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안공주 이온희, 해창위 오태주 묘역
1687년 5월 16일 숙종은 하얗게 소복을 차려 있고 머리를 풀고 곡을 하였다. 동생 명안공주 이온희가 죽었기 때문이다.
현종이 딸 명안공주의 이름을 ‘온희’라 짓고 직접 쓴 뒤 수결(사인)한 ‘명안공주 작명단자’.
출처 :경향신문, 성종의 태항아리 유물 5점은 왜 90년간 흩어졌을까 2018.6.2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6262109015&code=960201
명안 공주(明安公主)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소복(素服)차림으로 거애(擧哀)하고, 이어 전교(傳敎)하기를,
"몹시 슬프고 애통스러워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예장(禮葬) 이외에 비단과 쌀·무명 등의 물건을 숙정 공주(淑靜公主)의 예대로 시급하게 마련하여 실어보내고, 각가지 상사(喪事)에 쓰는 것을 각사(各司)의 관원들이 몸소 친히 진배(進排)하여 미진하게 되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오두인(吳斗寅)이 바야흐로 임소(任所)에 있었는데, 본직(本職)을 즉시 개차(改差)하여 교귀(交龜)를 기다리지 말고 밤낮없이 올라오도록 하고, 그의 대신을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즉각 의논해서 추천하여 3일 이내에 사조(辭朝)하게 하도록 하니, 윤이제(尹以濟)를 그의 대신으로 삼았다.(明安公主卒。 上素服擧哀, 仍敎曰: "驚慘痛悼, 無以爲心, 禮葬外匹段米布等物, 依淑靜公主例, 斯速磨鍊輸送, 凡百喪需, 各司官員, 躬親進排, 俾無未盡之弊。" 平安監司吳斗寅, 方在任所, 本職卽爲改差, 勿待交龜, 罔夜上來。 其代令備局, 卽爲議薦, 三日內辭朝, 以尹以濟代之)-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5월 16일 계사 1687년 '명안 공주의 졸기. 공주의 시아버지 오두인의 평양 감사직을 개차하고 올라오게 하다'
명안공주는 원래 병약하였다. 일찍이 두 언니가 어린 나이에 천연두로 일찍 죽어 오라비 숙종과 함께 부왕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숙종도 하나뿐인 누이라서 매우 사랑하고 아꼈다.
사신(使臣)이 돌아올 때에는 청주(淸主)가 으레 은(銀)과 비단을 보내는데, 임금이 명하여 그 은을 유사(有司)에 내리고 비단을 명안 공주(明安公主)에게 내렸다.(辛巳/使臣之還, 淸主例送銀錦。 上命下其銀于有司, 賜錦于明安公主。)-숙종실록 15권, 숙종 10년 3월 15일 신사 1684년 청주가 보낸 은과 비단을 유사와 명안 공주에게 내리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명안 공주(明安公主)의 집터로 합당할 만한 곳에, 본조의 낭관(郞官)을 보내 측량해 보니, 모든 집을 통합하면 1천 8백 26간이 됩니다. 일찍이 선조(先朝)에 있어서 공주의 집터[第宅基址]는 모두 1천 6백 간으로 정하였습니다. 지금 이곳을 측량하니, 전례에 비해서 더해진 것이 2백 26간에 이르릅니다. 마땅히 헤아려서 줄일 방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하니, 명하기를,
"선조에서 법식으로 정한 칸수(間數)에 따라 거행하라."하였다.(戶曹啓曰: "明安公主家舍基址可合處, 發遣本曹郞官打量, 則統合諸家, 爲一千八百二十六間。 曾在先朝, 公主第宅基址, 皆以一千六百間爲定。 今此打量, 比前例則所加者多至二百二十六間, 宜有裁減之道。" 命依先朝定式間數擧行。)-숙종실록 9권, 숙종 6년 7월 1일 무자 1680년 호조에서 명안 공주의 집간을 선조에서 정한 칸수에 따를 것을 건의하다
명안공주의 묘가 있는 안산시 사사동은 해주오씨의 선영이다. 이곳은 원래 안산시가 아니고 조선시대에는 광주군(廣州郡) 월곡면(月谷面) 사사리(沙士里)였다. 수원시 입북동과 당수동이 접하고 있는데 여기도 광주군 월곡면이었다.
