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곰솔누리숲 2020(03, 제2호)
계간 곰솔누리숲 2020, 제2호 시간(기억) 초고
바다를 메워 염전이 되다
곰솔누리숲 이전 바다였던 이곳의 커다란 변화가 시작된 것은 조선 후기부터 이루어진 간척(干拓)이다. 간척은 바다 등을 메워 농경지를 만드는 것으로 안산 첨성촌(瞻星村)의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3)은 「해거방축(海居防築)」이란 시를 써서 간척 사업을 통한 농지 확장을 노래하였다. 그 꿈이 실현된 것이 시흥시 중간에 위치한 호조벌(1721, 경종1)이다. 현재 곰솔누리숲이 있는 정왕동 인근에는 안산군 대월면 석곡리에 조자언(鳥堰)이 있었다. 해변을 간척하여 농경지를 만드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1894년과 1896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대월면 거모포(현재의 거모동) 명례궁(덕수궁)의 둑을 지역민들이 무너뜨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저수지를 만드는데. 지역민을 마구 동원하여 빚어진 일이다.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uy77777&logNo=221159055005
일제(日帝)는 산업발달에 중요한 원료인 천일염(天日鹽)의 확보를 위해 군자염전을 만들었다. 천일염은 햇볕으로 바닷물을 증발시켜 만드는 소금이다.
1924년 10월 21자 「채염증가 오천만근」, 『동아일보』 기사에 이마무라(今村) 전매국서무과장(專賣局庶務課長)은 군자염전을 ‘약 90여만원으로 공사하고 면적이 575정보(5,685,950m²)이며, 큰 섬도 이 개소를 포함해 완료되면 생산량이 무려 4~5천만근에 달하고 인천과도 가까워 수송(일본)에도 매우 편리하다’고 하였다. 군자염전은 1921년 11월 착공하여 1925년 3월(3년 5개월)에 완공하였다. 군자면 앞바다 5km내 해상의 옥구도와 오이도 두 섬을 이용하여 두 개의 제방(둑)으로 연결하여 쌓는 총연장 11km에 이르는 공사였고,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해 난공사였다. 이러한 제방공사는 폭풍과 해일의 피해로 제방이 붕괴되어 5회의 걸친 재공사를 거듭하며 완공 하였다.
-군자염전 공사도면(출처 : 시흥시사편찬위원회, 「시흥의 근현대」,『시흥시사』6, 2007, 223쪽)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1917)에 표시한 곰솔누리숲 위치
“포크레이가 무슨 포크레이 드문드문 여기다 해요 뭐 별거 다 했죠 목도로 돌 져 날르라고, 중국 사람은 그런 걸 안 줬어요 위험한데 데꼬 가서 물 들오믄 터져 나가는데 그냥 중국 사람만 갖다 댄 거예요 그러니까 막을 쩍에도 하루 20전 줬대니까”
-정왕동 박갑록 구술, 1917년생으로 오이도 토박이-시흥시사편찬위원회, 「시흥 바닷가 사람들의 일과 삶」,『시흥시사』6, 2007, 286~287쪽
이처럼 공사는 순전히 인력으로 이루어져 매일 수 천 명이 동원되었다. 당시 동원된 연인원이 60만 명, 공사에 8천명, 그중 2천명이 중국 산동성에서 온 노동자(쿨리[Coolie] 중국어 苦力 쿠리 : 2차 세계대전 이전 중국의 하층노동자)였다. 힘든 공사였던 만큼 토목인부 40명이 임금 인상 파업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공사비도 당초 예산보다 50만원을 증액(총 소요 비용 141만원)하고 나서 마칠 수 있었다. 이러한 염전 조성과 운영에는 조선인 기술자도 대거 참여 하였는데, 이들은 평안도 진남포 출신으로 군자역(현재의 정왕역) 부근으로 이주하여 평안촌(아래, 웃평안촌[피양촌])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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