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김씨묘문 의왕시 왕림 입향조 정국공신 김우증 묘역
-김우증 신도비, 청평사(사당), 김우증 묘 및 묘갈, 김여광 묘, 김계 묘 및 묘갈, 김태로 묘, 김충백 부인 전주이씨묘
청풍김씨 판서공파 세도의 비조인 정국공신 김우증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3등이 되면서 이곳 왕림을 사패하였다. 이곳에서 손자인 계자 김계 이하 후손들이 현달하였는데, 특히 인백파라 불린 김계의 3남 김인백의 후손들에서 재상이 6명이나 배출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그의 묘갈은 인백파 후손 영의정 김상로가 묘갈을 지었고 그의 신도비 역시 김상로가 짓고 또 후손이자 영의정을 역임한 김치인이 써서 위엄있게 세웠다. 이 신도비의 내용을 보면 김계 이하 아들들을 지파로 후손이 번창하고 현달한 내용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특히 후손들이 2백여명이 넘어 그 내용이 많아 과거급제자나 벼슬에 오른자만 기록하였다고나와 당대 왕림의 청풍김씨 세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김우증 묘역은 왕림마을에 들어와서 백운산(백운사) 방향으로 올라가다 동편으로 왕곡천을 넘어서 있는 구릉이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현재 입구와 길이 모두 끊겼다. 작은 다리를 넘어서면 사당인 청평사가 나오고 그 옆에 김상로가 짓고 김치인이 쓴 '김우증 신도비'가 서있다. 신도비 옆으로 지나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수직의 구릉이 나오는데 오른쪽 계단길을 오르면 김우증 묘를 비롯한 묘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묘역의 자리배치는 위쪽부터 김우증, 그 아래 아들 김여광, 손자 김계의 묘까지 방향을 맞춰 늘어서 있고 방향을 달리해서 후손 김태로 묘가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 아래에 구릉에 김계의 장남인 효자 김충백의 부인 전주이씨 묘가 있다.
김우증 사당인 청평사
김우증 신도비는 1764년(영조40) 7세손 인백파 영의정을 김상로가 짓고 8세손 김치인이 글씨를 썼으며, 9세손인 김종정이 전액을 하였다. 김상로와 김치인은 인백파로 지파이고 김종정은 충백파로 종손이다. 비는 방부개석의 형태로 높이 213cm, 너비 65cm, 두께 65cm이다.
김우증신도비
조선 정국공신 정주목사 증병조판서 청평군 김공신도비명 유명조선 병충분의정국공신 통정대부 정주목사 안주▨▨ 병마첨절제사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훈련원사 청평군 김공신도비명 병서 7세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치사봉조하 상로 삼가 찬함 8세손 원임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치 인은 삼가 씀 9세손 통정대부 승정원좌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종정은 삼가 전을 씀 예전에 연산주가 음란하고 포학하여 나라가 장차 망할 지경에 놓인 지가 거의 십수 년이었다. 나의 선조인 청평군은 동지 여러 사람과 더불어 우리 공희왕을 추대하여 다시 종사를 안정시켰는데, 공훈을 논함에 이르러 공 혼자만은 기여한 바가 높으면서도 등급이 낮았으나, 공은 일생을 마칠 때까지 불만스런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이 일로 공의 어짐을 알았다. 공의 이름은 우증이고 자는 희여이다. 우리 김씨는 관향이 청풍으로 고려 때에 문하시중을 지낸 대유의 후예이다. 대유는 문하시랑을 지낸 인우를 낳았고, 인우는 감문위 대호군을 지낸 현창을 낳았으며, 현창은 문하시중을 지낸 조를 낳았다. 또 조는 봉상시판사를 지낸 중방을 낳았고, 중방은 관을 낳았는데 그가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호조참의를 지내고서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니, 바로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인 의지는 한성부윤을 지냈고, 조부인 리는 부사를 지냈으며, 아버지인 극함은 사재감 첨정을 지냈다. 어머니는 의령 남씨로 소윤을 지낸 상명의 딸이자 정당문학을 지낸 좌시의 증손녀이다. 