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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청년 독립을 외치다 서호 구국민단 결사

달이선생 2020. 6. 5. 00:09

수원 청년 독립을 외치다 서호 구국민단 결사

 

수원지역 수원읍 3.1운동 기독교 청년이 이끌다

  수원지역은 3.1만세운동이 강렬하게 전개된 대표적인 곳이다. 처음 만세운동은 191931일 방화수류정(용두각)에서 지식인, 청년학생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특히 이 시위의 배후로 남수리 출생의 삼일학교 교사이자 민족대표 48인 중 기독교 측 대표로 참여한 김세환(金世煥, 1889.11.18. ~ 1945.9.26.)이 있었고 수원상업강습소 김노적, 박선태, 임순남, 최문순, 이득수(종상), 김석호, 김병갑, 이희경, 신용준, 이선경 등 기독교도와 학생들이 중심이었다.

 

 

 

일제강점기 용두각(방화수류정)과 용연, 출처 : 수원시사 16권(이곳에 가면 수원의 역사가 보인다.), 2014, 328쪽
화성어차를 타고 돌아본 현재의 용두각 모습(2013.5.31)

 

 

 

  이후로 수원읍 시위는 3.16 장날을 기해 서장대 연무대에서 수백 명이 만세를 부르며 시가지로 나가 종로를 지나 벌이고 이를 일제는 경찰과 소방대, 헌병을 동원해 강제 해산하여 주모자를 체포하였다. 이에 상인들은 체포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며 철시투쟁하여 석방되었다. 3.25일 장날 20명의 청년학생 주도로 노동자가 합세하여 곳곳에서 만세를 부르고 10명 체포되고 3.28일까지 시내 곳곳에서 2~30명 씩 산발적으로 만세시위가 이루어졌다. 게다가 3.29 기생 김향화(23)의 주도로 기생 30여 명이 자혜의원으로 건강검진 받으러 가던 도중 만세를 부르고 밤까지 이어져 상인과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일본인 상점에 돌을 던지는 투석이 이루어졌다.

  참고로 위에서 열거한 수원읍 시위의 시작인 3월 1일 용두각 시위와 16일 시위는 '수원시사(2014)'를 통해 수원의 공식적인 만세운동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논란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위 만세시위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이병헌, 3.1운동비사(시사시보사, 1959)'로 문제는 일제측 기록이나 당대 매일신보 등을 통해 뒷받침할 사료가 나오지 않고 있어 이와 같은 사실 관계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성주현, 이병헌의 3.1운동비사로 보는 수원3.1운동, 제5회 수원학 심포지엄 자료로 본 수원지역 3.1운동[2018]) 그럼에도 역사연구자로서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자 할 때 주의할 것은 일본측 기록에 의존하는 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기록에 대한 사실규명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자칫 우리는 대외적으로 보여지는 최초에 긴박되어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다만 위 주장처럼 수원읍의 3월 1일 시위와 16일  시위의 사실규명이 현재로선 매우 어렵다는데 공감하고 있다.(박철하, 위 성주현 논고 토론문) 그리고 토론에서 제기된 이병헌 기록 외에 구체적인 상황을 전하고 있는 '이제제, 수원의 옛 문화(효원문화인쇄, 1995)의 1차 사료에 대한 질문이 있었는데 토론회를 직접 참관하지 않아 섣불리 말하기는 어려우나 이제제가 쓴 책을 살펴보면 '수원지방 독립운동의 선구자 김노적선생' 글에 인용된 자료로  '경기도교육위원회, 경기향토독본2권(사건편, 1984)' 105쪽을 자료1(146쪽)로 밝히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수원에서도 3.1운동의 주동적 인물 48인 중의 한 사람인 김세환의 지도와 수원상업강습소교사 김로적의 지휘로 3월 1일 밤 팔달산 봉화 대 횃불을 신호로 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니 개성 시민의 시위와 함게 우리 경기도 삼일운동의 길잡이가 되었다....-이제제 인용 자료1 '경기향토독본'

 

서호, 항미정 청년 애국지사의 구국민단 결사

  이러한 수원읍의 시위는 수원지역 지금의 화성시 송산(사강), 발안(제암리, 고주리), 우정(화수리).장안면(수촌리)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투쟁과는 달리 지식인 청년 중심의 평화적 시위였다. 그리고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바로 이곳 서호, 축만제의 항미정에서 3.1운동을 이끌었던 청년지식인들이 3.1만세운동이 잦아들자 비밀결사를 통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결하는 독립운동을 펼쳤다.

