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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학당] 씨알사상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달이선생 2011. 5. 25. 15:10

 

 

  배달학당을 하면서 늘 드는 생각이다. 씨알.. 씨알은 누구나 될 수 있고 누구나 되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 모든 사람은 씨알이다. 씨알의 삶은 살리는 삶, 생명 그 자체다. 함께 공부하고 이곳에서 만나 뵙는 분들은 세상의 빛이고 세상의 씨알이다.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등지는 곳에서 억척스럽게, 또는 즐겁고 담대히,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분들이 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선택할 일은 아니다. 이를테면 헐벗고 방황하는 노숙자와 함께하거나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하는 것, 그리고 물질이 풍족하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좀 더 나은 생활과 가치,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의 삶..

  물질의 눈꺼풀이 씌여 참다운 삶과 가치를 외면하고 사람다움, 사람 됨됨이를 볼 수도 볼 의지도 없는 이 시대에 나는 정말이지 너무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그런 사람들의 삶과 사상, 가치가 바로 씨알사상이다.

  이 글은 씨알사상이 나타난 역사를 밝힌다. 우리의 삶, 문화, 역사를  주목한 조선 후기, 새학문의 조류인 실학에서부터 시작하여 개항기 지식인들과 동학혁명가, 그리고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민중애의 발로가 씨알을 움트게 하였다. 따라서 남강 이승훈 선생님은 자기 헌신으로 씨알의 삶을 몸소 실천하셨고 그를 보고 함께하며 가슴과 머리로 신실하게 따르고 실천한 유영모, 함석헌 선생님에 삶..

  이 삶이 씨알의 남과 씨알의 역사이다.

  우리 시대 씨알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사단법인 제정구기념사업회 이병권이 녹취하여 옮기고 박재천이 정리, 박재순 박사가 감수했다. 

 

 

 

 

 

[ 배달학당2기 2강 ]

 

 

씨알사상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이글은 가난공동체생명 제2기 배달학당「박재순 박사와 함께하는 씨알사상」제2회 학당 <씨알사상은 어떻게 생겨났는가.>의 내용입니다. 2011년 4월 25일(월), 서울 종로구 이화동 제정구기념사업회 교육실에서 하태욱(우리집공동체 원장)외 9분이 참가했습니다.  

 

 

  민주정신이 뚜렷해야 한다.

 

  씨알사상은 한국근현대사에서 생겨났다. 한국근현대사는 동서문명의 만남과 민주화과정으로 전개되었다. 동서정신문명이 합류하는 과정에서 민중의 주체적인 자각이 이루어졌다. 동서문명의 만남과 민주화(민중의 자각)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제3세계에서 서양문명의 유입과 근대화는 흔히 반민족적인 지배엘리트의 독재로 이어졌다. 놀랍게도 한국에서는 동서문명이 합류하면서 민족 독립운동과 민중의 자각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오랜 세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정치, 문화, 경제 질서 속에 편입되어 살았다. 통일신라 이후 특히 조선 왕조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학문이든, 일상생활이든 공자, 맹자,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 얘기를 하며 살았다. 유교경전과 도교경전을 읽는 것이 학자들의 학문 활동이었다. 민족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었다.

 

3황 5제 시대를 모범으로 삼아 인(仁)을 실천하여 과거의 도를 회복하여한다고 주장하며 유가를 연 사상가 공자(孔子B.C551-479). 공자의 사상은 중국문명의 중심과 근간을 이루며 화이사상(중화주의)의 밑받침이 되었고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명나라가 망하고 만주족 청이 주인이 되자 오랑캐에게 망한 중국을 대신하여 중국문화의 정통을 계승하였다고 하여 소중화라고 자부하며 조선 성리학을 꽃피웠다. 

 

  그러다가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밀려들어와서 중국이 꼼짝 못하고 굴복하였다.(1,2차 아편전쟁) 청나라가 큰 위기에 빠졌다. 이 과정에서 서양의 종교와 과학기술을 접했다. 서양에서는 벌써 기선이 나오고 성능이 좋은 무기도 나오고 하늘의 별이 돌아가는 시간과 거리를 계산해 내니까 동양의 지식인들이 깜짝 놀라게 되었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중화=화이사상)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었다.

 

  서양의 천체, 물리, 화학, 해부학, 기계 기술 같은 것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고, 중국이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나온 것이 실학(實學)이다. 학자들이 우리민족의 문화, 역사, 언어, 지리, 정치, 경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고 연구하기 시작한 거다. 그 전에는 우리나라 지도를 만들 생각이 없었고 단군 얘기하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실학자들이 우리 역사, 문화, 지리를 탐구하고 우리민족이 어떤 민족인가 생각하게 된 거다. 민족의 자각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실학은 과도기적 사상이다. 우리의 근현대사가 동서문명의 만남이면서 민중의 주체적인 자각(민주화民主化)이라고 했는데 이 두 기준에서 실학을 평가한다면 실학은 과도기적 사상일 수밖에 없다.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은 주희가 정립한 성리학을 비판하고 공자, 맹자의 선진유학을 존중하면서 공자, 맹자의 사상과 서양의 서학(西學)과 과학기술을 합류시키려고 했다. 정약용은 성리학뿐 아니라 불교와 도교를 비판했다. 그는 동서정신문화의 본격적인 합류에 이르지는 못했다. 기독교와 과학사상, 유교·불교·도교의 회통에 이르지는 못한 것이다. 그의 사상과 정신에서 동서문명의 만남은 매우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렀다.

