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팔달산에는 유서 깊은 문화유산이 많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곳이 '꿈의 문화유산 화성(책 이름 인용 : 유봉학, 1996, 신구문화사)'이다. 200년 전 정조가 만들고 정조의 대표적인 유산으로 관련된 인물을 떠올린다면 단연 정조이지만 그 정조가 팔달산의 주인은 산신, 즉 성황이다.라고 하고 정조의 명으로 현재 융건릉이 있는 화산 바로 옆 성황산에서 성황사를 옮겨와 팔달산에 성신사를 만들고 제를 올려 이곳의 주인임을 기렸다. 또한 명령으로 유수가 음력 1월과 7월 헌관이 되어 고유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러한 성신사가 오랫동안 묻혀지다 2009년 10월 드디어 복원되었다. 복원과 함께 고유제도 지내게 되었는데 정조가 명한 헌관은 수원유수 즉 현재의 수원시장인데 수원시장이 안 지내고 화성연구회에서 지내고 있다.
이런 유서 깊은 곳에 정조대왕동상이 건립되어있다.(2003.6.)
그리고 그 바로 아래에는 선경도서관이 있다. 선경은 선경그룹으로 현재 대기업 SK의 전 사명이다. 이 기업을 이끈 이는 수원의 토성 수성최씨의 최종건과 동생 최종현 회장이다. 이 둘의 고향도 수원시 평동이다. 최종현 회장이 평소 수원에 대한 애향심이 크고 많은 일을 한 형의 유지를 받들어 선경도서관을 지어 수원시에 희사하였다.(1995년) 이러한 전통은 이미 1980년에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홍진기 사장이 중앙도서관을 지어 희사한 전례가 있다. 그런 이유로 정조대왕동상 바로 아래 최종건 회장상이 서있다. 우연은 여기서만 겹치는 게 아니다. 바로 정조대왕이 1800년에 승하하는데 49세였다. 최종건 회장도 1973년 별세하는데 49세였다. 수원을 사랑한 그들이 위 아래로 그 분신을 세우고 있다.
수원은 도서관의 도시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따라서 특색에 맞는 도서관이 곳곳에 세워져 있는데, 이곳 선경도서관은 경기도 서남부 역사를 꿰뚫고 있는 '수원학'의 서고이다. 따라서 3층에 수원학자료실이 구비되어 있다. 다만 도서관 개관 시간에 맞춰 들리면 오산이다. 수원학자료실은 화~금은 14~17시까지 토일은 9~18시까지 열람을 할 수 있다.
이곳에 이르게 되는 길은 팔달산 중턱의 숲길이다. 햇볕을 보지 않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길걷기 좋다. 더욱이 가는 길에는 팔달약수, 효원약수 등 작은 산이나 둘레에 약수터가 있어 길손의 목마름을 시원하게 해결해준다.
그리고 길가는 나무들로 빽빽한데, 늘어선 나무는 꽃나무로 주로 벗나무이다. 그런데 벗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간혹 생김새가 다른 수종이 있는데 바로 매화나무, 즉 매실나무이다. 이 두 나무의 차이는 꽃으로만 판단하기는 어려운데 나무의 껍질과 잎파리를 보면 알 수 있다. 보통 벗나무는 껍질이 매끈한 느티나무와 같다. 다만 오래된 고목은 매끈함이 없고 소보루 빵과 같다. 그리고 잎파리는 과실수 잎파리처럼 거칠고 솜털지다. 잎사귀 가운데 줄기가 가고 양쪽으로 세세하게 줄기가 나 끝이 뾰족한 달걀 형태이다. 반면에 매실나무는 아카시아 나무처럼 나무줄기에 세로로 껍질 주름이 지고 나뭇잎은 벗나무보다 잎자루 양쪽이 불규칙한 줄기가 넓게 뻗어있고 끝이 톱니가 지며 벗나무잎보다 넓은 계란형이다. 또한 표면이 매끈하고 가장자리엔 예리한 톱니가 있다. 그리고 맺은 과실이 더 분명한 차이를 가진다. 벗나무는 작은 버찌가 맺어져 그 아래 바닥에 수두룩 하고 매실나무는 마치 복숭아 어린 열매같은 매실을 맺고 그 아래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000년 초반 전국 어디나 벗나무만 심고 축제며 난리라서 벗나무보다 봄 꽃으로 개화기간이 긴 매실과 같은 과실수로 심는 건 어떤가 생각을 가지고 이야기한적이 있었다. 오래된 벗나무가 고사하고 빈자리를 매실나무가 차지한듯 보여 마음이 좋다.
