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샘의 역사나들이(답사)

청풍김씨묘문 의왕시 왕림, 김유 선생 묘 및 신도비

달이선생 2020. 1. 6. 10:00

청풍김씨묘문 의왕시 왕림

김유 선생 묘 및 신도비(김유 선생 묘역)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의 왕림마을은 숙,영,정조시기 세도가였던 청풍김씨 판서공파의 사패지로 입향조인 정국공신 김우증과 후손의 묘역과 세거지가 있는 곳이다. 2020년 1월 6일 월요일 눈과 비가 내리는 가운데 답사를 하였다.

  1번 국도를 따라 의왕시 고천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고천동주민센터를 지나 과천봉담간 고속도로 아래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먼저 보이는 것이 왕림마을 비석이고 그 뒷편으로 '청풍김씨묘문'이라고 쓴 비석이 나온다.

 

 

 

 

 

 

 

 

 

청풍김씨묘문비기문비

 

 

 1751년 정조대 영의정을 역임한 김치인이 국서체인 한호의 석봉체를 집자하여 건립한 것으로 1991년 4월 세운 기문비(규택[奎澤] 지음)에 따르면 원래 동입구 복전동(卜前洞) 초입에 세웠는데, 의왕시 승격과 함게 별묘(웃말)에 비각과 함께 이전하였다고 전한다. 지금의 위치는 남쪽 낙안동 왕림마을 입구로 이전된 것으로 별묘에 있던 비각은 없어지고 비만 서있다. 포털에 검색하면 사진이 나오는데 김우증 묘 아래 사당 청평사 옆에 세워진 김우증 신도비 사진이다. 

 

 

별묘마을에 서있던 '청풍김씨묘문비' 모습이다.(출처 : http://egloos.zum.com/pp19in/v/2111557)

 

 

  의왕시 왕곡동은 왕륜과 지곡마을을 합쳐 부른 것이고 왕륜마을은 청풍김씨 입향조인 김우증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정국공신 3등이 되면서 백운산(동), 오봉산(서), 지지대(남), 모락산(북) 사방십리를 사패지로 받아 형성된 마을이다. 

  김유(金楺, 1653~1719)의 선계는  입향조인 6대조 김우증, 5대조 김여광 그리고 김여광이 손이 없자 족문에서 양자온 고조부 김계, 증조부 김인백, 할아버지는 김극형이고 아버지는 전라감사 김징이다. 어머니는 함평 이씨로 양곡선생 이의길의 따님이다. 숙종대 홍문관 대제학을 역임한 문형 김유는 특히 그의 아들들이 현달하여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는데 이는 차남 김취로가 이조판서를 4남인 김약로가 좌의정, 막내인 김상로가 영의정에 올랐기 때문이다. 

  김유의 원배는 전주 이씨 이명진(월산대군 후손)의 딸로 일찍 죽어 후사가 없고 계배인 여산 송씨(송박의 딸)에게서 5남 3녀를 두었다. 차례로 김정로(좌랑), 김취로, 김성로(도사), 김약로, 김상로이다. 딸은 정석조, 황재하, 유봉에게 출계시켰다.

 

 

 

검재김선생화상 64세(김유 초상 보물 제1481호, 경기도박물관 소장, 출처 : 의왕시청http://photo.uiwang.go.kr/PhotoDetail.asp?photo_id=2993&mflag=photonew)

 

 

 

대제학(大提學) 김유(金楺)가 졸(卒)하였는데, 나이는 67세이다. 김유는 고(故) 상신(相臣) 김구(金構)의 아우로서, 박세채(朴世采)에게 수학(受學)하였는데, 문학(文學)으로 당시에 칭찬을 받았다.(大提學金楺卒。 年六十七。 , 故相之弟, 受學於朴世采, 以文學見稱於時。)-숙종실록 63권, 숙종 45년 3월 13일 병술(1719)

 

김유(金楺)가 졸(卒)하였다. 김유는 장리(贓吏)인 김징(金澂)의 아들로서, 천성(天性)이 바르지 못하여 관직(官職)에 있을 때 탐람(貪婪)하고 방종(放縱)하였으니, 양서(兩西) 의 관찰사(觀察使)가 되었을 때에는 부고(府庫)가 텅 비게 되었다. 구변(口辯)이 좋고 간사한 짓을 잘 꾸며서 마침내 사문(師門)의 모적(蟊賊)이 되었으니, 그가 장수(長壽)하여 뜻을 얻게 되었다면 세도(世道)의 폐해(弊害)가 어찌 이에 그쳤겠는가?(丙戌/金楺卒。 贓吏之子, 賦性傾邪, 居官貪縱, 按藩兩西, 府庫爲虛。 侫口文奸, 卒爲師門之蟊賊。 使其老壽得志, 世道之害, 豈止於是哉?)-숙종실록보궐정오 63권, 숙종 45년 3월 13일 병술(1719)

 

  김유의 졸기를 보면 노론의 주도로 쓰인 졸기는 단촐하고 소론이 추가한 보궐정오는 실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소론의 영수인 박세채를 스승으로 섬겼으나 당색은 노론으로 늘 ‘죽은 스승(박세채)이 송시열을 존경하고 윤증을 배척하였다.( "亡師尊而斥"-숙종실록보궐정오 권61, 숙종44년[1718] 4월 1일 기묘 )’라고 변호하였기에 소론의 입장에서 김유는 상당히 불쾌한 인물이었다. 노론에서도 박세채를 사사(師事 : 스승으로 섬김)한 전력으로 그의 평판에 대해 일체 거론하지 않으면서 박세채를 사사했다는 점만을 부각하였다. 이는 박세채가 소론의 영수였지만 노소분별과 정국에 강하게 편승하지 않았던 전력과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는 사사로이 사돈관계였기 때문이다.(송시열의 손자 송순석은 박세채의 사위이다)아울러 김유 자신 역시 송시열을 받들었고 노론의 영수격이였기 때문이다.

  김유 선생의 용모는 키가 크고 마른편이었으며, 가는 글씨를 볼 정도로 눈이 좋았다. 박세채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처음 학문을 하였고, 송시열은 그의 영특함을 총애하였다. 우의정을 지낸 김구가 형님으로 부모처럼 섬겼다. 김구는 아버지 돌아가자 그 슬픔을 못 이기고 돌아간 효자였다. 김구의 후손들은 현달하여 부자간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 김치인이 아들과 손자이고 정조대 좌의정이자 스승인 김종수는 둘째 아들 김희로의 손자이다. 막내 김무로의 7대손은 독립운동가인 김규식이다. 

 

  김유 묘역은 마을입구를 지나 왕곡천을 따라 백운산 입구 87번 버스 종점 방향으로 가다보면 신애교회가 나오는데, 교회를 끼고 바로 좌측으로 꺽어지면 좁은 골목을 지나 낮은 구릉의 묘역이 나타난다.

