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이야기

[배달학당] 왜 씨알인가

달이선생 2011. 5. 12. 13:53

 

 

 

  사단법인 제정구기념사업회에서 간사를 맡아 보면서 배달학당을 통해 살아가는 지혜에 대한 나눔을 하고 있다. 늘 사람이 된다는 것,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무엇하나 쉬운 일은 없다.

  이런 젊은 날의 번민에서 소중한 빛으로 자리하는 것이 씨알재단 박재순 박사님이 들려주시는 '씨알사상'이다.  씨알사상을 통해서 우리들 자신이 씨알이라는 자각과 그 씨알이 의미하는 바, 단순히 종교적 철학을 넘어서 실천적이고 현재적 물음에 대한 자의지를 북돋는 계기가 된다. 한편으로는 반성이 된다. 내가 과연 씨알로 살아가고 있나? 말이다.

  이 글은 박재순 박사님의 강의를 녹취해서 정리한 글이다. 녹취 및 문서로 옮기는 것은 내가 했고 내용정리는 제정구기념사업회 박재천 상임이사님이 하셨다.

 

  그간 함석헌이라는 인물에 대한 막연하고 너무도 유명하니 그 분이 씨알을 말했다 정도로 알고 있다면 정말 씨알의 의미와 씨알사상이 무엇인지 아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박제화된 지식에서 삶 속으로 체화되는 소중한 기회가 되길 고대한다.

 

 

 

 

 

[배달학당 / 2기 1강 ]

 

 

  왜 씨알인가?   

 

 

  이글은 가난공동체생명 제2기 배달학당「박재순 박사와 함께하는 씨알사상」제1회 학당 <왜 씨알인가?>의 내용입니다. 2011년 4월 11일(월), 서울 종로구 이화동 제정구기념사업회 교육실에서 이병학(한국지역자활협회 회장)외 9분이 참가했습니다. **학당게시판**

 

 

 

  우리 인생은 완성된 원고가 아니다.

 

  제1기 학당에서 얘기할 때도 말했지만 스승은 밖에 없다. 오늘 나를 스승이라 소개하고, 여러분을 학승이

 

라 말했지만 스승은 내안에 있다. 나는 함석헌 선생님한테 좋은 가르침을 듣고 배우며 그분을 스승으로 생각했다. 실제 197~80년대를 전후해서 온 겨레가 훌륭하신 스승으로 생각했던 때인데 함 선생님이 여러 차례 스승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씨알이 스스로 싹트고 열매 맺듯이 씨알인 사람도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삶과 정신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존재다. 삶의 진리는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배우는 것이다. 누가 주입해서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니까 스승과 학승의 관계로 볼 수 없다.

 

 

 

  씨알사상의 원조는 안창호, 이승훈 선생이다. 나라가 망해갈 때 안창호는 신민회를 조직(1907)하고 이승훈은 오산학교를 세워서 나라의 토대이며 주체인 민(民)을 깨워 일으킴으로써 나라를 되찾고 바로 세우는 운동을 일으켰다. 이것은 민을 깨워 일으킴으로써 나라를 되찾고 바로 세우는 운동, 한 마디로 교육입국(敎育立國)운동이다. 씨알사상은 이런 운동에서 닦여져 나왔다.

 

  오바마 미국대통령이 한국을 칭찬하면서 “한국의 교사는 국가의 건설자였다. 미국의 교사도 국가 건설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우리나라 교육이 그렇게 찬사를 받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어찌 보면 지금 교육은 나라를 세우는 교육이 아니라 허무는 교육이다. 제일 잘 나간다는 카이스트 학생 4명이 죽었다. 카이스트 최고 인물상을 받은 교수가 자살했다. 우리나라 교육에 근본적인 문제가 생긴 것이다. 교육입국운동을 벌인 안창호, 이승훈 선생의 교육정신은 섬기는 교육이다. 이분들처럼 철저하게 섬기는 교육, 섬기는 정신, 섬기는 종교에 사무친 사람들이 없다. 이것이 씨알사상의 정신이다. 지금 이런 정신이 없으니까 교육이 다 헛소리가 됐다.