공은 자태가 빼어나고 지기가 웅대하였으며, 경사에 능통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또 성품이 강직하여 남의 잘못을 보면 번번이 낯을 돌려 배척하고 용서하지 않았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되었는데 하루는 연산군이 대궐 안에서 말을 달리려 하니 말고삐를 쥐고서 그릇됨을 간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명천현감으로 있을 적에는 갑자사화를 당하여 유배된 윤여해와 대질 심문을 받고 장배 당했다가 얼마 후에 사면되어 돌아왔다. 중종 병인년(연산군 12, 1506년)에 3등의 공신에 책훈되니 곧 정국공신이었다. 뒤에 동래현령 · 정주목사 · 첨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금상 임술년(영조 18, 1742년)에 대전을 적용하여 친공신인 까닭에 병조판서와 청평군에 추증되었으니, 아! 훈공과 덕행으로 종묘사직에 이름을 새겼도다. 명군이 통치하는 시기를 만났으나 불행하게도 참소와 무고의 재앙을 당해 뜻을 펴지 못하고 곤경에 빠져서 벼슬이 비옥에 머물렀으며, 끝내 작위를 받고 공적을 세워서 세상에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다. 공이 일찍이 시를 지어, “말 잘하고 아첨 잘하는 이가 많은 복을 누림을 이미 보았으니, 충성하고 신의 있는 자가 일신을 그르치는 것 뉘 알리요?”라고 하였는데, 이 시를 보면 공을 알 수 있다. 공이 작고한지 이제 2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사당의 신주가 옮겨지지 않은 까닭에 단지 공의 기일은 8월 13일이고 부인의 기일은 7월 28일이라는 것만 전해질 뿐 생졸 연대와 역임한 관직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세월이 오래 되어 전하지 않는다. 기록이나 소문에 의해 알아낸 것이 겨우 이 한두 가지 뿐이니 슬프도다. 그러나 공은 자신의 광채를 숨기고 복을 쌓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크게 빛을 발휘하여 자손들이 번성하고 가문이 창성함으로써 마침내 세상의 명망 있는 집안이 되었으니 천도는 믿을 만함을 징험할 수 있다. 공의 무덤은 광주 왕륜 옛 현의 백운산 아래 손좌의 언덕에 있는데 바로 공이 스스로 정한 곳이며, 그대로 자손들이 대대로 묻힌 곳이 되었다. 공의 부인은 남양홍씨로 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이로이고, 조부는 판중추부판사를 지낸 약이다. 공의 무덤 왼쪽에 합장하였고, 공의 품계를 따라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여광으로 대호군을 지냈으나 아들이 없어서 조카인 계를 데려다가 후사를 삼았다. 계는 학행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고 사헌부집의에 추증되었으며 4남을 낳았다. 큰 아들 충백은 참의에 추증되고 둘째 아들 효백은 사헌부집의에 추증되었는데 모두 효행이 두터웠기 때문이고, 셋째 아들 인백도 학행으로 세상에 알려져 판서에 추증되었다. 막내 아들 예백은 후사가 없다. 현손 이하의 후손들이 모두 2백여 명인데 그 가운데 과거에 합격했거나 벼슬에 나간 자들은 다음과 같다. 수는 참봉을 지냈고, 간은 유일로써 의정부우참찬을 지냈으며, 재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집의를 지냈다. 또 치후는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찰사를 지냈고 종정은 문과에 급제하고 승정원승지를 지냈는데 참의에 추증된 충백의 파이다. 그리고 익겸은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지냈으며, 익성은 진사이고 부는 감역을 지냈다. 또 상은 무과에 급제하고 병사를 지냈고, 응로는 무과에 급제하고 부사를 지냈으며, 범로는 무과에 급제하고 병사를 지냈고, 치명은 무과에 급제하고 부정을 지냈다. 치구는 무과에 급제하고 부사를 지냈으며, 치요는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지냈으며, 종만은 무과에 급제하고 병사를 지냈으며, 종영은 무과에 급제하고 부사를 지냈는데 집의에 추증된 효백의 파이다. 극형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독학으로 천거를 받아 정랑을 지냈으며, 징은 문과에 급제하고 관찰사를 지냈으며, 첨은 생원이다. 혼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순은 진사로서 동지돈녕부사를 지냈으며, 구는 문과에 급제하고 의정부우의정을 지냈다. 