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91-6번지 한국빈민운동회관 내 사단법인 제정구기념사업회.
2011년 새로운 출발을 위해 몸을 두게 된 곳이다. 이곳에서 내 삶의 두 번째 서울살이가 시작된다.
처음 서울살이를 했던 것은 2006년 대학을 갓졸업하고 나서였다.(3월) 전국은 지방선거 와중이었고 내 첫 사회진출은 선배님의 서울시의원 출마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흔히들 20대에 해야하는 일로 여러 가지가 이야기되는데 그 중 정치도 크게 이야기가 되어 나름 좋은 경험이겠다싶어서 나선 길이었다.
서울시 광진구 중곡동 일대 그중 사무실이 중곡3동에 있었고 거기에서 숙식을 하였다. 서울이 시멘트 빌딩과 건물이 즐비한 너무 인공적이고 삭막한 생각이 컸는데 중곡동에서 살면서 서울이 참 살기 좋구나 생각하였다. 가까이 아차산이 있고 옆으로 중곡천과 한강이 흐르는 너무도 좋은 자연환경과 불편함이 적은 시내의 각종 인프라.. 여기서 이렇게 살면 서울도 참 살기 좋겠다싶었다.
중곡동 생활을 한 100여일 하고 서울을 떴고 지금 거의 5년만에 다시 서울살이가 시작되었다. 이곳 이화동의 주변환경도 너무나 좋다. 서울생활에는 환경적으로 운이 따르는 것같다.
처음 서울살이를 할 때의 마음가짐과 지금의 생각이 새롭다. 마치 옛날 시골선비가 상경할 때의 마음가짐이라고 할까..
정조 때의 일이다. 정조는 늘 조정의 시류에 편승하기보다는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공론화하여 전국의 식자들인 선비들에게 자주 그 의견을 묻곤 하였다. 그러다 훌륭한 식견을 가진 선비가 있으면 친히 불러 그를 맞아 생각을 나누고 치하하였다. 어느날 정조는 정국의 현안을 물으니 전국에서 상소가 올라왔고 삼남지방의 어느 선비의 의견이 탁견이었다. 따라서 정조는 그를 친히 불러 입궐하도록 명하였다. 이렇게 시골 선비가 주목을 받자 조정의 많은 대신들은 늘 그렇듯 시골나부랭이에 불과한 자가 임금의 주목을 받아 심기가 불편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임금이 친히 불러들이는 자이니만큼 그가 골탕먹으면 시골선비는 물론 임금도 물먹일 수 있겠다싶어 벼르게 되었다.
예나지금이나 기득권을 지키려는 생각과 마음은 새로운 사람에 대한 경계와 내침이 크다. 당시 조선에서 임금이 명하여 입궐을 하는 것은 학문을 하고 유학을 한 선비라면 신하된 입장에서 자신은 물론 가문의 영광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유학의 나라 조선은 특히 예를 존숭하고 예법을 중히 여기니 그 예법에 벗어나면 금수에 치부하거나 천한 사람으로 대우하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임금이 사는 대궐에 들어가는 것은 단순히 남의 집을 드나드는 것이 아닌 국왕의 거처이자 나라의 근본인 법궁에 들어가는 것이기에 그에 합당한 예법은 물론 예식을 갖춰야 한다. 이러한 예법에 어긋나면 당연히 엄격한 궁중의 예법에 따라 처벌되는 것은 당연했다.
조정의 많은 대신들도 이를 알았기 때문에 시골 선비가 크게 골탕먹을거라 생각하고 그의 입궐을 기다렸다. 마침내 시골의 선비가 상경하였고 임금님을 뵙고자 예법에 맞게 사대관복을 착용하고(벼슬이 없는 사람도 조정에 입조할 때는 사대관복을 착용한다.) 대궐에 들어섰다. 시골선비가 어디 대궐의 예법을 알아 제대로 하겠냐고 벼르던 대신 앞에 시골 선비는 궁중예법에 맞게 궐문을 지나 임금이 계시는 정전을 향해 사배를 하는 등 그 엄격하고 세세하게 많은 예법을 하나하나 갖추고 정조가 계시는 조정으로 들어왔다. 이 모습을 보자 대신들은 탄복했다. 매일 같이 들고나는 자신들도 까다롭기 그지없는 이 격식을 시골 선비가 그것도 서울 한양에 한 번도 올라 온적이 없는 자가 예법 하나하나 틀리지 않고 입조한 것을 보고 감탄할 수밖에.. 정조도 가히 훌륭한 선비라는 것을 알고 흡족하였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선비는 시골뜨내기, 촌뜨기라고 무시되거나 예법을 몰라 호되게 곤욕을 치룰 수도 있었으나 당당히 대궐에 들어섰다.