 

 

  민중의 주체적인 자각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다산은 민주정신과 원리를 확립하지는 못했다. 다산이 민중을 사랑하고 존중한 위대한 사상가이고 인격자이지만 민중 주체와 민주주의 원리를 분명히 제시하지는 못했다. 민중이 역사와 정치의 주체라고 확인하고 선언한 사람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민중의 역사변혁운동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실학은 과도기적이다. 그러다가 조선왕조(朝鮮)가 망하면서 조선왕조와 함께 실학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임금을 가르친 유명한 학자였다. 그가 북경(北京=베이징)에 사절로 가서 보니까 청나라가 망할 것 같고 우리나라를 보니까 더 절박하고 곧 망할 것 같아 위기의식을 가졌다. 그래서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의 형 서광범, 서재필 같은 젊은이를 불러 모아 개화당을 형성했다. 이 사람들을 중인(中人)출신 역관 오경석과 의원 유홍기를 앞세워 개혁공부를 시켰다. 서구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서 근본적으로 나라를 바꾸지 못하면 우리나라가 살 수 없다고 생각해서 젊은이들을 준비시킨 거다.

 

  개화사상을 익힌 2, 30대 젊은이들이 정부 요직에 들어가 1884년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것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를 먹으려는 야심을 키우고 있었는데 이들은 순진하게 일본세력과 군대(별기군)가 자기들의 개혁을 지원해 줄 거라고 믿었다. 결국 3일 천하로 쫓겨나 처형당하거나 망명했다. 갑신정변은 민중하고 전혀 관계없이 일어난 거다. 이들에게 문화적인 주체성은 없고, 서양의 문화만 받아들이자는 일념(동도서기東道西器)만 있었다. 민중의 동의나 협력을 구한 것도 아니다. 그저 엘리트 지식인들의 조급한 개혁운동으로 끝났다.

 

 

  동학(東學)은 민중적인 종교운동으로 시작했다. 중국이 무너져가고 조선왕조가 몰락하는 것을 보면서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했다. 동학은 민중주체의 사상을 바탕에 깔면서 천주교와 서양문물의 영향을 깊이 받아들였다. 동학에서 하나님을 천주(天主)라고 한 것은 천주교의 영향을 나타낸다. 동학은 서구문명의 침입에 대한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응답이었다. 서학에 맞서기 위해 동학이라고 했다. 천주교와 서양의 학문과 문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동학은 서양문명과 외세의 침입에 대해 민족 주체적이고 저항적인 종교·문화적 대응이었다.

 

  동학에는 유교, 불교, 도교의 정신과 천주교의 기본생각이 들어가 있다. 수운은 “서학이나 동학이나 도는 같고 설명하는 이치가 다르다.”고 했다. 수운 최제우가 창도하고, 해월 최시형이 발전시킨 동학을 바탕으로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갑오농민전쟁-고부봉기)을 일으켰다. 김옥균의 개화당이 일으킨 갑신정변에서 꼭 10년 후에 갑오농민전쟁(1894)이 일어났다. 동학농민혁명은 실학이나 갑신정변과 다르게 민중적인 차원에서 민중에 기반을 두고 일어난 거다. 그러나 이 혁명의 약점은 과학적인 합리성이 부족했다. 죽창을 들고 나온 다수의 동학 농민군은 신식 소총과 기관총(게틀링)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궤멸당하고 말았다. 수운과 해월이 주문과 부적을 강조한 것은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다. 부적을 차고 주문을 외우면 죽지 않는다고 말하면 총알 앞에서 용기는 나지만 실제로 총을 맞으면 죽는다.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1824-1864),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1827-1898) 왼쪽부터

1894년 전라도 고부군에서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전봉준 장군이 봉기하였다. 당시 많은 농민들이 참여하여 갑오농민전쟁이라고 불리는 동학농민혁명이다.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근대 민중혁명의 효시이다. 

  정의와 생명과 평화를 위해 몸과 맘이 하나로 되어 자발적 헌신성을 기초로 민중이 일으킨 갑오농민전쟁은 민중혁명운동이었다. 여러 가지 아쉬움이 남지만 동학농민혁명의 뜻과 과정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광주민주항쟁(1980)이 일어났을 때도 그랬지만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해방구가 되면서 아름다운 공동체 세상이 펼쳐졌다. 민중이 일어나서 세상을 뒤집어 놓으면 큰 혼란이 일어나고 지옥같이 될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람다운 세상, 살맛나는 세상이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혁명(革命 revolution)이 성공할 수 없다. 서양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높고 반외세적인 성격이 강했다. 비판적인 역사의식보다 방어적인 민족감정이 앞섰던 것 같다. 민주정신과 합리적 비판정신이 뚜렷해야 혁명의 과정과 방향이 정해진다. 동학은 정권을 잡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구상이 없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이 결여되었다. 또 민주의식과 민주적인 비전이 부족했던 거다. 분명한 비전과 구상이 있었다면, 주춤주춤하지 말고 왕조질서를 뒤엎고 새 질서를 열었어야 했다. 결국 시간을 놓치고 기회를 잃으니까 많은 사람이 죽고 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남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여기는 것이 깨달음이다.