팔달산(八達山)의 유래 고려말 학사 이고 설화
고려왕조가 몰락하였다고 어찌 새로 들어선 이태조를 섬길 수 있느냐며 고려의 절개있는 신하들은 조선왕조의 협조 요구를 거부하고 그 길로 송악산 깊숙한 곳, 만수산으로 들어가서 초막을 짓고 마을을 이루어, 갖은 고생을 하며 세상에 나오지를 않았다. 이들은 조선왕조의 끈질긴 협조요구에도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에 이태조는 만수산에 불을 질러 위협했으나, 끝내 이곳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불에 타서 죽었다는 두문동칠십이현의 이야기를 사기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그때의 일이었다. 여말에 여주인 학사 이고가 있었다. 호는 망천으로,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로부터 대사성집현전제학이 되었는데, 공양왕때에 와서 정란으로 나라가 장차 쇠망해감을 예견하고, 자진 은퇴하여 수원의 광교산 남쪽에 있는 탑산 밑에 살고 있었다.
이고는 팔학사의 한 명으로, 이때 조견, 이집 등과 왕래하며 광교산 아래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는 등 여러 학사들을 벗삼아 세상을 잊고 소요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 개울을 후세 사람들은 망천이라 일러왔다고 한다. 이분이 사시던 뒷산을 탑산이라 했다. 올라가 보면 어느 산과도 연결되지 않은 독립되어 있는 산으로 보이며, 평지에 탑을 세워 놓은 듯, 딴 산과는 뚝 떨어져 있다 하여 탑산으로 불리워 왔는지 모른다.
당시 공양왕은 사자를 보내어 무엇으로 소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 고는 “집 뒤에 조그마한 산이 하나 있사온데, 들 가운데 있는 산으로서, 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살펴보면 어디고 막히는 데가 없어 사통팔달 하여 내다보는 시야가 탁 트이고, 또한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산이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이 가장 즐거움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 이태조가 등극한지 2년이 지나서 신조에 나와 경기우도 안염사의 벼슬을 하라고 여러 차례 권고하여 불렀으나, 끝내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태조는 할 수 없이 화공(畵工)을 시켜, 얼마나 그 산이 좋은지 그림으로 그려 오라고 명하였다.
화공이 그려서 바친 탑산의 그림을 본 이태조는 ‘역시 아름답고 좋은 산이구나’하시며 크게 칭찬한 다음, 그렇다면 그 산을 팔달산이라 이름지으라고 한 뒤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팔달산이라 불리고 있다.
정조는 고려말 처사 이고를 팔달산의 주인으로 부르며, 그에 대한 경의로 치제문을 내렸다.
팔달산주인(八達山主人) 처사(處士) 이고(李皋)의 묘소에 치제한 글(八達山主人處士李皋墓致祭文)
산 이름이 팔달인 것은 / 山名八達
성주(聖主)께서 주신 바였으니 / 聖人攸錫
그 가운데 일민이 있어 / 中有逸民
홀로 기거하며 지냈네 / 獨寐寤宿
고사리는 수양산에 자라고 / 薇長首陽
토지는 반곡에 비옥하니 / 土肥盤谷
장자(莊子)는 낚시를 드리운 채 돌아보지 않았으며 / 莊釣不顧
위야(魏野)는 자신이 살 곳을 알았네 / 魏居省識
이곳에 나아가 화성(華城)을 건치(建置)하니 / 卽地建治
팔달산이 끌어당기듯 둘러싸고 있네 / 控揖襟帶
망루가 즐비하고 여정이 갖추어져 / 樓櫓閭井
하나의 큰 도회를 이루었네 / 一大都會
주인옹이 여기에 있어 / 主翁於此
황연히 신이 살피는 듯하니 / 怳若神胥
광세(曠世)의 감회가 깊은지라 / 曠感者深
이에 나의 행차를 멈추었네 / 爲停鑾輿
홍재전서 제23권 제문(祭文) 5
성신사 상량문(城神祠上樑文)
삼가 아룁니다.