  바로 이득수(李得壽, 종상[鍾祥], 1899~?), 박선태(朴善泰, 산루동111 출신, 1901~1938), 임순남(林順男, 남수리 출신), 최문순(崔文順, 남수 187 출신, 1903~?), 이선경(李善卿, 애기[愛基], 산루 470 출신, 1902~1921, 애국장[2012])으로 192067일 서호 항미정에서 비밀결사 수원 혈복단구국민단이라고 개칭(매일신보 1920.11.13)하고 20일 구국민단을 조직한 것이다. 구국민단의 단장에 박선태, 부단장 이득수, 서무부장 임순남, 재무부장 최문순, 구제부장 이선경, 교제부장 차인재(林仁載, 林仁在, 북수 99 출신, 1895~1971, 애족장[2018] )로 조직되었다.

구국민단의 2대 목표

1. 한일합방에 반대하여 조선을 일본제국 통치하에서 이탈케 하여 독립국가를 조직할 것.

2. 독립운동을 하다가 입감되어 있는 사람의 유족을 구조할 것.

 

  위와 같은 목적으로 구국민단은 활동하였으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단원들은 207월경까지 1주일에 한 번씩 금요일 삼일학교에서 회합하여 독립신문을 배포하고 임순남 최문순, 이선경은 상해 임시정부로 가서 간호부가 되어 독립운동(후일 미일 전쟁 등)에 매진할 것을 맹세 하였다. 실제로 이선경은 동네 오라버니이자 단장 박선태에게서 독립자금 120엔을 받아 상해임시정부로 가려다 경성에서 체포되었다. 이렇듯 당시 구국민단 활동은 최문순이 암호일기로 내역을 남겼다.

 

 

 

시기 미상의 축만제(서호), 항미정(수원박물관 소장)의 옛 사진. 갓과 도포를 입은 복색으로 보아 시기는 일제강점기 이상이다.  출처 : 수원시사 17권(수원화성), 2014, 143쪽
위의 옛 사진과 같은 구도의 모습 현재의 서호와 항미정이다. 옛 사진에서 오른쪽에 뚝방으로 이어진 길이 서호천에 징검다리를 볼 수 있는데 현재는 수문이 세워져 용수 조절이 이루어지고 있다. 수문과 그 위체 축만제교가 세워짐에 따라 현재의 항미정의 위치는 당시와 좌표는 비슷하나 높낮이 등 위치의 변화가 있었다.

 

 

 

  당시 구국민단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은 독립신문(獨立新聞))’의 배포였다. ‘독립신문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로 1919821일부터 간행되어 민족의 독립을 위한 임시 정부의 활동과 독립운동 상황을 국내외에 알린 신문이다. 이득수는 이 독립신문 입수를 위해 박선태에게 비용을 받아 동대문 부인병원 박성환에게 입수하여 6월부터 여러 차례 독립신문과 창가집, 애국가, 경고문 등을 수원 곳곳에 배부하였다.(60여 호) 또한 조직의 확대를 위하여 김석호, 김노적, 윤구섭, 김병갑, 이희경, 신용준 등에게 결사 참여를 권유하였고 특히 박선태는 청년운동을 통해 조직 확장 꾀하였다. 당시 수원은 1908년 수원엡윗청년회가 창립되었다가 해산된 후 체육회 또는 운동구락부로 명맥을 유지하여 오다가 1917년 재조직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와 청년회들은 전국적 조직이 되고 지덕체 삼육 연마와 그 지방의 풍습을 개량하며 산업경제의 발전을 도모하는 목적을 가지고 활동(민족 개량, 계몽, 교육적 성격)하였는데 남양청년회, 수원청년구락부, 수원엡윗청년회, 천도교청년회 수원지부, 천주교청년회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박선태는 711일 남문 밖 교동에 위치한 성공회 교회에 창립된 진명구락부 운동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부장 김인순, 도서부장 김노적, 총무 조용호가 당시 활동한 주요 인물로 이들과 관계를 맺고 활동하였을 것이다.(당시 수원읍 남자 인구 5천 명 추정 학식 있는 청년은 몇 백 명도 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니 이들 사이에 일정한 유대관계 형성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단원 임순남도 여성청년단체와 유대관계를 확대하여 종로 감리교회 여성청년단체 여보호회에서 총무로 활동하였다. 당시 회장은 이신애, 이화순이 부회장이었다.