 

  개화파의 막내가 서재필이다. 이 사람이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미국으로 갔다. 미국부인을 얻어 의사가 됐다. 그러다가 고국에 돌아와 개화파 정부의 지원으로 독립신문과 독립협회(1896)를 만들었다.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통해 민중을 깨우쳐 나라를 바로 세우고 힘 있게 하려고 했다. 민중을 외면하고 지식인 몇 몇이 자기들끼리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던 것을 반성하고 민을 깨우는 일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미국인들의 시민의식이 높고 생활수준이 높은 것을 보고 한국민의 계몽과 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만들고 청의 사신을 맞아 들이던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민족의 주체성 확립과 국가의 자주가 절실하게 요청되었다. 당시 보수파(온건개화파=친청파親淸派)는 중국에 의지해서 나라를 지켜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에 대해 개화당(급진개화파)는 중국으로부터 자주 독립하고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서 튼실한 나라를 세우려 했다. 독립문을 세운 것은 중국에 더 이상 머리를 숙일 필요가 없고, 우리가 독립자존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내외에 알린 거다. 그리고 관민합동대회를 열었다. 높은 고위 관리들, 양반들, 평민들, 백정들, 천민들까지 끌어들여서 국민대회를 연거다. 이것이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다. 우리 역사에서 실학이 있었고, 개화파가 있었고, 동학이 있었고 그 다음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나왔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민(民)이 주체로 일어나야 한다는 자각이 이루어졌고 민이 역사의 앞장을 서게 된 것이다. 새로운 나라에 대한 과학적이고 현대적인 비전을 가지고 민을 깨워 주체로 일어나게 했다는 점에서 만민공동회는 새로운 운동이고 사건이었다.

 

 

  안창호는 17세 때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기독교 교육과 서구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스무 살 때 안창호는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을 중심으로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창립하는데 주도했다. 평양 대동강 쾌재정(快哉亭)에서 수천 명의 관리와 양반, 평민, 일반백성이 모인 만민공동회를 연다. 여기서 20살 안창호 선생이 역사에 길이 남을 연설을 했다. 지금도 그 연설을 사람들이 외고 다닐 정도로 유명한 연설이다. 얼마나 열렬하고 절실한 감동적인 연설을 했는지 만민공동회로 모인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었다. 안창호의 마음과 청중의 마음이 하나로 녹아들었다. 민중과 하나로 되는 체험이 이루어진 것이다. 역사를 변혁시키려는 운동에서 민중 체험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지식인 엘리트에 속한 안창호라는 사람이 젊은 나이에 민족전체, 국민전체, 민중전체를 대표해서 모인 사람들과 하나 되는 체험을 하였다. 이 시기에는 민족과 민중이 거의 같은 말로 쓰였다. 2천만 민족은 2천만 민중과 같은 말이었다. 민중이 하나로 되는 체험, 민중과 하나로 되는 체험이 역사를 움직이고 나라를 새롭게 하는데 가장 중요하다.

 

  안창호는 민중과 하나 되는 체험을 한 거다. 나이 스물이면 감수성이 예민할 때다. 자신의 인생 틀을 만들 때다. 20대 초반에 심어진 거는 평생을 가는 거다. 지금 안창호 선생을 이렇게 저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민족(민중)과 하나 되는 체험을 해서 민족의 마음과 처지를 자기 마음과 처지로 알고 죽을 때까지 처음처럼 살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구경각(究竟覺)을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구경각은 어설프게 깨닫는 게 아니라 아주 끝까지 깨달은 것이다. 더 이상 나갈 수 없는 마지막 깨달음이다. 그게 뭘까? 구경각은 자기 마음과 처지를 넘어서서 남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여기는 경지가 아닐까?

 

 

  함석헌 선생은 ‘예수’를 ‘너를 나’라고 한 사람이라고 했다. ‘니가 나다.’ 이거야말로 해방이고 구원이고 깨달음이다. 너와 내가 하나 되는 거다. 민중과 한 마음이 되었다는 것은 내 편견과 욕심의 벽을 깨고, 이기적 삶의 울타리를 허물고 자아의 좁은 감옥에서 벗어났다는 증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내 마음을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궁극적인 깨달음이다.

 

  수운이 오랜 세월 도를 추구해서 1860년에 깨달았다. 이 깨달음의 시점이 동학의 기원이 되는 시점이다. 갑자기 수운의 몸이 떨리더니 하느님이 나타나서 계시를 줬다. 하느님이 수운에게 ‘오심(吾心)이 여심(汝心)이다’ 한 거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 신의 마음과 수운의 마음이 하나 된 순간이 신의 계시가 이루어진 순간이고 수운이 깨닫고 동학이 시작된 순간이다. 안창호 선생이 청중과 하나의 마음이 됐을 때 안창호가 깨달은 것은 민족의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민족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마음을 가지고 평생을 사신 분이다. 평생 처음 마음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거다.