 

  씨알사상은 완성된 이론체계라고 볼 수 없다. 유영모 함석헌 선생이 씨알사상이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이것을 체계화하거나 정립하지 않았다. 심오하고 넓은 씨알사상의 원칙과 틀, 방향과 성격을 제시해주셨을 뿐이다. 오늘 배달학당 교재로 쓰고 있는「씨알사상」에서도 밝혔듯이 씨알사상은 생명철학이고 정신철학이지만 완성된 이론체계가 아니라 씨알의 삶과 실천 속에서 형성되고 완성되는 사상이다.

 

  이런 점에서 씨알사상은 열려진 사상, 미완의 사상이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서 대화하면서, 자기를 다듬어가면서, 현장에서 실천해가면서 씨알사상의 실마리가 잡히고 틀거리가 형성되고 완성돼 나갈 것이라 생각한다. 유영모 선생이 자기사상과 이론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과 이론과 철학은 ‘미정고(未定稿)’라는 말씀을 자주 했다. 미정고라는 말은 완성되지 않는 원고, 아직 못다 쓴 원고, 지금도 쓰고 있는 원고다. 지금의 모든 이론이나 철학은 쓰고 있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고 완성될 것이지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인생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계속 완성을 향해 나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 사상과 철학도 결정되고 완성된 게 아니라 새로운 삶과 영(靈)의 역사 속에서 새롭게 생성되고 다듬어져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씨알사상은 늘 새로워져야 하는 생명철학이고 영성철학이다.

 

 

  씨와 알속에 생명체의 알짜배기가 들어있다.

 

  씨알은 씨와 알이라는 말이다. 씨는 식물의 씨이고 알은 동물의 알이다. 또 사람과 동물에게는 정자와 난자가 있다. 사람과 동물뿐 아니라 모든 씨앗과 식물에도 정자와 난자가 있다. 꽃의 암술의 난세포와 수술의 정자가 결합돼서 씨앗과 열매가 나온다. 씨알은 매우 작지만 그 속에 전체 생명의 알짬을 담고 있다. 씨앗, 씨와 알이 왜 생겼을까? 생명을 후세에 전하고 널리 퍼트리기 위해서, 번식하고 증식하기 위해서 생겼다. 씨앗이 없으면 그 낱개 생명체가 죽을 때 그 종(種)의 생명 전체가 죽어버린다. 생명을 연장하고 존속시키는 수단으로 씨와 알이 생겼다.

 

  만약 나무에 씨와 알이 없다면 그 나무가 죽을 때 나무의 생명은 다 소멸되고 만다. 사람의 생명도 짐승의 생명도 씨와 알이 없어지면 곧 사라진다. 씨와 알은 작지만 그 작은 것 안에 그 생명체 전체의 핵심 알짜배기들이 다 들어가 압축돼있다. 씨알맹이, 속알맹이를 담고 있다.

 

  씨앗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생명진화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37억 년 전에 생명체가 처음 생겼다고 한다. 이 생명체를 고세균이라고도 하고 원핵생물이라고도 한다. 완벽한 세포가 아직 이루어지기 이전의 핵이 없는 단세포 원핵생물의 시대를 세균시대라고 한다. 이때는 자기 몸을 그냥 분열시켜서 번식했다. 영양상태가 어느 정도 되면 둘이나 셋으로 쪼개져 자기 몸을 나눔으로써 개체 수가 늘어나고 생명이 연장되었다. 이것이 가장 원시적인 번식방법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동일한 세포, 동일한 세균이 갈라져서 내려온 거니까 이론적으로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세균이 있을 수 있다.

 

  그때부터 20억 년 가까이 진화와 발전이 없었다. 자신의 몸을 쪼개서 다른 생명체를 만들어내지만 몸은 똑같은 몸이다. 똑같은 몸을 나눈 것이고 같은 몸을 연장(延長)시킨 것이었다. 그러므로 질적인 변화가 없었다. 아무리 몸을 쪼개고 나누어도 똑같은 일이 되풀이될 뿐 새로운 생명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화가 이루어졌나. 원핵세포가 진핵세포로 됨으로써 본격적인 생명진화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진핵세포 속에는 본래의 세포와 전혀 딴 살림을 하는, 동물로 말하면 미토콘도리아, 식물로 말하면 엽록소가 생겼다.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소는 세포의 발전(發電)기관 구실을 한다. 이것들이 있어서 발전소같이 에너지가 창출되고 뭔가 활력이 넘치는 힘이 나온다.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엽록소와 미토콘도리아는 원래 다른 세포여서 유전자(遺傳子)의 성격도 다르고 재생되는 방식도 다르다. 이 전혀 다른 생물체가 하나의 세포에 통합돼서 공생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식물 동물이 나왔고 진화의 세계가 활짝 열렸다.