 

 

 

 

 

 

 

 

 

  묘역을 올려다보면 제일 먼저 커다란 옥계석을 얹은 김유 선생 신도비가 위치하고 그 위로 후손들의 묘소가 줄지어 있다. 원래는 후손들의 묘가 있지 않았는데, 2017년 과천에 묘소가 있던 4남 김약로의 묘소가 타인의 소유로 있어 이 소유자가 이장비용을 부담하여 이장이 결정되자 6월 13일부터 8월 13일까지 이곳 의왕시 왕곡동 산9-3번지에 이장하였다. 이때 김약로 선생 묘만이 아닌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쌍봉산 아래 있던 차남 김취로 선생 묘와 증손인 김숙연, 사남 김상로 선생 묘와 그의 아들 김치양, 치영의 묘까지 이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 묘역에는 맨 위 김유 묘소 아래로 오른쪽에 큰 아들 김정로 묘, 그 옆 둘째 김취로 묘가 있고, 그 다음 아래 김약로, 김상로 묘소 다음 아래 김치양, 치영, 김숙연 묘소가 나란히 위치한다.  

 

 

 

 

 

 

 

 

 

 

 

 

 

 

 

 

 

 

 

 

 

 

 

  문경공검재김선생신도비

좌의정을 역임한 이관명이 짓고 생질로 대사헌을 역임한 윤득화가 썼다. 전액은 우의정을 역임한 유척기이다.  신도비는 아들 김약로가 김유의 벗인 이관명을 찾아가 신도비명을 부탁하여 지은 것이다. 신도비의 규모는 높이 242cm, 너비 103cm, 두께 48cm에 이르는 큰 규모이다. 영조20년(1744)에 건립되었다.

 

문경공검재김선생신도비명
유명조선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수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의금부춘추관사 세자우부빈객 증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판의금부사 지경연사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시문경공 검재 김선생신도비명-서문을 겸함-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이관명 지음
생질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겸동지경연사 윤득화 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유척기 전자를 씀