 

  만민공동회를 통해 민중이 모이고 사회를 변혁해 가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왕궁에서 고종(제26대 왕)이 겁을 잔뜩 먹었다. 처음에는 돈도 대주고 애국자라고 하더니 나중에 개혁안이 나오니까 겉으로는 한다고 하고 속으로는 포도청 사람들과 보부상(황국협회)을 동원해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해산 시켰다. 이로써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도 실패로 끝났다.

 

  안창호는 1902년에 미국으로 가서 기본부터 배우겠다고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민족지도자이고 24살이 되었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간다는 게 쉽지 않다. 안창호가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고 겸허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기초부터 배우면서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의 교민생활을 보니까 정말 어렵게 살고 사람 꼴이 아닌 것을 보게 되었다. 많은 교민들이 게으르고 지저분하고 만나면 술 먹고 싸우고 도박하면서 지냈다. 그래서 도산 선생이 우리 교민들의 생활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교민들을 깨워 일으키는 운동을 시작했다. 도산은 교민들이 사는 집 앞부터 빗자루로 쓸기 시작했다. 젊지만 유명한 지도자가 길을 쓸기 시작하자,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함께 쓸었다. 더 나가서 안마당까지 쓸어주고 친해지면 변소청소도 해 주고 그렇게 1년이 지나가니까 길거리가 깨끗해지고 옷차림이 단정해졌다. 몸가짐이 아주 의젓해지고 눈빛이 달라지는 거다. 교민들이 부지런해지고 싸움도 안하고 술도 덜 먹고 노름도 안 하게 되었다. 서로 만나서 좋은 얘기 나누고 좋을 일을 하면서 생업에 열심을 내었다. 미국 사람들이 한국 교민들의 생활이 갑자기 크게 바뀐 것을 보고 “한국에서 얼마나 위대한 지도자가 왔기에 한국 사람들이 저렇게 바뀌었나!” 감탄했다고 한다.

 

  안창호 선생은 민중과 하나 되는 체험을 하고 민중을 깨워 일으키는데 헌신한 분이다. 민중을 깨워 일으키되, 민중과 한 마음이 되어서 깨워 일으켰다. 민중을 섬기는 자세로 민중을 일으킨 거다. 섬기는 교육, 섬기는 정치, 섬기는 지도력이다. 거만하게 앞장서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정말 낮은 자세로 몸소 마당 쓰는 것부터 해서 깨워 일으키는 거다. 안창호는 민중의 처지에서 민중의 마음으로 민중을 깨워 일으켰다.

 

 

 

  안창호는 민중에게 절함으로서 민중을 일으킨 사람이다. 한신대학장, 건국대학교총장, 한국유네스코 사무총장을 했던 정대위 박사라는 분이 있다. 그는 평양중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하고 몇 몇 친구들과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얘기를 나누었다. 한 사람은 “나는 큰 정치가가 돼서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 또 한 사람은 “큰 기업가가 돼서 굶주린 백성들을 풍요롭게 하겠다.”고 했다. 정대위 소년은 “나는 목사가 돼서 우리민족의 정신을 일깨우겠다.”고 하였다.

 

   마침 그 식당에서 안창호 선생이 앉아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는 다가와서 정대위 학생에게 90도 각도로 큰 절을 하더니 “미래의 목사님 부디 훌륭한 목사님이 되셔서 우리민족의 정신을 일깨워주십시오.” 하고 가더라는 거다. 민족의 큰 지도자가 소년 정대위에게 큰 절을 했으니 이 사람이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겠는가. 정대위는 키는 작지만 카리스마가 있고 아주 온화하고 잘 화합을 시키는 지도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정치권으로부터 정치하라는 유혹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끝까지 그 유혹을 뿌리치고 목사 자리를 지켰다. 그는 “도산 선생님의 큰 절을 받았기 때문에 그 절값 하느라고 내가 목사를 그만두지 못했다.”고 했다.

 

 

 

  유영모와 함석헌이 만나서 씨알사상이 싹텄다.

 

  안창호가 1907년에 미국에서 돌아온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맺고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는 즈음이다. 안창호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했던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 민족주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만든다. 신민회의 목적은 말 그대로 민(民)을 새롭게 하자는 것이다. 나라의 토대이고 주체인 민을 깨워 일으켜서 나라를 되찾고 나라를 바로 세우자는 거다. 민을 중심에 놓는 생각이다. 신민회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군주제를 부정하고 민주공화정을 이념으로 내세웠다.

