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살이가 시작되고 늘 감탄하고 있다. 그렇게 서울을 들고났었는데 가본 곳이 별로 없었다는 것.. 늘상 찾았던 것은 보통을 찾는 술집거리들.. 그런데 실상 거기도 정말 좋은데는 가지 못했다. 물론 여기서 좋다고 하는 것은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곳과 볼거리가 많은 곳을 말한다.
서울은 새련되고 화려한 도시다. 남산 서울타워(이하 남산타워)와 그 주변을 본다면 당연하다. 특히 야경의 모습은 황홀 그 자체다. 2011년 5월 2일 충무로역 근처 남산한옥마을과 남산을 올라 남산타워를 구경하기로 했다.
남산을 오르려고 여기 저기 찾다가 남산한옥마을을 찾게 되었다. 북촌 한옥마을은 너무도 유명하여 남산 한옥마을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현재 북촌 한옥마을과 달리 남산 한옥마을은 실제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 아닌 박제화된 전시물 같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것이다. 마치 도심 속 민속촌 같이 말이다.
서울은 조선의 도성이었다. 따라서 서울에는 여러 신분의 사람들이 각기 저마다 구역을 나눠 많이 살았다. 우리가 잘 아는 북촌한옥마을은 조정의 중신들이 많이 모여 살았고 왕십리 쪽에는 녹을 받는 군인들이 많이 살았다. 그리고 이곳 남산에도 많은 양반들이 모여살았는데 남산골 샌님들이라고 해서 조정과는 거리가 있었다.
북촌지역이 경복궁 등 한양 궁궐이 밀집한 지역이라 자연 궁궐 출입과 그 앞 육조거리에 관청에 출입을 하였던 관헌들은 자연스레 가까운 북촌지역에 모여살게 된다. 특히 양반세도가 하면 단연 떠오르는 가문에 안동 김씨일텐데 이들 안동 김씨들도 이 곳에 살면서 순조, 헌종, 철종 연간에 세도를 떨치면서 장동 김씨로까지 불렸다.
그래서 일반적인 안동지역을 거점으로 살았던 안동 김씨나 이곳 서울 지역의 안동 김씨와는 구별된다. 같은 본관을 두지만 반청주의자 김상헌의 후손들이 이곳에 살며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내며 세도를 이룬다. 그래서 간혹 안동 김씨라고 우쭐 하는 사람이 있는데 잘 알아보길 바란다. 장동지역에서 혹은 김상헌의 가계에서 나온 사람인지.. 아니라면 그리 우쭐할 필요가 없겠다.
근데 과거 양반 세도가 였다라는 것이 오늘날 가문의 영광으로 자신의 큰 자랑으로 삼는 것이 우쭐될 정도로 행동해야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헐벗고 무지 몽매한 민중을 업신 여기고 호의호식을 했던 가문의 호사를 말이다.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많이 갔다. 북촌이 이렇듯 조정의 중신들과 입신자들이 모여 살던 동네라면 남산골 양반들은 그 처지가 사뭇 달랐다. 북촌지역의 양반들의 당색이 인조 이후 서인 집권자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대표적인 중심세력이었다면 남산골에 찾아들어 살던 선비들은 그야말로 조정의 관직과는 먼 서생이었다. 그래서 남산골 샌님들이라고 불렸다. 당색으로는 남인들이 대거 살았다.
물론 이렇게 당색으로 모든 사람을 구별할 수는 없지만 특히 전통시대 같은 신분과 처지를 같이하는 사람들 끼리 모였다는 것으로 볼 때 자연스레 정권에 참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그 중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사는 곳도 조정과 차이를 지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조선 전기가 아닌 중후기로 가면서 고착화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남산골 역시 신분적으로는 많은 양반들이 모여살았고 정치적 실권과는 거리가 있는 유생들이 많이 살았다는 것이다.
남산골 한옥마을에는 대략 8~9채의 한옥들이 즐비하는데 그 한옥들은 원래부터 이곳에 위치 한 것이 아닌 서울이 개발되면서 이전 되어 온 집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본래의 규모와 시설 등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는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그나마 큰 기와집을 구성하였던 문과 사랑채, 안채 등은 보존되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하나..