 

  그러면 진핵세포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세균세계에는 혐기성 박테리아와 호기성 박테리아가 있다. 혐기성은 산소를 싫어하는 세균이다. 호기성은 산소를 좋아하는 세균이다. 산소는 본래 생명체에 치명적인 것이다. 활성산소는 생명체를 노화시킨다. 우리는 산소가 없으면 죽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최초의 생명체들에게는 산소가 독이었다. 산소를 싫어해서 수소만 가지고 생명체를 유지한 것이 원핵생물들이다. 그러다 햇볕이 들어오고 산소가 들어오니까 돌연변이가 생겨서 산소를 좋아하는 세균이 나왔다. 이것이 독과 같은 산소를 마시고 에너지를 만드니까 강력하고 활기 있는 세포들이 되었다. 이 세포들은 식욕이 왕성해서 혐기성 세균들을 잡아먹었다.

 

  세균의 세계에 큰 위기가 생겼다. 이러한 큰 위기에서 놀라운 생명의 지혜가 나왔다. 혐기성 세균이 호기성 세균에게 처음에는 잡아먹혔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잡아먹히던 혐기성 세균들이 잡아먹으려 하는 호기성 세균을 끌어안아서 자기 몸을 열고 몸속으로 받아들였다. 엄청난 모험이 이루어진 것이다. 적과의 공생이 이루어짐으로써 호기성 세균이 혐기성 세균 안에 들어와서 미토콘드리아가 되고 엽록소가 된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것이 진핵세포다. 강력한 적을 품었더니 적이 강력한 엔진 노릇을 해서 엄청난 진화를 이룬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인간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인간들이 이익에 눈멀고 편견에 빠져 서로 싸우기만 하는 것 같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저밖에 모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인간 생명의 본바탕에는 상생과 평화의 지혜와 힘이 들어 있다. 그렇게 죽고 죽이는 위기상황 속에서 원시생명은 자기를 열고 적을 받아들여서 적과 공생하고 생명진화의 길을 열었다. 우리 사람의 생명 속에도 공존과 상생평화의 지혜와 힘이 내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도 희망이 있다.

 

  생명진화의 역사 처음에 적과의 공존과 상생이 일어났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나는 일이 이렇게 중요하다. 똑같은 존재가 자기분열만 하면 변화가 없다. 그러나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를 끌어안았을 때 새로운 생명 세계가 열렸다. 우리가 원수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미워만 할 게 아니다. 남을 미워하고 욕하는 것으로는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불의하고 부당한 적에게 무릎 꿇고 자기를 내주면 나도 적도 함께 망한다. 위험한 모험이지만 적을 끌어안고 상생공존의 길로 갈 때 새 역사가 열린다. 석가나 예수나 유영모, 함석헌, 제정구가 다 이런 길을 알려주고 그 길을 갔다.

 

  진핵생물이 나오고 나서 생명은 더욱 진화하기 위해서 새로운 번식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새로운 번식방법이 유성생식이다. 씨와 알이 그런 거다. 대체로 씨앗 식물과 동물은 유성생식을 한다. 유성생식이라 하면 남녀관계의 섹스를 떠올리기 쉽다. 남녀관계도 따져보면 남과 여라는 아주 다른 존재가 서로 만나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는 관계다. 전혀 다르게 생긴 존재가 만나서 하나가 됨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유성생식을 함으로써 생명세계는 다양하고 풍부해졌다. 유성생식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똑같은 것들끼리 만나거나 유전자배열이 같은 것끼리 만나가지고 섞어 놓으면 변화가 없다. 사람의 유전자가 24개다. 남자와 여자는 24개의 유전자 끄트머리가 다르다. 서로 다른 남녀의 24개 유전자들이 만나서 거의 무한하게 다양한 결합을 이룬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났을 때는 무한히 다양한 새로운 생명체가 생성될 수 있다. 형제자매들 심지어는 쌍둥이도 다 다르다. 유성생식은 생을 풍부하고 다양하게 하고 새롭게 돌연변이를 만들어내는 획기적인 생식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존재의 만남이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존재의 만남이다. 자기를 넘어서 서로 다른 존재를 만나는 것이 진정한 자기초월이다. 나와 다른 존재를 만나서 남과 하나가 되는 것이 자기초월이고 구원이다. 나와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생명의 가장 간절한 염원이고 목적이고 바램이다. 또 종교와 철학이 추구하는 근본적인 목적이고 사명이다.