 

  민을 일깨워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신민회는 학교운동, 교육운동을 일으켰다. 이것이 교육입국(敎育立國)운동이고 교육으로 나라를 세우는 운동이다. 그래서 도산은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 신민회 평안북도 책임자였던 남강 이승훈은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도산은 1910년에 망명을 했기 때문에 대성학교는 힘을 잃었고 남강은 끝까지 조선 땅을 지켰기 때문에 오산학교는 오랜 세월 정신의 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오산학교에서 유영모와 함석헌이 만난 거다. 유영모가 1910년 나이 20살에 교사로 와서 2~3년 가르쳤다. 그 후 1921년 만 31세의 유영모가 교장이 됐다. 3․1운동으로 남강이 감옥에 있고 교장 조만식 선생이 민족주의자라고 쫓겨났기 때문이다. 유영모도 임시 교장으로 1년 있다가 물러났다. 학력이 부족해서 교장 자격이 없다고 일본 당국이 교장 인가를 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영모 선생의 교장 시절 평양보고에서 3․1운동에 앞장섰다가 퇴학을 맞은 함석헌 선생이 오산학교로 왔다. 이때 유영모에게서 인생, 종교, 나, 나라, 정신,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함석헌은 큰 자극과 깨달음을 얻었다.

 

  유영모는 20대부터 새벽마다 냉수마찰을 했다. 교장으로 부임해서는 교장실에 가자마자 교장실 의자 등받이를 잘라버리고 평평한 의자 위에 무릎 꿇고 앉아 교장업무를 보고 공부를 했다. 왜 등받이를 잘랐을까? 기대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기 위해서다. 민이 주체적으로 일어나기 위해,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체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먼저 제 몸, 제 허리부터 꼿꼿이 세우자는 것이다. 일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주독립하려면 몸부터 꼿꼿이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유영모 선생은 주체인 ‘나’를 세우는데 전념했다. 이렇게 둘이 오산학교에서 만나서 씨알사상이 싹텄다. 오산의 교육정신에서 씨알사상의 꽃이 피었다.

 

  오산의 교육정신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오산의 설립자와 이사장인 남강 이승훈이 오산 교육정신의 밑돌을 놓았다. 남강은 안창호보다 14살이 더 많고 이미 큰 기업가로 성공한 분이다. 1907년에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 후 머리를 자르고 한복을 벗어버리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시작했다. 남강은 1907년 말에 오산학교를 세우고, 오산학교를 통해서 나라를 살리는 운동을 했다.

 

 

  본래 남강은 열 살 이전에 부모, 조부모까지 돌아가셔서 고아가 된 가난한 평민 집안사람이다. 그래서 남의 집에 들어가서 사환노릇을 했다. 어려서부터 남의 심부름 하고 궂은 일 하는 것을 몸에 익혔다. 주인이 “쟤는 내가 일을 시킬 수 없는 애”라고 했다. 일을 시키려고 보면 일을 벌써 끝냈거나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거다. 남강 이승훈 선생의 특징은 남의 심부름을 잘하니까 남을 섬기는 교육, 섬기는 정치의 귀감이 될 수 있었다. 남강은 좋은 일에는 남을 앞세우고 굳은 일은 자신이 먼저 했다.

 

  남강은 어려서 부모, 조부모를 잃은 탓인지 죽을 각오를 하고 살았다. 독립만세운동에 앞장 설 것을 제안 받고는 죽을 자리 찾았다고 기뻐했다. 남강은 자신의 삶과 재산을 나라와 민족교육을 위해 다 바쳤다. 그의 일생은 섬기는 삶이고 바치는 삶이었다. 오산학교를 세우고 거기다 재산을 다 바쳤다. 학교 지붕이 새면 자기 집 기와를 거둬다 얹어놓고, 교사들 먹을거리가 떨어지면 자기 집 쌀가마니를 갖다 놓았다. 부인이 “우리는 뭐 먹고 살아요” 하면 “아 우리는 그냥 학생들 하숙이나 쳐서 된장이나 끊여 먹으면 되지 밥이야 굶겠어, 저 선생들 학생들 밥이나 해주면서 같이 먹으면 된다.”고 했다. 그는 재산을 다 바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남을 앞세우고, 남의 심부름 하는 것을 좋아했다.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버려야 산다는 것을 깨닫고 몸으로 실천했다. 이게 씨알정신이다. 남강 이승훈은 씨알정신의 원조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뿌리가 하늘에 닿아있다.

 

  남강은 오산학교에서도 시간만 나면 마당을 쓸고 변소청소를 했다. 학교 설립자요 이사장인 남강이 그렇게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나. 같이 해야지. 1919년 3․1운동을 일으키고 남강이 교도소에 들어갔다. 이 때 사형이 예상 되었는데 남강은 죽을 자리를 찾았다며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췄다. 감방에는 여러 잡범들이 있었는데 남강은 “오늘부터 변기통 청소는 내가 한다.”고 했다. 당시에는 감방에 화장실이 따로 없고 변기통을 사용했다. 남강은 출옥할 때까지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변기통청소를 3년 반 동안 맡아서 했다.