 

 

 

단장 박선태가 진명구락부 운동부장으로 활동하였던 대한성공회 수원교회의 현재 모습 수원시 팔달구 교동에 있다. 안내판과 구내 소개판에 살펴보면 일제강점기 교회 사진을 볼 수 있다. 이 일대는 화산에서 화성으로 읍치를 옮기고 세운 수원 향교가 있어서 교동으로 불렸으며,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옛 부국원(종묘회사), 조선중앙무진회사(구 수원시청, 문화원) 건물 등 근대문화유산이 즐비하다. 서쪽으로 이어진 길은 일제강점기에 부설된 수원역으로 이어진다.(2020.6.5)

 

 

 

 

 

출처 : 수원시사 8권(수원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2014, 129쪽

 

 

 

  이렇게 민족독립을 위해 수원을 중심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친 비밀결사 구국민단은 그러나 19208월 이 활동이 탄로나서 일제에 의해 모두가 체포되고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214월 박선태(애족장, 1990)와 이득수(애국장, 2012)는 징역 2년을 임순남, 최문순(대통령표창, 2018), 이선경(애국장, 2012)은 징역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특히 단원 이선경은 모진 고문을 받아 재판장에 못나와 궐석재판을 받고 고향(수원면 매산리 119)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421일 오전 819세라는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였다. 생전에 구금상태에서 ‘석방 되도 다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소’라며 당찬 의지를 보인 이선경 열사는 유관순 열사와 같은 나이에 순국하여 수원에서는 경기도의 유관순이라는 별칭(경기도의 유관순)으로 추모하고 있다. 광주이씨 금대업(고리대금)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이학구 슬하 4남매 중 셋째인 이선경 지사는 언니 이현경 지사와 막내 이용성 지사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선경 열사 못지 않은 항일독립운동가인 이현경 지사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1921년 3월 1일 3.1운동 2주기 기념 도쿄 히비야 공원 만세시위로 옥고를 치루었고, 1925년에는 무산계급과 한국 여성의 계급, 인습적 구속 및 민족적 압박의 철폐를 목적으로 한 삼월회를 조직하는 한편, 귀국후 동아일보 기자와 1927년 근우회를 만드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1928년 남편 안광천과 일제의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고 끝내 귀국하지 못하였다.('수원독립운동 인물열전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다', 2018, 수원박물관 참조)  

 

 

 

일제의 구국민단 체포를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

 

 

"남녀학생의 피촉
가택수색을 하며 한편으로 구인해
수원성내 북수리김흥근은 수일전에무사몁의인지 수원경찰서에 검거되야 취조를 밧던바 그 후련하여사오처의 가택수색을 행하며금월십삼일부터림효정(여18)을시작하여경성가잇는산루리리선경(여18)은 자동차로 급히인치하고 광교리 리종상(20)남창리박선태(20)남수리최문순(여16)다섯명이차레로구인되고김흥근은 십오일에 방명되얏는대 인차된다섯명은 경성에통학하는 남녀학생이요사건은자못중대한듯하더라(수원) ≪동아일보≫ 1920. 08. 17."

 