여러 가옥들이 있는데 그 중 한 가옥에 들어갔다. 가옥은 구한말 도편수 이승업이 살았던 집으로 대문은 없고 가옥을 이루었던 중문과 사랑채, 그리고 안채 만이 남아있다. 본래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각각 남녀생활공간을 구분하여 낮은 담으로 둘을 나눴다고 하는데 이전 복원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인지 대문과 담장 등은 죄다 빠진채 지어졌다.
사랑채는 사진에서 보듯 직각의 형태로 사랑채에 딸린 부엌과 방이 큰 방과 작은 방 2개가 있다. 각각에 한옥에 어울리는 내부 장식과 소품, 장 등을 배치하여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살람살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이곳을 찾는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외국인 등에게 좋은 볼거리가 되고 있다. 낮에 보는 한옥의 모습도 모습이지만 방에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한옥의 모습은 우리 전통가옥의 멋을 은은하고 멋스럽게 보였다.
"삼각수 도편수 이승업 가옥
이 집은 1860년대에 경복궁 중건공사(1865-68)에 참여했던 도편수 이승업이 지은 것이다. 원래 이 집은 청계천 부근의 중구 삼각동 36-2번지에 있었다. 1889년 이후 경주이씨 집안이 이 집에 거주하였으며, 1970년부터는 조흥은행의 사료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이 조성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안채, 사랑채와 중문만이 남아 있지만, 원래 이 집은 문간채, 앞뒤 행랑채, 사랑뒤채 등 모두 8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큰 주택이었다.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몸채와 그에 직각으로 붙어 있는 날개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몸체가 더 크고 두터우며 지붕도 더 높고 웅장했다. 원래는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낮은 담이 있어 남녀의 공간을 구분하였으며, 사랑채 부엌의 문도 안채 쪽으로 나 있어 사랑채 영역과 나뉘었다. 이 집은 조선 후기 서울의 주거문화와 당시의 건축기술을 잘 보여 준다. 또한 각 공간의 중요도에 따라 지붕의 높낮이와 모양을 달리하는 세련된 솜씨를 보여 주며, 안채의 곳곳에 설치된 난간과 툇마루는 편리하면서도 아름답다.-남산골한옥마을 삼각수 도편수 이승업 가옥 설명 참조"
안채는 사랑채보다는 작고 후면 직각의 건물로 이루졌다. 앞에서 보면 일자형 건물로 보이지만 안채에 딸린 부엌을 공간을 더 주기 위해 뒤로 한 칸 정도 늘렸기 때문이다. 사랑채와 안채 뒤란에는 벽돌로 쌓은 낮은 굴뚝이 있고 기와를 올린 담장이 둘러있다. 건물 기둥마다 짤막한 경구를 넣어 가옥의 운치를 더한다.
같은 동양이지만 중국과 일본의 기와를 얹은 전통가옥에 비해 우리 한옥이 정말 단아하면서도 너무 화려하지도 너무 단촐하지도 않고 주변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멋스러움이 있다. 중국의 가옥이 크고 화려한 장식과 붉은 색 등 건물 외벽에 강한 색감, 일본 가옥의 부정형적인 지붕이 강조된 마치 가분수의 형태와 자연물을 가옥에 끌어들여 하나의 소품화하여 꾸며진 정원과 다른 우리의 소박하고 간결하면서도 균형과 곡선이 살아있는 멋스런 정서를 다시금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가옥이다.
서울 한복판에 우리 전통가옥이 아름답게 서있는 모습이 정말 자랑스럽고 우리 문화를 알리는 소중한 일꾼으로 느껴진다.
예로부터 남산골은 여러 계곡들이 아기자기 하면서도 음산하지 않아 많은 문사들이 저마다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그런 역사적 바탕으로 남산골한옥마을에도 예전 정자는 아니지만 남산골 계곡에 어울리는 정자를 지어 그 운치를 더하고 있다.