내가 사직을 잃은 지 십수 년이 지났으나 사직의 청초한 풍채와 아름다운 의표는 어슴푸레 내 눈에서 아른거리지 아니 한 때가 없었다. 사직의 아들 약로가 하루는 내가 있는 적막한 해변을 찾아와 말하기를, “선친의 친구는 오직 어르신 밖에 없으니 선친의 묘비명을 써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나의 글이 어떻게 사직을 영원히 후세에 전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비록 그렇지만 예전에 내가 쓴 글이 투박하고 어려워 세상 사람들이 취하지 않아도 오직 사직만은 좋아하여서 사직이 죽은 뒤에는 나의 글이 나오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이제 사직을 위하여 세상을 전율시킬 만한 것을 골라 이에 명을 하고자 한다.
공의 이름은 유이고, 호는 검재이며, 사직은 그의 자이다. 청풍 김씨는 고려 문하시중 대유에서 나와 자손이 번성하고 고관을 이어갔는데, 집의로 추증된 계와 이조판서에 추증된 인백에 이르러서 모두 학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으니 실로 공의 고조와 증조이다. 조부는 극형으로 공조정랑을 지내고 찬성에 추증되었는데 도학으로 더욱 저명하였다. 부는 징으로 청렴하다는 명성과 곧은 절개로 일세를 풍미하였는데 벼슬은 전라도관찰사를 지냈고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비는 함평이씨로 양곡선생 의길의 딸이자 예문관봉교를 지낸 정의 손녀이다. 숭정 기원 계사 5월 20일에 공을 낳으니, 공은 타고난 품성이 밝고 명랑하며 총명함이 남들보다 뛰어나 책이 눈에 스치기만 해도 바로 그 자리에서 외웠고, 나이 겨우 7~8세 때에 이미 문장력이 날로 높아갔다. 커서는 남계 박선생 문하로 들어가 수업을 받았는데 견해가 명쾌하고 학식이 뛰어나 선생의 기대가 아주 커서 유도를 부탁할 정도였으며, 우암 송선생도 중시하여 항상 자리를 비어놓고 초대하였다.
갑인년에 소인배들이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러 두 분 선생께서 나란히 죄적에 걸리니, 공이 탄식하기를 “이 어찌 세상에 나아갈 때인가.”하고는 드디어 과거 준비를 그만두고서 가족을 데리고 이천에 우거하면서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 동방의 사대부들은 가훈을 가진 이가 적기에 가르침이 처자에게 행하여지지 않고 교화가 노예에게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고 가약 1편을 지었는데, 대요는 검약을 근본으로 삼았다. 또 일상의 일에도 정연한 예법을 마련하여 집에서 행하니 온 집안이 숙연하였고, 인근의 선비들 중에도 또한 이를 보고 감동하여 모범으로 삼은 이가 많았다.
병진년에 부친상을 당하자 상제를 모두 가례에 따랐으며, 제전은 반드시 몸소 지내되 아무리 몸이 불편하여도 하루도 폐함이 없었다. 경신년의 경화에 부모의 명으로 과거에 응하였으나 공의 본뜻은 아니었다. 계해년에는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경학에 뛰어났으므로 여러 차례 추천을 받았다. 을축년에 창릉참봉에 제수되고, 정묘년에는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며, 무진년에는 전설사 별검으로 옮겼고, 기사년에는 6품에 올라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 그 때에 간흉들의 뜻을 얻어 장차 경신 역안을 번복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조정에 있음을 꺼려하여 이인 찰방으로 내보냈고 다시 멀리 유배시켜야 한다고 계를 올리면서 극력 무고하였다. 임금께서는 삭직만을 명하였으나 공을 꺼리는 자들이 흡족하게 여기지 않아 결국은 금고를 당하였다. 이윽고 중궁이 손위하고 인륜이 무너지는 데에 이르자 공은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 날마다 학생들과 학문을 연마하기에만 힘썼다.
갑술년에 임금께서 지난날의 일이 잘못되었음을 크게 깨닫고 중전의 복위를 명하자, 이에 한두 재신들이 황급히 모였는데 그 거동이 수상하였고, 정원에서도 대신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회의하여 거행하자고 청하였다. 공이 이를 듣고는 크게 놀라 탄식하며 친구에게 서신을 보내 그 잘못을 극언하였다. 영상 남구만이 부름을 받고 서울 가까이 와서는 사람을 시켜 거취를 물으니 공이 다시 말하기를 “하루를 지체하면 중궁의 복위도 하루가 늦어지기 마련이니 하루라도 마땅히 하루의 책임을 져야 한다.”하고 또 이르기를 “인심이 무너지고 의리가 막혔으니 지금의 시급한 일은 명분을 세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였으나, 남구만은 끝내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신중하게 깊이 생각하여 의논을 정해야 할 것이라 주장하며 일세를 미혹하였고, 일부 기회주의자들도 그의 의견에 호응하니 나라의 절반이 이에 휩쓸렸다. 그러므로 공은 아주 미워하여 이들을 통렬히 배척하였다. 박선생이 입조하여 맨 먼저 명분을 세움에 이르러서야 승정원 및 전에 모여 회의하였던 재신들이 모두 죄를 입고 쫓겨났다. 이로써 기강이 다시 밝아지고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으나, 죄를 얻은 자들은 크게 원한을 품고 공이 뒤에서 조종하였다고 비방하였다.
경연에 참석한 신하 중에 공이 기사년에 무고당한 실상을 아뢰는 사람이 있었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그 때 대간의 장계가 날조된 것임을 내가 훤히 알고 있었다.”라고 하고 특별히 서용하라는 명을 내렸으며, 거듭하여 유신으로 하여금 교유문을 짓게 하니 참으로 각별하신 예우였다. 곧바로 사복시 주부를 제수하자 공은 은혜에 감사하여 나아가 사은하였으며, 수운판관과 호조좌랑으로 옮겨갔다. 을해년에는 박선생의 상을 당하여 9개월의 복을 입었고, 복을 벗자 용담현령에 제수되니 1년만에 유화가 크게 행하여졌다.
정축년에는 호조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으며, 무인년에는 장흥고 주부와 호조정랑에 제수되었고, 이어 과천현감으로 나갔다. 기묘년에는 증광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마침 합격자 중에 부정한 방법으로 합격한 사실이 발각되어 모든 합격이 취소되었다. 찬수낭청에 뽑혀 《여지승람》을 증보하였고, 사재감 주부에 제수되었다가 장악원 주부로 전보되었다. 신사년에는 고양군수에 제수되었고, 임오년에는 사도시 첨정에 제수되었으며 체직되어 장예원 사평과 한성부서윤에 제수되었다. 계미년에는 선공감 부정으로 승진하여 군역 개정의 일을 함께 관리하다가 부평현감에 제수되었다.
갑신년에 모친상을 당하자 슬픔이 법도에 지나쳐 날로 야위니 친척과 친구들이 모두 걱정하였으나 끝내 바꾸지 않았다. 병술년에 사복시 판관에 제수되었고, 정해년에는 연안현감으로 나갔는데 근무 성적이 한 도에서 가장 뛰어나 의복 한 벌을 하사받았다. 무자년에는 호조정랑에 제수되었는데 재상 최석정이 《예기유편》을 지어 《중용》《대학》을 다시 《예기》의 49편 속에 넣고 주자의 장구를 변역하여 새 주를 달았으며, 게다가 인출하여 경연의 강의에 참고토록 할 것을 청하고 이것을 자랑하려 하니, 공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유학의 변고이다.”라고 하고 극력 배척하였다. 이로써 사론이 드디어 일어나 상소를 올려 경서를 훼손하고 성현을 모독한 죄로 논하니 그 무리들이 공을 더욱 미워하여 내키는 대로 욕을 퍼부었다. 공은 벼슬을 내놓고 한거하였다.
경인년에 조정에서는 그 책을 불사르고 바로 공을 예빈시정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때에 기묘년의 방방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 임금께서 공론을 들어 회복을 명하였다. 이에 반대 세력이 힘을 합쳐 좌우에서 번갈아 일어나니 해를 넘겨가며 다투었다. 임진년에 처음으로 성균관 사예와 시강원 사서에 제수되었고, 계사년에는 지제교를 겸직하였으며, 이어 사헌부 장령과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 동안 사복시정에 제수되고 사간원 사간과 홍문관 수찬에도 제수되었으나 글을 올려 힘써 사양하니 비답은 더욱 간절하였고, 따로 하유하여 명분과 의리로써 꾸짖고 연석에서의 교지 또한 엄중하여 공은 부득이 나와 명을 받들어 부교리 겸 남학교수로 승진하였다.
임금께서는 이 때 《예기》<월령>편에 대한 강을 받고 있었는데, 공은 글에 따라 부연하여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장구에 따라 사물에 비겨 경계하였으며, 몸소 검약하고 귀척을 제어할 것과 양을 돕고 음을 누를 것,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를 권장하는 일을 간절하게 권하였으며, 더욱이 성색과 욕구에 대한 경계의 뜻을 전하였다. 또 고려말 정이오의 “입추의 땅도 모조리 왕후의 소유가 되었는데 오직 계산만이 속현이 많구나.”란 시를 인용하면서 궁가에서 산택을 병점하는 폐단을 극론하였으며, 불러 마주한 자리에서는 소식의 책략을 강론하면서 말하기를 “소식의 학문은 본래 신한에서 비롯되었기에 공리의 학설이 많아 주자도 일찍이 그의 학술을 공격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바 ‘천자는 반드시 가까이 하는 장수가 있어야 하고 장수는 반드시 가까이 하는 병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릅니다. 국가에서 사람을 쓸 때 정승과 장수보다 막중한 것이 없으니 마땅히 공정하게 가려서 써야 하거늘 그 사이에 어찌 사사로움이 끼어 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지금 붕당의 화는 장차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게 할 것이니 원컨대 아주 공정하고 지극히 분명한 도로 황극을 세우고 색목도 묻지 말며 오직 어진 인재만 등용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또 형법이 해이해진 폐단과 여항에서 일어나는 도에 넘치는 해독에 대하여도 말을 하였는데 모두가 당시의 병폐를 제대로 짚은 것이다.
