐將) 즉 충좌위장에 올라 무반으로 출세의 정점에 이른다. 그리고  1718 첨지(僉知, 첨지중추부사), 다시 경종1년(1721) 충좌위장, 동년 12월 18일 동지(同知, 동지중추부사, 아래 교지)에 올라 무반으로서의 최고 자리까지 올랐다.

 

 

출처 : 해풍김씨 대종회 haepungkim.or.kr/

 

  그러나 영조가 등극하면서 영조8년(1732) 진휼청주전감관전동지(賑恤廳鑄錢監官前同知)과 영조9년(1733) 양덕현감(陽德縣監)을 끝으로 벼슬이 끊긴다. 이러한 상황은 위의 실록 기록을 통해 그 영향을 잘 알 수 있는데 김천중은 첩의 소실이기는 했으나 숙종대 남인을 이끌던 영수 민암의 사위로 군부의 실세로 출세의 탄탄대로를 가던 그가 영조의 등극으로 노론의 정국하에 들어가자 군부 중앙직에서 밀려나가고 지방직인 양덕현감에 올랐으나 양사의 탄핵으로 받아 파직과 유배를 받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실록에 나오는 것처럼 아들 김협이 음난한 일을 벌인 비행이 결정적이었지만 그를 둘러싼 정국 변화가 큰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장인 민암이 남인의 영수로서 인현왕후 민씨의 폐비와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또한 노론의 영수이자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을 사사하는데 앞장섰던 문제 등은 당시 노소론이 정국을 좌지우지 할 때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원죄였다. 따라서 민암과 관련되어 연좌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결국 영조대 이인좌의 난에서 분무원종공신 3등이 되기도 하였지만 이를 극복하기는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직으로 주전소 감관과 현감 등에 잠시 등용되지만 아들의 비행으로 완전히 불명예 퇴진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천중은 무재만큼은 뛰어난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무과로 입신한 그는 26세에 장군인 종4품 만호가 되고 10년 안에 무반 고위직에 오른 해풍김씨 남양쌍부파의 걸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치열했던 정쟁의 역사를 촌길 한켠에서 읽혀질 수 있는 것이 새롭다. 우리는 역사에 조선의 당쟁이 가져온 참혹한 결과를 알고 있다. 국론이 분열되면 결국 사적이익이 결속되고 이는 망국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사기말 입구이다.

 

멀리 사기말의 가장 오랜 세월을 지킨 엄나무와 그 뒤로 삼괴지역의 중요 관방인 흥천산봉수대가 있던 봉화산이 보인다. 현재 엄나무 옆에 3.1운동 중요 유적인 우정면사무소 터 안내와 스탬프가 설치되고 있다. 봉화산에는 아직도 흥천산봉수대 연대가 남아있는데 사유지라서 유적 보존이 안되고 있다. 10여년 전에도 시에 요구하였지만 담당자는 사유지라서 어렵다는 말만 하고 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흔적은 사라질 것이다. 누구하난 관심을 가지질 않으니 안타깝다. 흥천산 봉수대를 확인하고자 한다면 두레자연중고등학교로 들어가서 오르면 된다. 현재 봉화산길은 이 길이 제일 접근성이 좋다.

 

 

 

 

 

 

 

 

 

 

 

 

 

 

 

 

 

 