성인은 천지의 마땅한 이치에 따라 조처해 이루나니 바로 토공(土工)을 헤아릴 때 그러하고, 신명이 제수(祭需)를 올린 정성을 내려와 살피나니 사당의 풍모를 드높게 한다. 이에 화려한 들보가 계획한 대로 순조롭게 올라갔다.
이 화성(華城)은 한(漢)나라의 삼보(三輔)와 같은 지역에 위치하고, 주나라처럼 두 곳의 수도를 갖추었다. 한강의 남쪽과 충청도가 만나는 요충지이니 울타리가 없어서는 안 되고, 행궁(行宮)과 외영(外營)을 세움에 어찌 규모를 작게 하겠는가. 땅은 만년토록 편안할 선친을 모신 곳의 곁인데, 하늘이 백 리에 걸쳐 천연의 요새를 베풀었네. 산과 내가 에워싸고 있어 오릉(五陵)이 있는 곳처럼 상서로운 기운이 울창하게 서려 있고, 관방(關防)이 허술해 겹겹이 방비할 장대한 계획을 세웠네. 정한 곳이 길지(吉地)라서 인화(人和)의 효험을 보았고, 기이하게 돌덩이가 나온 것은 실로 신령이 도운 것이라네. 유사시를 대비하고 능묘를 쓰고자 하는 뜻이 담긴 일인지라 관원과 서민이 모두 따랐네.
이에 갑인년(1794, 정조18) 봄에 공역을 시작하였으니, 화홍문(華虹門)을 설치한 물가에서 시작해 창룡문(蒼龍門)을 세운 모퉁이까지였다. 3년이 지나자 100개의 치(雉)가 펼쳐졌고 하나의 성지(城池)에 팔방으로 길이 가지런히 났다. 큰 건물이 밀집하고 많은 군병이 운집하였으며 성을 쌓아 곳집의 곡식 쌓이고 해자(垓字)를 파 젊은이들 흥기되었다. 바로 이와 같이 하여 어떠한 것도 빠뜨리지 않았나니, 이 때문에 신령이 편안하지 못할 사정이 아무것도 없을 줄 알겠네. 성(城)은 천하보다 큰 것이 없으나 어찌 그저 강이나 산만 하다고 할 것이며, 예(禮)는 사(祀)마다 두루 올리지 못하나 그렇다고 조왕신(竈王神)이나 문신(門神)에 대한 예보다 못할쏘냐. 우리 임금께서 백성을 어루만지는 마음으로 선왕께 은혜를 갚는 의식을 치르시고, 말씀하시기를 “성은 흔들리지 않을 대업(大業)을 안정시키고 신령은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베풀 것이다. 성을 쌓고 해자를 판 것이 어찌 한두 신하만이 잘해서 된 일이겠는가. 우리에게 수(壽)를 내리고 복을 내릴 것이니 실로 억만년토록 이어질 터로다. 아, 너희 유사(有司)들은 날을 잡아 건물을 짓고 이름을 ‘성신사’라 하여 때맞춰 제물을 올려 제사를 지내라.” 하시니, 이에 서남쪽에 터를 잡고 산등성이가 똑바로 뒤가 되도록 방향을 잡았다. 근신(近臣)은 분주히 장인들을 감독하였고 유수(留守)는 도면을 살피며 주선하였네. 가리는 것을 잘라 내 햇볕이 들게 하니 3층 계단과 양쪽 행랑이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장식은 검소하게 하되 단청은 화사하게 하니 많은 기둥과 기다란 서까래가 번듯하다. 목재와 돌을 실어와 며칠 걸리지 않고 위패 모실 곳을 만들었고, 누로(樓櫓)를 빙 둘러 쳐서 주인에게 의지하며 소중한 곳임을 드러냈다. 사당과 재실(齋室)은 광리왕(廣利王)에게 제를 올리는 황목(黃木)의 그것과 같고, 군악을 쓰고 장수가 주제(主祭)하는 것은 붉은 깃발을 꽂고 치우(蚩尤)에게 제를 올리는 것을 닮았다. 예(禮)의 취지에 맞게 제사의 규모를 정하였으니 영원토록 복이 내리리라.
