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리주저리(역사) 38

제정구선생 20주기 특별전 가짐 없는 큰 자유 1

제정구선생 20주기 특별전 '가짐 없는 큰 자유' 2019.9.27~10.25 경기도 시흥시 ABC행복학습타운 으뜸관 1층 갤러리 시흥 "철거민들이 오갈 데가 없어서 등을 대고 잘 수 있는 방 한 칸을 갈망하던 시절이었다. 처음 복음자리 마을로 이주를 결심했을 때, 철거민들이 그곳으로 이주하면 적어도 등을 대고 살 수 있는 따뜻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위성종(전 경기시흥신협이사장, 2012 사라져가는 자연마을 조사보고서 '복음자리, 한독마을, 목화연립[시흥문화원]) 경기도 시흥시 '복음자리'는 제정구 선생(諸廷坵, 1944~1999)이 가난한 사람들과 등을 맞대고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진한 공동체를 시작하였던 곳이다. 그의 도반 정일우 신부(미국 태생의 가톨릭 선교사 미국명 존 데일..

밀정

밀정은 독립운동의 주요 정보를 몰래 일제에 빼돌리는 사람이다. '독립군이 2천명 결성됐어도 그 안에 밀정이 한 사람 있으면 그 조직은 와해되고 마는 것이다. 밀정은 그만큼 어떤 반민족 행위보다도 더 악랄한 반민족 행위다'(김주용 원광대 교수) "이 밀정들은 반민족 행위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라는 것을 규정하고 이건 밝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 KBS 탐사보도부가 1tv '시사기획 창', '밀정'을 2부작으로 기획하고 8개월 동안 일본 외무성과 방위성 기밀문서, 헌정자료실에 보관된 각종 서신, 중국 당국이 생산한 공문서 등 5만 장의 문서를 입수하여 밀정 혐의를 받는 895명의 실명을 확인하였다. "당시의 일본 경찰과 군 라인들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통제하기 위해서..

녹두꽃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간다"-'가보세요'(참요[讖謠]) *동학농민혁명을 전후하여 불려진 가사로 가보세는 1894년 갑오년을 을미적은 1895년 을미년을 병신은 1896년 병신년을 말한다. 이 민요는 동학농민혁명 자체를 예언했다든지 병신년에 이르러 거사가 실패하리라는 것을 예언한 참요라고 한다. 사발통문 ...이때 도인(道人)들은 선후책(先後策)을 토의 결정하기 위하여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의 집에 도소를 정하고 매일 운집하여 순서를 결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 1.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1. 군수에게 아첨하여 인민의 것을 빼앗은 탐리(貪吏)를 공격하여 징계할 것 1. 전주영을 함락하고 경사(서울)로 바로 향할 것 ..

안산관아 교수형 형구돌

안산관아 교수형 형구돌 안산관아 교수형 형구돌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구돌 혹은 형구틀이라고도 불린다. 이 형구돌을 제보한 사람은 조재경(1963, 하중동, 민족문제연구소 안산시흥지부 회원, 문화원회원)이다 3월 29일 목감지구 산현공원 삼일운동 유공자 윤동욱 지사 기념비 제막식에서 전시관 뜰에 있는 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형구틀에 대한 존재를 확인하였다. 그동안 이 돌의 쓰임새를 놓고 절구, 혹은 주춧돌, 석조 등 의견이 분분하였었다. 형 구돌은 편마암 재질의 크기 가로 48, 세로 54, 원추형 구명이 뚫려있어 앞쪽 구멍 지름 11, 뒤쪽 홈 지름 22cm이다. 이 형구돌은 원래 시흥시 산현동 묘재(양회다리)마을 151번지 이석우 댁에 안산관아 여러 석재(수암면사무소 ..

벽처에서 울린 '독립만세'... 군자면 주민들 일제에 맞서다

벽처에서 울린 ‘독립만세’… 군자면 주민들 일제에 맞서다 군자면민들의 광복축하모임(군자면 거모리 1945.8) 출처 : 시흥시청 향토사료실 시흥시 삼일독립운동 기념비(군자초등학교) 2016.3.1 건립 군자면에서 만세운동이 감돌다 시흥시는 전근대 인천과 안산의 일부가 합쳐진 지역이다. 일제의 강점이후 1914년 군면통폐합으로 시흥군이 만들어지고 서남부 지역에 군자면(君子面, 현재 시흥시와 안산시의 일부가 합쳐진 지역)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군자면 중심에는 조선후기 안산군 최초의 장시 석곡산대장(石谷山垈場, 현재 서안산나들목 부근)이 위치하였다. ‘안산군읍지(安山郡邑誌, 1871)’에 따르면 “대월면에 산대장시가 있으며, 읍으로부터 서남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다. 벽처(僻處, 외따로 떨어져 있는 매우 후미..

민족의 사랑 『백범일지』

민족의 사랑 『백범일지(白凡逸志)』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36분. 경교장에서 여러 발의 총탄소리가 들린다. 향년 74세,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가 쓰러졌다. 백범은 조국의 자주독립을 보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백범 김구의 죽음을 둘러싸고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정작 그를 저격했던 안두희 조차도 다른 이의 손에 죽는 날까지도 그날에 대해서 어떠한 진실도 밝히지 않았다. 그는 죽음과 함께 모든 진실을 가지고 침묵하여 버렸다. 김구 선생을 암살 했던 안두희가 당시 특무대장 김창룡(金昌龍, 1920-1956)과 가까웠고 그런 김창룡은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을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이승만의 신임은 두터웠다. 이승만을 위해서라면 김창룡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당..

시흥군(始興群) 수암면(秀岩面) 3․1운동과 윤동욱(尹東旭)의 사상(思想)

시흥군(始興群) 수암면(秀岩面) 3․1운동과 윤동욱(尹東旭)의 사상(思想) 산현동 윤동욱 선생의 생가(손자 윤성준 가옥)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만세운동의 촉발은 일본제국주의의 불법적 침탈에 따른 것으로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시작으로 1910년 한일병합으로 식민지배를 확정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설치하고 헌병경찰제(憲兵警察制)를 통한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실시하여 야만적인 탄압과 수탈을 자행한다. 3∙1운동은 바로 이러한 일제에 맞서 자발적이고 거국적으로 이루어진 민족적 저항이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각 지역의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전 계층이 일제에 맞서 항일만세운동을 일을 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