청년의 비밀결사의 시작 수원 혈복단

  이러한 서호 구국민단의 활동에는 앞서 이야기한 거와 같이 비밀결사 수원 혈복단(血復團)에서 시작되었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지만 이는 민족을 이간하고 폭압적인 식민통치를 눈 가리고 아웅하는 조치였음으로 우리민족은 노동, 농민, 청년운동 형태로 지하화 한 비밀결사 운동이 적극적으로 펼쳐졌다. 특히 신현구 주도로 1919~20년까지 활동한 대한독립애국단(서울)이 밀접한 단체로 이들은 신교육을 받은 20대 청년층을 중심으로 강원, 충청, 전라 등지에 지단과 아래 군단을 둔 임시정부 지원 단체로 선전, 통신, 연락, 자금 수합을 임무로 하였다. 그러나 19191120일 단장 신현구가 체포되면서 애국단은 혈복단으로 계승되는데 이 혈복단이 임시정부 특파원 김태원의 주도로 191911월 종로 5정목 김교선의 집에서 비밀결사로 결성되어 조선독립운동 자금의 모집과 독립을 위한 민족위식 고취를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바로 이 혈복단의 하부조직으로 활동한 것이 바로 수원 혈복단이다. 수원 혈복단의 윤익중이 서병철과 같은 애국단 및 혈복단 인사와 교유를 한 점을 통해서 이 점이 드러나고 이들이 또한 서울에서 임시정부 문서와 독립신문을 받아 배포 한 것을 통해 추론한 것이다. 이러한 수원 혈복단 결성에 중심된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구국민단 결성과 부단장을 한 경성기독교청년학관 학생이자 수원에 거주하며 서울로 통학한 이득수이다. 이득수는 종로 3.1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한문을 가르쳐 준 스승 차관호와 깊이 관계되는데 그는 임시정부 독립신문의 발간 및 배포에 관여한 인물이었다. 이득수는 동대문 부인병원 박성환으로부터 독립신문을 받아 동지 삼일학교 여교사 차인재(車仁載)와 수원면에 19198~9월 경 배포하였다. 그러던 중 9월에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휘문고 4년 박선태와의 만남이다. 박선태는 상해 망명으로 임시정부 합류를 계획하던 차에 이득수가 상해에 가지 말고 수원을 중심으로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신문과 대한민보를 배포하자고 권유하여 이를 받아들여 연말에 이르러 수원 혈복단을 조직 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 박선태와 이득수는 수원 지역에 거주하면서 서울로 통학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새로운 조직 결성에 나선다. 이 일에 차관호와 김보윤이 후원하였는데 이들은 상해임시정부의 대한적십자회에 관여한 인물로 191912월 대한적십자회가 병원 설립과 간호사 양성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국내의 연락을 취하여 회원 모집을 하고 있었는데 이를 이득수가 스승 차관호를 돕기 위해 여학생 참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19206월경 차인재에게 도움을 청하여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2년생 임순남, 최문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3년생 이선경(1902~1921)을 소개 받았다. 3인은 수원 거주 서울 통학생이자 항일운동 요람인 수원교회 교사인 기독교인들로 임순남은 삼일학교를 졸업하였고 최문순과 이선경도 수원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처럼 구국민단 결성에는 삼일학교 관련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삼일학교는 철저한 기독교 학교로 설립자이자 교사 임면수와 교사 이항여 등은 독립사상이 철저한 애국지사들로 삼일학교는 수원지역 항일운동의 요람이었다. 수원읍 첫 만세시위 주모자인 김세환(독립기념관 20203월의 독립운동가 선정)도 이곳 교사라는 것은 앞서 밝힌 바와 같다. 당시 김세환의 지령으로 각지 연락 업무를 맡았던 것은 구국민단 단원이자 구제부장 이선경이다. 이선경은 치마 속, 혹은 앞가슴에 비밀문서를 넣어 일제의 눈을 피해 대전, 충주, 안성 등지로 수십 차례 지령을 전달하였고 이 때문에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15일 구류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선경, 김세환, 김노적, 박선태는 모두가 수원면 산루리(현재의 수원시 중동, 매교동 일대)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출처 : 수원시사 8권(수원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2014, 130쪽

 

수원시 명예의 전당 기념물(수원시 팔달구청)

 

수원지역 민족독립운동의 요람 서호, 항미정

  수원지역 독립운동 청년 비밀결사인 수원 혈복단에 이어 서호 구국민단이 결성된 이곳 서호와 항미정이 민족운동의 현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서호라는 수려한 풍광과 권업모범장 등 근대농업시설 등이 위치한 특성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고 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인근 수원역과 매산리는 일제상점가가 즐비하였다. 수원과 화성을 배경으로 쓴 홍성원의 대하소설 '먼동'에서도 당시 수원역 개설과 일본인 상점이 들어서고 있던 매산리의 풍경이 잘 묘사되고 있다. 특히 등장 인물인 일진회 지회장 송근술은 매산리에서 기름집 점포를 내어 일본인 상점과 어울려 큰 돈을 벌었는데, 남양 김대감댁과 연결된 의병에 의해서 불태워지는 이야기가 실감나게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서호 일대에는 일제가 운영하는 권업모범장을 비롯하여 많은 농장과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과 수원 매산리 거리(조선총독부, '생활상태조사-수원군' 1929) 당시 신문물인 고무와 고무를 판매하는 점포가 눈에 띈다. 출처 : 수원시사 16권(이곳에 가면 수원의 역사가 보인다.), 2014, 314쪽
일제강점기 권업모범장. 출처 : 수원시사 16권(이곳에 가면 수원의 역사가 보인다.), 2014, 328쪽