 

  우리는 어떤 때 가장 보람을 느끼고 기쁠까? 사람을 비롯해서 모든 생명체는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른 사람이 통했을 때, 사람은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서 통하고 하나로 느껴졌을 때 그 때가 가장 기쁘고 보람을 느끼고 풍성함을 느낀다. 서로 통할 때 자기로부터 벗어나서 자기를 초월해서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된다. 씨와 알, 정자와 난자도 자기를 초월해서 남과 통하고 하나로 되는 것이다. 씨는 내 몸을 늘리고, 잘라서 새 생명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서 엑기스를 뽑아서, 알짬을 뽑아가지고 작은 정자와 난자 속에 집어넣어서 내 존재의 바깥에서 번식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씨앗은 자기 몸과 자기존재를 초월하여, 자기를 뛰어넘어 생명을 후세에 전한다. 내 몸을 쪼개거나 늘려서 번식하면 자기가 죽는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씨앗의 번식방법은 개체가 죽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개체는 죽는다는 것을 전제로 씨와 알 속에다가 내 생명의 알짬을, 생명의 모든 요소를 압축해서 집어넣어서, 내 바깥에서 생명의 새로운 탄생이 이루어지게 한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넘어서는 것이 초월이다. 내 몸은 죽어도 내 속의 생명은 살리기 위해서 씨가 생기고 알이 나온 거다.

 

  세균들의 원시단계에서 자기 몸을 분열시켜 번식할 때는 몸 생명의 연장과 영속을 생각할 뿐 개체 몸 생명의 죽음을 전제하거나 각오할 필요가 없다. 세균들도 환경에 따라 죽기도 했지만, 번식하는 데는 제 몸 생명에 머물 뿐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개체는 죽어도 그 생명의 성격과 본성은 살아있을 수 있도록 씨와 알을 만들어 낸 거다. 씨와 알을 통해서 놀라운 생명진화가 이루어졌다. 생명이 제 몸에 머물 때는 진화가 없었다. 자기 몸 생명을 뛰어넘어 새 생명을 낳을 때 비로소 놀라운 생명의 진화가 이루어졌다.

 

  씨와 알은 개체의 죽음을 전제하거나 개체의 죽음을 통해서 내 생명을, 참된 생명을 전한다. 죽음을 각오했을 때, 죽음을 감수했을 때 비로소 아주 풍부하고 힘 있고 깊고 높은 생명 세계가 열린다. 이게 신비다. 죽음 없이 생명이 번식되면 편하고 괴로움이 없을 텐데 어찌하여 생명진화과정에 개체의 죽음을 끌어들였는가. 개체로 보면 너무나 야속하다. 생명진화과정에서는 개체생명이 연장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 깊어지고 높아지고 다양해지고 풍성해지는 거다. 생명이 깊어질수록 육체의 생명에서 정신의 생명, 얼의 생명, 신적인 생명으로 높아간다.

 

  생명이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육체적인 생명에서 영적인 생명으로 고양되는 것이 생명진화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고 가치다. 단순히 육체적인 생명이 존속되는 것은 생명에서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개체생명을 희생하더라도 전체 생명을 살리자. 그리고 그 생명이 영적생명, 신령한 생명으로까지 가자. 이것이 영원이 사는 길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다. 이것이 신의 섭리고 생명자체가 선택한 생명진화의 방향이 아니겠는가.

 

 

  생명진화의 원리에는 상생평화의 정신이 있다.