찾아본 정자는 한옥마을 우측을 가로지르는 시내와 계곡을 만들어 세운 청류정(聽流亭)이다. 한자의 이름풀이로만 본다면 깨끗하고 정결한 남산골 시내물을 들으며 머무는 정자이며 정확한 이름에 대한 뜻은 모른다.
한옥마을 위쪽에는 서울시가 만든 타임캡슐 공간이 있었다. 1994년 서울 정도 600년 을 맞아 타임캡슐을 매장하고 '서울천년타임캡슐'이라 이름한 곳으로 '서울천년타임캡슐광장'에 있다. 광장의 모습은 분화구의 모양이며 큰 원반형태의 타임캡슐 보관 장소가 있다. 이 캡슐은 서울 정도 1000년이 되는 400년 후인 2394년 개봉예정이다.
원반의 보관장소 중앙에서 남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니 남산타워가 한 눈에 들어온다. 눈에 잡힐 듯 보이는데 사진에서는 상당히 거리가 느껴진다. 실제로는 상당히 가까운 모습이다.
내친김에 한옥마을을 지나 남산을 오르기로 하였다. 한눈에 보이는 남산은 너무도 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왠걸 남산을 오르는데 상당히 거리가 있고 시간이 걸린다. 가는 길은 너무도 잘 닦아 저녁과 밤시간 운동하는 사람들과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남산길은 사랑과 사람들의 즐거운이 넘치는 공간이다.
남산골 한옥마을의 설명에서 이곳 남산에 사람들이 모여살고 많은 정자들이 지어졌다는 얘기가 선뜻 다가오지 않았는데 막산 남산을 오르며 그 사이사이 계곡과 시내를 보면서 음기와 살기가 느껴지지 않고 생동감이 있는 풍수 좋은 곳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역시 우리 조상들이 선호할만한 살기 좋고 풍수 좋은.. 문사들이 풍류를 즐기기에 손색없는 운치가 있었다. 처음 오른 남산은 선입견으로 서울 여타 인왕산 등 여러 산에 비해 초라하고 볼품 없는 산일 거라는 편견을 확 날려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역시 "한번 보는 것이 낫다.(百聞而不如一見)"라는 말이 절로 든다.
남산(목멱산) 정상부근의 서울 도성과 1993년 복원된 봉수대, 현대식 남산타워와 이색적인 풍경이다.
등에 땀이 베이고 바람이 느껴질 때 쯤 정상에 다달았다. 가깝게만 보였던 남산타워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오랜 줄타기에 다리가 풀리고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하니 정상이다. 서울의 4대산(동의 낙산, 동의 인왕산, 북의 북악산)으로 서울 도성이 둘러진 남산정상에는 오랜시간 이곳을 지키고 있는 높다란 성곽이 둘러있다. 도시화된 풍경과 현대식 도로 옆 낮은 담장(여장=성가퀴)으로 이어진 도성, 여장에는 밖을 내다 볼 수 있는 타구와 적병을 화기로 사살할 수 있는 총안이 뚫려있다. 2011년 5월 19일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서울시가 아직 미복원 구간인 서울 도성 1.8km전 구간을 복원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신청한다고 하니 역사를 공부하며 아끼는 마음에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된다. 다만 전구간 원형복원이 되어야 문화재의 실제적인 생동감, 생명을 넣는 것인데 그 점이 매우 안타깝다. 수원 화성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고 전 구간이 다 복원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수원시가 전구간을 원형 복원을 하고자 장기 계획을 세워 실천하는 모습은 앞으로 문화재 정책을 하는 정부나 지자체에 좋은 귀감이지 않을까? 좋은 소식에 너무 커서 아쉬움도 배가되는 모양이다.
한동안 서서 남산의 정상을 바라보니 현대식 건축물인 남산타워와 서울 도성의 성곽이 서로 다르지만 왠지 모를 어울림.. 이색적인 광경이다.
남산은 목멱산이라고 했다. 남산의 유례는 다음과 같다.
"남산은 조선시대 때 한양이 도읍으로 정해지면서 궁의 남쪽에 있는 산으로 자연스럽게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목멱산은 곧 도성의 남산인데, 인경산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남산의 본래 이름은 목멱산, 인경산이었겠죠.