 

 

 

 

 

일제강점기 서둔동 농림학교(서울대 농학도서관 소장)출처 : 수원시사 16권(이곳에 가면 수원의 역사가 보인다.), 2014, 323쪽

 

 

 

  따라서 1919323일 수원역 부근인 이곳 서호에서 700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경찰과 헌병대 및 소방대에게 저지되어 해산하였다. 이처럼 서호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벌인 군중들은 이곳 권업모범장 등 일제의 농장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소작인이거나 평소에 일본인들에게 민족적 차별을 당하던 주민들로 이들이 3.1운동을 맞아 일본인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이곳에서 만세시위를 하며 그들에게 우리의 독립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자 한 사건이었다. 이밖에 권업모범장 부속 수원농림학교(수원시 서둔동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농대 전신으로 현재 서울대 및 경기도상상캠퍼스 등 운영) 기숙사생 36명이 33일 밤 몰래 탈출하여 행선지를 알 수 없게 되자 일제는 이들이 만세를 부르러 경성으로 가지 않았나 의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서호와 인근 농림학교 등은 민족독립을 위해 나선 청년 애국지사들의 요람이었다.

 

 

 

1960년대 왼쪽 위 서울농대와 뒤 칠보산 오른쪽 축만제(서호)와 농촌진흥청이 보인다.
1960년대 축만제(서호)와 여기산
1960년 축만제둔과 축만제(수원박물관 소장). 서둔이라 불린 축만제둔에서는 우리나라 1호 벼 품종인 통일벼가 태어난 고향이다. 출처 : 수원시사 17권(수원화성), 2014, 146~7쪽

 

 

 

 

서호 구국민단 결성지(답사)

 

 

 

 

 

동영상

 

 

 

 

항미정에서 나와 축만제 표석(사진)부터 숙지산(숙지중학교) 방향으로 이어진 뚝방길. 이길은 오른쪽으로 과거 축만제둔의 일부인 서둔이 펼쳐져 있고 길 양옆으로는 수령이 오래된 철갑을 두르듯한 소나무가 운치 있게 서있다. 과거 수원 사진을 보면 해방 이전 화성 북쪽 북둔(대유둔, 대유평)과 서둔은 너른 농경지(우리 국산품종 통일벼의 고향)가 펼쳐졌었다. 현재는 북둔에 있던 만석거가 도심의 작은 저수지로 전락하였고 그나마 축만제만이 서둔 일부를 유지하여 당시를 회상할 수 있는 꺼리가 된다.
숙지산 방향에서 축만제 표석과 항미정으로 이어지는 뚝방길. 오른편으로 가마우지가 대량 서식하는 원형의 섬이 보인다. 우리 전통 연못 조경의 하나로 이상셰계를 표현한 월도(달섬)이다. 대개 오래된 연못에는 옛 사람들이 정자를 지어놓고 풍류를 즐겼다.
농촌진흥청 부속기관과 한국농어촌공사 옛 부지에 들어설 국립농업박물관 건립공사 모습이다.

 

 

 

 

부록

수원 혈복단 및 구국민단 공판기록(신문기사)

 

 

 

*수원구국민단(救國民團) 예심이 종결이 결정되어야 한 명을 제하고는 모두 공판

○작년 삼월부터 금년 칠월사이에 수원에서 이러난 구국민단원은 수원경찰서에 검거되어 예심중이라 함은 임의 보도한바이니 수원법원 지령 예심판사 대궁이민(大宮伊敏)씨가 그후 심리중이더니 필경 종결이되어야는데 즉 아래와 같더라

(19201131일 경기도 수원에서 작년 3월부터 금년 7월 사이에 구국민단을 조직 한국 독립에 진력하던 이득수(李得壽) 등의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다. 그 예심 종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원군(水原郡) 일왕면(日旺面) 하광교리(下光教里) 학생

이득수(李得壽, 19)

수원군 수원면 남창리(南昌里) 학생

박선태(朴善泰, 20)

수원군 수원면 북수리(北水里) 여학생

임순남(林順男, 17)

수원군 수원면 남수리(南水里) 여학생

최문순(崔文順, 17, 신문에 김문순 오기

수원군 수원면 산루리(山樓里) 여학생

이선경(李善卿,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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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京城府) 종로통(鍾路通)2정목76번지

윤익중(尹益重, 25)

이상 피고 등의 정치범처벌법 위반 피고사건에 대한 예심종결을 결정함이 아래와 같음.