 

  오산학교가 있었던 평안북도 정주는 겨울 추위가 매서웠다. 한겨울에는 변소의 똥 무더기가 얼어서 올라온다. 누는 사람만 있고 치우는 이가 없으니까 그 무더기가 자꾸 올라왔다. 남강이 한 손으로 수염을 잡고 도끼로 그 무더기를 까는데 그게 튀어서 입으로 들어가고 했다는 거다. 총무과 일을 보던 조형균 장로가 지나가다 그것을 보고 “선생님 이게 어쩐 일입니까?”하고 말렸다. 남강이 퉤퉤하며 침을 뱉는 것을 보고 “맛이 구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맛이 괜찮네.”라고 했다. 말년에 남강은 “오산학교에서 내가 한 일이 있다면 똥 먹은 것밖에 없다.”고 학생들에게 자랑했다. 3․1운동을 준비 할 때 독립선언서의 맨 앞에 누구 이름을 쓸 것인가를 놓고 기독교 사람들과 천도교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맨 앞에 이승훈을 쓰느냐 손병희를 쓰느냐 하고 다투느라고 일이 진전이 안 되었다. 밖에서 돌아와 이것을 보고 남강 선생이 “이거는 죽는 순서야 손병희부터 써”해서 일이 쉽게 풀렸다. 그리고 남강의 이름은 민족대표 33인 명단의 가운데쯤에 넣었다는 거다. 남을 앞세우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험한 일을 도맡아 한 이가 남강이다.

 

  함석헌이 28살에 오산학교 교사로 왔다. 2년 남짓 남강을 가까이 모셨는데 1930년에 선생이 돌아가셨으니까 선생은 60대 중반의 노인이고 함 선생은 20대 후반의 청년이다. 함 선생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성경공부를 했다. 남강이 함석헌의 성경공부모임에 참여해서 들어 보고 젊은 선생 하는 얘기가 깊고 진실하니까 다른 교사들, 학생들에게 “너희들도 와서 들어라 좋은 얘기는 같이 듣는 거다.”하고 권했다. 남강은 이 성경모임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면서 함께 듣고 말씀도 나누며 격려했다. 그런 남강에게 함석헌은 크게 감격했다. 남강은 함석헌의 말을 들어줌으로써 함석헌의 마음을 사로잡은 참 스승이었다. 함석헌은 민족을 일깨워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남강의 뜻을 이어서 평생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 바쳐 살았다.

 

  1970년대 중반에 젊은 사람 10여명과 함께 함 선생을 모시고 천안 부근 모산에서 2박3일 수련회를 가진 적이 있다. 밤에 마당에 나오셔서 말씀하셨는데 다른 것은 기억나지 않고 스승에 대한 말씀이 기억에 남아 있다. “제게 좋은 선생님이 계셨지요. 다석 유영모 선생님…”하는 말 속에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승훈 선생님에 대해서는 좋다는 말씀도 없이 그저 “아! 남강 이승훈 선생님!” 하실 때는 스스로 감동하여 함선생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70대 중반의 함석헌은 이미 겨레의 스승으로 추앙받던 때였다. 그런 함석헌이 두 스승 이승훈과 유영모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깊은 존경을 품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스승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이 사무쳐 있는 70대 중반의 함석헌에게서 영원히 젊은 학생의 마음을 느꼈고 늘 새롭게 싹트고 자라는 씨의 정신을 보았다.

 

  유영모가 말했다. “내게 두 벽이 있다. 동쪽 벽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고 서쪽 벽은 함석헌 옹이다. 내가 이 두 벽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고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이승훈, 유영모, 함석헌 세 사람은 정신적으로 뗄 수 없는 운명공동체다. 유영모는 깊이 파고드는 사람이다. 오산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철학적이고 영성적으로 깊이 파고들어서 민중주체의 뿌리를 팠다. 민중을 일깨운다는 말은 민중이 스스로 자각(自覺)해서 스스로 일어나게 하는 거다.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의 ‘내’가 일어나는 거다. 그것이 참 교육이다.

 

  안창호의 신민회, 이승훈의 오산학교는 민중의 주체적인 자각을 추구했다. 자각(自覺)은 스스로 깨닫는 것이고, 스스로를 깨닫는 것이다. 내가 깨닫는 것이요 나를 깨닫는 것이다. 유영모는 나의 뿌리를 탐구했다. 그는 “나의 뿌리가 하늘에 닿아 있다.”고 보았다. 하늘이 바로 나의 뿌리다. 내 속의 속을 파고 들어가면 하늘에 닿는다. 사람은 누구나 속에 하늘을 품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이 하느님(하늘)의 아들(天子)임을 자각했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창녀와 세리도 하느님의 딸과 아들이라고 했다.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하느님의 딸과 아들이라는 것을 자각해서 하느님을 어버이로 모시고 형제자매로 사는 것이 하늘나라다. 유영모는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의 뿌리가 하늘에 닿아 있다고 봤다. 하늘에 까지 닿을 때 진정한 깨달음이 온다.

 

  유영모는 “햇볕에 그을린 농부의 얼굴이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고 했다. 햇볕에 타서 그을려진 농부의 검은 얼굴이 노자가 말하는 최고 진인(眞人)의 경지라는 거다. 화광동진은 “빛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과 같아진다.”는 말이다. 높은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 지식과 정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날카로운 정신과 지식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처럼 겸허하게 밑으로 내려가서 서로 어울릴 수 있게 하는 거다. 바로 이것이 노자가 말한 참 사람(眞人)의 경지인데 햇볕에 그을린 농부의 얼굴이 그 경지를 보여준다는 거다.

