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백제의 기군(基郡)인데, 신라에서 부성군(富城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그대로 따랐다. 인종(仁宗) 21년 계해에 현령(縣令)을 두었다가, 충렬왕(忠烈王) 10년 갑신에 고을 사람 대호군(大護軍) 정인경(鄭仁卿)의 공으로 인하여 지서산군사(知瑞山郡事)로 승격하고, 충렬왕 말년 무신에 서주목(瑞州牧)으로 승격하였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 경술에 모든 목(牧)을 없앰에 따라 서령부(瑞寧府)로 강등하고, 뒤에 또 강등하여 지서주사(知瑞州事)로 하였다.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서산군으로 고쳤다. (本百濟 基郡, 新羅改爲富城郡, 高麗因之。 仁宗二十一年癸亥, 置縣令, 忠烈王十年甲申, 以邑人大護軍鄭仁卿之功, 陞爲知瑞山郡事。 忠烈王末年戊申, 陞爲瑞州牧, 忠宣王二年庚戌, 汰諸牧, 降爲瑞寧府, 後又降爲知瑞州事。 本朝太宗十三年癸巳, 例改爲瑞山郡,)
세종실록 149권, 지리지 충청도 홍주목 서산군(瑞山郡)
보통 서산이라고 하지만 서산사람들은 '스산'이라고 부른다. 그래서인지 지역문화의 대표 기관인 서산문화원의 연간지가 '스산의 숨결'이다. 그 스산에 갔다.
스산의 시원은 역사적 연원 이전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문화유산이 바로 서산 부장리 고분군 유적이다. 이 유적에서 청동기시대 집자리 유구부터 한성백제기의 분구묘와 조선시대 유구까지 다양하게 조사되었다. 사실 이 유적이 발견된 것은 학술발굴은 아니고 지금의 서산수림미소가아파트 건립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발견되어 구제발굴이 시행되었다. 건설사와 주민에게는 엄청난 경제적 손해가 이루어졌지만 서산의 역사와 문화에서는 대단한 발견이다. 특히 청동기 시대 취락은 흔암리 유형의 전기 취락과 휴암리·송국리 유형의 중·후기 주거지로, 주변의 해미 휴암리 유적, 기지리 유적 등과 함께 서산 지역 청동기 시대의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리고 가장 핵심된 유적이 바로 고분군 5호분의 발견이다. 한성백제기 고분으로 분구묘의 형식인데(흙을 돋우어 관과 곽을 안치하는 묘제) 그곳에서 출토된 부장품이 바로 금동관이다. 이는 백제가 확장하는 가운데 특징적인 유물로 판단되는 것으로 서산 바로 북쪽 화성시 요리에도 금동관이 출토되면서 백제가 편입한 지역의 유력자를 포섭하는데 쓰인 위세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한성 백제기 서산지역도 백제 기군이 설치되고 유력자에게는 금동관을 하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물을 토대로 서산 유력자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요리 금동관 다시 깨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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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과 지금은 터에 불과한 보원사는 한 때 수천의 수행자가 머문 규모 면에서 대단위 사찰이라는 점(6세기 경 창건)에서 고대 서산지역의 지배세력이 백제로 편입된 위세를 가늠하고도 남는다.
오늘날 서산의 이름을 가지는 데는 서산 정씨 비조 정인경과 관련이 깊다. 정인경은 고려 때 귀화한 남송의 유학자 정신보의 아들이다. 이들의 세계가 서산의 토반으로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추숭하는 사우로 송곡사로 불리는 송곡서원(송곡서원의 주향에는 이견이 있다. 현재는 정신보, 정인경이 격이 높게 나오지만 또 연려실기술 등에는 토성인 서령 류씨의 류방택으로 보기도 한다.) 이 있다. 정인경은 충렬왕을 보필하며 그 공로를 높이 사 그의 출자인 부성현을 '상서로운 곳'이라고 하여 지금의 서산군으로 이름하고 이어 서산목으로 승격하였다.
따라서 충선왕 때 서령부로 격하되며 한때 이름이 바뀌기도 하였지만 지금까지 지역의 대표 지명으로 서산이 통용되고 있다. 참고로 신라 부성군 시절 가장 유명한 위인은 태수로 부임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908)이다. 이를 기념하여 도로명에 고운로를 붙였다. 이 밖에 조선 전기 산수화의 대가로 ‘몽유도원도‘를 남긴 안견(安堅)의 고향임을 기념하여 안견로도 있다.
