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리주저리(역사)

장안면 유래비

달이선생 2019. 12. 4. 13:30

장안면 유래비


  장안면은 화성시의 행정동이다. 장안면의 청사인 장안사무소는 3.1운동 당시 어은리에 위치하여 수촌리, 석포리, 주곡리, 어은리, 독정리, 장안리, 덕다리 등 인근 주민들이 장안면사무소로 몰려가 친일부역자인 면장 김현묵을 앞세워 만세를 부르게 하고 돌과 몽둥이로 면사무소를 부수고 불태워졌다.


   1919년 43일 아침부터 각 동리 구장들은 마을 사환을 시켜 주민을 동원하고 각 몽둥이를 준비시켜 공세적 시위계획을 수립하여 시위에 들어간다. 주곡리의 차희식, 김흥식, 장소진, 장순명 등이 오전 8시경 각 집집마다 1명 이상씩 나오라 만약 나오지 않으면 집에는 방화하고 가족은 타살한다고 외쳤다.” 이와 더불어 석포리 구장 차병한은 엄성구를 시켜 주곡리의 차봉습이 많은 동민을 데리고 장안면사무소로 몰려간다.”, “자기 마을에서도 가기로 하였으니 각 동민에게 빠짐없이 전달해 달라고 하여 마을 사환이 북을 쳐 주민을 모았다. 이와 함께 수촌리 구장 백낙렬은 이원준과 정형영을 금의리 구장 이해진은 김백천을 장안리 구장 김준식은 박복룡에게 각각 마을 사환인 이들을 시켜 주민들을 금일시위에 참여하라고 전달했다. 독정리 구장 최건환은 사환 이고두쇠를 시켜 장안리 구장에게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때려 부수니 몽둥이를 들고 오도록 전달했다수촌리와 석포리, 주곡리에서 출발한 시위대가 오전 10시경에 장안면사무소에 도착했을 때는 가는 길에 주민이 더해져 200여 명이었다. 차병한, 차병혁이 장안 면장 김현묵에게 참여 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선두에 서게 하여 만세를 불렀다. 다시 시위대가 쌍봉산으로 이동하고 그 사이 남은 시위대가 장안면사무소와 문서, 집기류 등을 파괴, 전소하였다. 이어 쌍봉산에서 모여 만세를 부르고 화수리로 몰려가 화수리 주재소를 파괴하고 주임순사 가와바타를 처단한 주민들은 일단 해산한 후 저녁을 먹고 남산에 모여 군대와의 회진에 대하여 상의하였다-이병권, 2006「수원군 우정․장안면의 3․1운동」『2006국사학과 한신졸업논문집』: 국사편찬위원회, 1994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19,20



 이렇듯 장안면사무소는 일제의 침탈과 식민지배를 공고히 하면서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후 장안면 어은리 사거리에 구청사를 이루고 있다가 2002년 10월 29일 지금의 자리에 새로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3.1운동 당시 불탄 장안면사무소 청사 사진으로 일제가 피해상황을 위해 남긴 자료이다.

위 사진은 청지 내 전시되었으나 현재는 다른 사진으로 교체 되었다.



  장안면사무소는 남산에 위치한다. 남산은 지역의 승지인 쌍봉산과 대응하는 중요 지세로 쌍봉산과 더불어 마고할미 신화가 깃든 명소이다. 쌍봉산 남동쪽의 야특막한 산으로 장안면 사랑리, 독정리와 어은리에 걸쳐있다. 남산은 바로 쌍봉산과 마주보고 있어 떼레야 뗄수 없는 산이고 이 두 산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마고할멈, 마고할매, 할미로 불리는 창조신 마고신화이다.