 

  유영모는 “동양문명의 뼈에 서양문명의 골수를 심는다.”면서 “나는 평생 이 일을 추구해왔다.”고 했다. 그러나 동양문명이 주인지 서양문명이 주인지 또 어디가 종인지 말할 수 없다며,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이 다 각자 주가 돼서 주체와 주체로서 생동하면서 합류하고 만나게 했다. 그래서 기독교, 유교, 불교, 도교의 주체적 만남을 실현했다. 동서문명의 합류라는 점에서나 민중의 자각이라는 점에서 유영모는 확실한 원리와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 함석헌은 도산과 남강의 역사정신, 민족정신을 이어받고 유영모의 깊은 민중영성철학을 계승해서 씨알사상을 정립하고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정리하면 안창호는 씨알사상의 씨앗을 심고, 이승훈은 하나의 옹근 씨알이 돼서 씨알사상의 씨앗을 싹트게 하고, 유영모는 민중 씨알의 뿌리를 깊이 파서 그 뿌리가 하늘에 닿게 하고, 함석헌은 씨알사상과 정신을 큰 나무로 자라게 했다.

 

 

  어버이 뵈옵듯 씨알 민(民)을 어버이로 받든다.

 

  ‘씨알’이라는 말이 언제 생겼나. 유영모가 1956년 12월 28일 YMCA 연경반에서 유교경전 대학(大學)을 강의했다. “대학지도(大學之道)는 재명명덕(在明明德)하며, 재친민(在親民)하며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이라는 말이 있다. 다석은 이렇게 풀이했다. “한 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으며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 데 머묾에 있느니라.” 큰 배움의 길은 밝은 속알을 밝히는데 있다. 덕을 속알이라 했다. 친민(親民)을 ‘씨알 어뵘’으로 옮기고 지어지선(止於至善)을 지극한 선에 머문다는 말인데 ‘된 데 머묾에 있다’로 풀이했다. 지극한 선, 최고의 선을 다석은 우리말로 ‘됨’으로 파악했다. 지극한 선(善)은 무엇을 행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참 사람이 되고’, ‘하나로 되는데’ 있다. “그 사람 됐다.”, “그 사람 된 사람이다.”할 때의 ‘됨’이 인생의 목적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사람으로 되는 존재요 되자는 존재다. 친민에 대한 풀이가 중요하다. 친(親)은 모친 부친 할 때의 친인데 어버이를 나타낸다. 친민은 민을 ‘가까이한다’, ‘친하게 한다’는 뜻이다.

 

  성리학을 정립한 주희는 친민을 ‘민을 새롭게 한다’는 뜻으로 신민(新民)으로 풀이했다. 안창호가 신민회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친민과 신민은 서로 통하는 말이다. 민을 가까이한다는 말과 민을 새롭게 한다는 말이 서로 통한다. 민을 새롭게 하려면 민을 가까이 해야 한다. 유영모는 친민(親民)을 ‘씨알어뵘’이라고 풀이했다. 어뵘은 ‘어버이 뵈옵듯’하라는 말이다. 씨알인 민을 어버이처럼 받들어 섬긴다는 말이다. 유교전통에서는 민을 어리고 어리석은 존재로 봤다. 임금이나 관리는 군자고 백성은 어리고 어리석은 존재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에도 민을 ‘어린백성’이라고 했다. 임금과 관리, 도지사나 군수는 어버이고 백성은 어린 자식으로 여겼다.

 

  유영모는 민을 어버이 뵙듯 하라고 했으니까 전통적인 유교의 생각을 확 뒤집은 거다. 아주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함석헌은 이런 생각을 분명히 표현했다. “봐라. 군왕들이나 영웅이라는 것들이, 장군이라는 것들이 철없이 땅따먹기나 하고 전쟁놀이나 해가지고 세상을 얼마나 파괴하고 괴롭히느냐.” 욕심에 사무치고 제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들이 군왕들이고 관리라는 거다. 장군이라는 것들이 철부지들이다. 어버이 심정을 가진 사람이 누구냐. 민중이다. 군왕이나 장군 같은 철부지들이 망나니짓을 해서 세상을 짓밟고 파괴하지만, 민중은 폐허가 된 생명 동산을 어버이처럼 일궈서 다시 꽃동산, 평화의 생명 동산으로 만든다. 씨알민중이 어버이다.

 

유영모 선생님과 함석헌 선생님(왼쪽부터)

 

  함 선생은 일관되게 “민을 어버이처럼 생각해라” 했다. 지식인들은 명예욕 때문에 이름 앙탈을 부리지만 민중들은 이름을 가지고 앙탈부리는 일이 없다. 민이라고 해서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완벽하다는 게 아니다. 역사와 사회의 전체 구조와 틀 속에서 전체적으로 보면 욕심 사나운 지배 엘리트가 철부지 어린이 같고 역사와 사회의 바닥에서 힘든 일을 맡아 하는 민중이 어버이 같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씨알’이라는 말이 맨 처음 ‘민(民)’에게 쓰여 진 거다. 그 다음 1957년 3월에 함 선생님이 천안에서 ‘씨알농장’을 처음 시작해서 ‘씨알’이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씨알은 민을 주체로 대접하는 품격 높은 이름이다.