임금이 명안 공주(明安公主)의 장지(葬地)를 양주(楊州) 서면(西面) 염산(廉山)에 정하도록 명했다. 염산은 곧 서울에서 10리 이내인 금표(禁標) 안의 땅이므로, 특별히 세조조(世祖朝)에 의숙공주(懿淑公主)를 양주(楊州) 개좌동(价佐洞)에 장사하도록 명하였던 옛일을 인용하여 분부하게 된 것인데, 승정원에서 법에 의거하여 논쟁하고 재차 아뢰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上命定明安公主葬地於楊州 西面 廉山。 廉山卽京城十里內禁標之地, 故特引世祖朝命葬懿淑公主於楊州 价佐洞故事而爲敎。 政院據法爭之, 再啓而不從。)-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6월 16일 임술 1687년 '명안 공주의 장지를 양주 서면 염산에 정하게 하다'
공주의 묘는 원래 고려대학교가 위치한 서울시 종암동에 있었다. 종암동이 현재는 서울이지만 당시는 양주에 속하였다. 이 일대가 일찍이 숙종이 명안공주의 청을 받아 하사한 땅으로 고려대 뒷산 일대를 남편인 부마 해창위의 명칭을 따서 앞뒤로 큰 해창 작은 해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공주를 보내고 해창위는 동대문 7리 쯤 별장을 짓고 살았는데, 숙종은 누이의 매제를 아껴 시를 내리고 받는 등 글동무로 지냈다.
임금이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에게 어제시(御製詩)를 내려 화답(和答)하여 바치게 하였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삼월 언뜻 지나가고
내일은 또 윤달일세.
제비가 돌아오매 봄 기운이 따르고
꽃이 피어 세월을 재촉하누나.
북쪽 섬돌 오히려 볼 만하거니
동쪽 동산 더구나 알 만하도다.
마을마다 농사일이 바쁜 때인데
때맞추어 비내려 밭을 어루만지네."
이때 봄가뭄이 이미 오래 이어져 비를 바라는 마음이 바야흐로 간절하므로 임금이 앓아 누운 가운데에서도 백성의 근심을 깊이 진념(軫念)하는 것이 시가(詩歌)를 읊는 데에 나타나기까지 하니, 뭇 신하가 누구나 다 용동(聳動)하여 탄복하였다.(庚申/上下御製詩于海昌尉 吳泰周, 使之和進。 詩曰: "三月瞥然過, 明朝又一閏。 燕回春氣隨, 花發令辰趁。 北砌猶宜觀, 東園矧可認。 村村農務急, 時雨慰田晙。 時, 春旱已久, 望雨方切, 上於寢疾中, 深軫民憂, 至發吟詠, 群臣莫不聳歎。)-숙종실록 57권, 숙종 42년 3월 29일 경신 1716년 해창위 오태주에게 어제시를 내리다
이랬던 공주와 해창위의 묘가 안산시 사사동에 있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전해지는 이야기로 일제에게 나라를 잃고 민족주의자들은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나서자 그렇게 설립된 학교가 고려대의 전신 보성전문학교 인데 그러나 학교 운영이 쉽지 않았다 학교가 손병희 이후로 동아일보 인촌 김성수에게 넘어갔다. 인촌은 학교를 새롭게 짓기로 하고 지금의 고려대 자리로 옮기고자 하였다. 그 때 이 지역을 소유하고 있던 오씨 정무공파가의 종손 참판 오정근을 찾아 큰 절을 올리고 뜻을 전달하자 오정근은 흔쾌히 땅을 희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출처: 시사안성, 오환일의 해주오씨 정무공파 이야기 '명안공주와 국혼' 2018.5.30 http://www.sisaanseong.com/news/articleView.html?idxno=568&replyAll=&reply_sc_order_by=C#reply)
이렇게 1934년 보성전문학교가 옮겨져 새롭게 지어졌으니 그 시점 전후로 공주와 해창위의 묘가 현재의 안산시 사사동으로 이장 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곳으로 옮겨졌을까? 안산문화원에서는 비지정문화재 조사를 벌였는데 이 때 사사동 일대에 해주오씨 선영을 확인하였다. 확인결과 남측 산자락으로 명안공주와 해창위의 증손 오윤상(吳允常,1746~1783)의 묘와 그의 증손 오준영(吳埈泳, 1829~1894)의 묘가 비늘치에 있었다. 이들 묘소와 공주묘역은 현재 수인산업도로로 나뉘어 있지만 지형상 큰 산자락 북쪽 끝이 공주 묘역이 해당하므로 한 공간이다. 수인산업도로가 생기면서 단절된 것이다.(출처:반월신문, '사사동 오윤상, 오준영 묘' 2017.9.27 http://www.banwol.net/news/articleView.html?idxno=38789)
대개는 남향으로 묘를 쓰는데 명안공주와 해창위 묘 등 모두가 북향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정확한 이야기는 알 수가 없다. 남향으로 하면 양지바른 지형인데 왜 그랬을까? 북쪽의 임금이 계신 궐을 향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예전 묘소가 북쪽이니 그 방향으로 모신 것인가 여러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모른다.