나라의 위세를 태산(泰山)과 반석(磐石)처럼 공고히 한 것은 문왕이 풍(豐) 땅에 성을 쌓아 왕업(王業)을 빛낸 것과 같고,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복락을 누리게 된 것은 주공(周公)이 낙(洛) 땅에 도읍을 만들어 하늘의 마음을 얻은 것과 같도다. 요새에 야순(夜巡)을 도는 것은 위엄 있게 적을 대비하기 위함이요, 길한 날에 제를 지내는 것은 방불하게 혼령을 임하시게 하기 위함이라. 이는 처음으로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니, 어찌 상량을 축송하는 노래가 없을쏜가.
이로써 함께 힘쓰는 것을 돕고 신령이 임하시길 바라노라.
어기영차 동쪽 들보 올리세 / 兒郞偉抛梁東
문 열면 마주 보이는 구천 위로 붉은 해가 떠오르면 / 門對龜川浴日紅
신령의 눈과 봉홧불은 어느 것이 더 밝을까 / 神目與烽誰似雪
매번 평안한 밤이었다고 행궁(行宮)에 보고하네 / 平安夜夜報離宮
어기영차 서쪽 들보 올리세 / 兒郞偉抛梁西
등 뒤 청산에 해가 질 무렵 / 背後靑山日馭低
원수가 있는 장대(將臺)에 신비로움이 서리고 / 元帥有臺神亦止
구름 사이로 보이는 성가퀴마다 깃발이 늘어서 있네 / 雲間睥睨簇旗齊
어기영차 남쪽 들보 올리세 / 兒郞偉抛梁南
높이 솟은 누대와 회 바른 성가퀴에서 뿔피리 소리 상쾌히 울리니 / 山樓粉堞角聲酣
성문으로 들어오는 길에 사람들이 모여들겠고 / 知應輻輳皐門道
상서로운 일이 많이 벌이지고 만백성은 늘어 가리라 / 禎瑞芸芸萬姓覃
어기영차 북쪽 들보 올리세 / 兒郞偉抛梁北
도성을 굳게 지키는 성벽이 천 길 높이 솟아 / 長安鐵鎖千尋直
해마다 대가(大駕)의 앞길을 호위하고 / 年年呵護翠華前
봉인같이 축원하기를 청하는 사람만을 허락한다네 / 只許封人工請祝
어기영차 위쪽 들보 올리세 / 兒郞偉抛梁上
견우성이 정중앙을 가리켜 신장을 되돌리고 / 牽牛正指回神仗
별자리처럼 펼쳐 자리한 높은 누대에서 / 麗譙羅似學星辰
경보를 알리는 소리 빛처럼 사방으로 똑같이 퍼지네 / 報警昭芒同四放
어기영차 아래쪽 들보 올리세 / 兒郞偉抛梁下
제때 비 내리고 시원한 바람 부는 저 들판을 바라보니 / 膏雨條風觀彼野
보장에 필경 곡식이 풍작이리니 / 保障終須黍稌多
알겠노라 영험한 신령이 우리 고을과 함께함을 / 吾知神力同吾社
삼가 바라건대, 상량한 뒤로 사방에는 변란이 일어나지 않고 팔문(八門)으로 생기를 맞이하며 임금께서는 장수하시고 나라는 번창하여 만세도록 태평하며 병사는 용맹해지고 말은 준마가 되어 첫째가는 고을이 되게 하소서.