 

  씨알사상이 우리사회에서 한 번도 주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유영모가 35년 동안 강의를 했던 YMCA가 지금 유영모의 씨알사상과 무슨 관계가 있나? 안창호가 설립한 흥사단도 안창호의 씨알정신을 제대로 계승하는 것 같지 않다. 왜 그런가?

 

  정신이나 사상은 제도나 기관을 통해서 계승되기 어렵다. 제도나 기관은 물질적 토대 위에 세워지고 유지되는 것이다. 정신과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제도나 기관은 본래의 생명과 정신을 배신하기 쉽다. 생명은 생명을 통해서 정신은 정신을 통해서 계승된다. 예수와 오늘의 기독교, 석가와 오늘의 불교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제도나 기관은 성격상 하나의 기계이며 틀이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의 정신을 타락시키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제도나 기관 없이 우리가 살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고 함께 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제도나 기관이 있어야 한다. 산업화된 자본주의사회에서 돈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제도나 기관, 돈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제도나 기관, 돈의 주인 노릇을 하고 정신과 뜻을 계승하려면 깬 정신으로 비상한 노력을 해야 한다. 비상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비상한 노력을 하는 사람이 그 제도와 기관을 움직여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과 사상은 금방 타락한다. 유대교가 그랬다. 예언자 중의 예언자인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혹독하게 “회칠한 무덤 같은 인간들, 너희 조상들이 예언자는 잡아 죽였고 너희들은 무덤에 색칠하고 있구나.” 했다.

 

  타락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갱신해야 한다. 종교개혁의 명제가 “항상 개혁하는 교회”다. ‘끊임없이 항상 혁신’하지 않으면 타락한다. 제도나 돈의 주인 노릇을 하려면 정신과 생명이 깨어 있어야 한다. 지금 오산학교가 오산정신을 제대로 살리려면, 유영모, 함석헌 같은 분이 오산학교를 운영했어야 했다.

 

  씨알사상은 지금 주류사상은 아니다. 그럼 언제 주류사상이 될 수 있을까? 씨알사상은 민중을 받들고 민중을 위하는 민주사상이니까 민중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만큼 이 사상이 주류가 되는 거다. 지금은 말로는 소비자가 왕이고,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하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하며 정치인들이 국민을 섬기고 받든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 돌아가는 원리는 그렇지 않다. 돈 많고 권력을 가진 사람과 보수언론이 주인이다. 씨알사상과 정신으로 움직이는 사회가 아니다. 그래서 갈수록 민이 깨어나서 주체가 되고 주인이 되어야 하는 거다. 그러면 씨알사상이 국민교육의 교본이 되고 국민을 움직이는 주류사상이 될 수 있다. 앞으로 몇 십년 몇 백년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지만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의 교재에 유영모와 함석헌, 안창호와 이승훈의 삶과 사상이 못 들어갈 이유가 없다. 초등학생들 사이에 약육강식의 폭력행위가 만연되었는데 어린 학생들이 자신들의 가학적인 폭력행위의 문제점을 느끼지도 못한다. 전쟁과 경쟁의 정복 철학이 사회를 지배하고 생명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에 어린 학생들이 가학적 폭력에 물들어 있다. 어린 아이들에게 씨사상의 생명과 평화 정신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씨알사상’은 민주정신과 깊은 영성의 철학을 나름대로 일관성 있게 정리한 거다. 지금 세상은 정신이나 사상에서는 일대 혼란에 빠져서 일관성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다. 지금부터 씨알정신과 철학에 비추어서 그리고 민중의 처지와 심정에서 ‘씨세상’에 대한 지침이 나와야한다. 먹고 입고 자고 쓰고 하는 것에 대하여 실천적인 ‘씨알지침’이 나와야한다. 경쟁사회라지만 어디까지 경쟁하고 어디까지는 경쟁하지 않아야 하는지 사회생활 지침이 나와야 한다. 공기업의 민영화도 어디까지 허락할 것인지 따져 보아야 한다. 먹고 입고 자고 교육을 받는 국민의 기본생활에 관련된 분야는 경쟁도 민영화도 제한되어야 하지 않을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의 모든 영역에서 실천적인 생활지침을 마련하고 실천해 감으로써, 민주적인 철학과 사상으로서 ‘씨알사상’을 완성해가야 한다. **가난공동체생명 제2기 배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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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순 박사

「씨알사상」지은이 박재순은 1950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으며, 한신대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한신대 연구교수, 성공회대 겸임교수, 씨알사상연구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 씨알재단 상임이사, 씨알사상연구소 소장, 다석학회 이사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에「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민중신학과 씨알사상」,「열린사회를 위한 민중신학 」,「한국생명신학의 모색」,「다석 유영모」등이 있다.

 

 참고하시면 좋은 책   

*「씨알사상」박재순 나녹

*「하루를 일생처럼」정양모 외 두레  

*「다석 유영모」박재순 현암사

*「다석 유영모 - 가난공동체생명으로 배우다」박재순 제정구기념사업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함석헌저작집 5 한길사

*「예수회신부 정일우 이야기」정일우 제정구기념사업회

*「가난뱅이 하느님 - 제정구, 예수를 읽다」제정구 제정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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