또 유는 문과에 급제하고 참판과 대제학을 지냈으며, 무는 진사로서 목사를 지냈으며, 고는 문과에 급제하고 승정원승지를 지냈다. 방은 군수를 지냈고, 후는 무과에 급제하고 병사를 지냈으며, 희로는 진사로서 참판을 지냈다. 또 재로는 문과에 급제하고 영의정을 지냈으며, 정로는 생원으로서 좌랑을 지냈으며, 취로는 문과에 급제하고 판서를 지냈으며, 성로는 진사로서 판결사를 지냈고, 약로는 문과에 급제하고 좌의정을 지냈으며, 상로는 문과에 급제하고 영의정을 지냈다. 또 득로는 무과에 급제하고 도사를 지냈으며, 익로는 현감을 술로는 부사를, 항로는 군수를 지냈으며, 갑로는 진사이다. 명로는 군수를 지냈고, 찬로는 무과에 급제하고 오위장을, 장로는 무과에 급제하고 판관을, 치만은 진사시에 일등으로 합격하고 시직을 지냈으며, 치일은 진사로서 원정을, 치인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판서를, 치량은 생원으로서 정랑을 지냈다. 그리고 치영은 진사이고, 치온은 생원으로서 목사를, 치공은 진사로서 부사를 지냈으며, 치각은 생원이다. 치양은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부수찬을, 치성은 봉사를, 종후는 생원으로서 부솔을, 종수는 진사로서 군수를, 종설은 진사로서 정랑을, 종협은 현감을 각각 지냈는데 판서에 추증된 인백의 파이다. 공의 무덤에 비목 표지가 있었지만 세대가 점점 오래되어 또렷하던 비문이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이 점을 걱정하여 나의 참담되고 망녕스러움을 헤아리지 않고 삼가 표지에 실려 있는 내용을 추려 모아서 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백운산 남쪽에 사수가 세차게 흐르는데 그 가운데에 무덤이 있으니 대부가 묻혔도다. 그의 본파와 지파까지 좌우에 모두 있으니 수백 년을 전해 오며 팔구대가 모였도다. 덕이 두텁지 않고서는 아!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훌륭한 우리 공은 지난 날 정릉을 섬기어서 임금을 도와 난세를 평정하여 대동을 있게 하였도다. 벼슬은 공훈에 부합되지 않았고, 복은 다 먹지 않았으되 자기가 차지하지 않고서 후손에게 경사를 열어 주었도다. 가문이 크고 현달하여 계속해서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에 효도함이 그의 가성이었도다. 지킴을 잠시라도 소홀하면 곧장 떨어지고 엎어질지어다. 무릇 우리 후예들 누가 감히 힘쓰지 않으리. 세대가 오래 되었다고 하지 마라, 공이 이 산기슭에 있도다. 숭정기원후 세 번째 갑신년(영조 40, 1764년) 12월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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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nrich.go.kr)
김우증의 묘와 묘갈
조선병충분의정국공신통정대부정주목사 증병조판서청평군김공우증지묘 증정부인남양홍씨부좌
김우증 묘갈은 김상로가 짓고 외7대손 유수 윤득화가 썼다. 윤득화는 서예에 능하였다.
김여광의 묘
대호군김여광지묘 숙인연안김씨부좌
처사 김계 묘 및 묘갈
이곳 청풍김씨 가문을 실질적인 비조인 김계의 묘표는 '숙인순흥안씨부좌 처사 증집의김계지묘'라고 하며, 일반적인 표기방식을 떠나 본인의 이름이 부인 왼편에 자리한다. 처사라는 비문에서 보여지듯 고고한 선비의 기풍이 느껴진다. 남존여비와 같은 고루한 생각이 아닌 아내도 같은 인격체로 존중하였을 높은 정신적 전통이 있지 않았을까? 초당선생의 제자로 38셀로 요절한 김계, 자손이 번성하고 현달하니 큰 복을 누린다.
김계 묘갈
왕륜의 청풍김씨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다.
이 묘갈명은 아들 김인백의 증손자인 대제학 김유의 스승 박세채가 지었고 당대 산림을 주도하던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이 쓴 작품이다. 소론의 영수이자 양명학자 정제두 등 많은 후진을 양성하고 학문이 높던 박세채의 문장을 확인할 수 있으며, 송자 송시열의 글씨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전액은 숙종의 비였던 인현왕후의 아버지 국구 민유중이다. 김계 묘갈은 처사에 불과했던 그가 당대 산림의 영수들과 국구 등이 참여한 묘갈을 세움으로서 당시 청풍김씨의 세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파는 다르지만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김육의 손녀) 역시도 청풍김씨이다. 묘갈은 '숭정신유구월'로 1681년에 세웠다.