 

  남쪽지방 어느 산골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쁜 짓을 일삼고 있는 마귀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소굴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살고 있던 마고할멈 하나가 마귀소굴에서는 수 많은 마귀들끼리도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어 먹고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 곳을 뛰쳐 나왔다. 뛰쳐나온 마고할멈은 인심 좋고 살기 좋으며 먹을 것이 많다고 소문남 한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떠났다. 그런데 이 마고할멈은 가는 곳마다 못된 짓만 골라서 하고 다니기가 일쑤였다.
  어느 날 마고할멈은 부잣집 아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고 공연히 심술이 나서 슬쩍 머리를 쓰다듬는 척하곤 병을 주었다. 아이가 이 때부터 갑자기 인사불성으로 눕게 되자 부모는 웬일인가 하고 야단이 났다. 그래서 무꾸리(무당 따위에게 길흉을 점치는 일)를 했더니 뜬 것이 들렸다고 하여 음식과 떡을 잔뜩 차려 놓고 죽을 쑤어 풀어 주었으나, 마고할멈은 죽만 실컷 얻어먹고 아이는 죽거나 말거나 내버려둔 채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이러한 일이 자주 일어나자 하늘에서는 가끔 엄포를 내렸다. 그러나 인간을 괴롭히는 일을 그만두라고 해도 마고는 들은 체도 안하고 종횡무진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실컷 배불리 먹으면서 한양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한양에는 잘사는 사람도 많고 좋은 구경에 살기 좋은 곳이라는 소문을 듣고 아주 한양 땅에 자리잡고 호의호식하면서 영원히 그 곳에서 살 작정으로 올라 가다가 인심 좋다고 소문난 삼귀 땅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마고는 무거운 쌀자루를 짊어지고 다니다 삼귀 즉 조암(朝岩)이란 곳에 이르러 지친 나머지 잠시 이곳에 주저앉았다. 쌀자루를 내려놓고 쉬고 있을 때 하늘은 착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곳에서 마고가 또 무슨 짓을 할 지 알 수 없어 마고할멈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했다.
  "너는 네 집을 뛰쳐나와 방방곡곡 다니면서 인간들에게 극악한 짓만 하고 다니니 용서할 수 없다. 더 이상 올라가지 말고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바닷가 '참남기'란 곳에 배가 있을 터이니 그 배를 타고 배가는 대로 내려가면 섬이 하나 있을 것인즉 그 곳에서 마음을 고치도록 하라"

하고 하늘에서 호령을 했다.
  마고할멈은 자기가 지금까지 저질러온 일은 조금도 뉘우침이 없이
  "내가 무슨 잘못으로 외로운 섬으로 쫓겨가야 합니까? 한양길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 그곳에 가서 나오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하늘에선 호통이 대단했다.
  "네가 정 그렇게 내 말을 안 듣고 거역한다면 할 수 없다. 지난 번에도 몇 번이나 용서를 해준 일이 있었는데 이제는 끝장을 보자"
  하더니 하늘에는 삽시간에 먹장구름이 모여들고 비바람이 불면서 뇌성번개와 벼락이 치더니 마고할멈을 하늘로 끌어올려서 처치하고 말았다. 이때 마고할멈이 쉬고 있을 때 내려 놓았던 두 개의 쌀자루는 산으로 변해서 쌍봉산이 되었으며, 양쪽 봉우리가 불쑥 튀어나온 가운데 골짜기는 마고할멈이 쌀자루를 짊어졌던 '멜빵자리'라고 일러오고 있다.
  그 후에 이 산에서는 장사(壯士)가 나서 마주 보이는 남산의 장사하고 싸움을 할 때 장사들은 서로 돌을 던지면서 싸움을 벌였는데, 쌍봉산 장사가 어찌나 기운이 세었는지 돌이란 돌은 전부 남산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에도 남산에는 돌이 많지만, 쌍봉산에 돌이 없는 것은 그런 까닭이라고 이곳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
화성문화원 홈페이지 '화성의 설화' 참조



  지역민들은  면사무소를 이전하고 지역주민들의 뜻을 모아 장안면의 유래비를 건립하였다. 유래비는 장안면 전도와 각 리의 위치와,유래를 밝히는 글을 석각하였고, 뒷면에 유래비 건립에 함께한 이들을 동판으로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