이러한 서산을 대표하는 유산이 지금의 서산 시청에 자리하고 있는 서산 관아문과 외동헌, 객사이다. 서산이 조선조에 행정 치소가 되고 읍성과 함께 관아도 완비되었겠지만 지금의 건물은 고종 때 군수 오병선이 개축한 것이다.
서산군수 오병선(吳秉善) 고종 경오년(1870)에 부임 오 군수는 본래 조선 고종 3년 경복궁 건축 때 도편수로 궁역을 완성했고, 그 공으로 특별히 본 읍 군수에 제수해서 그로 하여금 본 읍의 관청 건물을 개축하게 했다. 지금 함서령군문(두 계단 건설)과 우편소, 경찰서장관사, 군수관사 등의 건물은 모두 오 군수가 지은 것이다.
서산문화원 사이버향토사료관 : 서산문화원, 번역판 1926, 서산군지 상(선생안)
서산 객사도 정확한 개축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외동헌의 건축 양식과 비교할 때 군수 오병선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재밌는 사실은 오병선이 경복궁 중건에 책임자였던 도편수라는 것이다. 오병선이 그 공으로 서산군수가 되었으니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대역사에 기울인 정성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관아와 읍성은 모두가 잘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관아의 정문인 관아문은 제자리로 보이고 동헌은 서산시청 본관이 위치하면서 조금 서쪽으로 이동한 것이라고 한다. 관아문과의 위치로 볼 때 맞다. 다만 객사의 위치인데 객사는 현재 위치를 고지도를 볼 때 타당한데 설명은 일제 때 동헌 내에서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자료마다 상이하거나 자료 미비로 객사가 옮겨졌는지 정확히 알길이 없다.


서산의 향토 사가들의 판단으로 보면 서산 읍성의 둘레는 시청 앞 로타리 일대가 남문 위치로 비정되는데, 서산군산천도 역시 동문 근처에 객사가 위치한다. 객사의 안내판 설명에서는 동헌과 같이 있었다고 하지만 고지도에는 분명히 동헌과 분리되어 읍성 남쪽 끝 남문 근처에 따로 존재한다. 따라서 지금의 위치가 일부 조정이 있었을지는 모르나 현 위치가 객사의 위치로는 타당하다. 혹 옮겨졌다고 해도 동헌 경내에서라기 보다는 서산 시내 신작로 개설과 같이 편이에 따라 일제의 위치 조정이 있었을 거라 추정할 수 있다. 고지도상으로 객사는 남문과 동헌 사이 일직선상에 배열을 볼 수 있는데 현재는 그러한 배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객사를 들어가기 전에 근대식 건물이 있다. 서산시 선관위 건물이었고 그 전에는 문화원, 더 올라가 읍사무소 등으로 쓰였다고 하는데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서산읍사무소로 일제 때 건물이라는 가정으로는 당대 건축물들과 비교 할 때 유사성이 높다. 하지만 이를 정확히 알려주는 자료가 없어서 추정만 할 뿐이다.
서산 객사는 지역의 객사 치고는 위상을 가지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바로 태종이 순행 당시 충녕대군, 즉 세종과 머물렀다는 고사이다. 서산에 현 군왕과 미래 군왕이 모두 머물렀던 곳이 서산 객사이니 지역민에게는 상당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다. 더욱이 태종과 세종은 어떤 군왕인가 조선조를 대표하는 성군이다. 하지만 객사를 들어서자 알 수 없는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고 누가 보더라도 관리 안하는 티가 난다. 시청에 면한 관아문과 외동헌은 주변이 잘 정돈되어 있지만 그로부터 100보 정도 떨어진 객사는 완전히 버려진 공간처럼 치부되고 있다. 서산시민들은 부끄럽지 않은가? 여러 지역을 다녀보지만 관아 건물이 남아 보존된 곳은 드물다. 읍성까지는 아니나 관아의 건물이 남겨진 서산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역사문화적 토대를 가지고 있지만 이에 대한 생각들이 없는 듯 하다.
그리고 서산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안 좋은 이유는 또 있다. 서산에 와서 운전을 하다보니 대도시 심야에 도심에서나 볼 수 있는 차량 폭주에 굉음, 카 스테레오의 고음 등이 수시로 목격되니 이곳은 상당히 민도가 낮나라는 생각을 떨치 수가 없다. 외가와 가깝고 지친이 사는 곳이라 친근했는데 문화유산 관리나 도로에서 상당히 실망을 한다.