 

  씨앗은 깨지고 죽어서 그 속에서 생명이 피어나게 되어있다. 씨앗자체가 죽어야 되고 깨져야 한다. 씨알 하나하나의 개체는 깨지고 죽어서 심오하고 깊은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 생명의 진리이고 가르침이다. 생명진화의 역사가 생명의 진리, 생명의 가르침을 보여 준다. 이 가르침은 예수뿐 아니라 석가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가 다 일러 준 것이다. 동서고금의 성현들은 한결같이 ‘죽어야 산다.’, ‘죽음을 통해 참 생명에 이른다.’고 가르쳤다. 생명진화의 역사에서 포유류와 꽃피는 식물의 관계도 이런 진리를 보여준다.

 

  2~3억 년 전 파충류시대에는 공룡의 몸길이가 50~60cm밖에 안 되었다 한다. 공룡의 몸이 귀여운 고양이 정도의 크기였다. 이때는 겉씨식물이 가득 차 있던 시대였고 속씨식물인 꽃피는 식물은 적었다고 한다. 겉씨식물인 침엽수가 울창했는데 공룡이 침엽수를 뜯어먹다보니 식탐이 나서 계속 먹었다. 그러니까 공룡 몸길이가 50~60m로 커졌고, 너무 많이 먹어 침엽수는 파괴되었다. 공룡은 숲 파괴자가 되었다. 숲이 파괴되자 공룡도 멸종하게 되었다. 공룡과 숲 사이에 아무런 공생관계가 없었다. 파괴관계만 있었다.

 

 

  공룡이 왜 멸망했느냐. 고생물학자들 사이에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큰 운석이 지구와 충돌해서 공룡이 멸종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운석이 지구와 충돌하기 전에 이미 공룡은 멸종의 길로 들어섰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겉씨식물의 숲이 파괴되어 먹을 것은 없어졌는데 공룡의 몸은 비대하고 머리는 작고 사나워져서 스스로 멸종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이런 생명의 위기상황에서 현화식물이라는 속씨식물이 번성하게 되었다. 꽃이 활짝 피는 속씨식물은 예쁜 꽃을 피면서 꽃 속에 꿀도 있고 맛있고 영양이 풍부한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예쁜 꽃으로 포유류와 곤충들을 끌어들여서 달콤한 꿀과 달고 맛있는 열매를 포유류나 곤충들에게 주고 대신 제 씨앗을 널리 퍼트리게 했다. 그래서 지구는 꽃 피는 식물과 포유류, 곤충의 세상이 되고 이들이 생명진화의 중심과 선봉에 서게 되었다. 이것이 꽃피는 식물들의 지혜다.

 

  꽃피는 식물들이 상생평화의 길을 열었다. 자기 몸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먼저 내어주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으로 초대하고, 다음에 달콤한 꿀과 열매를 먼저 줬다. 기계는 먼저 받고 다음에 결과를 내어 주지만, 생명은 먼저 주고 다음에 받는다. 먼저 주는 것이 생명의 원리다. 포유류들이 열매를 먹고 그 씨앗을 천지사방에 뿌려줘서 꽃피는 식물들이 지구를 뒤덮게 되었다. 지금은 겉씨식물보다 속씨식물이 더 발달되어 있고, 포유류가 지구 생명세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꽃피는 식물들이 보여준 지혜는 무엇인가. 꽃과 열매를 통해서 자신도 살고 남도 살리는 상생의 길을 열어간 것이다.

 

  상생평화의 정신이 생명진화의 중요한 원리가 되고 생명진화의 성격을 이룬다. 생명은 상생평화의 길로 발전해 온 것이다. 생명세계에는 먹고 먹히는 생존투쟁이 있고, 아직도 사나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물어뜯고 죽이기도 하지만, 생명진화의 기본 방향은 상생평화로 향하고 있다. 꽃이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로운가! 새끼를 배어 제 몸의 살과 피를 나누고 젖을 먹여 기르는 포유류의 모성애는 얼마나 갸륵하고 정성스러운가! 파충류에서 포유류로 진화한 것은 사나운 힘이 사랑으로, 서로 파괴하는 관계에서 서로 살리는 관계로 진화한 것이다. 꽃피는 식물들의 아름다운 꽃과 달콤한 열매는 상생평화세계로 초대하는 조물주의 부름이다. 생명자체가 우리를 상생평화세계로 부르는 것이다. 꽃과 씨와 열매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꽃과 씨와 열매는 상생평화세계로의 부름이다.