이러한 남산은 태조 4년(1395) 12월에 북산인 백악산신을 진국백, 남산의 산신을 목멱대왕으로 봉작하여 국가에서 제사를 받들게 하고 목멱대왕을 봉사하는 사당을 목멱신사, 이 신사가 있는 산을 목멱산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목멱신사는 나라에서 제사지내는 사당이라 하여 국사당으로도 불렀는데 지금의 N서울타워가 있는 근처의 성벽 안에 자리했습니다.
남산은 중구와 용산구 경계로,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과 함께 서울의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 중의 하나입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 남산은 풍수지리상 안산 겸 주작에 해당되는 중요한 산이었습니다. 즉 남산이 남쪽의 외적을 막는 자연의 방패가 된 거지요. 그래서 조선 정부는 남산에 18km 이상의 도성을 쌓고, 5개의 봉수대도 설치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남산 일대를 무예훈련장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현대에 들어와서 그 역할이 사라지고 1955년 7월 11일 남산공원과 장충단공원을 확장했고, 1959년 3월 12일 '남산대공원'으로 명칭을 고친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출처 : [남산의 원래이름 목멱산] 산림청 대학생 블로그 기자단/김지은 참조"
남산은 목멱산을 서울 도성에서 아주 중요한 곳이었고 따라서 국가가 제사를 지내는 국사당이 위치했던 곳이다. 이렇게 중요한 이 남산은 지금도 서울타워를 가보면 우리나라 사람보다 많은 일본인을 만나게 된다. 그 아래 명동은 거리마다 일본어 간판과 호객은 마치 일본 거리를 옮겨 놓은 것처럼 일본과 친숙하다.
이렇듯 일본인들이 많고 친숙한 이유는 우리의 아픈 역사적 배경이 있다. 바로 강화도조약(1876) 이후 일본공사관과 일제 거류민단이 남산과 그 일대에 조성되어 많은 일본인들이 밀집하였고 1910년 경술국치(한일강제병합) 이후 일본제국주의가 제일먼저 토지 측량을 하여 국사당 터를 빼앗았고 아울러 일제의 강력한 통치를 위한 조선주차일본헌병대사령부가 근처에 주둔하면서 일제식민지의 중심으로 거듭났다. 또한 남산에는 우리민족의 가장 가슴 아픈 역사이자 치욕이었던 일제의 '조선신궁' 즉 일제의 신사가 위치하였다. 이 조선신궁의 목적은 조선과 일본이 하나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며 강력한 식민정치와 함께 제국주의 욕망에 사로잡힌 일제 침략자들이 일으킨 태평양전쟁(1941년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며 일으킨 전쟁으로 일제는 '대동아전쟁'이라고 한다.)을 지지하고 지원(병참기지화정책)하려는 조선의 사상적 중심이었다.
"목멱산 봉수대 터
목멱산 봉수대는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경봉수)라고도 불렸었는데 전국의 봉수가 집결되었던 곳이다. 신호체계에 따라 연기나 불을 피워서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까지 연결하여 알리며, 해당 지역의 주민들에게도 알려 빨리 대체하도록 하는 일종의 통신수단이다.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불을 피워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봉수는 남산에서 집결하였고, 남산 봉수대는 제1봉수대부터 제5봉수대까지 다섯 곳의 봉수대가 있었다. 제1봉수대는 함경도-강원도-양주 아차산. 제2봉수대는 경상도-충청도-광주 천림산. 제3봉수대는 평안도 강계-황해도-한성 무악 동봉. 제4봉수대는 평안도 의주-황해도 해안-한성 무악 서봉. 제5봉수대는 전라도-충청도-양천 개화산에 이르는 봉수를 받았다.
이곳에 1993년에 김정호의 [청구도] 등의 관련 자료를 참고해서 남산의 다섯 봉수 중 하나를 복원한 것이다.-목멱산 봉수대 터 설명 참조"
남산 정상의 남산타워가 뿜어내는 네온사인은 그야말로 현대식 문명의 아름다움 그 자체다. 서울에 이런 곳이 다 있었나 할 정도로 그 아름다움이 뛰어나다. 물론 멀리서 바라보는 타워의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왜 그토록 사람들이 저마다 기억 속에서 남산타워를 서울의 이미지로 가지고 있었는지 이해된다.