북향이다 보니 묘제석물과 무덤 정면으로 사진을 찍기가 곤란하다. 햇볕이 들기 때문이다.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가 졸(卒)하였는데, 나이는 49세이었다. 오태주는 성품이 본디 평온하고 조용하여 사치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예서(隷書)에 능하여 오직 글을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기사년의 화(禍)를 겪고부터 더욱 스스로 경계하여 의복·거처는 품질이 좋고 사치한 버릇을 아주 없앴다. 임금의 권우(眷遇)가 매우 지극하였는데 죽으니, 임금이 슬퍼하여 친히 글을 지어서 제사하였다.(乙未/海昌尉 吳泰周卒。 年四十九。 泰周, 性本恬靜, 不喜浮靡, 工隷書, 惟以文字自娛。 自經己巳之禍, 益自毖飭, 被服、居處, 痛祛禁臠侈靡之習, 上眷遇甚至。 及卒, 上震悼, 親製文祭之。)-숙종실록 58권, 숙종 42년 10월 9일 을미 1716년 해창위 오태주의 졸기
오태주는 공주가 죽고도 혼자 살며, 낮은 처신으로 왕실의 귀감이 된 인물이다. 그랬기 때문에 서인들이 숙청 당할 때도 화를 입지 않았다. 그리고 숙종이 그토록 아낀 누이의 매제였으니 당연하다. 해창위는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가 간택한 인물이다. 공주 부마 간택에서 해창위와 여러 후보 명문가의 자제들이 왕비를 알현하였다. 당시 해창위는 왕비 앞에서 방석에 앉지 않고 옆에 비껴 앉았다고 한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왕비가 물으니 자리에 아비의 이름이 적혀있는데 감히 아비 이름 위에 앉을 수 없었다고 답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그의 자질과 성품을 나타내는 여러 일화가 이밖에도 많이 전한다. 오태주가 명성왕후에 눈에 당연히 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일화 들에서 오태주의 자질은 매우 훌륭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마가 되지 않았다면 당시 서인을 이끌던 중신이 되었을 것이고 높이 된 만큼 큰 화도 입었을 것이다. 노론 4대신처럼... 그러나 오태주는 권력보다는 명예가 높은 임금의 부마가 되면서 일생을 조용히 살게 되었다. 한 시대 풍미했을 걸출한 인물이었지만 말이다.
숙종이 죽고 그 아들 영조도 명안공주가를 살뜰하게 살폈다. 왕조의 정통성과 본인의 정통성을 위해서 아버지 숙종의 누이이자 고모 명안공주를 우대한 것이다.