사실 김계의 5대손으로 대제학 김유는 박세채의 문도이자 송시열을 모신 사람이다. 더욱이 노론의 영수로 활동하였기에 김유 할아버지에 대한 정성을 기할 때 이들 노 스승과 민유중이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승의 자리에서 응했던지 박세채와 송시열은 민유중과 다르게 당시 하늘을 찌르던 자신들의 관작을 생략하고 본관만 써놓았다. 처사 김계에게 최대의 예를 표한 것이다. 선비를 대할 땐 선비로 만나는 옛 사람의 정성과 마음이 아름답다.
유명조선처사 증사헌부집의김고묘갈명 병서
반남 박세채 찬
은진 송시열 서
보국숭록대부여양부원군민유중 전
우리 부자(夫子, 공자(孔子)를 가리킴)가 일찍이 선인(善人)을 논하였다.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선행과 신의를 아울러 거론하여 설명하면서 그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운데다 또 한때의 현명한 인사에게 질문하고 배워서 거의 자신이 성취하고 다른 사람에게 구하는 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만일 기필코 이 말을 가지고 구애를 받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성인(聖人)의 뜻이겠는가?
고(故) 처사(處士) 김공(金公)의 휘(諱)는 계(繼)이고, 자(字)는 성부(誠夫)이니 대대로 청풍(淸風) 사람이다. 드러난 분으로는 고려(高麗) 때 감대유(金大猷)와 김창조(金昌祚)로 모두 벼슬이 시중(侍中)이었다. 조선조[本朝]의 김관(金灌)은 호조 참의(戶曹參議)이고, 김의지(金儀之)는 한성 부윤(漢城府尹)이다. 증조(曾祖) 휘 모(某)는 모관(某官)이며 고(考) 휘 모(某)는 대호군(大護軍)이다. (대호군) 공이 본래 그의 족제(族弟)인 우후(虞候) 숭의(崇義)의 아들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태어나면서 특이한 자질이 있었다. 아홉 살에 호군공(護軍公)의 상(喪)에 나아가 곡읍(哭泣)하며 상례 집행하기를 성인(成人)처럼 하니, 보는 이들이 놀라며 감탄하였다. 그러다가 야위어 병이 들자 양가(兩家)의 어버이가 몹시 번민하며 강요하였지만 강직한 성격을 끝까지 바꾸지 않았다. 모부인(母夫人) 김씨(金氏)를 수십 년 동안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고 섬기면서 특이한 음식을 얻게 되면 반드시 품고 가서 바쳤으며, 또 여러 조카에게 전민(田民, 농사짓는 노비)을 나누어주도록 청하고 비록 젊은 여종이라 하더라도 (모부인이) 애호한 바를 보면 죽을 때까지 떼어놓지 않았으므로 김씨가 매우 편안하게 여기어 규정(閨庭) 사이가 화목하였으므로, 이웃에서도 따라서 감화된 자가 많았다. 양가 어버이의 연세가 많아 더욱 쇠로(衰老)하기에 미쳐 공이 늘 간절히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으며, 막내 누이가 일찍 죽으매 예절에 지나칠 정도로 비통(悲慟)해 하여 곁의 사람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평상시 별장[別業]에 왕래하면서 국릉(國陵)이 길에서 바라보이는 곳에서는 모두 말에서 내리게 하여 걸어가도록 하였는데,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것으로 조금도 폐하지 않았다. 간혹 어린 종이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면서 부역하는 자를 만나면 문득 측은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왕정(王政)에서 차마 행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하였으니, 대체로 그의 자질이 어질고 충성스러우며 효성스러움은 천성(天性)으로 타고나서 그런 것이었다. 공의 사람됨은 충성스럽고 믿음직하여 온화하고 순수한데다 엄격하고 정중함을 성취하여 가슴속이 침착하여 서둘지 않아 옛날 군자(君子)의 기풍이 있었으며, 말과 행동 그리고 움직이고 그침에 겉으로 꾸미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정성된 마음으로 사물(事物)을 접하므로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모두 그를 아꼈다. 그러나 그의 지키는 바는 확실하여 굽힐 수 없었으며, 진출하여 취하는 데에 마음을 끊었고 다른 사람의 과실을 보면 반드시 책망하여 바로잡았다. 평소에 산업(産業)을 돌보지 아니하였다. 처(妻) 안씨(安氏)는 순흥(順興) 사람으로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후손이며, 사직(司直) 광옥(光沃)의 딸로서 역시 어질었는데, 그 까닭을 물었더니 공이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나의 도리가 진실로 옳으니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며, 두루 구휼하는 의리에 이르러서는 그 힘을 힘써 다하고야 말 것이오.” 하였다.