객사도 엉망인데 서산 대표 고분인 부장리 고분군 관리도 엉망이다. 더욱이 이 유적을 찾아가는데 큰 도로에서 가면 되겠거니 나섰다가 낭패다. 큰 도로에서 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 마을 여기저기 샛길로 돌고 돌아간다. 다행히 서산 부장리 고분군이 사적으로 지정되고 최근 정비사업이 추진 중에 있다니 기대를 가져본다.
서산시 읍내동 비석군
1833~1965년에 건립된 선정비, 불망비류로 서산시 곳곳에 있던 것을 모아 놓은 것이다. 주로 세금감면과 구휼에 대한 내용이다.
본래 백제의 기군(基郡)인데, 신라에서 부성군(富城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그대로 따랐다. 인종(仁宗) 21년 계해에 현령(縣令)을 두었다가, 충렬왕(忠烈王) 10년 갑신에 고을 사람 대호군(大護軍) 정인경(鄭仁卿)의 공으로 인하여 지서산군사(知瑞山郡事)로 승격하고, 충렬왕 말년 무신에 서주목(瑞州牧)으로 승격하였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 경술에 모든 목(牧)을 없앰에 따라 서령부(瑞寧府)로 강등하고, 뒤에 또 강등하여 지서주사(知瑞州事)로 하였다.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서산군으로 고쳤다. 속현(屬縣)이 1이니, 지곡현(地谷縣)은 본래 백제의 지륙현(知六縣)인데, 신라가 지육현(地育縣)으로 고쳐 부성군(富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도비산(都飛山) 【군의 서남쪽에 있다.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해미(海美)에 이르기 17리, 서쪽으로 태안(泰安)에 이르기 7리, 남쪽으로 요아량 수영(要兒梁水營)에 이르기 95리, 북쪽으로 대산포(大山浦)에 이르기 42리이다.
호수(戶數)가 4백 89호요, 인구(人口)가 1천 8백 87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2명이요, 진군(鎭軍)이 53명이요, 선군(船軍) 2백 9명이다.
토성(土姓)이 5이니, 유(柳)·송(宋)·두(杜)·문(文)·전(全)이요, 촌성(村姓)이 1이니, 방(房)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박(朴)이다. 지곡(地谷)의 성이 3이니, 안(安)·이(李)·문(文)이요, 촌성이 1이니, 박(朴)이다. 없어진 복평향(福平鄕)의 속성(續姓)이 1이니, 유(柳)요, 없어진 광지향(廣地鄕)의 속성이 1이니, 염(廉)이요, 없어진 안면소(安眠所)의 성이 1이니, 유(柳)요, 없어진 화변소(禾邊所)의 속성이 2이니, 유(柳)·송(宋)이요, 없어진 인정 부곡(仁政部曲)의 속성이 1이니, 이(李)요, 없어진 조립 부곡(助立部曲)의 속성이 1이니, 나(羅)요, 없어진 성연 부곡(聖淵部曲)의 속성이 2이니, 김(金)·하(河)이다.