그 선비의 마음이 생각났다. 서울을 올라오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였을까? 또 얼마나 많은 것을 보면서 그 새로움과 낯설음에 정신이 없었을까? 그럼에도 준비된 사람으로 주눅됨 없이 당당할 수 있었던 선비의 진취적인 자세.. 이런 것들이 많이 생각되었다. 마치 내가 시골 선비인마냥..
처음 사대문 안의 옛서울, 그 중심에 들어왔다는 생각에서 새로움, 낯설음.. 그리고 예전 서울살이와 지금 내가 할 일에 대한 조금의 사회경험에 따른 여유가 그 시골 선비를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몇백년전 시골 선비와 내가 똑같을 수는 없지만 그가 생각하고 체험했던 서울 한양의 경험은 시골뜨내기인 나와도 어느 정도 같을 거라 생각한다.
나의 서울살이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 옛날 시골 선비님처럼..
전철 1호선 종로5가역이나 4호선 혜화역에서 내려 방송통신대학교 방향으로 길을 잡아가면 서울대부속초등학교가 나온다. 그 앞의 길을 통해 낙산공원쪽으로 가다보면 이화동주민자치센터가 나오고 그 맞은편 새우리약국 골목 중간에 한국빈민운동회관이 있다. 건물의 외관은 일반 벽돌식 주택이며 벽돌로 담장을 두른 아담한 집이다.
회관에는 사)제정구기념사업회와 함게 한국주민운동교육원(코넷)과 주거권실현운동연합, 전국공부방연합회 등 여러 단체 사무실이 함께있다. 이 회관은 우리 기념사업회의 건물이며 다른 단체의 뜻깊은 활동에 연대하는 의미에서 임대료없이 같이 지내고 있다.
봄햇살이 느끼기엔 좀 쌀쌀한 3월, 서울살이를 시작하고 주변을 살펴보고자 발걸음을 옮겼다. 회관을 나와 맞은편 이화동주민자체센터를 보고 동쪽으로 이화장으로 가는 언덕길이 나있다. 그 길을 가기 앞서 동사무소 건물을 지나치다가 우연히 이곳이 과거 석양루(夕陽樓)터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서울 사대문 안에서 이렇게 살게되면서 곳곳이 유적일거라 생각은 했지만 눈길머물고 닿는.. 발에 걸리는 모든 곳이 다 유적이다. 그러나 터는 있지만 현존하는 문화재는 극히 드물다는 것은 유서깊은 우리 역사를 생각할 때 매우 아쉽다.
석양루의 주인은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1622(광해군 14)∼1658(효종 9))의 사저이다. 인평대군은 형인 효종과 각별하였으며 죽은 뒤 그의 위패를 효종의 묘정에 배양되었다. 당대 시서화에 능한 예술적 문사였으며 〈산수도〉, 〈노승하관도 老僧遐觀圖〉, 〈고백도 古栢圖〉 등이 전하며 특히〈고백도〉는 섬세하고 꼼꼼한 필치로 다루어져 있어 맹영광의 공필법(工筆法)과 서로 영향을 미쳤고 〈산수도〉는 다소 거치른 필치 등이 절파풍(浙派風)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저서 ≪송계집≫·≪연행록 燕行錄≫·≪산행록 山行錄≫이 있다.
이렇듯 인평대군의 개인적 재능이 뛰어나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보다는 구한말 석파 이하응, 즉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5대조라는 사실이다.