처음에 공의 나이가 많도록 학문할 줄을 모르다가 초당(草堂) 허엽(許曄) 공이 힘쓰도록 하자, 마침내 두렵게 여기며 조심스럽게 분발하여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뒤 똑바로 앉아 ≪소학(小學)≫ㆍ≪대학(大學)≫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 을사 사화(乙巳士禍)에 징계된 여러 노 선생(老先生)이 가끔 몰래 모여서 강의하고 글을 가르쳤는데, 공이 바로 기꺼이 그 문인(門人)이며 고제(高弟)인 한윤명(韓胤明) 공과 신후(申煦) 공, 그리고 김근공(金謹恭) 공의 무리와 종유(從遊)하자, 더러는 화(禍)의 빌미라고 지목하였지만 못들은 사람처럼 하고서 날마다 반드시 모여서 토론(討論)하며 지조 유지에 더욱 힘을 썼다. 여러 공들이 위하여 말하기를, “경숙(敬叔, 김근공(金謹恭)의 자(字))은 행실이 독실하고, 성부(誠夫, 김계(金繼)의 자(字))는 타고난 자질이 아름답다.” 하였는데, 대체로 김공의 학문과 행실은 최고였지만 공은 오히려 ‘짝할 만하여 손색이 없다’고 하였다. 가끔 산사(山寺)에서 책을 읽으며 마음을 가라앉혀 하루 종일 (책을) 대하고 있노라니 중[闍利]이 그것을 보고 학선(學禪) 인줄 알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미 친구를 따라 ≪근사록(近思錄)≫을 질정하면서 한 글자 한 귀절의 탐색(探索)을 한결같이 처음 배우는 법칙을 따르면서 조금도 꺼려함이 없이 조목마다 나아가 세밀하게 분석하여 이치를 발견함이 정밀하고 분명하며, 성정(性情)과 사물 그리고 고금(古今)을 분변하는 데 미쳐 비록 조화(調和)되지 않는 점이 있다 하더라도 드물었으니, 그가 평생에 한 바와 추향(趨向)하고 힘을 쓴 방도가 대저 이와 같았다. 허 노재(許魯齋, 노재는 허형(許衡)의 호)가 ≪소학≫을 공경히 믿었다는 말을 얻어 듣게 되어서는 감탄하기를, “이것은 후학(後學)에게 있어서 더욱 대단히 반성해야 한다.” 하였으며, 또 여씨(呂氏)의 심재(心齋, 송(宋)나라 때의 동덕수(董德修))에 대한 시(詩)와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고사리를 캐는 그림을 앉은 자리 곁에다 게시(揭示)해 두고 외며 구경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리고 글 중에도 (맹자(孟子)의) 양기편(養氣篇)과 (한유(韓愈)의) 원도(原道) 두 편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렇다면 그 한갓 타고난 자질만 핑계대어 진실로 당실(堂室)을 아름답게 한 공을 끝내 바라지 않으려고 하는 자와 필경은 어떠하다 하겠는가? 반드시 그것을 절충(折衷) 할 수 있는 자가 있을 것이다. 아! 세상의 도의가 번갈아 가며 상실되어 총명하고 재치 있게 분변하는 자를 구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겨, 그 뜻이 독실하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공과 함께 배운 제공(諸公)같은 분은 진실로 꽃을 피웠어도 결실하지 못한 이가 많았으니, 어찌 하늘의 좋아하고 미워함이 때와 사람이 다르게 지목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이른 바 가끔 정밀하고 한결같은 기운을 만난 자가 문득 장구하지 못한 것인가? 거듭 애석하게 여길 만하다 공은 문공(門功)으로 3품(品)의 계자(階資)를 전례대로 받았으며, 가정(嘉靖) 을축년(乙丑年, 1565년 명종 20년) 12월 28일 졸(卒)하였는데, 향년[得年]이 38세이다. 광주(廣州)ㆍ백운산(白雲山) 선영[先兆]의 건좌(乾坐) 터에 장사지냈으며, 안씨(安氏)도 실제로 부장(祔葬)하였다. 세상을 떠나던 날에 끝까지 (어버이를) 봉양할 수 없음을 한스럽게 여겼으므로 사림(士林)에서 듣고 가슴 아프게 여겼다. 허공(許公)이 지은 뇌문(誄文)에 이르기를, “누추하고 좁은 거리에 살던 안자(顔子, 공자(孔子)의 제자 안회(顔回)) 같은 이가 세상을 떠나고 남전(藍田)에 살던 여숙(與叔, 송(宋)나라 때 여대림(呂大臨)의 자(字)) 같은 이가 죽었네[陋巷顔生逝藍田與叔亡]” 하였는데, 평논(評論) 하는 이가 지나친 표현이 아니라고 하였다. 아들은 네 명인데, 충백(忠伯)은 효도로 알려져 참의(參議)에 추증(追贈)되고, 효백(孝伯)ㆍ인백(仁伯) 또한 행의(行義)로 칭찬을 받았으며 승지(承旨)에 추증되었고, 예백(禮伯)이다. 친손(親孫)과 외손(外孫)은 번거로워 다 기록할 수 없다. 사증손(嗣曾孫) 참봉(參奉) 김수(金洙)가 아들 김간(金幹)을 시켜 와서 그 사실을 묘비(墓碑)에다 기술해 주기를 청원하였다. 내가 공을 알고 사모한지 오래되었기에 공경히 허락하고 이어서 명문(銘文)을 지었는데, 명(銘)은 다음과 같다.