  우정면사무소가 있었던 사기말(사금말)은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화산리이다. 화산리 사기말은 마을 이름에서도 보이듯 사기=자기와 연관이 많다. 예전 자기그릇 파편들이 많이 나왔다고 하는데 지금도 밭고랑이나 밭데기를 갈다보면 종종 파편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과거 이곳을 지나던 무역선들이 조난하여 많은 자기들이 바다로 떠밀려 와서 사기마을이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이곳은 무역이나 물건을 실어 나르던 포구였다고 한다. 고려 때 쌍부현이 설치되기 전에 육포라고 불렸던 지역이니 만큼 이 사기말도 중요한 포구가 인접했다. 김연방지사의 마을이 일원동인데 일원(一院)이라는 뜻도 이들 무역에 관계된 상인이나 사신들이 묵었던 숙소가 있어서 붙여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최근 고고학적 조사에 따라 이곳 사기말이 위치한 화산리와 이웃한 운평리, 한각리의 넓은 지역에 단일한 유적이 분포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특히 한각리 토성 등과 고분, 백제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되는 산포지 등이 나왔는데 이는 이 육포지역에서 해상교역 등 해상을 기반으로 한 세력이 일찍부터 형성된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지금은 논들이 있는 이들 유적과 앞에는 예전에는 모두가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이었다. 앞으로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지만 특히 마한 54개국 중 여기에 위치했던 상외국과 이후 한성백제 시대 육포, 그리고 쌍부현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변천의 중요한 고리가 되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사기말은 화산리의 자연촌 중 하나이며 화산리(花山里)라는 이름은 봄에 산과 들에 진달래가 만발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바다에 인접하여 꽃과 관련된 한자지명은 바다로 돌출된 지형인 곶을 의미한다. 바다가 멀어지고 간척이 되면서 원뜻도 바뀐 것이다. 어쨌든 지금 지역사람들은 모두 꽃과 관련지어 말들 한다. 하여간 사기말은 야특막한 야산이 둘러져 있고 아늑한 지형이다. 사기말 외에 배미, 일원동, 장자터, 한마을(閑촌) 등이 있다. 

  우정면은 고려시대에는 쌍부현(雙阜縣)이라고 했고, 조선말기에는 수원부에 속한 삼괴(三槐 7面)라고 하여 본면(本面), 마정(馬井), 팔라곶(八羅串), 압장(鴨長), 화방면(禾方面)으로 구분 설치되어 있었으나 우정면․압정면으로 통합되었다가 1910년 남양군에 편입되면서 조암 북쪽을 우정면, 조암 남쪽을 압정면으로 구획하였다. 이후 1914년 군,면 통폐합 때 수원군에 편입하고 우정면과 압정면 일원을 병합하여 우정면으로 개칭하였다.

  당시 우정면을 관할하던 면사무소는 이곳 사기말 현 화산리 557-1번지에 위치한다고 10여년 전에 자료로 파악하였는데 현재 기념물과 그 위치가 다르다. 정확히 확인을 하진 못했지만 과거와 현재의 위치가 그리 멀지 않은 지척이므로 모두 남긴다.  

  사기말 언덕에서 남동쪽으로 야트막한 산이 보이는데  봉화산이다. 봉화산은 조선시대 중요한 봉수가 있었던 산이다. 원래는 흥천산이었는데 봉수가 설치되어 있어 주민들이 봉화가 있는 산이라고 불러 지금은 봉화산이라 불린다. 마을에 있는 교회 이름도 봉화교회다.  현재 완만한 봉화산을 오르면 그 중심부에 6기의 크고 작은 연대(망루 겸함)와 연조(불피워 신호하는 시설)가 남아있다.('지역향토사 흥천산봉수' http://blog.daum.net/ilovepk/6 참고) 

 

   3.1운동 당시 우정면사무소는 조선식 초가로 14평, 이고 소사실, 숙직실, 사무실, 창고, 목욕탕, 면장실 등이 있었다. 장안면사무소를 불태운 주민들은 당시 장안면장 김현묵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면직원들을 앞장서게 한 뒤 정오에 쌍봉산에 올라가서 만세를 부르고 내려오니 주민들이 1천5백여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이곳 우정면사무소로 몰려와서 우정면장 최중환과 면서기들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이미 줄행랑을 치고 없었다. 빈 우정면사무소를 때려 부수고 마저 불태웠다.

   우정면사무소는 '수원군 우정, 장안면의 3.1운동'의 두 번째 주요 항쟁지가 된다. 이때 피해액을 550원 상당의 재산상 손해를 입었다고 일제는 밝혔다.

 

 

 

 

 

위 사진은 수원대 동고학연구소에서 펴낸 자료집(사진으로 본 화성지역의 3.1운동과 항일영웅들, 2005)에 나온 우정면사무소 주소를 찾아 답사 후 기록한 것이다. 엄나무를 느티나무로 오기하였다. 정정한다.

출처 :

  [3.1절 특별기획] 수원군 우정, 장안면의 3.1운동 현장을 가다(2012)

http://blog.daum.net/ilovepk/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