인평대군과 각별했던 효종은 석양루 근처에 조양루(朝陽樓)라는 잠저가 있었다. 잠저는 임금이 되기 전에 머물던 집을 말하는 데 효종의 잠저는 임금이 되었다고 하여 용이 흥한 궁해서 용흥궁이라고 불렸으며 현재 이화동사거리에서 종로5가역 방향으로 50m거리에 있었다. 현재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그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이화장(梨花莊), 이화장은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사저이다. 해방 정국하에 거물급 민족지도자들이 저마다 자기 사저에서 모임을 형성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김구 선생님은 현재 삼성의료원이 들어선 경교장에서 했다. 그러한 전통이 이후는 동교동계니 뭐니 하면서 이어진 모습이있다.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것이다. 독립운동가였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북진통일론자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1945년 해방 이후 자주민족독립국가 건설에서 철저하게 반공적 이데올로기에 서서 친일파를 껴안아 반쪽 국가건설을 주도한 분단주의자라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요 며칠 전 제주도에서 곡소리가 끊이질 않았는데 바로 제주4.3항쟁을 촉발하여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살상하였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사에 굴곡많은 역사에 첫단락을 장식하고 거기에 피와 한(恨), 절망과 아픔, 상실, 반쪽이라는 명사를 친숙하게 만든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이승만 스스로 대만의 장개석처럼 국부로 자처하고 군림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와 이승만 개인만의 특징은 아니다. 세계의 저마다 초대 국민 지도자들이 이런 사례를 따른 자들이 많다. 그래도 나는 아쉽다. 수많은 독재자가 있다지만 남아메리카 독립 영웅이었던 볼리바르가 있었고 쿠바혁명의 지도자 체 게바라가 있었으며 인도에는 간디, 터키에는 케말파샤가 있었다.
역사에서 개인은 어떻게 영광만 있고 그 이면의 그림자는 없게냐는 생각을 하지만 그래도 너무 아쉽다. 그가 그 현실에서 자신의 욕심을 조금만이라도 내려놓았더라면.. 이화장 뒤 낙산공원 올라가는 길에 서있는 이승만이 쓴 글귀를 새긴 '경천애인(敬天愛人)' 비석을 보니 헛 웃음이 나오는 것은 왜일까?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
역사에서는 가정은 없다. 때문에 우리는 지금을 철저하고 냉철하게 살아야한다. 현재만이 미래를 바꾸고 과거를 아름답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이화장은 이승만 기념관이다. 간간이 그 앞을 지나지만 개방하고 있지 않다. 조선 중기의 한옥 건물이라고 하는데 자세히 살펴볼 수 없다. 이화동은 예전 배꽃이 아름다운 동네였고 이 이화장 위에 이화정(梨花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많은 문사(선비)들의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이화장 옆 언덕 골목을 이르는 길이고 이 길을 지나서 낙산 정상과 낙산공원, 서울성곽 등에 이르게 된다. 흔히 달동네라고 부르는데 그 이름에서 내포하는 의미가 있어 유쾌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서울 한복판에 다닥다닥 집들이 어께를 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정겹다. 바둑이가 뛰어 나와 짖을 거 같고 동네 꼬마녀석들이 딱지 치기를 하고 술레잡기를 할 것 같은 정취..
골목을 걷노라면 어느 새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낀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자주 오르는데 가끔 너무 취해서 근무시간을 넘길 때가 있다. 그냥 한 귀퉁이에 앉아 막걸리를 벗삼아 흥얼 거리고 싶을 때도 있고..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빡빡하게 살면 빡빡한 것이고 여유를 부리면 여유가 있는 것이고..
푸근한 골목길을 지나 낙산공원에 올랐다. 낙산은 서울 도성의 4대문과 함께 4대산을 형성하는 산이다. 풍수적으로 좌청룡에 해당한다. 경복궁 뒷산이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오른쪽이 우백호 인왕산, 그리고 남주작 목멱산 남산 이렇게 4대산이다. 낙산에 올라 서울을 바라보면 북악산, 인왕산, 남산 산자락은 물론 종로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북촌, 우리 사무실이 위치한 이화동 일대의 동촌, 남산의 남촌, 최근 세종이 탄신 하셨다고 해서 문화지구로 지정된 경복궁 서남쪽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지역의 서촌 등 방위별로 지역이 구분되었다. 특히 궁궐과 가까운 북촌이나 서촌, 동촌 지역은 권세가 등 조정신료들이 많이 모여 살았고 상대적으로 그보다 멀리 떨어진 남산주변인 남촌에는 남산골 샌님이라고 불리며 조정과는 거리를 두고 시류에 편승하지 않았던 선비들이 주로 살았다. 예나 지금이나 유유상종이다.
한성 4대산 중 가장 완만한 동촌의낙산은 낙타등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예전에는 타락산으로도 많이 불렸는데 타락은 우유의 옛말로 예전 왕실에 들이던 우윳소를 낙산에서 길렀기에 타락산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낙산 중턱, 낙산공원 위에 텃밭 비슷하게 무슨 시설물이 있어 가봤더니 '흥덕이 밭'이라고 설명이 나온다. 흥덕이는 병자호란 당시 봉림대군을 따라 심양에 가서 모시던 궁녀이다. 흥덕이는 특히 손맛이 좋아 김치를 잘 담궜는데 대군이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볼모에서 풀려난 봉림대군이 그맛이 그리워 흥덕이에게 밭을 주어 그곳에서 나온 채마로 김치를 담궈 바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말 이곳에 밭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곳 낙산이 봉림대군, 훗날 효종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이곳에 있던 정자는 아니나 낙산공원을 만들면서 세운 낙산정이다. 낙산정에 올라 바라보면 옛 서울도성 안의 모습이 구석구석 눈에 들어온다.