일찍이 관중에 나아가 고사에서 송유 진덕수의 ‘안일에 빠지지 않으면 장수하고 어진 이를 가까이 하면 장수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경계의 말을 아뢰기를 “일상의 정서로 보면 편히 거처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이 오래 사는 길인 것 같지만 주공은 안일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써 나라의 운명을 길이 이어가는 근본으로 삼았으니 참으로 부지런히 힘쓰는 데에 길이 들어 조금도 게으름이 없다면 엄격히 삼가는 일이 날로 늘고 물욕은 물러나 저절로 장수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또 어진 이를 가까이 하면 장수한다는 것은 그 뜻이 이와 표리가 됩니다. 임금은 높은 자리에 있어서 안일하고자 하는 마음이 쉽게 생기니 씩씩한 사람과 어진 선비가 조석으로 같이 있으면서 바른 말로 일깨우고 정도로 인도하며 신체를 보양하고 욕심을 근절시킨다면 자연스레 수명을 단축시키는 일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송과 거란이 폐백을 늘려서 우호를 맺었으나, 부필은 오히려 업신여김을 당한 수치를 생각하도록 그 임금에게 고하여 경계시켰습니다. 요사이 저들이 우리를 후대하는 것을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도리어 안색을 바꾸고 서로 기뻐하며 물리치지 않고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오랑캐들은 흉악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으니 마땅히 빈신을 경계하고 그들의 속셈을 미리 알아차려서 수모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전하께서도 마땅히 부필의 말을 깊이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북사가 입성하는 날 큰 비가 쏟아지니 공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물은 음기이니 유추하자면 소인이 되고 이적이 되는 법인데, 이제 오랑캐의 사신이 성에 들어와 있으니 하늘이 경계심을 보인 것입니다. 천하의 걱정은 항상 소홀한 데서 생기는 법이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의 음기가 처음 생기는 때를 당하여 홍수가 일어서 양기를 핍박하니, 이는 소인 한 사람이 여러 군자를 엿보는 상으로 더욱 염려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북사 목극등이 여러 차례 왔었는데 연신이 은밀히 그에게 폐백을 보내 우대하는 뜻을 보이자고 청하자, 공이 소를 올려 말하기를 “그가 만약 의리를 내세워 물리친다면 이는 스스로 이적들에게 욕을 취하는 일이 될 것이며 그가 그들의 일행에게 폭로하여 자신의 청렴을 드러내고 그들의 군주에게 고하여 자신의 신임을 굳히는 데에 이용한다면 천하가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또한 부사에게는 시기심을 심어주는 단서만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상사가 과연 의심하고 노하여 싸움의 단서가 층층이 노출되는 것이 한결같이 공의 말과 같았다.
공은 홍문관에 있었던 7일 동안에 여섯 번이나 경연에 나아갔는데, 아뢸 때에는 정성을 다하고 해가 기울어서야 나오곤 하면서 강개한 심정으로 임금의 덕이 펼쳐지도록 돕고 인도하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다. 그러나 간간이 왕의 뜻을 거스르는 말도 많이 하여서 임금께서 점점 꺼려하는 빛을 보이자 공은 바로 물러났으며, 그로부터 하늘의 조짐 또한 자주 나타나지 않으니 공은 더욱 조정에 있기가 불안하여졌다. 그 때에 장령 서명우가 상소하여 조신들을 거의 빠짐없이 무고하고 또 과방을 회복시킨 일을 제기하며 공이 준비한 것이라고 모독하였다. 후에 시강원 문학과 중학교수를 겸직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글을 올려 고사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외직을 구하여 곡산부사로 나갔다. 곡산은 벽지에 처하여 사람들이 학문을 몰랐다. 공은 나이 어린 자제들을 모아놓고 부지런히 학문을 깨우치니 오래지 않아 문교가 크게 일어나 원근에서도 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다. 공이 돌아옴에 이르러서 모두 추모가 그치지 않았으며,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기까지 하였다.
갑오년에 유신 중에서 공이 경학에 뛰어나니 의당 경장 안으로 소환하여야 한다고 하자, 임금께서 좋다는 답을 내렸으나 명을 내리지는 않았으며, 가을에는 의주부윤으로 승진하였으나 전임자를 유임시키고 공은 부수찬 겸 시강원 보덕으로 체직하였다. 을미년에는 수원부사를 제수받고 품계는 통정대부로 올랐다. 황해도관찰사로 이직하여서는 폐단을 없애고 가난한 백성들을 소생시켰다. 더욱이 유교를 보급하는 데 힘썼는데 해서에는 옛날에 율곡선생의 향약이 있었으나 폐하여져 시행되지 않았으므로 공이 윤색을 하여 다시 밝히니 한 지방이 다시 일어섰다. 정유년에는 사간원대사간에 제수되었는데 취임도 하기 전에 평안도관찰사로 이배되고 품계는 가선에 올랐다. 공은 청렴으로써 자신을 신칙하고 근면한 태도로 일에 임하였으며, 힘 있고 교활한 자는 억누르고 은혜는 약한 백성들에게 고루 미치게 하였으므로 치적이 크게 나타났다.
윤증의 문도인 이세덕이 북을 치고 그의 스승을 송사하면서 박선생의 말을 끌어다 거짓 증명을 하니, 공이 글을 올려 변론하고 이어서 논하기를, “화란을 치른 뒤에 인심이 크게 변하여 존주의 대의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만일 효종대왕이 위에서 창도하고 몇몇 선정신들이 아래에서 천명하지 않았다면 예의지국이 하마터면 오랑캐의 나라로 전락할 뻔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순리를 돕지 않아서 무기만 뜻밖에 남았지만 남기신 풍속과 명성은 또한 인심을 맑게 하고 천리를 밝히기에 충분하였으니 종사가 이어가고 인륜이 실추되지 않게 한 것이 누구의 힘이었겠습니까? 지난번 공공연히 대의를 배척하면서 실현 가능성 없다는 말이 거실의 입에서 나왔는데 윤증의 의서가 나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말이 분명 전수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자고로 성현이 당시에 도를 실행할 수 없으면 언어와 문자를 빌어 뜻을 전하는 것은 주공이래로 다 그러하였습니다. 만약 성공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허망하다고 말한다면 공자는 춘추를 짓고도 난신적자를 베지 못하였을 것이고, 양묵을 물리치고도 하우에 비교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애석하도다. 그 말대로라면 80년 공부는 대의가 허망하다는 설을 얻어서 세상을 오도하였다고 간주될 따름입니다. 청컨대 문장을 짓는 신하에게 대고를 모방하여 짓게 하고 전국에 게시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니 그 때에 왕세자가 대리청정하면서 가납한다는 비답을 내렸다.
무술년에 많은 선비들이 박 선생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청하자 연소한 대관들이 멋대로 헐뜯는데 말을 가리지 않았다. 또 공이 사론을 일으켰는가 의심하고 그를 배격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였던지 공의 아들로 한림에 있는 이에게는 ‘기세가 등등하다’고 말하는 데까지 이르니, 공이 크게 두려워하여 네 번이나 상소를 올려 해직을 빌었으나 불허하고 별도로 교유를 내려 공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공이 정유년에 봉장을 올린 후로 이당들이 더욱 이를 갈더니만 이때에 이르러 적신인 명의가 정언이 되어 공을 매우 급하게 몰아붙여 탐욕스럽다고 모독하는 데에 이르니, 공이 글을 올려 조사하여 명백하게 밝혀 줄 것을 청하였다. 세자가 비답하기를 “위험한 말은 오로지 허구와 날조에서 나온다. 경이 그런 일을 당해 아주 원통하겠지만 성명께서는 이미 통촉하고 계시니 조사하여 밝힐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은 문을 닫고 몇 달에 걸쳐 연달아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고, 마침내 대신의 말로 인하여 비로소 체직을 허락받았다. 공은 우아하고 지조가 있으며 청렴결백하여 양서를 맡아서는 재화 보기를 기름이 옷을 더럽히는 것처럼 하여서 부고는 가득차도 돌아오는 행차는 쓸쓸하였으니, 사람들이 이것으로 그 말이 거짓임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
비변사당상, 병조참판, 동지의금부사, 세자우부빈객을 제수받았고 연거푸 외직을 수행하고 돌아와 성밖에 이르러 수하에게 부신을 전하게 하고는 바로 향리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임금의 병이 더욱 중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안부를 묻기 위하여 마침내 입성하였다가 연이어 홍문관부제학, 사헌부대사헌, 사역원제조의 제명을 받았다. 공이 머뭇거리고 직에 나가지 않으니, 그 뒤에 한성부 우윤을 거쳐 이조참판, 양관의 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춘추관사, 전생서제주를 배수하였다. 공은 서울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사직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임금의 병이 위독하게 되자 ‘한결같이 사퇴만 하는 것도 신하된 자의 직분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억지로 나아가 숙배하고 날마다 나아가 임금의 상태를 살폈는데 일찍이 하루도 병을 핑계로 거른 적이 없었다.