수원 판관 홍원섭(洪元燮)이 지어 올렸다. - 이상은 갑인년(1794, 정조18)에 지어 올린 것이다. -
일성록 정조 정조 20년 병진 9월 10일


성신사는 팔달산 오른쪽 기슭의 병풍바위 위에 유좌 묘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병진년 봄에 특교로써 집터를 잡으라는 명령이 계시어 택일하여 이 사당을 지었다. 정당은 오량 삼가인데 전을 쌓아 벽을 만들었다. 전영 안팍에는 방전을 깔았고, 당 아래에는 계단 셋을 놓았다. 전면에 삼문을 세우고, 문의 좌우에는 오간 행각을 붙였는데, 남쪽으로 두 간은 안쪽을 향하여 전사천을 지었고, 북으로 세 간은 바깥쪽을 향하여 재실(한 간은 온돌, 한 간은 마루, 한 간은 공량임)을 지었다. 뜰의 삼면을 네모진 담으로 둘러쳤다. 단청은 삼토를 사용하였고, 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사당이 이루어지자 화성 성신의 신주(재목은 태상에서 보내 왔음)를 의자와 탁자를 갖추어 사당 안 정간에 봉안하였다. 이날 향축을 내려 제사를 지냈고 해마다 봄가을의 맹삭에 향축과 제품과 대로 만든 변 둘, 두 둘, 보와 궤 각 하나, 작 셋을 규정에 의하여 내려보냈다.
수원시, 1977, 『국역화성성역의궤』 상
화성부(華城府) 성신사(城神祠)의 향축(香祝)은 성문이 열리거든 내려보내고, 위판(位版)의 조성(造成) 여부를 예조에서 수원 유수에게 물어보고 보고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화성의 성역이 완성되면 성신사를 먼저 건립하라고 하였는데 그 역시 완공되었다고 한다. 행행(行幸)하기 전에 길일을 잡아서 위판을 봉안(奉安)하게 하라. 제문은 직접 지을 것이다. 헌관(獻官)은 화성 유수가 맡고 향축은 기일이 되기 전에 내려보내도록 예방과 예조에 통지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화성 성신사에 길일을 잡아 위판을 봉안하기 위해 일관(日官)에게 날짜를 가리게 했더니 이달 19일 묘시(卯時)가 길하다고 합니다. 이날 이 시각에 위판의 봉안을 거행하고, 봉안한 뒤의 고유제(告由祭)는 상황에 맞추어 설행하며, 제물과 집사관(執事官)은 화성부에서 차정(差定)하여 진배(進排)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르고 전교하기를,
“향축은 성문이 열리거든 내려보내라. 헌관 이하는 내일 재숙하면서 향축을 기다리도록 정원에서 이 계사(啓辭)와 판부(判付)를 후록(後錄)하여 수신(守臣)에게 하유(下諭)하게 하라. 위판은 이미 조성했는가? 만약 미처 조성하지 못했다면 향축을 내려보낼 때 위판을 조성할 나무도 함께 내려보낼 것이니 길일이 되기 전에 먼저 조성하여 상황에 맞추어 제사를 행하게 하라. 이런 내용을 통지하고 위판의 조성 여부에 대해 경이 오늘 중으로 장계로 보고하라는 내용도 함께 하유하라.”
하였다.
(命華城府城神祠香祝待開門下送位版造成與否令該曹問于守臣以聞
敎曰華城城役告成而城神之祠先令建置矣聞亦告完行幸前卜吉妥奉位版祭文當親撰而獻官本府留守爲之香祝先期下送事令該房該曹知委擧行○禮曹啓言華城城神祠卜吉妥奉日子令日官推擇則今九月十九日卯時爲吉云以此日時擧行而妥奉後告由祭則隨時設行祭物及執事官請令本府差定進排之意分付從之敎以香祝待開門下送獻官以下明日齋宿以待香祝事令政院後錄此啓辭及判付下諭守臣位版已爲造成乎如未及爲位版木當於香祝下送時同爲下送吉日先爲造成隨時行祭此意知悉造版與否卿其今日內狀聞之意一體下諭)
일성록 정조 정조 20년 병진 9월 17일(기미)
병진년(1796) 9월 17일
전교에말씀하셨다.
화성의 성역이 완성되는 대로 성신城神의 사당祠堂을 먼저 세워 설치하게 하였다. 이제 들으니 이것도 완공되었 다 하니 행차(행행行幸) 전에 길일을 택하여 위패位牌102) 를 봉안하라. 제문은 마땅히 직접 지을 것이다. 헌관獻官103) 은 본부 유수로 하고 향香과 축문祝文을 기일 전에 내려보낼 것이니, 해당 부서와 해당 관아에 자상히 알려 거행하 게 하라.