 

 

  딱딱하고 쓴 씨앗 속에 영원한 사랑이 있다.

 

  함석헌 선생이 씨알사상을 복숭아로 비유해서 설명했다. 복숭아는 껍질과 속살과 씨로 이루어져 있다. 복숭아 껍질은 빨갛고 예쁘다. 이것이 사람을 끈다. 그러나 복숭아에게는 껍질이 목적이 아니다. 껍질은 아낌없이 벗겨버리는 거다. 껍질을 벗기면 복숭아의 살이 있다. 살은 달콤하지만 아낌없이 주자는 거다. 아깝다고 끌어안고만 있으면 다 썩어버린다. 복숭아 살도 복숭아의 목적이 아니다. 살을 먹고 나면 복숭아씨가 있다. 복숭아의 목적은 오로지 씨에 있다.

 

 

  생명의 씨알인 사람도 복숭아에 비유할 수 있다. 사람에게도 껍질이 있다. 얼굴 생김새, 몸매, 재능, 솜씨, 사회적 지위, 돈과 명예가 다 껍질이다. 요새는 이것을 알맹이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껍질은 사람의 목적이 아니다. 이런 것이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하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지속시키지도 못한다. 사람에게 살은 무엇인가. 마음이고 인정이다. 사람의 사회적 껍데기를 벗기고 나면 인생의 속살인 마음이 나온다. 그러나 마음과 인정도 사람의 목적은 아니다. 따사로운 마음이 속에 있어도 품고만 있으면 다 썩어버린다. 마음과 인정은 주자는 거다. 주어야 마음이고 주어야 인정이다. 복숭아나 사람의 껍데기가 처음에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외모와 돈과 지위가 친구와 애인을 끌어당길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친구관계, 사랑관계가 지속되지는 않는다. 우정과 사랑이 존속하려면 속살인 마음을 줘야 한다. 마음을 주고받지 않은 친구는 친구가 아닌 거다. 다른 것은 다주고도 마음을 안 준다면 그것은 친구가 아니고 애인이 아니고 가족이 아니다.

 

  살이 중요하고 마음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목적은 아니다. 복숭아나 사람의 목적이 살에 있지 않다. 복숭아가 살은 아낌없이 주지만 씨앗은 남기려 한다. 씨앗은 딱딱하고 쓰다. 못 먹는다. 그러나 복숭아의 영원한 생명이 이어질 수 있는 알맹이가 씨 속에 있다. 그것이 목적이다. 이 씨앗을 유지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복숭아가 있는 거다. 한문으로 복숭아씨를 도인(桃仁)이라고 한다. 복숭아 도(桃)에 어질 인(仁)자를 쓴다. 왜 그런가. 씨앗을 인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인이라는 말이 참으로 맞는 말이다. 인(仁)은 사랑, 자비, 덕이라고 해도 된다. 그런데 사람의 씨가 뭐냐. 사람 생명의 씨가 뭐냐. 인(仁), 사랑이다. 사랑만 있으면 생명은 영원할 수 있다.

 

  사람의 씨알맹이인 인이나 사랑은 달콤한 유행가에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딱딱하고 쓴 사랑이다. 전태일, 제정구가 온몸을 불살라서 보여준 그런 사랑이다. 참 사랑은 딱딱하고 쓴 거다. 그러나 쓴 속에 그 사랑이 있다. 그것이 영원한 거다. 우리 몸이 껍질이 되고 마음이 속살이 되어 생명의 속 씨알맹이인 이 사랑을 품고 있는 거다. 이것을 남기면 인생의 목적과 보람이 있는 거고 이것이 없으면 허탕 친 거다. 종교와 철학이 말하려는 것이 이거라고 생각한다. 나라는 존재가 영생한다는 것은 내 속에 있는 씨알맹이 사랑이, 속 생명이 영생하는 것이다. 살이나 뼈다귀나 몸뚱이는 그대로 썩어 죽는 거다.