주문

피고 이득수·박선태·임순남·최문순·이선경에 대한 본건은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치고, 피고 윤익중은 면소하여 방면함.

이유

피고 이종상(李鍾祥이득수는 이전부터 조선 독립을 희망하고 그것을 선전하고자 마음에 머금었다가 19193월 말부터 상해가정부원 차관호(車寬鎬)와 연락하여 오던 바, 그 사람이 가정부의 동정 및 조선 독립에 관한 기사를 게재한 독립신문이라는 인쇄물을 보냈으므로 이득수는 이것을 동지되는 여교사 차인재(車仁載)와 같이 수원군 수원면내의 조선인들에게 반포하였더니, 작년 9월경에 피고 박선태도 일본의 시정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비밀히 상해로 건너가서 가정부에 투신하여 조선 독립에 진력하고자 계획한 그 때에, 마침 이득수의 권고에 의하여 이득수와 같이 혈복단이라 칭하여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함께 써서 불온 문서를 반포하여 조선 독립의 사상을 선전하여 동지를 모으고자 수원에 재주하는 조선인 등에 대하여 이 우에 말한 바의 불온 문서되는 독립신문과 창가집을 반포하여 오던데 192067일에 이르러서는, 차인재의 소개로 피고 여학생 임효정(林孝貞), 즉 임순남·최문순과 이선경 등도 역시 이득수 등의 목적을 찬동하고 그 단체에 참가하여 다시 구국민단이라고 개칭하고 동년 7월 초순경에 대한민보라고 하는 전기 조선독립사상에 관한 기사를 인쇄한 문서를 역시 수원면내의 조선인에게 반포하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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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질서를 방해한 것인데, 이 증거는충분하여 피고의 소위는 1919년 제령 제7호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령 제 1조에 해당되는 것으로 사료하므로 형사소송법 제167조에 의하여, 본건을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붙일 것으로 함. 피고 윤익중은 전기 이득수의 범죄 행위에 가공하였다는 공소 사실은 그 증거가 불충분함으로써 이 사람에 대하여는 형사소송법

165조 제 1호에 의하여 면소 방면을 언도할 것으로 하여서 주문과 같이 결정함.

매일신보1920. 11. 13.-출처 : 독립운동사자료집 13, 학생독립운동사자료집

 

 

 

 

 

 

*구국민단의 공판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득수 외 4명의 사실 심문

수원군을 중심으로 남녀 학생이 연합하여 조직한 구국민단(일명 혈복단)의 공판은 예정과 같이 작 5일 오전 11시부터 경성지방법원 7호 법정에서 열리었다. 이동(伊東) 재판장, 태재(太宰등촌(藤村) 양배석 판사 가등(加藤) 검사가 열석한 후 동단의 단장인 이득수 외 4명에게 대하여 심문을 시작하였는데, 그 중에 이선경은 무슨 사고가 있어서 결석되었다. 먼저 여러 피고의 성명과 연령과 생년월일, 본적, 주소를 물은 후에 이득수부터 심문을 시작하였는데 이득수는 아직 20쯤되는 청년으로 오랫동안 옥중에 있던 까닭인지 얼굴이 해쑥하게 세였으나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이 검은 두루마기의 흰 동정을 연해 잡아다니며 대답하다가 관절염으로 무릎이 아프다 하여 앉아 대답하게 되었다. 먼저 자기가 재작년 3월에 경성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그 운동에 참가하여 본정 경찰서에 체포된 후, 종로 구치감에 20일동안 구류되었던 일과 그 때 곧 방면되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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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생각은 변경되지 아니하고 더욱 견고하여져서 항상 독립운동을 희망하던 말과 이전에 자기에게 한문을 가르쳐 주던 선생이 상하이 가정부에 들어가 있으면서 때때로 생각을 격려하는 편지와 독립신문≫ ≪대한민보같은 것을 보내 주어서 상하이가정부의 형편과 총독 정치에 대한 불평이 깊어갔다는 말과 재작년 9월 중에 이 단원 중의 한 사람인 박선태(朴善泰)를 방문하였을 때에 박선태는 마침 상하이로 가고 싶어 애쓰는 터이므로 자기가 권하기를 지금 상하이를 가야 별로 할 만한 일이 없으니 이곳에 있으면서 수원(水原) 읍내에 상하이에서 오는 독립신문을 배포하여 독립사상을 선전하는 것이 어떠 하냐고 하였더니 박선태도 찬성하여 결국 동지가 되었다는 말과 작년 6월 중순경에 자기가 생각하기를 이와 같은 비밀 운동을 하기에는 남자로만 할 수 없으므로 여자를 가입시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수원삼일여학교(三一女學校) 교사 차인제(車仁濟)의 소개로 이화학당고등보통과(梨花學堂高等普通科) 여학생 임순남(林順男)과 최문순(崔文順)을 안 후에 구국민단이라는 것을 조직하고 단장에 박선태, 부단장에 자기, 서무부장에 임순남, 재무부장에 최문순, 구제부장 이선경(李善卿)을 선임한 후 단체의 주지는 일한합병을 반대하고 조선 독립을 계획할 일과 독립 운동으로 감옥에 들어간 가족을 구제하기로 정한 일과 동년 7월 중에 임순남에게 대한민보30여 장을 맡긴 일이 있으며, 그 외에도 불온 문서를 동대문부인병원 박 승환에게서 찾아온 일을 차례대로 일본말로 대답하였다. 끝으로 판사가 웃으며 이와 같이 큰 단체를 그대와 같이 젊은 사람이 조직하였다 함은 아무래도 고지들리지 아니하니 원래 이 단체의 본부는 경성에 있고 그 지부가 수원에 있던 것이 아니냐 물으매 자기는 모르는 사실이라고 사건을 부인하였다.