내시를 보내어 명안 공주(明安公主) 및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에게 치제(致祭)하도록 하고, 전 세마(洗馬) 오재순(吳載純)·전 현감 오재유(吳載維)를 소견(召見)하고, 특별히 오재순은 6품으로 승진시키고 오재유는 견복(甄復)하도록 명하였는데, 오재순과 오재유는 바로 명안 공주의 손자이다.(遣內侍, 致祭于明安公主及海昌尉 吳泰周, 召見前洗馬吳載純、前縣監吳載維, 特命載純陞六品, 載維甄復, 載純、載維卽明安公主孫也。)-영조실록 83권, 영조 31년 2월 1일 을사 1755년 내시를 보내 명안 공주와 해창위 오태주에게 치제토록 하다
영조는 집권 내내 정통성 논란에 상당히 신경썼다. 따지고 보면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것도 그러한 연유였다. 그래서인지 영조는 태조의 건원릉 등 숙종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능행에 열성적이었다. 이러한 영조와 마찬가지로 정조도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왕통에 대한 정통성이 미약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영조처럼 능행에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능행에는 그 길에 놓인 왕가와 공신들의 묘에 적극적인 치제를 명하는 한편, 서용까지 하였다. 이러한 정조가 숙종의 하나 뿐이었던 피붙이인 명안공주를 우대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중신(重臣)이 임진년 승자(陞資)할 때 외어주던 선조(先朝)의 하교를 대하였는데, 숭릉(崇陵)의 외손이 처음으로 정경(正卿)에 올라 내가 슬픈 마음이 든다. 해창위(海昌尉) 와 명안 공주(明安公主)의 집에 치제(致祭)하고,
충정공(忠貞公, 오두인[吳斗寅])의 사당에도 일체로 치제하라."하였다. 이때 오재순(吳載純)이 새로 공조 판서에 올라, 편전에서 소견하고 이런 하교가 있게 된 것이다.(丁未/敎曰: "今對重臣, 誦傳壬辰陞資時, 先朝下敎, 而崇陵外孫, 初登正卿, 予用愴感。 海昌尉、明安公主第致祭。 忠貞公祠宇, 一體致祭。" 時吳載純, 新陞工判, 召見便殿, 有是敎。)-정조실록 17권, 정조 8년 6월 24일 정미 1784년 오재순을 소견하고 하교하다
명안공주와 해창위 묘역의 현재 문화유산 공식 명칭은 '취몽헌 오태주 묘역'으로 경기도기념물 제186호이다. 이곳의 또다른 문화유산으로 한응인 묘와 종가 재실과 사당에 모신 영정과 유품이 유명하다.
임금이 명안 공주(明安公主)의 묘소(墓所) 석물(石物)을 강도(江都)에서 떠오도록 명했다. 일찍이 경연관(經筵官)의 진달에 따라 공사(公私)의 석물을 강도에서 가져다 쓰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승정원에서 이를 들어 논계(論啓)하였다. 또한 우선 정하는 산소가 멀는지 가까울는지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의논해서 떠오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내 동생의 상사에 송종(送終) 때 쓸 것을 특별히 떠내게 하여 유감스러운 바가 없게 하는 것이 과연 대단히 적당치 못한 일이겠느냐? 하물며 많은 석물(石物)이라 떠내는 역사(役事)가 거창하여, 비록 지금 역사를 시작하더라도 사세가 장사 이전에 다 마치게 되기는 어려울 것이니, 우선 산소를 정하도록 기다렸다가 떠내자는 말은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己亥/上命明安公主墓所石物, 浮取於江都, 曾因筵臣陳白。 公私石物, 有勿爲取用於江都之令, 故政院以此論啓, 且請姑待卜山遠近, 徐議浮取。 傳曰: "介弟之喪, 送終之具, 特許浮出, 俾無所憾, 果是大段未安之事乎? 況許多石物, 浮取之役浩大, 今雖始役, 勢難完畢於葬前, 則姑待卜山浮出之說, 尤未曉也。")-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5월 22일 기해 1687년 명안 공주의 묘소 석물을 강도에서 떠오게 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명안공주의 석물이다.
묘갈명 내용
명안공주 묘제석물과 같이 놓인 숙종이 지은 '명안공주어제치제문비'
내용은 아래 참조
明安公主御製致祭文碑
해창위 어머니 상주 황씨 묘(묘역 가장 위쪽[남향])
묘역 전경 등
동영상
근처 선조유교칠신 중 한 명인 한응인 묘역
한응인 재실(사당)에서 바라 본 명안공주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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