땅이 메마르고 기후가 차다. 간전(墾田)이 7천 2백 83결이요, 【논이 10분의 4이다. 】 토의(土宜)는 벼·기장·피·조·보리·메밀·모시·삼·칠이다. 토공(土貢)은 시우쇠·지초·잡깃[雜羽]·족제비털·여우가죽·삵괭이가죽·표범가죽·참가사리[細毛]·황각(黃角)·숭어·민어·홍어·상어·큰 새우[大蝦]요, 약재(藥材)는 병풍나물뿌리[防風]·오징어뼈요, 토물(土物)은 굴[石花]·낙지이다. 어량(魚梁)이 10이요, 【주로 청어·조기·상어·큰 새우가 난다. 】 염소(鹽所)가 1이요, 【염정(鹽井)이 2이요, 염분(鹽盆)이 3이다. 】 철장(鐵場)이 1이요, 【군의 서쪽 도비산(都飛山) 남쪽에 있다. 】 자기소(磁器所)가 1이요, 【군의 북쪽 사기동(沙器洞)에 있는데, 하품(下品)이다. 】 도기소(陶器所)가 1이다. 【군의 동쪽 보현동(普賢洞)에 있는데, 하품(下品)이다. 】
주산 석성(主山石城) 【군의 북쪽 2리에 있는데, 둘레가 4백 68보이며, 〈지세가〉 험하고, 안에 우물 3이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하며, 군창(軍倉)이 있다. 】 역(驛)이 1이니, 풍전(豐田)이다.【예전에 왜적의 침입으로 인하여 〈모두〉 흩어져 없어졌는데, 본조 공정왕(恭靖王) 2년에 다시 두고, 여미현(餘美縣)200) 의 득웅역(得熊驛)을 혁파하여 〈이곳에〉 붙였다. 】 대산포(大山浦) 【군의 북쪽 42리에 있다. 】 봉화가 2곳이니, 주산(主山)이 군의 북쪽에 있고, 【동쪽으로 해미(海美) 안국산(安國山)에, 서쪽으로 태안(泰安) 주산(主山)에 응한다. 】 군의 남쪽 도비산(都飛山)이다. 【동쪽으로 홍주(洪州) 임내 고구(高丘)의 성산(城山)에, 북쪽으로 태안 주산에 응한다. 】 율곶 축제(丑堤) 【군의 남쪽에 있는데, 길이 1백 30척이며, 논 1백 8결에 물을 댄다. 】
월경처(越境處)는 없어진 임내인 복평(福平)·광지(廣地)·안면(安眠)이 태안(泰安) 지경에 들어가 있고, 홍주(洪州) 임내인 운천(雲川)·대산(大山)이 해미(海美) 지경을 넘어 군(郡)의 동·북촌(東北村) 가운데 들어와 있다.(瑞山郡: 本百濟 基郡, 新羅改爲富城郡, 高麗因之。 仁宗二十一年癸亥, 置縣令, 忠烈王十年甲申, 以邑人大護軍鄭仁卿之功, 陞爲知瑞山郡事。 忠烈王末年戊申, 陞爲瑞州牧, 忠宣王二年庚戌, 汰諸牧, 降爲瑞寧府, 後又降爲知瑞州事。 本朝太宗十三年癸巳, 例改爲瑞山郡, 屬縣一。 地谷縣, 本百濟 知六縣, 新羅改爲地育縣, 爲富城郡領縣, 高麗改今名。 都飛山。 【在郡西南】 四境, 東距海美十七里, 西距泰安七里, 南距要兒梁水營九十五里, 北距大山浦四十二里。 戶四百八十九, 口一千八百八十七。 軍丁, 侍衛軍十二, 鎭軍五十三, 船軍二百九。 土姓五, 柳、宋、杜、文、全; 村姓一, 房; 續姓一, 朴。 地谷姓三, 安、李、文; 村姓一, 朴。 亡福平鄕續姓一, 柳。 亡廣地鄕續姓一, 廉。 亡安眠所姓一, 柳。 亡禾邊所續姓二, 柳、宋。 亡仁政部曲續姓一, 李。 亡助立部曲續姓一, 羅。 亡聖淵部曲續姓二, 金、河。 厥土塉, 風氣寒。 墾田七千二百八十三結。 【水田十分之四】 土宜, 稻、黍、稷、粟、麥、蕎麥、苧、麻、漆。 土貢, 正鐵、芝草、雜羽、黃毛、狐皮、狸皮、豹皮、細毛、黃角、水魚、民魚、洪魚、沙魚、大蝦。 藥材, 防風、烏魚骨。 土産, 石花、落地。 魚梁十, 【主産靑魚、石首魚、沙魚、大蝦。】 鹽所一。 【鹽井二, 盆三。】 鐵場一, 【在郡西都飛山南】 磁器所一, 【在郡北沙器洞, 下品。】 陶器所一。 【在郡東晉賢洞, 下品。】 主山石城。 【在郡北二里, 周回四百六十八步, 險阻。 內有井三, 冬夏不竭, 有軍倉。】 驛一, 豐田。 【舊因倭寇流亡, 本朝恭靖王庚辰, 復置, 革餘美縣、得熊驛以屬之。】 大山浦。 【在郡北四十二里】 烽火二處, 主山在郡北, 【東準海美安國山, 西準泰安主山。】 郡南都飛山。 【東準洪州任內高丘城山, 北準泰安主山。】 栗串丑堤。 【在郡南, 長一百三十尺, 灌漑田一百八結。】 越境處, 亡任內福平、廣地、安眠, 越入泰安境; 洪州任內雲川、大山越海美境, 入郡東北村中。)
세종실록 149권, 지리지 충청도 홍주목 서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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