한양은 서울의 오래된 이름으로 삼국시대에 한양이라 불리었고 고려 때 행궁이 설치되면서 남경이 설치되면서 함께 불리었다. 이 한양이 조선시대 수도로 결정되면서 그 안을 감싼 성곽이 지금의 서울 성곽이고 서울 성곽의 역사는 조선왕조의 탄생과 함께한다. 따라서 한양을 두른 성(城)이 한성이며 조선시대 명실공히 수도 한양을 한성이라고 불렸다. 조선의 수도 한성의 범위는 한양을 두른 성곽을 포함하여 성저십리(城底十里 성밑에서 십리에 이르는 지역)를 한성부(현재의 서울시에 해당하는 관청)가 관할하는 수도의 범위였고 무덤은 물론 나무의 벌채도 일절 금지하며 수도를 관할하였다.
중원에서 몽골의 제국인 원나라가 쇠퇴하며 각지에서 한족이 원을 타도하고 명나라를 건국하려는 시기 한족의 반정부집단 및 도적이기도 했던 홍건적이 만주를 걸쳐 고려에 들어오고 아울러 원나라 말기부터 고려의 해안과 내륙, 중국은 물론 멀리 동남아시아까지 세력을 떨치던 왜구의 잦은 침입과 약탈, 거기에 고려 내부의 원과 결탁된 부원배 권문세족과 사원들의 백성에 대한 갖은 수탈 등 고려는 내우외환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때 원을 북으로 밀어내고 새로이 중원을 차지한 명나라가 한때 고려가 차지한 요동지역(만주)은 물론 원이 차지했던 고려 내지의 영토인 과거 원의 쌍성총관부의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며 철령위를 설치하려 하자 이에 반발한 고려의 조정에서는 최영장군을 중심으로 명나라 공격하는 2차 요동정벌을 단행한다. 이때 요동정벌군을 이끈 사람이 이성계였고 이성계는 4불가론(四不可論)을 주장한다.
이소역대 일불가 以小逆大 一不可(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치는 것은 불가하다)
하월발병 이불가 夏月發兵 二不可(여름에 군사를 출병하는 것은 불가하다)
거국원정 왜승기허 삼불가 擧國遠征 倭乘其虛 三不可(명과 싸우는 사이에 왜구가 침략할 것이다)
시방서우 노궁해교 대군질역 사불가 時方署雨 弩弓解膠 大軍疾疫 四不可(지금은 장마철로 활이 약해지고, 병사는 병든다.)
결국 압록강 하중도인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고려의 도성인 개경으로 회군한다. 바로 1388년 위화도회군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려는 망하고 왕의 성이 왕(王)씨에서 이(李)씨로 바뀌는 역성혁명으로 조선이 건국되었다.(1392)
공양왕이 물러나 선양의 형태로 국왕이 된 태조 이성계, 그는 전장의 벗, 노장 최영을 죽였고 두문동의 선비들, 우왕과 창왕, 그리고 공양왕 등 많은 사람의 피를 보고 왕위에 올랐던 개경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초기 수도를 갑작스레 옮기지 않았지만 하루 빨리 새왕조의 새 터를 잡아 새 시대를 열고 싶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 계룡산 아래 터와 경합이 되었지만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올라 새왕조의 새터로 찜해두었던 북악산 밑의 이 한양에 도성을 세운다.
한양은 일찍이 한강변에 위치한 곳으로 수도로서 물망에 오른 오래된 땅이다. 특히 한양 남쪽은 백제의 하남 위례성이 들어서 백제 역사가 꽃피웠던 곳이었고 이 터 역시 고려 인종 때 행궁을 지은 이래로 항상 수도의 적임지로 주목되던 곳이었다.