성품에는 순진함과 결점이 없으니 착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학문을 고상함과 비루함이 없으니 힘써 행하는 이를 두렵게 여길 만하도다. 조예가 깊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오직 하늘도 기필하기 어렵도다. 짝할만한 부류 많은데 공에게 있어서 굽힌 것이 아니었네. 백운산 언덕 아래 사수(沙水)가 북쪽으로 흐르도다. 내가 그 사실을 추려서 영원토록 알리노라.
[네이버 지식백과] 김계 [金繼]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김태로 묘 및 묘표
1844년(헌종 10년)에 건립된 김태로묘표(金泰魯墓表)는 현손인 김동건(金東健)이 비문을 지었고, 5대손인 김학성(金學性)이 글씨를 썼다. 방부개석의 형태로 높이 120cm, 너비 47cm, 두께 26cm 이다.
김태로(金泰魯 : 1668~1692년)의 자는 성첨(聖瞻)으로 김계의 장자 김충백의 후손으로 우참찬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김간(金幹)의 아들이다. 25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 특별한 이력이 없으며, 후에 아들 김치후가 관찰사가 되어 신분이 귀해짐으로 인하여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이후에 손자 김종정도 현달하면서 이조판서에 추가로 증직되었다.
김태로묘표
부군의 이름은 태로이고 자는 성첨이다. 우리 김씨는 관향이 청풍으로 고려 때에 시중을 지낸 휘 대유가 바로 비조가 된다. 증조인 익신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인 수는 참봉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아버지인 간은 우참찬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문경공으로 호는 후재이며, 어머니인 증정경부인은 음성 박씨로 참판에 추증된 호원의 딸이다. 부군은 현종 무신년 10월 20일에 출생하여 숙종 임신년 6월 1일에 작고하니 향년이 겨우 25세였으며, 광주 사천 황새 모퉁이 묘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후에 아들의 신분이 귀해짐으로써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손자의 신분이 귀해짐으로써 이조판서에 추가로 증직되었다. 아내인 정부인은 직산강씨로 교관을 지낸 석하의 딸인데 부군 보다 2년 뒤에 출생하여 부군보다 56년 뒤에 작고하니 무덤은 갑좌에 합장하였다. 아들인 치후는 관찰사를 지내고 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손자 종정은 행판서이고, 종직은 일찍 작고하였다. 딸들은 부사를 지낸 윤심위와 군수를 지낸 이제연에게 출가하였으며, 증손자 세연은 현령을 지낸 다음 판서에 추증되었고 희연은 참판, 명연은 도정을 지냈다. 서증손자인 경연은 군수를 지냈고, 서증손녀는 맹극원에게 출가하였다. 판서에 추증된 세연이 도정을 지낸 아우 명연의 아들 동건을 데려다가 후사를 삼았는데 동건은 현재 판서로 있으며 세연의 딸은 유 시· 신광훈· 서겸보 및 전직 현령인 이시민 등에게 출가하였다. 