조선어 답변은 거절

임순남 등 여학생의 답변

그 다음 박선태(朴善泰)를 심문하게 되었다. 자기는 휘문의숙 4학년 생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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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총독 정치를 불복하고 조선 독립을 희망한다는 말과 재작년 9월경에 이득수가 와서 상하이로 가지 말고 조선 내지에 있으면서 상하이에서 오는 대한민보독립신문을 배부하자 하므로 자기도 찬성하여 동지가 되었다는 말과 이득수가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전기 과격문서를 찾아오는 데 드는 비용은 자기가 담당할 일과 작년 6월경에 상해에서 온 대한민보를 수원 민가에 배부한 일과 작년 6월경에 삼일학교 여교사 차인제의 주선으로전기 구국민단이 조직되고 임원이 선정된 것은 이득수의 말과 같으나 자기가 실상 그 조직하는 곳에 가지는 못하였다는 말과 이리하여 이와 같이 배일 문서를 배포하면 자연 인심이 선동되어 독립사상이 굳어지면 독립이 될 수 있으리라는 원대한 목적을 세웠었다는 말로 심리를 마치고, 그 다음 임순남(林順男)을 심문하게 되었다. 동 피고는 원래 보석 중이었으므로 안색도 그렇게 초최하지 아니한데 일본말로 대답하기 시작하였다. 자기는 원래 수원삼일학교 졸업생으로 이화학당에 다니는 중 작년 6월경에 차인제 선생이 사진을 찍을 터이니 수원농림학교 뒤로 오라 하므로 갔더니 실상 사진을 찍자고 오라 한 것이 아니요 이득수가 그 곳에 있어서 조선 청년된 사람은 남자와 여자를 물론하고 다같이 독립 운동을 하자는 이야기를 하므로 자기도 찬성하여 구국민단에 참가하였다는 말을 대답하였다. 판사는 다시 그러면 지금도 조선 독립을 희망하느냐 물으니 피고는 서슴지 않고 물론 희망합니다. 대답하매 판사는 다시 그러면 그 사상은 견고한 것이냐 물었다. 피고는 다시 사상은 일정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일찌기 학교에 있는 동안에 선생님의 말씀과 동서양 역사를 배우는 동안에 위대한 인물이 그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것을 보고 자기도 그렇게 되어 보고자 한 것도 사실이나 지금은 학생의 몸인즉 힘써 공부할 것이요, 한편으로 부모의 근심하실 것을 생각하면 그 마음이 없으므로 자연 그 마음이 없으니까 사상은 때를 따라 변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매 판사는 다시 웃으며 사상이 매우 단순하군. 하면서 다시 심리를 계속하여 피고가 구국민단에 가입하기는 상해 정부와의 연락과 과격 문서 배포와 재감자 가족 구제인 줄 아느냐고 물으매 자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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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단체에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체포되었으므로 내용은 자세히 모른다고 대답하는데 일본말이 좀 서투른지 때때로 조선말로 대답하겠노라고 하였으나 판사는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그 다음에 판사는 피고는 독립 운동의 활동 상황을 기록하기 위하여 암호 일기를 한 일이 있느냐 물으매 자기가한 것이 아니요, 최문순이가 한 것이라고 대답하매 판사는 증거품으로 일기책을 보인 후 다시 심문이 계속되어 자기가 차인제에게 대한민보30여 장을 받기는 하였으나 배부하였느냐 묻기로 다만 배부하였다고 대답하였을 뿐이요,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말과 상해로 건너가서 가정부에 적십자 간호부가 되어 힘쓰고자하든지 또는 미국으로 가서 공부하고자 한 일도 있다고 대답하며 판사는 다시 피고가 수원지청 예심정에서 성대하게 기염을 토하여 미국 갔다 온 후에 조선이 독립되거든 여자 참정권을 운동하겠다 한 일이 있느냐 물으니 그런 일이 있다고 대답하여 이로써 임순남의 심문은 마쳤다.