한양 성곽은 배산임수의 지형을 최대로 고려한 풍수지리법에 따른 수도였으며 여기에 성리학적 세계질서를 가미한 조선 최초의 신도시였다. 풍수적으로 좌청룡 우백호 북현무 남주작에 따라 우리 사무실이 위치한 낙산, 마주한 인왕산, 북쪽의 백악산, 목멱산(남산)으로 이루어지고 그 가운데 맑고 깨끗한 천이 흐르는 청계천이 흘러 한강과 합수되어 도성을 휘돌아 나간다. 천혜자연조건이자 명당인 것이다.
또한 조선의 성리학적 유교질서를 도성체계에 반영하여 북악산 아래 조선의 정국 경복궁을 짓고 좌우에 각각 사직과 종묘를 세웠으며 한양 둘레로 성곽을 쌓고 동서남북 4방위에 따라 도성의 4대문을 유학의 사단, 즉 인의예지(仁義禮智)로 한양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 돈의문(敦義門)을 쌓았고 예를 숭상한다는 서울 중심의 대문 숭례문(崇禮門), 북악산에 숙지문(숙청문, 중종이후 숙정문)을 세웠다. 특히 북대문인 숙정문(肅精門)은 풍수적으로 경복궁의 양팔을 밟는 형국이라서 문을 폐쇄하였고 항간에는 북이 음이므로 북문을 열면 여자들이 음란해진다고 하는 속설이 있었고 가뭄이 심하게 들면 양을 억제하고 음을 강하게 해야한다는 믿음으로 북문을 한시적으로 열었다 닫는 풍속이 시행됐다. 그러나 북문은 경복궁 주산인 백악산(북악산) 정상에 있어 평소에도 사람들이 크게 드나들지 않을 뿐 아니라 늘 닫혀있던 관계로 그 쓰임이 적었다. 그래서 실제적인 북문으로 불린 것은 사소문인 창의문이었다.
이성계가 개경에서 천도한 이후 한성은 2대 왕 정종에 의해서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게 된다. 이는 내부적 여러 정치적 상황과 결부되었는데 특히 개경을 위시한 고래로부터의 집권세력과 상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시전들의 반발이 컸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다시금 한성 천도를 단행하여 굳건히 조선의 서울로 한성을 세운 것이 3대 태종 이방원으로 태종은 개경 구세력을 철저히 누르고 새 상권으로 개경의 부호들을 적극적으로 한성으로 끌어들여 명실공히 새 나라 조선의 수도로 올려놓았다. 이와 같은 천도는 국가의 중요한 일일 뿐 아니라 새 왕조의 새 기틀 및 정치를 위해서도 새 세력을 결집하고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일대 전환인 것이었다.
정도를 가는 사람은 대문으로 드나들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샛문이나 개구멍이 더 끌린다. 왠지 더 인간적이고 사람냄새가 난다고나 할까 낙산성곽에 오르면 정상에서 북측으로 작은 암문이 나온다. 암문은 유사시 적의 눈을 피해 성안으로 드나들던 비밀통로였고 평시에도 사람들이 드나들던 문이다. 이런 암문은 구조상 매우 작은 형태로 잘 안 보이게 만들었는데 위급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문이었기 때문이다.
암문에서 나가 바라보니 한성대학교 캠퍼스가 한눈에 들어오고 그 아래 이전 설치된 총무당이 보인다.
서울 도성은 조선 500년 동안 개보수를 하였는데 특히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처음 쌓았던 태조 때와 세종, 그리고 후기의 숙종 때이다. 따라서 이들 성곽의 축성방식의 차이도 명확하여 답성돌이를 하면서 이 부분이 어느 시절에 쌓았는지 눈 여겨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일 것이다.
처음 도성을 쌓았던 시기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돌을 얼기설기 쌓아 투박한 느낌을 준다. 이후 세종조에는 하단의 기단석과 위에 쌓는 돌의 크기를 달리하며 조형감이 있다면 숙종 때 쌓은 성곽은 요즘 복원공사를 하듯 반듯반듯한 석재가 올려져 있다. 이런 특징을 잘 기억해서 한양성곽을 돌면서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리 쌓은 성곽을 확인하고 살펴보면 좋겠다.
암문을 나와서 쭈욱 내려오다 보면 한성대학교 왼편에 눌려있듯 위치한 총무당을 볼수있다. 총무당은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고 지금 강화문거리 세종로에 중앙정부청사 자리에 있던 관청이다. 총무당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이 관청은 군영의 사령부에 해당하는 삼군부의 본전이다. 삼군부는 군사를 총괄하는 오늘날로 치면 계룡산 아래 육군본부에 해당한다. 조선 초 권력의 핵심은 삼군부를 장악하는 것이었고 이에 정도전은 삼군부를 앞세워 공신들과 왕족들을 견제하였다. 이후 세조 때 폐지되고 흥선대원군이 세도정치를 혁파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새로이 삼군부를 설치하였다. 지금 이 총무당은 흥선대원군이 설치한 삼군부의 건물이다.
