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곰솔누리숲 2019(12, 창간호)
계간 곰솔누리숲 내용
계간 곰솔누리숲 2019 창간호 시간(기억) 초고
태초에 바다가 있었다
시흥에코뮤지엄인 곰솔누리숲은 1996년 조성된 시화지구중앙완충단지이다. 이러한 곰솔누리숲이 조성되기 전 이곳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현재 오이도 선착장에서 바라다 보이는 것처럼 바다(갯벌)였다. 이곳은 서해안 경기만(京畿灣)에 속하여 북으로 인천광역시와 아래로 안산·화성시와 접한 곳이다. 조수 간만의 차가 최대 4~9m에 이를 정도로 심하여 드넓은 갯벌(간사지)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환경에 따라 일찍부터 어업과 염업이 발달하였다.
'곰솔누리숲(녹색선)',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朝鮮總督府 陸地測量部), 대정6년(大正, 1917)『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近世韓國 五萬分之一地形圖)』, 축척 1:50,000 / 인천, 군포장, 남양, 대부도 합본 / 출처 시흥시청 향토사료실
어업으로 살아가던 시흥사람들의 아주 오래전 흔적이 있다. 신석기 조개더미(패총) 유적인 ‘시흥 오이도 유적(사적 제441호)’이다. 곰솔누리숲이 이어지는 옥구공원과 맞닿아 있다. 당시엔 옥구공원도 섬이었다. 참고로 옥구도는 1911~1918년 사이 새롭게 만든 이름이고 이전의 지리지 등에는 석을주도(石乙注烏)나 석줄도로 나오고 주민들은 ‘돌주리’로 불렀다.
오이도 유적에는 신석기 시대에서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흥사람들이 물고기를 잡고 갯벌에 나가 조개를 캐서 먹고 남은 조개더미가 오이도는 물론 정왕동 인근해안 곳곳에 퍼져있었다. 이러한 오이도 유적은 1960년 윤무병 박사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알려졌다.
오이도 유적 뒷살막 패총 시굴조사 전경(2000) : 출처 시흥시청 향토사료실
“성게, 새우, 소금으로 광주리와 항아리에 그득 채워 포구에서 새벽에 출발한다. 해오라기 놀라서 날고 한 번 펼쳐 보니 비린내가 바람에 코를 찌르는 듯하다.”-『행려풍속도병』「매해파행」의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발문 중에서
사옹원 분원(안산어소)도(김영찬 기증) : 출처 안산문화원 소장
곰솔누리숲 이전 이곳 해변은 조선시대 안산 지역에 속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어염(魚鹽)을 생계로 삼는다”라고 할 만큼 이 지역에서 어업과 염업이 발달하였다. 조선 전기에 조정에서는 안산 지역의 해산물을 진상하기 위해 사옹원(司饔院) 분원을 설치하였다. 곰솔누리숲의 안산시 경계 부근인 신길동 지역이 분원터이다. 사옹원은 임금의 식사 등 궁 안의 식재료 공급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청으로 곰솔누리숲 자리의 바다에서는 임금님에게 진상할 고기잡이가 성행한 곳이다.
흔히 전통소금 하면 하얗고 굵은 천일소금을 생각하는데, 우리네 전통소금은 갯벌을 갈아 염분을 높혀 그 물(염수)을 솥(벗)에 끓여 만드는 자염(煮鹽)이 전통소금이다. 자염은 전오염(煎熬鹽)이라고도 부르고 끓는 솥에 졸여 만든 소금이라 입자가 가는 것이 특징이다. 곰솔누리숲이 펼쳐진 과거의 해안가 갯벌에서는 자염을 굽던 염전들이 즐비하였다.
김준근 염조지인(鹽造之人) ‘소금 만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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