기해년 3월에 시원에서 돌아오자 병이 나 13일에 서울 사저에서 죽었다. 병이 더 심해지는 데에도 정신은 태연하여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들 정로 등이 뒷일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가 커다란 은혜를 입어 지위가 경의 반열에까지 올랐으나 한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한 가지 일도 행하지 못하였으니 은혜를 저버림이 많은데 어느 겨를에 가사에 생각이 미치겠느냐.”하고는 부녀자들을 손짓하여 나가게 하였다. 곧 옷을 갈아입히고 깨끗한 자리를 펴게 하였으며, 염습에는 비단을 쓰지 말라고 당부하고는 베개를 바로 하고 옷깃을 여미고서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다.
부음이 조정에 알려지니 조의·제사·부의를 의례대로 행하였으며, 세자는 특별히 관을 내리고 궁관을 보내 조문하였다. 5월 18일에 광주 백운산 서록 탕산 선영 옆 축좌미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 후에 둘째 아들의 훈적에 따라 의정부좌찬성으로 증직되었다.
공은 장신에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랐고 심사와 언행은 온화하였으며, 눈빛이 빛나 능히 몇 발짝 밖에서도 가느다란 글씨를 분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시문을 짓고 예를 중시하는 가문에서 생장하여 어려서는 가학에 따랐고, 커서는 현사의 가르침을 따랐다. 정로로 벼슬을 시작하여 주야로 부지런히 학문을 익혀 입에서는 여러 성인들의 말이 끊이지 않았고, 손에서는 백가의 책이 떠나지 않았다. 자신을 돌아보는 방도에 마음을 쏟고 깊이 연구하는 데 힘을 써서 총명한 예지가 비추는 바를 묵묵히 깨달았고, 하늘과 사람의 성명의 심오함과 음양이 접혔다 펴졌다하는 묘리를 두루 알았으며, 경곡상변의 제도와 고금치란의 형적을 소상하게 이해하고 꿰뚫어 막히는 바가 없었다.
부모를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데에는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맏형을 엄부처럼 섬겼다. 평소에도 새벽이면 일어나 세수하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었으며, 한 번도 말을 조급히 하거나 급히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태만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야비한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으며, 바둑같은 유희물이나 이단의 서적은 한 번도 가까이 하지 않았고, 다 헤어진 자리에 먼지가 수북하여도 담백하기가 조용한 선비와 같았다. 임금을 섬김에는 직간하여 꺼리지 않는 것을 주로 삼고 나라 일을 꾀함에는 큰 것을 끌어다가 멀리 경영함에 힘썼으며, 외직에 나가서는 교화에 전력하니 고을 백성들이 기뻐 날뛰었다. 문장은 맑고 뛰어나며 표현이 풍부하여 한가로운 구름이 산상에서 피어오르듯 변화가 무상하였고, 장강이 바다로 들어가듯 출렁거려 멈춤이 없었다. 일을 논하는 글에 이르러서는 명백하고 자세하며 끝까지 밀어붙였으니, 송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게 만들었다.”고 하였다.
공은 생삼의 의리가 중차대한데 회니의 사건이 있고부터는 사제의 도리가 남김없이 파괴되어서 근래에 자제가 부형에게, 젊은이가 어른에게 전혀 바른 행실이 없고 공경할 줄을 모르게 된 것은 모두가 사도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동문의 선비로서 혹 각기 사견을 주장하여 선생의 뜻과 배치된 사람이 있으면 바로 의리를 끌어들여 심하게 질책하였고, 제자들에 대해서도 반드시 스승을 받들고 어른을 공경하라는 말로서 반복하여 일깨워주었다. 사람의 재주와 품성에 따르고 교도하는 데에도 방도가 있었으니, 일찍이 말하기를 “학문은 별 것이 아니다. 단지 일상에서 마땅히 실행해야 할 도리일 뿐이니 고인의 언행을 내 마음과 몸으로 체험하다 보면 얻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평생 공부하면서 《소학》에 가장 심취하였고, 만년에는 《중용》과 《주자서》를 즐겨 읽기를 늙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할 때나 사물을 접할 때에는 드러내지 않되 진심과 성의를 보이고 화기애애하였다. 간사한 논설을 배척하고 유도를 두둔하는 것을 의연히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고, 득실과 영욕 때문에 절대로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으며, 은거에 뜻을 두어 일찍이 팔회시를 지어 뜻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저술로는 《소학집주증보》《주자외기》《존주록》 및 문집 약간권이 있는데, 집에 소장되어 있다.
공의 첫 번째 부인은 전주 이씨로 호군을 지낸 명진의 딸이자 원산대군 정의 후손이다. 부덕이 있었으나 일찍 죽어 자식이 없다. 두 번째 부인은 여산 송씨로 군수를 지낸 박의 딸이자 참판을 지낸 시길의 손녀인데 5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정로는 좌랑을 지냈고 취로는 판서를 지냈으며 성로는 도사를 지냈고 약로는 교리를 지냈으며 상로는 생원이다. 딸은 현감을 지낸 정석조와 사인 황재하, 좌랑을 지낸 유봉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정로는 생원인 한석좌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은 없이 딸 하나만 두었으므로 생원인 치량을 계자로 두었고 딸은 심순에게 출가하였다. 사인인 이석록의 딸에게 재취하였다. 취로는 판서를 지낸 이기하의 딸에 장가들어 2녀를 낳아 진사인 홍계희와 조정규에게 각각 출가시켰고 사인인 정호의 딸에게 재취하여 1남을 낳았는데 정로의 후사가 되었다. 사인인 홍중채의 딸에게 삼취하였다. 성로는 도사를 지낸 조상적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인 치온을 낳았고, 사인인 이수방의 딸에게 재취하여 1남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약로는 감사를 지낸 이해조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치공·치검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상로는 참판을 지낸 조정만의 딸을 취하여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맏사위 정석조의 아들은 신검이고, 사위는 급제한 이산배와 김인대이다. 둘째 사위인 황재하의 아들은 설과 섭이고, 사위는 한시대·이성증·정증이다. 셋째 사위인 유봉의 아들은 덕중이다.
오호라! 상서로운 봉황과 기린은 세상에서 고귀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고, 청천백일은 노예들도 알리라. 공은 온화하고 순수한 자태와 독실한 학문으로 교양이 매우 두텁고 표리가 투명하였으며 규모와 제도는 온전히 정주의 성법을 따랐고, 언론과 시비는 반드시 의리를 주장하여 학술과 언행이 두루 세상에 모범이 될 만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세상의 가르침이 퇴폐하고 인심이 무너져 춘추의 의리를 목석처럼 여기고 사제의 의리를 쓸모없는 것처럼 버려서, 점차 명의가 크게 무너지고 광란이 세상을 뒤덮었다. 공은 이를 크게 걱정하여 엄히 꾸짖고 준엄하게 배척하여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니, 모든 악담이 한데 모이고 많은 화살이 몸을 에워싸 마침내 조정에서 조금도 편안할 수가 없었다. 하늘도 매정하여 오래 살지도 못하여 그의 재주를 열에 한 두 가지도 펴보지 못하게 하였으니, 슬프도다. 이것이 운명이란 말인가?
전에 나는 공과 한 마음으로 막역하게 지냈다. 우리 중에 신익중이란 사람이 있어 3인이 매번 시사를 걱정하고 강개하여 서로 흐느끼기도 하였는데 익중이 병상에 있으면서 정중하게 부탁하기를 “국사는 아직도 가망이 있으니 두 분은 힘써 주게나.”하였다. 나와 공이 매우 근심하며 수년 동안 고생한 것은 어떻게든지 국사를 도와 멀리 간 친구의 부탁에 조금이라도 부응해 보려는 것이었는데, 공이 죽은 뒤에 간사한 논설은 더욱 세차게 일어나 큰 화가 하늘에 닿을 듯하였으니 인륜도 망하고 국세도 위태롭게 되었다. 전날을 돌아다보며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진 꼴이니 두 공의 영령도 응당 저승에서 가슴 아파할 것이로대, 백발 성성한 인간이 또한 더불어 이야기 할 곳도 없으니 뒤따라 죽는 자의 슬픔이 어찌 다 함이 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훌륭한 현옹은 간세의 명현으로
공은 그 서업을 이었으니 참으로 근원이 있도다.
정수한 천품에다 학덕을 더하였으니
좋은 옥에 탁마를 더함과 같도다.
묘리에 잠심하여 견식이 탁월하였고,
논설은 패연하여 의혹이 얼음 풀리듯 하였다네.
세교가 쇠하니 거짓과 참람만 불어나는게,
이단을 막고 사도를 펴는 책임 공이 아니면 누가 질 것인가?
비분하여 자신도 잊고 한 손으로 냇물을 막아,
정론을 부식하였으니 공이 사문에 있도다.
뭇사람이 지껄여 시기하여 기구함을 감수하였지만,
행지가 인력으로 됨이 아닌데, 어찌 폐인을 가까이 하랴?
깊이 주지를 받아 만년에야 숭반에 올라서고,
금화· 세전에서 당우를 강론하였도다.
한정의 걱정을 나눠 문옹은 교화를 천명하고
사단에 깃발 꽂고 일전에 패권을 차지하였네.
절월잡고 외지로 돌아, 조정에 있음을 두려워하고,
세월은 자꾸만 저물어가니, 세상을 걱정하여 격앙하였도다.
마음은 울적한데 병마가 드니,
정기는 산하로 돌아가고, 슬픔은 사림에 얽히도다.
사람은 나면 죽는 것, 온전히 돌아가기도 어려운데
공은 천부를 받아, 먼저 큰 공을 세웠도다.
이륜이 공의 힘을 입었으니, 백세토록 찬송이 있으리라.
나의 명은 거짓이 아니로니 내세에 보이노라.