「화성성역의궤』 전교 병진년 9월 17일 : 2005, 화성성역의궤 국역증보판 상권 기전문화예술총서 16. 173쪽
병진년(1796) 9월 17일
예조에서 화성 성신사城神祠의 위패를 봉안할 날짜를 잡아서 올린 것을 아뢴 바에 따라 시행하되 향이나 축문은 문 열기를기다렸다가 내려보낼 것이니, 헌관獻官 이하는 다음 날까지 재계하며 향과 축문을 기다리도록 하라.
승정원으로 하여금 보고한 내용과 거기에 대해 결재한 것을 나중에 기록하였다가 수령에게 내려보내서 일러주도록 하라. 위패는 이미 다 만들었는지, 아직 만들지 못하였다면 위패 만들 나무를 향과 축문을 내려보낼 때 같이 내려보내겠다. 길일吉日에 우선 만들어서 때에 맞추어서 제사를 지내라. 이 뜻 자세히 알아서 위패를 만들었는지 아닌지를 경이 오늘안으로 아뢰라는 뜻의 일체를 하유하노라. (후록에 대해서는 계사를 볼것)
병진년(1796) 9월 18일
화성 성신사에서 제물(祭物)은 변(籩)이 2개, 두(豆)가 2개, 보궤(簠簋) 각 1개, 잔(爵) 3개로 원칙을 삼고, 예물은 없고 축문(祝文)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헌관(獻官)은 수령이 하고, 전사관(典祀官) 겸 대축은 판관이 하며, 여러 집사는 수원부에서 뽑아서 임명할 것을 정례화하라. 봄과 가을의 첫 달에 좋은 날을 점쳐 가려서 향과 축문을 내려보내기로 한다.
2개의 두에는 육장과 김치를 각각 1가지씩 담고, 2개의 변에는 그 계절의 과실을 각각 1가지씩 담으며, 1개의 보에는 벼나 조 중 1가지를 담고, 1개의 궤에는 메기장이나 차기장 중 1가지를 담고, 1개의 조에는 돼지를 통째로 담았다.
「화성성역의궤』 윤음 병진년 9월 17일 : 2005, 화성성역의궤 국역증보판 상권 기전문화예술총서 16. 180쪽
이처럼 정조가 전교와 윤음으로 내린 성신사의 제사 규모는 《오례의(五禮儀)》를 참고하여 정하였는데, 변(籩)이 2개, 두(豆)가 2개, 보(簠)와 궤(簋)가 각 1개, 조(俎)가 1개, 작(爵)이 3개이다. 《承政院日記 正祖 20年 9月 18日》
아울러 고유제의 제품은 7가지로 제물(폐백)은 없고 축문은 읽고 해마다 봄가을(음력 1월, 7월) 첫 달 좋은 날에 수령(유수)가 헌관이 되어 고유제를 지내라고 윤음을 내렸다.
화성(華城) 성신(城神)에게 제사드린 글(祭華城城神文)
저 화양에 성을 쌓으니 / 城彼華陽
이것이 화성이로다 / 是爲華城
땅이 만들고 하늘이 감추었던 곳에 / 地效天藏
성을 쌓기 시작했도다 / 之經之營
만대의 터전을 / 萬世之基
뭇사람들의 마음으로 이루었네 / 衆心以成
높은 성벽이 우뚝하고 / 崇墉屹屹
줄지은 담이 단단하네 / 列雉庚庚
우리 선침을 에워싸고 / 拱我仙寢
우리 왕경을 호위하네 / 捍我王京
해자가 있어 의지할 만하니 / 維隍有依
그 혼령을 깨끗이 씻을 만하네 / 有濯厥靈
신주를 다듬어 이에 제향하니 / 治主斯饗
성대히 영광이 있도다 / 蔚有光榮
천년 억년이 지나도록 / 時千時億
막아 주는 울타리가 되리라 / 是翰是屛
풍패(豐沛)의 산수에 / 沛山豐水
하해(河海)가 맑고 고요하네 / 海晏河淸
우리에게 수복을 내리고 / 壽我福我
우리에게 태평을 끼치소서 / 詒我泰平
고전번역서 홍재전서 홍재전서 제24권 제문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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