남산타워 곁에는 우리 문화를 상징으로 나타내 주는 600년이 넘은 서울 도성의 성곽과 정자가 있어 그 운치는 E.H 카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 말처럼 과거와 현재가 만나 동시에 인식되는 색다른 체험이다.
이마에 땀을 송글송글하고 숨을 헉헉거리며 올랐던 나이지만 남산에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어서 충무로나 명동역에서 내려 케이블카로 남산의 정상을 오를 수도 있다. 그리고 서울 투어버스를 통해서도 정상에 쉽게 오를 수 있다.
손 쉽게 오를 수 있는 여러 방법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답사(踏査)'를 생각할 때 걸으며 보고 느끼는 온몸의 감흥이 더 좋다. 근데 케이블카도 은근 한번 타고 싶다. 혼자는 말고 둘이서..
남산 서울 도성의 성곽을 사이로 원서울과 바깥 서울이 나뉜다.
(위는 정동 일대 사진, 가운데는 남산 성곽, 밑은 목동일대)
지금의 서울은 인구 1000만이 넘는 세계에서도 손을 꼽을 정도로 인구밀집도와 첨단현대적 도시라는 의미에서 큰 도시이다. 처음부터 서울이 이렇게 크진 않았다. 본래 서울은 도성 성곽과 그 주변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서울의 크기는 상당히 줄어든다. 아무리 크게 잡아도 서울 종로구와 중구 등 8구 이상 되지 않는다.
예전 서울인 도성 안쪽과 바깥쪽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든다. 성이란 방어적 산물이고 철저히 성 안쪽과 바깥을 구분하여 안쪽을 보호하는 외부로부터의 차단을 의미한다. 중국이 아무리 만주와 몽골지역에 대한 영유권에 목소리를 높여도 자신들의 조상이 세우고 자신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만리장성은 그들의 영역과 한계를 말해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만리장성은 곧 외부로부터의 위험(북방유목민족)을 막아섰던 중국의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곽이 가지는 의미는 구분, 단절, 차단, 보호를 의미한다. 서울의 중심은 누가봐도 종로구의 옛 서울 도성의 중심이다. 그곳에 가면 당연히 조선 왕조의 궁궐과 현대 대한민국의 중심 청와대와 정부청사가 위치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생각하면 중심부보다 그 바깥이 더 번영하였고 그 외부적 힘이 더 강한 것이 사실이다. 실제 서울의 많은 인구와 경제력은 그 도성 바깥이다. 특히 서울의 경제 및 부의 중심은 강남으로 집중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말이다.
조선 후기 서울 도성은 도성이라는 특권을 가지고 주변에 대한 우위를 가졌다. 특히 서울 도성 중심의 육의전(六矣廛)의 시전상인(市廛商人)들은 조정과 왕실, 도성의 물품을 전매하는 특권과 금난전권을 통해 여타 다른 상행위를 근절하며 명실상부 경제의 중심자가 되었다. 하지만 조선후기 농업생산력을 발달과 전국 각지 장시의 발달은 서울에도 그 영향을 미쳐 그 주변부가 발달하게 된다. 특히 사상도고(私商都賈)의 활발한 활동과 성장은 무시 못할 경제적 주체였다. 도성에서도 육의전이 아닌 아현, 칠패시장의 발달과 나루터인 마포 등지가 상행위의 중심이 되면서 서울 중심부의 위치는 점차 쇠퇴하였다.
오늘날 서울은 번영하였고 그 중심 또한 화려하게 현대적 도시로 변모하였다. 그 함께 서울 중심에 몇배에 해당하는 그 주변부는 더욱 팽창하고 발달하였다. 더 이상 서울 일번가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곳곳에 저마다 서울의 일번가가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도성 성곽을 사이로 도성의 안과 밖을 보면 여러 생각이 들었다. 폐쇄된 성안은 정체되고 성밖은 더욱 더 번성하고 팽창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사는 세상, 그 중심에 늘 변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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