 

  씨알사상은 사람을 씨알이라고 한다. 사람을 씨알이라고 하는 데는 세 가지 차원과 의미가 있다. 첫째는 수십 억 년 동안 이어온 생명진화의 씨알맹이가 사람이라는 거다. 사람은 자연생명의 씨알이다. 생명진화의 끄트머리에서 사람이 나왔으니까 사람의 나이는 우주의 나이와 같은 거다. 사람마다 속에 우주진화, 생명진화의 엑기스가 들어있다. 알짬이 들어있다. 내가 생명진화의 꽃이고 열매고 씨알이다. 생명진화의 중심과 끝이 내 속에 있다. 내가 살면 수십억 년의 생명진화의 역사가 보람이 있는 거고, 내가 망가지면 수십억 년의 생명진화의 역사가 망가져 버리는 거다.

 

  둘째는 사람은 역사와 사회의 씨알이다. 함석헌 선생은 오천년 민족사가 내 속에 있다고 했다. 오천년 민족사의 여러 가지 문화 경제적인 것, 사회 역사적인 것이 역사 속에서 이어이어 와서 내 속에 들어 있다는 거다. 사람인 나는 오천년 역사 속에 피어난 꽃이고 열매고 씨앗이다. 내가 골아지고 썩어지면 오천년 민족사가 내게서 끝나는 거고 이걸 살려내면 오천년 민족사는 살아나는 거다. 사람은 역사의 주체이고 씨알이다. 나는 역사의 씨알로서 역사의 생명을 후대로 실어 나를 책임과 의무가 있다.

 

  셋째는 사람은 신적 생명의 불씨다. 유영모 선생은 신적 생명을 제일 강조했다. 신적 생명의 불씨, 영원한 생명의 씨알맹이가 내 속에 있다는 거다. 내가 씨알이라고 할 때는 자연생명의 차원, 역사의 차원, 영적인 차원 이 세 차원이 함께 내 속에 있다는 거다. 사람에게는 몸과 맘과 얼이 있다. 몸은 자연생명을 나타낸다. 마음은 인간지성과 인간지성이 이끌어가는 사회와 역사를 나타낸다. 얼은 신령한 차원을 나타낸다. 얼은 하느님과 만나고 관계하는 거다. 씨알로서 사람은 몸과 맘과 얼, 자연과 역사와 신령의 세 차원을 아우르는 존재다.

 

  씨앗은 땅 속에서 깨지고 죽어서 싹이 튼다. 씨알의 생명활동은 하늘의 햇빛과 바람을 받아서 땅의 흙과 물을 길어 올려서 합작시키는 거다. 하늘의 햇빛과 바람과 땅 속의 흙과 물을 하나로 어우러지게 해서 창조적인 생명세계를 펼치는 거다. 하늘과 땅과 생명을 하나로 어우러지게 해서 새로운 생명세계를 펼쳐가는 거다. 사람도 씨알처럼 땅의 물질세계와 하늘의 영적인 세계를 합작시켜서 우리 삶 속에서 창조적 합일을 이루어가는 거다. 하늘과 땅과 사람을 하나로 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천지인 합일을 이루며, 새로운 생명세계를 펼쳐가는 존재다.

 

 

  땀 흘려 일해서 열매를 맺고 열매가 되자.

 

  몸과 마음과 얼이 하나로 되고,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람의 사명과 목적이다. 씨알사상의 기본성격은 첫째가 깨지고 죽어야 한다.「예수는 없다」책을 쓴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교수에 따르면 모든 고등종교는 표층종교와 심층종교로 나눌 수 있다. 표층종교는 이기적으로 자기 몸을 위해서 종교생활을 하는 기복종교다. 내 몸이 잘되고 내 자식과 집안이 잘되는 것을 추구하는데 매달린다.

 

  심층종교는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나는 거다. 내가 죽고 새로 나는 종교, 몸으로 죽고 얼로 다시 태어나는 종교, 거듭나는 깨달음의 종교다.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 심층종교의 근본성격이다. 깨져서 죽지 않고 이대로 나를 유지시키면서 모든 일이 다 잘되기를 원하는 것은 어리석은 욕심이다. 그것은 원시 생명세계에서 고세균이 제 몸을 쪼개고 늘림으로써 번식하는 것과 같다. 전체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깨질 줄 알아야 한다. 서로 화합하여 참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깨질 줄 알아야 한다. 무슨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버릴 줄 알아야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서 화해와 협력의 관계를 이룰 수 없다.