계축년에 비문이 만들어졌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비석을 세우지 못하다가 8년 후인 신유년에 상신이 연석에서 “법전에 품계가 정2품 이상은 역명을 하여야 한다는 규정을 지켜야 한다”고 아뢰니, 왕이 이를 허락하고 마침내 선생에게 ‘문경’이란 시호를 내렸으니, 학문에 힘쓰는 것을 ‘문’이라 하고 조석으로 경계하는 것을 ‘경’이라 한다.
이부인은 효종 신묘 6월 20일에 출생하여 현종 경술 11월 2일에 죽었다. 송부인은 덕이 있고 행실이 순수하였으며, 부도를 극진히 행하여 그 도리를 다하였고 어머니로서도 그 도리를 다하여 향당과 친척들 모두 경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효종 계사년 10월 8일에 출생하여 금상 정사년 12월 21일에 죽었다. 이부인과 송부인은 선생의 묘 좌우에 나란히 합사하였다.
아들 성로는 목사, 약로는 판서, 상로는 부제학을 지냈고 사위로 황재하는 현감, 유봉은 군수를 지냈다.
손자 치량은 봉사, 치온은 도사를 지냈고, 치공은 진사이다. 정신검은 판관, 홍제희는 참의를 지냈으며, 김인대는 참봉이다. 약로의 막내 아들은 치격이고, 딸은 박형원에게 출가하였으며, 상로의 아들은 치양과 치영인데, 치영은 취로의 후사가 되었다. 치온의 아들은 종설이다.
추가로 안 것을 대략 기록하여 원문에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였다. 손자와 증손자로서 결혼하지 않은 자 및 외증손 이하는 너무 많아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숭정 기원후 117년 갑자 5월 월 세움
 