총무당을 나와 한성대학교내를 걸어 올라가다 문득 바위를 보니 마치 마애불을 닮은 형상이다. 문득 예전 달마대사가 동굴에서 가부좌를 하고 수행을 오래했는데 그 앞 바위가 달마대사의 형상대로 변해있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불교식 절을 하고 돌아섰다.
정업원은 왕실이나 양반의 여인들이 출가하여 머무는 절이다. 이 정업원은 비운의 정순왕후 송씨의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정순왕후 송씨는 세종의 손자이고 세조의 조카였던 문종의 아들 단종의 비이다. 단종은 고명대신이었던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 장군도 그를 지키지 못했고 작은 아버지 안평대군, 금성대군 조차도 조카를 지키지 못했다.
희대의 지략가인 칠삭둥이 한명회를 얻은 수양대군은 지난날 왕권에 대한 욕심을 계유정난을 통해 채울 수 있었고 그 덕에 참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자신의 혈육마저도.. 그래선지 말년에 등창 등 피부병을 얻어 고생했는데 들리는 말로는 단종의 어머니가 세조에 꿈에 나타나 침을 뱉어 그랬다는 설이 전한다.
세조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눈물을 흘리며 강원도 영월로 떠난 단종, 후일 세조의 충신들은 사람을 보내 단종을 죽였다. 전하는 말로는 물레의 실에 목을 메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떠난 님을 그리워 하며 자신도 궁에서 쫓겨나와 정업원에 머물며 그가 있는 동쪽 영월을 향해있는 옆 동산 위에 올라 매일 단종의 무사안일을 기원하였다는 송씨.. 단종이 죽고 그 남편의 명복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웃한 동산의 이름이 동망봉(東望峰)이다.
송씨의 한숨과 한(恨), 시름이 베어 있는 곳이다.
아파트가 즐비하여 설마 이런 곳에 문화재가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숨어있는 비우당, 비우당을 찾느라 진땀 뺐다. 비우당은 실학자의 선구자로 불리우며 당대 문장가이자 외교관, 석학이었던 이수광이 머물며 유작 지봉유설을 지은 곳이다. 이수광은 명나라 사신으로도 많이 다녀오고 그곳에서 안남국(베트남)에서 온 사신과 편지로 사귄 일화가 유명하다. 이수광과 편지를 나누던 그 사신은 후일 우리나라의 이황과 이이와 같이 베트남 유학의 큰 스승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그 덕에 이수광 역시 베트남 유학자에게는 존숭의 대상이 되었었다.
비우당은 그의 외가 할아버지인 청백리 유관의 집이다. 초가삼칸을 벗삼아 사는 것이 선비의 길이라고 했던가.. 나의 스승님은 그랬다. 초가집도 있어야 살 수 있는 집이다. 초가집도 못짓고 사는 사람이 다반사였다라고.. 그래도 일인지하 만인지하였던 정승이 자신의 재물욕만 채우지 않고 초가를 이루고 살았으니 백성들은 편했을 것이다. 욕심쟁이 어른을 모시고 살지 않았으니..
비우당 옆으로 작은 우물이 있는데 자주동샘이다. 자주동샘은 정순왕후 송씨가 머리댕기를 자주 염색을 들이며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일화가 전하는 곳이다.
명문가의 여식으로 태어난 조선 최고의 여인인 왕후가 되었으나 그의 말년은 비운의 남편을 그리워 하고 힘겹게 머리댕기를 물드이며 하루하루 살았으니 참 사람팔자 모른다고 하더니..
사무실에서 잠시 짬을 내어 둘러 본 낙산과 그 주변.. 나의 서울살이가 참으로 즐겁다. 내가 좋아하는 유적과 역사가 곁에 있으니 절로 흥이난다.
그 옛날 시골선비의 마음이 되어 견문을 넓히고 서울을 알아가야겠다. 정말이지 알면 알 수록 우리의 서울은 우리를 닮아있는 편안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라던 옛말, 지금은 오히려 코를 세운다. 격세지감이 이런 것일까? 현대화된 서울과 전통을 아우르려는 서울의 모습..
저 달이가 열심히 보고 느끼고 살아보렵니다. 늘 새롭고 즐거운 서울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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