 

  씨알은 꽃으로 남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열매를 맺고 씨가 되기 위해서 꽃은 피었다가 지는 거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꽃 노릇만 하겠다는 것은 씨알정신이 아니다. 나는 높은 지위를 차지해서, 유명한 인간이 되고, 박수만 받겠다는 것은 영원히 꽃이 되고자 하는 허망한 욕심이다. 열매와 씨를 맺기 위해 꽃은 잠시 피었다 지는 거다. 정말 살 길은 씨알구실을 하는데 있다. 씨알은 가지 끝에 달렸다가 보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이내 떨어져 땅 속으로 들어간다. 남에게 자랑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랑하지 않음으로써 영원무궁한 생명을 세상에 펼치는 거다. 예수는 꽃 노릇을 하려는 것을 철저히 포기한 사람이다.

 

  꽃 노릇을 하려고 앙탈을 부리고 못되게 굴었던 사람들은 당시는 부귀영화를 누렸을지 모르지만 역사와 함께 다 쓸려 가버렸다. 그 시대에 꽃 노릇하려고 예쁜 척하고 잘난 척하고 남한테 못된 짓을 하던 인간들은 잠깐 폈다가 시드는 꽃처럼 다 역사의 쓰레기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모든 꽃들은 잠시 피었다 지지만 씨알맹이는 영원히 남는다. 예수, 석가, 노자, 장자, 공자, 소크라테스, 선지자들과 그들의 말씀은 영원히 남는다. 씨앗의 사명은 열매를 맺고 열매가 되자는 거다. 열매가 되거나 열매를 맺지는 않고 남이 땀 흘려 이룩한 열매를 따 먹으려는 인간들이 많은 사회는 반드시 멸망한다. 그러나 땀 흘려 일해서 열매를 맺고 열매가 되려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더욱 풍성해진다.

 

  하느님이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세워놓고 다른 나무의 열매는 다 따먹어도 좋은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절대로 따 먹서는 안 된다. 그걸 따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다. 왜 하느님이 이렇게 준엄한 얘기를 했나. 씨알사상에 비추어 보면 선악과 얘기를 이해할 수 있다. 선악과는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갖게 하는 열매이다. 선악판단의 기준은 생명 자체 또는 생명의 주인인 하느님 자신이다. 정의의 근원인 하느님만이 생명 자체만이 선악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선악과나무를 하느님의 생명동산인 에덴 중앙에 놔둔 거다.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은 선악판단의 기준을 이기적으로 사유화하고 독점한 것이다.

 

  가장 선악을 공정하게 판단하고 분별해야 될 판사, 검사가 자기 이해와 이익을 위해서 선악판단의 결과를 구부려가지고 거기서 나온 이익의 열매를 자기가 따먹는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선악판단의 기준은 공적인 것이다. 절대로 선악판단에서 자기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선악의 기준을 사유화한 결과 나에게 이로우면 선이 되고 내게 해로우면 악이 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남이 맺은 열매를 따 먹으려고만 하고 스스로 열매를 맺거나 열매가 되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씨알정신은 내가 땀 흘려 일해서 생명의 열매를 맺고 내가 영혼의 열매가 됨으로써, 세상을 풍성하게 하는 거다. **가난공동체생명 제2기 배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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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순 박사

 

「씨알사상」지은이 박재순은 1950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으며, 한신대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한신대 연구교수, 성공회대 겸임교수, 씨알사상연구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 씨알재단 상임이사, 씨알사상연구소 소장, 다석학회 이사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에「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민중신학과 씨알사상」,「열린사회를 위한 민중신학 」,「한국생명신학의 모색」,「다석 유영모」등이 있다.

 

 참고하시면 좋은 책   

*「씨알사상」박재순 나녹

*「하루를 일생처럼」정양모 외 두레  

*「다석 유영모」박재순 현암사

*「다석 유영모 - 가난공동체생명으로 배우다」박재순 제정구기념사업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함석헌저작집 5 한길사

*「예수회신부 정일우 이야기」정일우 제정구기념사업회

*「가난뱅이 하느님 - 제정구, 예수를 읽다」제정구 제정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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