암호로 일기

최문순의 답변

그 다음 최문순(崔文順)을 심문하는데 목소리가 너무 적어서 판사는 몇 번이나 듣기에 곤란하였다. 먼저 각년 6월 중에 차인제가 사전을 박으러 오라 하므로 갔더니 이득수가 독립에 관한 이야기를 하므로 찬성한 일과 재무부장은 상하이 가기 위하여 승낙한 것이며, 1주일에 한 번씩 금요일에 삼일학교에 모여 장래에 대한 방침을 의논한 말과 독립 운동의 활동 상황을 기록하기 위하여 암호 일기를 하였다는 말로 대답하였다. 끝으로 판사는 그대가 상하이에 간 후에 가정부 간호부가 되어서 장래 일·미전쟁이 일어나면 일을 하겠다는 말을 예심정에서 한 일이 없느냐 물으니 그런 일은 없다고 대답하여 최문순에 대한 심리를 마치고 판사는 다시 박선태에게 이 구국민단 외에도 수원에 있는 유지 인사에게 동지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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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고한 일이 있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하고 이득수에게 증거품으로 암호표를 보인 후 심리는 끝났다.

검사의 구형

3·2년으로

판결은 12

그 다음에 가등(加藤) 검사가 일어서서 피고 사정을 한 번 보기에는 학생의 신분으로 이러한 일을 함이 정상으로 가련한 점이 없지 아니하나 현재의 정치 문제로 보더라도 특히 엄벌할 필요가있다 하고 이득수·박선태는 각 징역 3년 임순남·이선경·최문순은 각 징역 2개년씩 구형한다 하고 앉으매 김우영(金雨英) 변호사가 피고의 행한 일이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아니한 이상에 될 수 있으면 무죄로 하고 유죄의 판결이 있더래도 집행유예되기를 바란다고 변론한 후 폐정하였는데 판결 기일은 오는 12일로 정하였다더라.

동아일보1921. 4. 6.-출처 : 독립운동사자료집 13, 학생독립운동사자료집

 

 

 

 

 

*혈복단(血復團) 판결 언도

작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여학생 3명은 집행유예

수원 읍내 사는 남자 학생 이득수(李得秀) 1명과 동지에 사는 여학생 임순남(林順男) 2명 도합 5명이 구국민단이라는 것을 조직하여 대한민보(大韓民報)독립신문등의 불온 문서로 수원 일대에 배포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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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격한 사상을 선전하였다는 사실로 지난 5일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동(伊東) 재판장의 손으로 공판이 있었다 함은 본보에 이미 보도한 바이어니와 작일 오전 11시에 태재(太宰)와 등촌(藤村), 이홍종(李弘鍾) 양배석 판사와 가등(加藤) 검사가 열석한 후 판결을 언도하였는데 압수 물건은 전부 몰수하고 피고의 형기는 아래와 같으며 죄명은 제령 제7호 위반이라더라.

이득수(李得秀) 박선태(朴善泰) 각 징역 2개년(단 미결 구류일수 140일을 산입함)

임순남(林順男) 최문순(崔文順) 이선경(李善卿) 징역 각 1개년(미결 구류일수 140일 산입, 3개년간 집행 유예)

동아일보1921. 4. 13.-출처 : 독립운동사자료집 13, 학생독립운동사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