참판을 지낸 희연의 양자인 동선은 현재 주부로 있으며 희연의 딸은 참판 이도재에게 출가하였다. 도정을 지낸 명연의 아들로서 장남은 바로 나인 동건이고 차남인 동헌은 전직 목사이며, 딸은 전직 정인 이봉수에게 출가하였다. 경연의 양자는 동승이고 딸은 정우덕에게 출가하였다. 동건의 아들인 교성은 현재 현령을 지내고 서자는 효성이다. 동선의 아들은 원성이고 딸은 이순익에게 출가하였다. 동헌의 아들은 학성으로 현재 참판이고 학성의 딸은 이 호명에게 출가하였다. 외손은 기록하지 않는다. 아! 부군은 시례의 가문에서 태어났고 또 과정의 훈계를 받았으므로 평소의 행실과 범절이 반드시 전해질 만한 것이 많았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작고하여 덕행을 상고할 방도가 없으니 그의 후손된 자들의 한이 그 어떻겠는가? 부인은 자녀를 올바른 도리로 가르쳤으며, 집안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었으니 그 점은 윤암 윤선생과 직암 신선생이 찬한 묘갈과 묘지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어찌 감히 군소리를 하겠는가? 이에 작은 비석을 세움으로 인해 그 음기를 오른쪽과 같이 대략 기록한다. 현손 동건 지음 5대손 학성은 씀 비석의 전면은 한 호의 글씨를 모았음 숭정기원후 네 번째 갑진년(헌종 10, 1844년) 월 일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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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泰魯墓表
府君 諱泰魯 字聖瞻 我金貫淸風 麗朝侍中諱大猷 寔爲鼻祖 曾祖諱益新贈吏曹參判 祖諱洙參奉贈吏曹判書 考諱幹右參賛贈領議政 文敬公號厚齋 妣贈貞敬夫人 陰城朴氏贈參判浩遠女 府君以顯宗戊申十月二十日生 肅宗壬申六月一日卒 享年僅二十五 葬于廣州沙川鸛隅之坐卯原 後以子貴 贈吏曹參判 以孫貴 加贈吏曹判書 配貞夫人 晋山姜氏敎官錫夏女 生後府君二李 卒後府君五十六年 葬祔坐甲 男致垕觀察使贈賛成 孫鍾正行判書 鍾直早卒 女尹心緯府使齊君守 曾孫世淵縣令贈判書 會淵參判 命淵都正 庶曾孫敬淵郡守 女孟克遠 判書取都正子東健爲后今判書 女柳詩申光訓徐謙輔李時敏前縣令 參判系后子東選 今主簿 女李道在參判 都正子長郞東健 次東獻前牧使 女李鳳秀前正 敬淵系后子東承 女鄭友德 東健子敎性今縣令 庶子斆性 東選子元性 女李純翼 東獻子學性今參判 學性女李鎬命 外裔并不錄
嗚呼 府君生於詩禮之門 又承過庭之訓 平日行範 必多可傳而不幸早世 考德無由 其爲後昆之恨 當如何哉 夫人事▨▨▨孝 敎子以義方 治家有法度 其詳載於允菴尹先生直菴申先生所撰碣若誌 頤何敢贅焉 玆因短表之竪 略識其陰如右
玄孫 東健 撰
五代孫 學性 書
前面 集韓濩字
崇禎紀元後 四甲辰 月 日立
출처 :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부시스템
김충백 부인 전주이씨 묘
김충백은 처사 김계의 장남으로 부모에 대한 효가 극진했다. 김충백 부인 전주이씨 묘는 최근에 석물을 갖춘 것이다. 이웃한 능선에 부군 김충백의 묘가 있고 그의 묘갈(金忠伯墓碣)이 특기한 것으로 1793년(정조 17년) 건립되었으며, 비문을 지은 이가 송시열(宋時烈)이고, 글씨는 당나라 시대의 명필인 안진경(顔眞卿)의 글자를 집자하고, 전액의 글씨는 당나라 시대의 명필인 이양빙(李陽氷)의 글자를 집자 한 것이다.