 
有明朝鮮嘉善大夫吏曹參判兼守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義禁府春秋館事 世子右副賔客贈崇政大夫議政府左賛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諡文敬公儉齋金先生神道碑銘并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世子傅李觀命 撰
甥 姪 嘉 善 大 夫 司 憲 府 大 司 憲 兼 同 知 經 筵 事尹得和 書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俞拓基 篆
自吾失士直經十數寒暑士直之淸標雅儀未甞不怳然接乎吾目士直之胤若魯日訪吾寂寞之濱謂曰先大夫執友惟丈人在請以銘先大夫墓曰吾之文何足以不朽吾士直
乎雖然昔吾爲文檏而晦世莫取獨士直好之子期死吾之聲不發久矣今爲士直銘其必有犂然合者矣公諱楺號儉齋士直其字也淸風金氏出自高麗門下侍中諱大猷子孫
蕃衍圭組相承至諱繼贈執義諱仁伯贈吏曹判書俱以學行名於世寔公之高曾祖也祖諱克亨工曹正郎贈賛成道學尤著考諱澄淸名直節聳動一代官全羅道觀察使贈領
議政妣咸平李氏亮谷先生義吉女藝文館奉敎瀞孫以 崇禎紀元癸巳五月二十日生公姿稟爽朗聰明絶倫書過目輒成誦年纔齠齔文詞日富旣長就南溪朴先生門受業
見解明透學識超詣先生期待特甚許以斯道之託尤庵宋先生亦重之常虛坐延之甲寅羣壬用事兩先生竝罹罪籍公歎曰此豈進取時乎遂廢擧業挈家寓居于利川杜門請
學甞謂吾東方士大夫鮮有家訓是以敎不行於妻子化不及於奴僕乃著家約一篇大要以儉約爲本而日用事爲井井有禮法行之於家闔門肅然鄰近士子亦多觀感而取則
焉丙辰丁議政公憂喪制一遵家禮祭奠必躬薦雖病未甞一日廢庚申更化以親命赴擧非素志也癸亥中司馬屢以經學登薦剡乙丑遂除昌陵參奉丁卯拜義禁府都事戊
辰遷典設司別檢己巳陞六品爲義禁府都事時奸兇得志將反庚申逆案忌公在王府黜爲利仁察訪旋發遠竄之啓極力誣衊 上只命削職忌嫉者猶未甘心後竟禁錮及至
坤聖遜位倫常斁敗公謝絶世事日與學徒講劘甲戌 上心大悟命復 坤位一二宰臣蒼黃聚會擧錯駭異政院亦請待大臣入來會議擧行公聞之駭嘆移書親舊力言其
非領相南九萬承召至近畿因人問去就公復曰一日留滯則 坤聖復位遲了一日當受一日之責又曰人心陷溺義理晦塞當今急務莫如扶植名義南終不用倡爲深長慮之
議以惑一世一種顧瞻之徒從而和之半國靡然公深惡而痛斥之及朴先生入朝首扶名義伊時政院及聚議宰臣竝罪黜於是倫紀復明人心大定而得罪名義者大生愠憾詆
毀公俑此筵臣有白公己巳被誣狀 上曰向日臺啓之揑虛子所洞知特下敍命仍令儒臣諭意實異數也即拜司僕寺主簿公感恩出謝遷水運判官戶曹佐郎乙亥哭朴先生
服九月之制拜龍潭縣令期年儒化大行丁丑拜戶曹佐郎陞正郎戊寅拜長興庫主簿戶曹正郎出爲果川縣監己卯擢增廣文科適榜中人幻弄盜占事發一榜遂罷焉選纂修
郎廳增補輿地勝覽拜司宰監主簿轉掌樂院主簿辛巳拜高陽郡守壬午拜司䆃寺僉正褫拜掌隸院司評漢城府庶尹癸未陞繕工監副正兼管釐正軍役拜富平縣監甲申丁
李夫人憂哀毀踰制澌綴日甚親戚知舊皆爲公憂終不變丙戌拜司僕寺判官丁亥出爲延安縣監以治最一道受表裏之賜戊子拜戶曹正郎倖相崔錫鼎作爲禮記類編庸學
二書還入於四十九篇之中而變易朱子章句創爲新註仍請入梓參講法筵欲以是自誇公曰此斯文之變也極力斥之士論遂發疏論毀經侮賢之罪其黨恚公益深恣意醜辱
公解官閒居庚寅朝廷火其書即拜公禮賔寺正不就時言己卯榜可復者衆 上採公論特命復之於是羣憾挾力左右迭起歷歲爭執壬辰始拜成均館司藝侍講院司書癸巳
帶三字䘖拜司憲府掌令弘文館校理皆不就間拜司僕寺正移司諫院司諫弘文館修撰又拜章力辭 批旨愈懇別諭責以分義筵敎又嚴截公不得己始出拜命陞副校理兼
南學敎授 上方講禮記月令公因文演義逐章寓誡懇懇乎躬儉約御貴近扶陽抑陰愛民勸農之事而尤致意於聲色嗜欲之戒又引麗末鄭以吾立錐地盡入侯家惟有溪山
屬縣多之詩極論宮家并占山澤之弊因召對講蘇軾策略曰軾之學本自申韓多有功利之說朱子甞攻其學術其所謂天子必有所私之將將軍必有所私之士者非矣國家任
人莫重於相與將尤宜公而擇之何可容私於其間乎又曰當今朋黨之禍將至亡國願以大公至明之道建極于上勿問色目惟賢才是用又陳刑法解弛之弊閭巷僭踰之害切
中時病嘗進館中故事引宋儒眞德秀無逸則壽親賢則壽之說陳誡曰以常情言之安肆逸樂似爲壽考之道而周公以無逸爲享國永命之本者誠以習爲勤勞無少怠荒則莊
敬日彊物欲退聽以自至於壽考親賢則壽者其義與此相爲表裏人君處崇高之位逸欲易生莊人拂士朝夕與處誨之以正言引之以正道保養身體禁絶嗜欲則自可無損壽
之道矣又曰宋與契丹增幣結好富弼尙以思其輕侮之恥告誡其君近日彼之優厚我者莫知其何意而乃反動色相喜曾不却顧夷虜兇狡有餘宜飭儐臣預度機宜母令納侮
殿下亦宜深省於富弼之言北使入城之日大雨暴注公上劄曰水陰氣在類爲小人爲夷狄今虜使在城皇天示警天下之患常起所忽不可不深念况當一陰始生之時大水
用事陵逼陽氣此爲一小人欲乘衆君子之尤宜惕慮北使穆克登嘗屢至筵臣請密贈以示優待之意公陳疏曰彼若據義却之則是自取辱於夷狄也彼又彰言行中以著廉
歸告其主以固信天下聞之以我爲何如也且只給副使猜疑之端必生矣上使果疑怒釁端層出一如公言公七日玉署六登講筵敷奏諄勤日晨乃出慨然以輔導 君德爲巳
任而間多觸忤之言 上稍示訑訑色公遂即引退自是 天點亦屢靳公益不安於朝時掌令徐命遇疏誣廷臣殆遍且提復科事詬辱公備至後有兼侍講院文學中學敎授之
除上章固辭不復就求外出谷山府使谷處僻奧人不知學公聚年少子弟勤自勸誘未幾文敎丕興遠近聞風四集及公之歸追思不已立祠祀之甲午儒臣言公經學宜凾召還
經幄 上優答而未即命秋陞義州府尹以前尹仍任褫拜副修撰兼侍講院輔德乙未拜水原府使陞通政移拜黃海道觀察使祛弊蘇殘尤以儒敎爲務海西舊有栗谷先生鄕
約而廢不行公修潤而申明之一路興起丁酉拜司諫院大司諫未納節拜平安道觀察使陞嘉善公兼以持己勤以莅事威制豪猾恩洽疲氓治績大著尹拯門徒李世德擊鼓訟
其師而誣引朴先生語爲證公上章辨白仍論禍亂之餘人心大變尊周之義殆乎泯滅儻非 孝宗大王倡揭於上一二先正闡明於下則禮義之邦幾淪於左衽之域矣人不助
順弓劍遽遺而遺風餘聲亦足以淑人心而明天理 宗社靈長倫常不墜者是誰之力頃者公排大義以爲空言無實者忽發於巨室及拯擬書出乃知此說明有傳授自古聖賢
不得行於當時則寄諸言語文字者由周公以下皆是也若以無成功而謂之虛假則春秋之作不足以誅亂賊楊墨之闢不足以比夏禹惜乎其八十年工夫只做得大義虛假之
說以誤世而己乞令詞臣擬作大誥揭示遠邇時 王世子代理優批嘉納戊戌多士發朴先生從祀之請年少臺官妄肆譏詆語多不擇且疑公激成士論排擊之不足拜及公子
之在瀛館者至謂之氣勢煥爀公大駭懼四上書乞解不許別諭開釋自公有丁酉封章尼黨尤切齒至是賊臣明誼爲正言持公甚急至以貪饕污衊之公上章乞賜查明 批曰
危險之言專出構揑卿所遭之至寃 聖明業已洞燭何待查明公閉閤累月連章力辭最後因大臣言始許褫公雅操淸潔及莅兩西視財貨若脂膏之污衣府庫充歸槖蕭然
人以此益知其言之誣罔焉籌司有司堂上兵曹參判同知義禁府事 世子右副賔客除召聯翩路中歸到城外使褊裨納符將直返鄕里聞上疾添重爲便承候遂入城連有
弘文館副提學司憲府大司憲司譯院提調之除公逡巡不就後由漢城府右尹拜吏曹參判兩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春秋館事典牲署提調公以爲在京累辭不得當 君
父病劇之日一向辭退非臣子分黽勉出肅日赴候班未嘗一日以疾病休己亥三月自試院罷歸疾作十三日卒于京第當其疾革神氣泰然少無戚戚容子正魯等問後事答曰
吾獲蒙洪造致位卿班尙不能進一言行一事所負多矣何暇念及家事揮婦女出戶即令屏去褻衣易布淨席戒令襲斂勿用錦帛正枕整襟而臥翛然而逝訃聞于朝弔祭賻如
儀 世子特賜棺材遣宮官致弔以五月十八日葬于廣州白雲山西麓碭山先塋側抱未之原後以仲子從勳贈議政府左賛成公長身瘦骨穆然淸高目光烱烱能辨細字於數
丈之外生長詩禮之門幼襲庭訓服膺賢師之敎發軔正路而蚤夜孜孜口不絶群聖人言手不釋諸百家文加意存省之方用力窮格之工明睿所照默識㫄通天人性命之奧陰
陽屈伸之妙經曲常變之制古今理亂之跡融會貫穿無所礙滯事父母奉祭祀至其誠敬事伯氏如嚴父平居夙興盥櫛終日危坐未嘗有疾言遽色惰慢之氣不設於身鄙俚之
言不出於口棊弈之戲異端之書無一近身弊席凝塵淡若寒士事 君以犯顏勿斯爲主謀國以挈大經遠爲務莅外專尙敎化士林聳動文章淸秀富贍若閒雲出峀變態無常
長江赴海逝波不停至於論事之文明白精切推致窮極宋先生嘗曰令人有望洋之歎公以爲生三之義重且大而自有懷尼事師生之道廢壞無餘近世子弟之於父兄幼少之
於長老專無行誼不知爲敬者率由於師道之不明也同門之士或各主私見有背師旨者輒引義切責對學者必以隆師敬長之說反復曉諭隨人才品誘掖有道襮曰學門非別
件物事只是日用當行之道古人言行體驗於心身上可以有得矣平日用工最深於小學晚又嗜中庸朱子書至老不倦待人接物不設表嘗開心見誠和氣藹然至若闢邪說衛
斯道毅然爲巳任得失榮辱絶無欣戚雅意丘園嘗述八懷詩以識其志所著小學集註增補朱子外紀尊周錄及文集若于卷藏于家公元配元山李氏護軍鳴震女月山大君婷
之後有婦德早世無子繼配礪山宋氏郡守搏女參判時吉之孫生五男三女男曰正魯佐郎曰取魯判書曰省魯都事曰若魯校理曰尙魯生員女適縣監鄭錫祚士人黃在河佐
郎俞崶正魯娶生員韓碩佐女無嗣有一女所後子致良生員女沈錞再娶士人李錫祿女取魯娶判書李基夏女生二女長洪啓禧進士次趙正逵再娶士人鄭鎬女生一男即爲
正魯後者三娶士人洪重埰女省魯娶都事趙尙迪女生一男致溫再娶士人李秀芳女生一男幼若魯娶監司李海朝女生三男一女致恭致儉餘幼尙魯娶參判趙正萬女生二
男一女幼鄭男愼儉女壻及第李山培金仁大黃男㰔女壻韓始大李省曾鄭增俞男德中鳴呼祥鳳瑞麟世莫不貴靑天白日奴隷亦知以公溫粹之姿篤實之學充養深厚表
裏瑩澈規模制度一遵程朱成法言論是非必主義理學術言行皆可爲範於世而不幸世敎頹敗人心陷溺春秋之義視若土梗師生之分棄如弁髦馴致名義大壞狂瀾滔天公
大爲是懼嚴辭峻斥不少沮撓於是群嗔如屋衆鏑叢身終不能少安於朝廷而天不憖遺又靳遐齡使其蘊抱不克施一二嗟乎此豈命耶昔吾與公同心莫逆而吾黨有申翼仲
者三人每憂時慷慨相對歔欷翼仲病在牀丁寧屬之日國事尙可爲二子勉旃噫吾與公憂心惙惙勞辛於數年之間者寧有粗裨國事少副長逝之託而公歿之後邪說益作大
禍彌天彝倫滅矣國勢危矣回視曩昔一落千丈二公之靈想應䀌傷於冥冥而白首人間無與告語後死之戚曷其有極銘曰
猗歟玄翁間世名賢 公承厥緒儘有淵源 精粹之姿輔以學力 如彼良王而加磨琢 潜心理妙識解超卓 論說沛然氷解凍釋 世敎之衰詖淫目滋 距闢之責非公
伊誰 憤不顧身隻手障川 扶植正論功存斯文 衆咻群猜甘心齮齕 行止非人嬖臧奚尼 深結主知晚躡露衢 金華細氈講論唐虞 漢庭分憂文翁闡化 亦幟詞
壇一戰定霸 弭節逡巡居寵若驚 歲月晼晚憂時激昂 丹衷欝欝二豎沈沈 氣返山河痛纏士林 人生而死全歸盖寡 公受天賦先立大者 彝倫賴之百世有辭
我銘不諛揭示來斯
歲癸丑碑文成而力詘未上石後八年辛酉相臣筵言守典文秩正二品宜著式易名 上可之遂賜先生謚文敬勤學好問曰文夙夜驚戒曰敬李夫人以 孝宗辛卯六月
二十日生 顯宗庚戌十一月二日終宋夫人有懿德純行爲婦盡其道爲母盡其道鄕黨親戚莫不敬慕之以 孝宗癸巳十月八日生今 上丁巳十二月二十一日終竝
祔先生墓右左男省魯牧使若魯判書尙魯副提學黃在河縣監俞崶郡守孫致良奉事致溫都事致恭進士鄭愼儉判官洪啓禧參議金仁大參奉若魯秀男曰致恪女適朴
亨源尙魯男曰致讓曰致永爲取魯後致溫男日鍾卨略書追識以補原序之而孫曾未冠者及外曾孫以下繁不錄
崇禎紀元後百十七年甲子五月建
 
 

출처 :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8236)

 

 김유 선생 묘소는 곡장을 두르고 묘갈과 상석, 향로석, 산신석, 혼유석, 둘레돌, 계체석, 제물석, 망주석 한쌍, 문인석 한쌍, 석양 한쌍 등의 묘제석물을 갖추고 있다. 특히 청풍김씨 묘소의 특징은 유택을 보고 오른쪽 상단에 산신석을 잘 갖추고 있다. 그리고 묘 앞에는 피장자의 신원을 밝히는 묘표와 묘갈을 세웠는데, 선조대 명필로 선조가 즐겨 쓴 한호의 석봉체를 집자하여 대해로 각자된 집자비이다. 석봉체는 당대 국서체로 왕실은 물론 사대부에서 외교 문서까지 두루 쓰였는데, 청풍김씨 묘역에서는 이를 따르고 있었다. 상석에도 석봉체를 집자하여 전면과 측면에 대해로 각자하였다.

  김유 선생 묘갈도 전면에 석봉체로 집자하였다는 내용이 뒷면의 음기에 나온다. 이러한 한호의 석봉체를 흔히 '불타는 글씨'로 불리운다. 글자 획에서 삐침의 결 모양 때문이다. 김유 선생 묘갈은 아들 김약로가 근술하여 김상로가 음기를 썼다. 묘갈과 상석에는 여러 곳에 탄흔이 발견된다. 한국전쟁 당시 소총 난사로 보인다.

 

 

 

 

 

 

 

 

 

 

 

 

 

 

 

 

  묘갈의 건립연대는 아래 '상지29년계유2월추각'으로 나와 영조 29년인 1753년 임을 알 수 있다.

 

 

 

 

 

 

 

 

 

 

 

 

 

 

 

 

 

 

 

 

 

 

 

 

 

김유 선생 묘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