김충백묘갈
유명조선 효자 증통정대부 호조참의 김공 묘갈명 아울러 서문도 씀. 은진 송시열 지음 옛적에 순효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관향이 청풍인 김계로 자는 성부이다. 김계를 아버지로 하면서 능히 그의 행실을 닮은 자가 있었으니, 그는 김충백으로 자는 군서이다. 그는 일찍이 광주에서 살았는데, 광주 출신인 부사 이정집· 현감 박명우 등이 효종· 현종 때에 모두 장계로써 조정에 알려 금상 초기에 비로소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공은 1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서 매우 애처롭게 곡읍하였으므로 조문하는 자들이 차마 듣지 못하였다. 어머니를 섬기면서 항상 그 곁은 떠나지 않았으며, 어린애들이 하는 우스개짓을 하며 어머니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도 했다. 어머니의 고질병을 40년 동안 부축하고 약을 드렸으며, 북신에 기도하기를 하루같이 하였다. 어머니의 머리에 서캐와 이가 가득하자 공은 항상 어머니의 머리타락에 기름을 발라 빗어주고, 몸소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항상 땔나무를 저울질하여 따뜻하고 서늘한 정도를 알맞게 하였다. 난리를 피해 돌아다니면서 부지런히 이것저것을 캐고 주워 모아 모친의 구미에 맞는 것을 한번도 빠뜨리거나 늦춘 적이 없었다. 여러 명공들이 공에게 벼슬하기에 권유해도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봉양을 지금처럼 전념하지 못하게 될까 걱정스럽다.”고 말하였다. 모친의 상을 당함에 이르러서는 아주 적은 양의 물도 입에 넣지 않은 지가 7일이었고, 전란과 흉년 때문에 8개월 동안 묘소를 마련하지 못하자 죽을 먹기를 초상 때처럼 하였으며, 3년 동안 묘막에 살면서 몸소 부엌일을 하며 지냈다. 무릇 조상을 제사지낼 때는 정결함을 극진히 하여 비록 하인들이라도 또한 반드시 의복과 손 · 발을 깨끗이 하도록 하였다. 형제들과 더불어 우애를 돈독히 하여 일찍이 잠시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고, 며칠 동안이라도 보이지 않으면 문득 그리워서 눈물을 흘렸으며, 아우가 잘못을 저지르면 울면서 매질을 하였는데, 형이나 아우의 아내들도 또한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그르게 여기지 않았다. 그의 모든 행실의 뛰어남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공을 제대로 아는 자들은 모두 공의 소절로 여겼다. 왜적이 쳐들어 왔을 때 어쩌다가 모친의 소재를 잃었는데, 공은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 들어가 울부짖으며, 어머니를 찾자 왜적들이 처음에는 첩자로 여기고서 사정없이 결박하였으나 얼마 후에는 공의 지극한 효성에 감격하여 결박을 풀고 위로하며 보내주었다. 그 후에 명나라 장수가 공이 살던 여막을 지나다가 공이 예법을 행함을 보고, “중국의 조정에도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이 많지 않다.”고 말하고서 탄식하며 간 일이 있었다. 무릇 모친이 먹고 싶어 하는 것이 있으면 비록 제 철이 아닌 것이라도 구하면 곧 바로 얻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여겼는데 그것은 공의 행실이 지성에서 나왔기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김씨는 고려 때에 시중을 지낸 대유로부터 시작하여 본조에 이르러 관은 참의를 지냈다. 공의 고조인 극함은 군수를 지냈고, 증조인 우증은 중추부첨사를 지냈으며, 할아버지인 여광은 대호군을 지냈다. 공은 이미 자신의 아버지를 능히 본받았으며, 어머니인 안씨도 또한 공을 가르치고 인도함에 법도가 있었으니 공의 행실이 뛰어나면서도 충분히 갖추어진 것은 단지 타고난 성품이 훌륭해서만은 아니었다. 공의 부인은 여릉 민씨로 고년의 딸인데, 부덕이 능히 공에게 어울렸으며, 공보다 먼저 작고하여 청주의 탑연리에 따로 장사지냈다. 아들은 익신이고, 측실 소생은 익선 · 익호 · 익창이며, 딸은 주부 박사룡의 아내가 되었다. 익신은 수와 도를 낳았는데, 수는 참봉이고 이명흠· 민영수가 수의 사위이며, 도는 간과 재를 낳았는데 간은 출계하여 수의 후사가 되었다. 내외의 증손· 현손은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 없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이치로 만사를 관통하여 사해가 모두 표준을 삼았으니, 오직 공의 효적이 화맥에 미더웠도다. 세상에 순수한 행실이 없고서는 시골에서나마 행세할 수 있을까? 어찌 비액을 보지 않으리오. 임금의 은택이 얽혀 있도다. 숭정기원후 세 번째 계축년(정조 17, 1793년) 9월 일 세움 본문의 글씨는 안진경의 글자를 모았고, 제목의 전서는 이양빙의 글자를 모았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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